⎯ 선험적 종합을 이야기하다 (2)

도대체 ‘선험적 종합 판단’은 가능한가? 칸트에 따르면, 선험적 종합 판단은 단순히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요청되며, 그것은 수학(그 중에서도 기하학)의 성과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어떤 판단이 단순히 경험적empriche 이라면 그것은 임의적인 것이며, 분석적analytik 이라면 지식의 확장에 기여할 수 없다. 따라서 선험적이면서도 종합적인 판단이야말로 앎의 발견이라는 학wissenshaft의 목적을 실현하면서도 보편적인 정당화를 충족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그의 첫번째 <비판>에서 선험-후험, 분석-종합 등의 개념쌍을 첨예하게 대립시키면서 선험적 종합판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분석하는 것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는 것이다. <비판>에서 구체화된 선험적 종합 판단의 개념은 그 자체로 수학과 과학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감각Sinnlihikeit과 감각에 기반한 오성의 연결verhaltness이라는 객관적인 정당화 기준을 마련했다. 여기서 칸트는 선험적 종합 판단이 흄을 위시한 경험주의의 회의적 측면과 형이상학적 관념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비판 철학의 이상을 달성했다고 자평한다.

그러나 칸트의 선험적 종합 판단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R. 카르납으로 대표되는 영미 과학 철학의 중대한 비판에 직면한다. 이들은 칸트가 제시한 선험적 종합 판단이, 도대체 경험주의 내에서는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선험적 종합 판단은 (1) 그 자체로 형이상학적, 독단적 측면을 여전히 지니고 있거나, 혹은 (2) 칸트 이후 현대 과학과 수학의 성취를 정당화할 수 없다. 전자는 주로 카르납, 후자는 W. 하이젠베르크가 제시하는 요점이다. 이들에 따르면 선험적 종합판단은 수학과 과학의 체계에 대한 지독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으며, 따라서 그것들을 정당화할 수도,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다. 이러한 비판은 선험적 종합 판단의 가능성 자체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며, 궁극적으로 칸트가 비판 철학에서 달성하고자 하는 비판적kritik 이상이 그 자신이 해체하고자 했던 일종의 형이상학적 귀결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따라서 본고는 칸트가 <비판>에서 다루는 ‘선험적 종합 판단’의 정의와 그 가능성을 간략하게 조명하고, 칸트가 선험적 종합 판단의 기치 하에 내세우는 수학과 철학의 이미지가 어떤 한계를 지니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상기한 분석은 R. 카르납의 <과학 철학 입문>을 중심으로 이뤄질 것이며, W. 하이젠베르크, W. V. O. 콰인의 문헌들도 함께 참조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비판>에서 제시된 칸트적 경험론이 어떻게 20세기 이후 경험론에서 카르납, 콰인, 셀라스W. Sellars, 데이비슨D. Davidson으로 이어지는 전체론적 경험주의holistic empiricism 사조로 이행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논구할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칸트로부터 전체론적 (혹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콰인적인) 경험론으로의 전환은 단순한 철학적 유행이 아니라, 칸트적 경험론이 지니는 명확한 한계들로부터 따라 나온 필연적인 이행에 다름 아니다.

1. <비판>에서의 선험적 종합 판단

<비판>에서 선험과 종합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중세부터 그 개념이 상대적으로 명확히 구별된 판단urteil과는 달리, ‘a priori’와 ‘synthetic’은 칸트가 기존 철학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차용하고자 하는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어떤 지식이 ‘선험적’이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knowledge that is absolutely independent of all experience.”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이라는 기준은, 일견 단순하지만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표현이다. 때문에 칸트는 선험적a priori과 초월적transcendental의 분명한 기준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비판>의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수학과 경험 과학은 선험 판단의 예시로 칸트가 가장 자주 언급하는 분야이다. 예컨대 덧셈에서 ‘5+7=12’ 은 대표적인 선험 판단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칸트는 ‘5+7=12’를 선험적이라고 말하지, 분석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칸트가 볼 때에 분석적이라는 것은 “주어가 술어를 내포하는” 형식을 갖춰야 하는데, 5+7 에서 12가 그 자체로an sich selbst 도출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계산은 주체가 직접 수행하는 것이며, 주체는 특정한 직관intuition을 바탕으로 덧셈을 이해한다.

