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 아이드 걸스. 2019. 〈원더 우먼〉. 《RE_vive》.

1. Wonder

조원선의 〈원더 우먼〉(2003)은 사랑에 빠진 소녀의 눈에 비친 황홀한 세상을 노래한다. 제목에 등장하는 ‘원더 우먼’ 또한 DC의 히어로가 아니라 사랑 이후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목도한 이의 경이(Wonder)와 더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사랑은 소녀의 눈에 비친 세상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꿀 뿐만 아니라 소녀 자신 또한 다른 사람이 되게 한다. “원래 둔한 머리”였던 그녀는 “너에 대한 기억 하나하나 꼼꼼히 다 기억해내는 천재소녀”가 되고, “밤을 꼬박 새웠어도 화장이 하나 안 먹어도”, “널 만날 때면 초자연 미녀”가 된다.

이런 가사들이야말로 이 노래를 특별한 것으로 만드는 사랑스러움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형태의 사랑 혹은 이런 식의 사랑을 하는 소녀가 다소 진부하고 심지어는 달갑지 않게 느껴졌음을 이야기해 두어야겠다. 사랑의 경이로운 힘을 강조하기 위해서 “둔한 머리” 소녀의 순진함(혹은 멍청함)이 전제로 요구된다는 것, 마찬가지로 순수한 형태의 여성을 칭송하는 방식으로 여성을 혐오하는 ‘자연 미녀’라는 개념 자체, 그리고 그러한 얄팍함이 사랑하는 이를 매료할 것이라는 들뜬 믿음 등의 발상이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몇 가지 아쉬움을 남겨둔 채로도, 이 노래는 사랑에 빠져 한껏 고양된 소녀의 가벼운 발걸음에 합을 맞춰 아름다운 봄날의 거리를 날아오르는 듯하다. 경쾌한 보사노바 리듬과 감각적인 클래식 기타의 선율, 그리고 산뜻하고 가벼운 보컬을 받쳐 주는 관악기들의 재치있는 합창은 듣는 이들을 처음 만나는, 경이로운(wonder) 사랑의 세계로 데려갈 만한 밝고 상승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지난해 10월 브라운아이드걸스가 오랜 공백기를 깨고 조원선의 〈원더 우먼〉을 리메이크하여 돌아온다는 소식이 의아하게 느껴졌던 것은 그러니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양자물리학을 다룬 음악 〈신세계〉와 같은 주제에 깊이 천착했던 앨범인 《Basic》, 혁명과 저항을 노래한 음악 〈Sixth Sense〉의 그 브라운아이드걸스가 하겠다는 이야기치고는 좀 심심하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2019년 처음으로, 브라운아이드걸스는 멤버 전원이 30대 이상의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는 ‘걸(Girl)그룹 아닌 걸그룹’으로서 가요계에 돌아오게 되지 않았는가. 그들만이 할 수 있으며 그들이기에 잘 할 수 있을 이야기는 뭔가 이게 아닌 다른 것일 터라는 생각 때문에 아쉬움이 컸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 본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원더 우먼〉’은 전혀 진부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내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신선함으로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놀랍게도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원더 우먼〉은 ‘새로운 삶으로 이행하게 하는 사랑의 경이’라는 주제만을 공유한 채로, 조원선의 〈원더 우먼〉과 완전히 똑같은 가사를 가지고, 전혀 다른 내러티브를 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2. 결혼 이야기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원더 우먼〉은 원곡에서의 경쾌하고 발랄한 보사노바 리듬과 대조되는 중후하고 둔탁한 타악기 소리로 시작된다. 그 뒤를 잇는 것은 남자이거나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되지 않는 중성적인 목소리들이 노래하는 아카펠라 멜로디이다. 아카펠라는 그것이 문화적 측면에서 관습적으로 행해지던 맥락들을 통해 우리에게 어렵지 않게 교회, 예식장 등의 풍경을 쉬이 연상시킴과 동시에 그 목소리의 모호한 정체를 통해 낯섦을 느끼게 한다. 또한 사뿐사뿐 걷는 소녀의 걸음걸이를 닮아 있었던 조원선의 가벼운 창법과 다르게 브라운아이드걸스는 투박한 숨소리를 섞거나 소리를 힘주어 곧게 뻗어내는 등의 새로운 해석을 가미한 가창을 시도한다.

이렇듯 원곡의 ‘소녀스러움’ 대신에 중성성(혹은 양성성)을 위치시킨 브라운아이드걸스의 버전에서 툭 불거져 나와 들리는 것은 뜻밖에도 다음과 같은 가사들이다.

이 사람 놓치면 죽도록 후회할 걸 내게 머물러 (2절 : 내게 정착해)

음악적 요소들과의 협동 속에서, 이 가사는 단순한 소망을 벗어난 열정적인 제의로 들리기 시작한다. 특히나 〈원더 우먼〉의 가사가 기본적으로 사랑의 경이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이행하게 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는 것, 앞서 언급했던 아카펠라 파트가 연상시키는 식장의 풍경, 뭔가를 힘주어 고백하는 듯한 보컬 스타일, 뿐만 아니라 ‘머무르다’ ̇‘정착하다’가 낭만적 사랑과 관련하여 갖는 문화적 의미를 고려해 보노라면, 이 노래가 제의하고 있는 것이 단지 사랑이 아니라 ‘결혼’임을 짐작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해진다.