여기서 직관은 경험에서 얻어지는 감각 자료를 의미한다. 요컨대, “5+7=12” 라는 판단을 수행하기 위해서 주체는 경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1을 여러 번 더함으로써 1+1+1+1+…1 = 12 와 같은) 이러한 경험 없이 주체는 덧셈을 이해할 수 없다. 덧셈만이 아니라 기하학에서도 선험 판단은 엄연히 존재한다. “선분 AB는 점 A와 B를 최단 거리로 연결한 것이다” 와 같은 기본적인 정의 또한 직관 없이는 이뤄질 수 없는 선험 판단이다. 점 A와 점 B만 가지고는 선분 AB의 정의가 곧바로 도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주체는 상기한 명제를 감성sinnlihikeit의 한 형식인 공간Raum과 관련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도출할 수 있다.

경험 과학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우리는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을 이해할 때에, 단순히 수학 공식을 형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뉴턴의 발견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실제 공간에서 운동하는 물체들에 대한 직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운동하는 물체에 대한 직관 없이는 경험 과학의 성취를 절대 이해할 수 없으며, 만약 이를 시도한다 하더라도 공허한 수학 계산만을 반복하는 것이 될 뿐이다. 이는 물리학, 나아가서는 경험 과학 일반에 적용된다. 모든 경험 과학은 실재하는 물질들의 운동과 변화에 대한 실제적 관찰로부터 나오며, 이를 위해 주체는 언제나 경험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덧셈이나 선분의 정의, 혹은 과학적 지식과 같은 판단들은 경험으로부터의 직관을 필요로 하지만, 여전히 일반적인 경험 판단들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그것들은 경험에 그 기원을 두지만, “특정한” 경험에 한정되지 않는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학적 지식들이 우리 경험 일반에서 참임을 기대할 수 있다. 물론, 그것들이 거짓으로 판명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이는 선험적 종합판단이 분석 판단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학과 과학이 경험 일반에서 보편성을 지닌다는 점, 따라서 지식Erkenntis로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점을 칸트는 정확하게 짚어낸다. 수학의 일부, 그리고 과학 전체는 형식적으로 참이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들은 선험적으로 정당화되었기에, “앎의 확장”에 여전히 기여할 수 있다. 칸트는 경험적인 것과 분석적인 것의 이분법 사이에서 “선험적 종합판단”이라는 제3의 길을 개척함으로써, 보편성과 앎의 확장을 동시에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판단에는 세 가지 구분이 있을 수 있다. (1) 경험적인 것과 (2) 선험적이고 종합적인 것, 그리고 (3) 분석적인 것의 구분이 그러하다. 경험 판단은 경험을 기반으로 수행된 판단 일체를 일컫는다. (1)은 “이번 시험은 어려웠다”, “오늘 짬은 맛이 없다” 와 같이 사적이고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일상적 표현들 또한 포함한다. 칸트는 이를 “임의적인” 판단들이라고 평가하며, 철학의 관심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2)는 우리가 지금까지 다룬, 선험적인 종합 판단들이다. 이들은 종합 판단이기에 거짓으로 판명되는 것이 가능하지만 경험 일반에서 참일 것으로 기대되는, 정당화된 지식들이다. 반면, (3)은 그 형식으로부터 참임이 당연하게 도출되는 판단들을 일컫는다. 논리학이 다루는 명제들은 분석 판단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칸트에 따르면 분석 판단은 그 자체로 참이기에 지식의 확장에 기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대상’을 지니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분석 판단은 “~에 대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문장 형식들의 정리이며, 따라서 공허한 유령Sceine적 명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칸트가 “선험적 종합판단”을 비판 철학의 주요한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명확하다. 칸트는 흄이 개척한 경험주의적 사조를 고수하면서도 일반적이고 엄밀한 학의 이상을 달성하고자 했다. 물론, 여기서 라이프니츠가 개진한 형식주의적 관념론의 길은 지양되어야 한다. 따라서 칸트는 선험적 종합 판단을 “경험주의적empirische” 이면서도 “일반적인algemeinen” 지식의 확장을 꾀할 수 있는 탁월한 개념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경험적 판단 일반과 구분되는가? 일단, 둘은 모두 경험에 그 기원을 둔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렇다면 둘의 차이는 각 판단에서 주체가 감각 자료Datum를 바탕으로 판단을 주조해내는 방식에 있을 것이다. 선험적 종합 판단에서 주체는 감성sinnlihikeit으로부터 나온 직관을 바탕으로 오성verstand을 작동시켜 개념을 주조해내고, 궁극적으로는 이성vernunft을 통해 판단을 도출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성과 오성이 각각의 대상 (직관과 개념)에 작용하는 방식일 것이다. 칸트는 우리 오성이 외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 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감성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자신의 고유한 형식에 따라 외부 사물을 인식한다. 즉, 우리 바깥의 외부 사물 (물자체ding an sich라고 불리는)을 감성은 자신의 형식에 따라 외관erscheinung, 혹은 겉보기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외관은 물자체와는 달리 시간과 공간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상호주관적으로 정당화 가능한 경험적 대상이다. 반대로 말하면, 시간과 공간의 형식을 따르지 않은 비경험적 대상은 상호주관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오성이 대상으로 삼는 대상은 감성의 형식에 따라 감응된 직관intuition들이다. 감성은 단순한 수용성sheer receptivity으로서, 오로지 수동적으로 외부 사물을 직관으로서 표상해내는 역할만을 수행한다. 따라서 감성이 직관을 만들어내는 일체의 과정에서 (공간과 시간이라는 순수한 형식을 제외하면) 주체가 능동적으로 개입할 여지는 없다. 반면, 오성Verstand이 직관에 작용하여 개념concept을 주조하는 것은 주체의 능동적인 행위라고 칸트는 주장한다. 감성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전적으로 외부에서 감응되는 반면, 오성은 주어진 직관을 다양한 방식으로 개념화conceptualize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칸트는 오성이 개념을 형성하는 방식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경험 일반에 유효gultig한, 다시 말해 정당화 가능한 객관적 유효함objektiv gultigkeit을 가지는 순수 오성reinen Verstand의 방식이며, 둘째는 문제적problemetisch 개념의 방식이다. “순수” 오성은 오성의 고유한 형식인 범주들Kategorien을 따르는 오성의 범례로서, 상호주관적으로 이해 가능한 판단을 도출하기 위해서 반드시 요청된다. 오성은 범주들을 따르는 한에서만 순수할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이해가능verstandlich한 판단으로 이행할 수 있다. 여기서 순수 오성을 정의해주는 잣대인 범주는 칸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서 원용한 것이다. 칸트는 오성이 경험의 소여인 직관들을 일정한 논리적 틀(즉, 범주)에 맞춰 사용할 때에만 객관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순수 오성과 범주는 선험적 종합판단을 기초 놓기 위한 중요한 잣대들이다.

어떤 종합판단이 선험적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범주를 따라야 한다는 것은, 적어도 칸트 철학 내에서는 당연해 보인다. (반대로, 범주를 따른다고 해서 어떤 판단이 반드시 선험적인 것은 아니다) 반대로, 문제적 개념이라는 것은 순수 오성의 범주를 따르지 않는 오성의 사용은 “문제적 개념”들을 낳는다. 문제적 개념들은 분명히 개념으로서 존재하지만 범주에 맞지 않는, 그 자체로 문제적인 개념들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객관적 정당성을 갖지 않는 만큼 초월 철학이 탐구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따라서 오로지 범주를 따르는 개념들만이 비판 철학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순수 오성을 경유하여 “일반적으로 정당한” 탐구들, 예컨대 수학적 지식들을 분만해내는가? 칸트는 여기서 두가지 주장을 동시에 전개한다.

(1) 우리 감성과 오성이 올바르게 작동하는 내재적이고도 규범적인 방식이 존재하며, 그것들은 공허하지 않고 확언적affirmative이다.
(2) 수학적 지식은 (1)에서 언급된 방식에 따라 구성되므로 선험적이다.

선험적 종합판단의 설명에 칸트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의 감각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내재적이고 일관적인 장場matrix을 따라 외부 사물을 인식한다. 둘째, 셋째, 선험적 종합판단은 이러한 순수 오성에 따라 인도된 “건전한” 이성의 초월적transcendental 사용에 의해 구성된다. 만약 이성이 오성이 만들어낸 개념들을 초월적인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을 경우 선험적 종합판단은 구성될 수 없다. 요컨대, 칸트는 우리의 오성과 이성이 외부 사물을 인식하는 일관적이고도 공허leer하지 않은, 즉 확언적인affirmative 방식이 분명히 존재하며, (“순수”오성과 이성의 “건전한” 사용이 그러하다) 그러한 방식의 규범성과 정규성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2. 수학과 과학에 대한 칸트적 설명과 그 반례들