추상적인 인상들에만 의존한 이 미심쩍은 추측은 청각 언어보다 구체적인 성격을 띠는 시각 언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뮤직비디오를 함께 둠으로써 설득력을 획득한다. 뮤직비디오는 드랙퀸과 드랙킹의 결혼이라는 사건을 핵심적인 상황으로 설정한다. 같은 가사가 새로운 서사를 연상케 한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의도는 음악 언어의 힘을 빌려 정확히 목적지에 닿았다.

음악이라는 추상적 언어가 어떻게 이토록 정확하게 기능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나는 음악 역시도 하나의 문화적 코드라는 점을 들어 설명하고 싶다. 한슬릭이 절대음악의 개념을 제시하고, 쇼펜하우어가 세계의 형이상학적 본질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음악을 묘사하기 이전부터 음악은 문자 언어나 시각적인 매체에 기대어서만 제 의도를 전달할 수 있는 극도로 추상적인 언어로 받아들여져 왔다. 제목이나 가사를 통해 음악의 의도를 부연 설명하거나, 시각 매체를 동원해 음악에 대한 인상을 특정한 쪽으로 유도하거나, 조성음악의 촘촘한 규칙을 활용하여 음악가의 의도를 악보 여기저기 숨겨놓는 방식 등을 통해 음악은 ‘순수 음악’의 주변적 요소들에 의존해 왔다.

그러나 음악 역시, 순수하게 음악적인 요소(문자/시각 언어적 요소에 기대지 않은)를 포함하여, 가치중립적이거나 맥락으로부터 자율적이지 않다. 음악은 일종의 소리이고, 소리에는, 소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에는 문화적 관습이 녹아 있으며, 어떤 문화적 관습은 소리와 연합된 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앞서 〈원더 우먼〉을 분석하는 데 활용했던 바와 같이, 어떤 소리는 예식장을 연상케 하며 어떤 소리는 중성성을 암시하고, 어떤 어조는 어떤 태도를 암시한다. 이 모든 것은 문화적이고, 맥락적이고, 심지어는 정치적일 수 있다. 그리고 듣는 이와 노래하는 이가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이상, 문화적 코드로서의 순수하게 음악적인 요소 역시나 음악을 독해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3. 바깥과 너머

게일 루빈은 “특권 집단charmed circle”이라는 도표를 통해 특권과 그로부터 배제된 이들을 핵심과 주변의 구도로 설명해 낸다. 핵심에는 이성애, 혼인 관계, 일대일 관계, 출산 등이 있다. 주변의 원에는 핵심에 각각 대응되는 동성애, 내연 관계, 문란한, 출산하지 않음 등이 있다.

핵심과 주변, 안과 바깥으로 이성애 정상성과 퀴어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단지 게일 루빈만의 것이 아니다. 예컨대 벨 훅스는 주변부와 중심부로 이성애정상성과 퀴어를 분류하는데, 그는 이러한 분화를 ‘바깥쪽에서는 안쪽이 보이고, 안쪽에서는 바깥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며 주변부에 위치한 이들, 퀴어의 인식론적 이점을 의미화하려 노력한다.