(감성-오성-이성으로 이어지는) 방식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수학적 지식은 그 자체로 참인 분석적인 명제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 인식의 내재적인 방식들을 따르기 때문에 선험적인 것이며, 오직 그러할 때에만 선험적이다. 어떤 명제가 우리의 내재적인 인식의 방법을 따른다면, 그것은 경험에 독립적으로 참임을 기대할 수 있다. 카르납은 이처럼 수학을 우리 인식(특히, 감성의 형식들)에 의존적인 것으로 만드는 칸트의 주장이 수학 일반에 대한 제한적 이해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칸트는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가지 종류의 기하학, 즉 수학적 기하학과 물리학적 기하학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 “기하학은 확실히 선험적이다. 따라서 그 정리들의 진리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도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수학적 기하학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세계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해 준다. 그것의 도움으로 우리는 실제의 기하학적 구조에 대한 측정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라는 말을 덧붙인다고 해보자. 그 경우에 우리는 다른 의미의 기하학으로 무심코 슬쩍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물리학적 기하학에 대해서, 그리고 실제의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수학적 기하학은 선험적이다. 그리고 물리학적 기하학은 종합적이다. 어떤 기하학도 선험적이면서 종합적일 수는 없다. … 경험주의를 받아들인다면, 선험적이면서 종합적인 지식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카르납은 두 종류의 기하학을 구분한다. 하나는 수학적 기하학이고 다른 하나는 물리학적 기하학이다. 물리학적 기하학은 칸트가 “기하학”이라는 개념을 통해 말하고 있는, 유클리드의 고전적 기하학과 그 아류들을 의미한다.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우리는 실재하는 공간들을 통해 도형들과 기하학적 정리들을 이해한다. 따라서 물리학적 기하학은 우리에게 실제 세계에 대해 말해주며, 따라서 앎의 확장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물리학적 기하학의 명제들은 종합판단이다. 그러나 수학적 기하학에서 사정은 다르다. 가우스, 리만 등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따르지 않는 기하학들에서는 우리의 공간에 대한 직관은 전혀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참인 명제들이 다른 공리계에서는 거짓으로 판단되거나, 반대로 반직관적인 증명이 특정한 공리계에서는 분석적으로 참인 경우도 있다. 기하학이 유클리드에서 벗어나 다변화된 지금, 기하학이 우리 감성의 형식을 따른다는 칸트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수학적 기하학에서 우리는 “왜 그 명제가 특정한 공리계에서 분석적으로 참인지” 를 우리 인식의 구조에 비춰 정당화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칸트가 비판 철학의 기치 아래 ‘선험적 종합 판단’의 사례로 수학을 포함시킨 것에 강한 의심을 보낼 수 있다.

우리는 과학에 대한 칸트의 이해도 수학의 경우에서와 비슷한 난점을 겪는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칸트에게서 과학은 수학과 마찬가지로 선험적 종합판단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예컨대 물리학적 법칙을 세울 때에 우리는 실제 사물의 운동과 변화에 대한 직관에 기초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직관에 기초함”은 단순히 감각 자료에 기반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순수” 오성의 개념에 맞춰 건전하게 사용함을 뜻한다.

운동motion은 칸트가 이러한 주장의 주요한 근거로서 제시하는 사례이다. 칸트는 운동 (혹은, 운동을 통해 이해되는 “생성” 일반)이 도대체 논리학의 명제들만으로는 이해되지 않으며, 따라서 실제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직관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CPR, ) 어떤 물체가 움직인다는 것은 단순히 “있음”과 “없음”의 조합만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며, 운동 그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실제로 운동하는 사물의 관측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칸트가 보기에 우리는 경험 과학 일반에서 이러한 선험적인 개념 사용에 의존하고 있다.

하이젠베르크W. K. Heisenberg는 <비판>에서 칸트가 설명하는 과학의 이미지가 현대 과학과는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종합적 지식이 선험적인 경우가 가능할까? … 공간은 다른 모든 외부 지각의 기본 가정인 필수 조건이며, 따라서 선험적이다. 공간이 없는 경우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 … 물리학에서 칸트는 공간과 시간 외에도 인과율과 물질이라는 개념도 선험적이라 생각했다. … ‘선험적’이라는 표현이 칸트가 말한 것처럼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면, 여기까지 칸트의 뜻을 받들려 하는 물리학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수학에서 칸트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선험적’이라고 받아들였다. … 칸트의 교리를 현대물리학과 비교해 보자면, 첫 눈에도 그의 ‘선험적인 종합적 명제’라는 중심 개념이 우리 세기에 이루어진 여러 발견들로 인해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상대성이론은 공간과 시간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서, 시공간의 완전히 새로운 성질을 드러내 보였다. 순수한 직관으로 이루어진 선험적 형식에서는 이런 성질을 찾아볼 수 없다. 양자론의 세계에서는 인과율이 적용되지 않으며, 기본 입자에는 물질 보존의 법칙 또한 진실이 아니다. 칸트가 이런 새로운 발견을 예측할 수 없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는 자신의 개념들이 ‘훗날 과학이라 불리게 될 미래의 형이상학의 근간’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으니, 여기서 그의 주장이 어디서 틀렸는지를 확인해 보는 일도 흥미로울 것이다. … 현대 물리학은 칸트가 주장하는 선험적인 종합적 명제를 형이상학적 명제에서 실용 속의 명제로 바꾼 것이다. 따라서 선험적인 종합적 명제는 상대적 진리라는 성질을 지니게 된다. 칸트의 ‘선험적’이라는 성질을 이런 식으로 재해석하면, 물질과 감각을 분리해서 생각할 이유가 없어진다. …

하이젠베르크가 칸트에 대해 가하는 비판의 요점은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현대 과학의 성취들은 칸트의 선험적 종합 명제와는 맞지 않는다. 어떤 명제가 선험적인 동시에 종합적이려면, 그것은 반드시 우리 감성의 형식들에 기초하여 순수 오성과 이성의 올바른 사용에 따라야만 한다. 그러나 입자에 대한 오늘날 과학의 이해는 ‘우리가 인식하는’ 공간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칸트가 오성의 순수한 개념으로 지목한 인과율은 뉴턴의 고전 역학에서는 유효했지만, 양자 역학의 세계에서는 완전히 불필요한 개념이다.

하이젠베르크 자신이 발견한 불확정성 원리 또한 칸트적 과학의 이미지에 대한 주요한 반례가 될 수 있다. 탐구 대상의 궁극적 실체substantia의 존재는 인식에서 항상 가정되는 것이지만,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그러한 실체 혹은 실체의 값은 그 자체로 확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칸트가 자기 주장의 결정적인 사례로 제시한 ‘운동’조차도 현대 과학에서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실제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직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예컨대, 우리는 전자의 운동에 대한 어떠한 직관도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전자에 대한 다양한 물리학적 이해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들은 경험 과학에서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유용한 지식들이다.

칸트는 어떤 설명체계가 우리의 직관과 어떻게든 연관verhaltnis을 갖지 않으면, 그것은 유령적 담론, 혹은 독단적 형이상학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에서 단언한다. 칸트적인 과학 이해는 단순히 현대 과학의 성취를 설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실제적 사용에 대해서도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한다. 예컨대, 특정한 현상에 대한 두 과학적 이해가 경합한다고 하자. (여기서, 과학wissenschaft은 자연 과학에 국한되지 않을 수도 있다.) 칸트는 선험적 종합판단을 통해 과학을 경험 독립적인 동시에 지식의 확장에 기여하는 유용한 설명 체계로 그 지위를 격상시켰다.

그러나, 동일한 현상에 대해 서로 다른 경험 과학이 대결할 경우, <비판>에서의 칸트는 명확한 해답을 내놓을 수 있는가? (콰인 W. V. Quine은 사유의 경제성을 통해 이러한 문제에 대한 탁월한 대답을 제시한다. 자세한 것은 word and object 참조) 경합하는 두 과학이 모두 오성의 순수한 사용을 따르고 있다면, 두 체계 중에 우열을 가릴 수 있는가? 예컨대, 특정한 행위에 대한 실험 심리학적 설명과 신경화학적 설명이 경합한다고 가정해보자. 두 학문은 모두 전형적인 과학의 사례에 포함되며, 따라서 칸트가 제시하는 “선험적 종합 판단”에 해당된다고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 이 경우에, 칸트주의자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그는 하나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한 체계의 우위를 포기하고 일종의 상대성relativa을 인정할 것이다. 전자는 독단적이며, 후자는 회의주의로 귀결될 가능성이 있다. 어느 것이든, 초월 철학의 이상과는 맞지 않는 것이다.