퀴어가 사회의 핵심으로부터 누락되고 배제되어 ‘주변’이 되어버렸다는 게일 루빈의 전제는 분명 진실을 담고 있고, 벨 훅스가 말한 인식론적 이점도 완전히 허황된 소리는 아니다. 그러나 핵심과 주변, 안과 바깥으로 이성애 정상성과 퀴어의 영역을 구획하는 것이 여러 가지 오해나 착각을 낳아 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게일 루빈과 벨 훅스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깊이 인지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일반적인 경우에 종종 오인되고 하는 지점들을 언급하자면) 이성애정상성과 퀴어 사이의 구분에 대한 첫 번째 오해는 바로 그런 구분이 가능하다는 점에 대한 것이다. 미미 마리누치는 『페미니즘을 퀴어링!』(봄알람,2018)에서 이성애자이면서 퀴어 공동체 내부에 위치한 자의 예시를 여럿 제시한다. 스스로를 이성애자로 정체화하는 트랜스 남성과 트랜스 여성, 양성애자 파트너의 이성애자 연인 등, 실제 사람들이 사랑하고 관계 맺는 양상들을 살펴볼수록 이성애정상성과 퀴어 사이를 명확히 구획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밝혀진다. 게일 루빈의 말마따나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를 ‘함께’ 이해하노라면, 종종 주로 섹슈얼리티의 범주에서만 판단되고 식별되곤 하는 퀴어의 범주는, 쉬이 ‘진단’할 수 있는 것도 구획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이 된다. 〈원더 우먼〉의 경우에서만 해도, 이 노래의 서사는 분명히 여성과 남성의 이성애적인 결혼을 다루고 있으며 이는 “특권 집단” 도표의 3가지 요소에서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단지 섹슈얼리티의 관점에 머무르는 것에서 벗어나 젠더의 관점까지를 기입해 본다면, 주어진 성별 역할을 따르지 않고 여성성과 남성성을 교란하며 젠더의 전복을 시도하는 드랙킹, 드랙퀸의 모습은 결코 퀴어하지 않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두 번째 오해는 보편과 특수에 관련된 것이다. 모니크 위티그는 『스트레이트 마인드』(행성B, 2020)에서 변증법에 대한 비판의식을 강력하게 피력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헤겔이 말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마치 필연적인 과정처럼 여겨지곤 하지만, 사실 주인이 없으면 노예가 없으며 노예가 없으면 주인이 없기 때문에, 그 두 가지 범주와 둘 사이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변증법적인 역사의 반복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성차와 성별이분법에 대한 본인의 입장에 이런 사고를 고스란히 반영하는데, 가장 급진적이며 파격적인 주장은 ‘젠더는 오로지 여성뿐’이라는 것이다. 남성은 보편이기에 젠더로 정의될 필요가 없으며 젠더로서 정의되는 것은 오로지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이라는 젠더가 파괴된다면 남성이라는 범주와 여성-남성을 가르는 성별 이분법, 그리고 성별 이분법에 기초한 이성애 제도가 흔들릴 것이라고 그는 진단한다. 앞선 주장에서는 남성이 보편에, 여성이 특수에 해당한다. 보편은 특수까지를 자신의 변형태로 포괄하는 기본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특수한 것으로 정의될 필요조차 없는 채로 특수의 대립항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특수한 것은 절대적으로 특수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이 보편에 그치는 한 특수한 것이며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젠더뿐 아니라 이성애 정상성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 퀴어 서사에 공감하거나 그것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할 때,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보편적인 사랑의 형태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혹은 ‘보편적인 사랑이 포착하지 못하던 것을 포착했다’는 말들로 퀴어 서사를 (고)평가하려고 한다. 보편적인 사랑의 내부로 퀴어함을 포섭하려는 전자의 입장만큼이나, 퀴어를 단지 보편성의 외연을 넓히는 것으로서만 파악하는 후자의 입장 역시 기만적이기는 매한가지이다. 이러한 기만은 퀴어를 어디까지나 바깥인 것, 그래서 그들이 이성애 정상성의 내부로 들어오거나 이성애 정상성이 퀴어를 엿보는 일이 가능할지언정 ‘퀴어 공동체’라는 내부에 이성애자들이 연구자나 연대자가 아니라 ‘공모자’로서 진정 동질감을 가지고 합류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앞서 첫 번째 오해에 대한 언급에서 밝혔듯, 이성애자와 퀴어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퀴어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20) 영화감독 셀린 시아마는 인터뷰에서 역시나 제기된 ‘보편적인 사랑’으로서의 퀴어에 대한 질문에, 자신의 영화는 보편적인(이성애 정상성에 해당되는) 이야기이기 이전에 우리(레즈비언)의 이야기임을 단단히 못 박아둔 바 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그쳐 이성애 정상성과 퀴어 사이를 구획해버리는 결말에 이르지 않고, ‘당신이 이 이야기에 매료되었다면, 당신을 환영한다. 당신은 초대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이 발화에서 핵심, 중심부, 내부에 해당하는 것은 퀴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퀴어는 단순한 흥밋거리나 관음의 대상이 아니라 이성애 정상성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새로운 공동체가 된다.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원더 우먼〉에서 내가 훌륭하게 평가하는 지점 또한 셀린 시아마의 발언이 내재하고 있는 전제들과 관련되어 있다. 〈원더 우먼〉 속 부부/연인들은 초대된 자들이다. 초대되어 퀴어 공동체 내부의 공모자가 된 이들이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도 젠더를 패러디하는 퀴어한 주체임과 동시에 퀴어 공동체가 알고 있는, 겪고 있는 사랑의 방식을 배우고 체험하고 수행한다.

퀴어 공동체는 그러니 중심부로부터 누락되고 밀려난 잔여물들이 퇴적되어 있는 끄트머리가 아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깥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그보다는 ‘보편’의 자리를 독점하고 있는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것, 체험하지 못했던 것을 이미 상상하고 수행하고 있는 ‘너머’이다. 나는 이 ‘너머’의 지위를 퀴어 공동체에 부여하고 싶다. ‘이성애자’라는 섹슈얼리티 범주로 환원되지 않는 이성애 정상성의 모든 영역이 퀴어를 너머의 것, 너머의 내부로 파악하여 적극적으로 퀴어-되기를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더 우먼〉의 결혼식이 이성애 정상성의 언어로 설명하기에는 과분할뿐더러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 버린 것처럼, 그러니까 그들이 너무나도 퀴어 공동체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처럼 말이다.

기고자 치커리(connect2chicory@gmail.com)
철학, 현대시를 전공했다.
아쉽게도 이번이 기획의 마지막 글이다. 과연 지평에서 그의 글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인가.

치커리
kjs97083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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