칸트는 과학 일반이 우리 인식의 구조를 따르고 있으며, 오직 그럴 때에만 정당화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선험적 종합 판단의 충분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과학 혹은 수학은 우리 인식의 구조와는 독립적인 것처럼 보인다. 과학과 수학 일반은 그 분과에 따라 서로 독립적인 장場을 지니는 것처럼 보이며 (여기서 우리는 쿤Kuhn과 콰인의 과학 이해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각 체계 내에서는 분석적으로 참이지만, 칸트가 기대하는 것처럼 (예컨대, 감성이나 오성의 순수한 사용과 같은) 일관적이고도 확언적인affirmative 기준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한 기준은 자칫 독단으로 흐르거나, 기껏해야 부정적negative, 형식적formal일 뿐이다.

3. 소여의 환상에서 전체론적 경험주의로

셀라스W. Sellars는 콰인이 제시한 경험주의의 두 독단에 이어 소여의 환상Myth of the Given 개념을 통해 경험주의 사조 전반에서 감지되는 강력한 독단이 칸트 이후로 존재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셀라스는 우리가 감각 경험 자체 만으로도 일관된 앎의 기준을 마련할 수 있다는 믿음이 환상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감각에서 얻어지는 소여Given만으로는 우리의 앎 (대표적으로, 과학과 수학적 명제들)이 주어진다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경험에 우선적으로 작용하는 (셀라스가 intellectual conceptivity라고 일컫는) 특정한 설명 체계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우리의 앎 일반은 그러한 체계의 작용으로부터 감각 경험을 주조해낸 것이지, 순수한 경험 만으로 형성된 것은 아니다. 셀라스는 소여의 환상을 지적함으로써 경험주의가 자신의 정당성을 경험 일반에 호소하지 않고 설명 체계들에 대한 탐구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여의 환상은 정확히 칸트적 경험주의, 그 중에서도 <비판>의 심장부를 겨눈다. 칸트는 우리의 경험 자체가 그 순수한 형식(시간과 공간)에 의해 이미 구성되어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오성 또한 그 자신의 정당한 사용을 위한 기준을 갖는다고 일관적으로 말한다. 요컨대, 우리의 경험 자체로부터 감성과 오성의 순수한 사용이 이미 예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감각 경험이 이미 우리 앎의 토대를 마련해주고 있다는 칸트의 강한 믿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맥도웰 J. McDowell은 칸트가 감각 경험을 ) 이를 통해 칸트는 경험주의를 고수하면서도 일관적이고 확실한 앎의 기준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여 자체가 그러한 토대를 마련해주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감각 자료 자체는 특정한 형식을 지니지 않고, 따라서 오성의 바른 사용을 위한 기준이 되지 못한다면 칸트의 철학적 기획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콰인은 <Two Dogmas of Empricism> 에서 이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콰인이 제시하는 두 독단 중에서도, 특히 첫번째 독단은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성 자체를 강하게 의심한다. 첫번째 독단에서 콰인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특정한 명제가 종합 판단인지 분석 판단인지의 구분은, 최소한 구분의 주체가 속한 언어 체계 (셀라스의 intellectual conceptivity와 비슷한)의 선재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서로 다른 언어 체계에 속한 두 주체가 동일한 경험을 한다고 해보자. 칸트는 경험 자체로부터 우리 앎의 기준이 인도되며, 이는 상호주관적으로 정당화된다고 일관적으로 주장한다. 따라서 칸트주의자는 두 주체가 최소한 그 현상에 대한 선험적인 판단에 대해서는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콰인은 그러한 일치는 둘이 같은 언어 공동체에 속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더 정확히는, 같은 공동체 내에서도 상대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서로 다른 체계에 속한 두 주체에게 “선험적”으로 일치하는 언어 사용은 있을 수 없다. 그러한 선험적 가능성은 둘이 같은 언어 체계에 속할 것을 요구하거나 혹은 단어의 원래 의미를 훼손하는 폭력적인 번역을 필요로한다.

콰인은 단순히 체계의 필요성에서만 칸트적 경험주의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콰인은 모든 앎은 경험으로부터 나온다는 경험주의적 강령을 고수하면서도 경험의 소여를 단순히 감각 신경의 자극에 한정한다. 경험은 주체의 신경을 특정한 방식으로 자극하는 현상에 불과하며, 이러한 자극을 바탕으로 개념을 주조하는 (콰인의 설명에 따르면, 특정한 matrix에 의해 그러한 자극을 언어로 mapping 하는) 것은 특정한 개념 체계이다. 따라서, 콰인은 궁극적으로 소여의 환상의 논점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셀라스와 콰인은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