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진 글: 선험적 종합이란 어떤 의미에서 가능한가? (상)

⎯ 선험적 종합을 이야기하다 (1)

이제 문제를 철학의 경우로 축소해 보자. 논리실증주의는 쇠락하는 듯 보였지만, 세 축으로 매인 이분법은 여전히 건재했다. 상술한 내용까지만을 고려한다면 왜 이 이분법이 유지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콰인은 의미론적 전체론에 근거해 분석성과 종합성이 엄밀하게 구분될 수 없다고 했고, 굿맨은 “이상한 속성”이 세상에 있지 않다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미래에 과거 경험을 투사하기 때문에만 정당화된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 이분법을 유지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었을까? 이를 위해서는 조금 길을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길은, 썩 정석적인 철학사적 평가를 따라가는 길은 아니다.)

가능세계

“가능세계”라고 불리는 괴상한 대상들이 영미철학계에 등장한 것은 오래 되지 않은 일이다. 물론 라이프니츠가 이 말을 처음 사용하긴 했지만,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라이프니츠가 신정론적 계기에서 가능세계들을 고안했다면, 영미철학자들은 양상 문장, 즉 필연성이나 우연성 따위에 관한 문장들을 안정적인 의미론 위에 안착시키기 위해 가능세계, 또는 “세계가 그러할 수도 있었을 방식들”을 형이상학적 대상으로 도입했다. 가능세계가 도입됨에 따라 논리학자들은 그 세계의 존재자들을 언급하는 문장들에 관해 설명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이른바 영미철학계에서 “양상 혁명”이 일어나는 계기가 된다.

양상에 관해서는 일단 이만큼이면 됐다. 가능세계 이론은 모 약품마냥 엄청난 부작용(?)을 함께 가져왔다. 가능세계가 도입됨에 따라 가능세계의 대상들을 언급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부터 모든 “내포성”을 “외연성”으로 바꿀 수 있는 듯 보였던 것이다. 외연은 표현의 바깥 의미이다. 즉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들, 집합, 진리치이다. 내포는 외연을 제외한 의미의 요소이다. 즉 어떤 것의 “뜻”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것이다.

내포성은 종종 골치아픈 논리적 문제를 만들었었는데, 같은 의미를 갖는 표현은 대치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외연이 같지만 대치 불가능한 표현들이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우연히 이 시점에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과 대머리인 사람의 수가 같다고 해도, “단현이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한다”와 “단현이 대머리이고 싶어한다”의 의미는 같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가능세계를 통해 우리는 이 대부분의 표현들을 가능세계에로 환원할 수 있는 듯했다. 현실세계를 포함해, 모든 가능세계에 있는 대상들을 논역으로 한다면 그 대상들 중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과, 대머리인 사람은 같은 집합을 구성하지 않을 것이다. 이로부터, “단현이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한다”는 단현이 전자의 집합의 구성원이 되고 싶음을 의미하게 되며, 이는 단현이 후자의 집합의 구성원이 되고 싶다는 해석을 배제하게끔 해 준다.

오호라, 이런 식으로 모든 내포적 의미들을 가능세계에로 환원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가능세계의 전체를 생각할 때, 양상과 의미의 간극은 사라지는 것 같다. 모든 의미는 가능세계로 환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분석적 진리는 필연적 진리겠다. 또한, 우리는 다른 가능세계들을 관찰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쩌면 모든 필연적 진리는 선험적 진리여야 할 것 같기도 하다. 마찬가지 의미로, 모든 후험적 진리는 우연적 진리여야 할 것 같고, 그렇다면 모든 우연적 진리는 종합적 진리여야 할 것 같다. 이렇게 이분법은 다시 등장한다.

정당화와 양상의 분열

일단은 가능세계의 도입이 칸트가 떠올린 분열이었던 지식과 진리의 분열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다른 쪽에서 분열이 있어났다. 크립키이 제시한 의미 이론으로부터, 크립키는 선험-후험과 필연-우연이 늘 같은 순서의 대립쌍인 것은 아님을 발견한 것이다. 교과서적인 설명은 뒤로 하고, 그가 찾은 두 반례가 어떤 것인지만 후딱 집어두도록 하자.

(i) 샛별은 개밥바라기이다.

(ii) 미터원기는 1미터이다.

각 반례를 소개해 보자. (i)은 크립키에 따르면 후험적인 필연성 문장이다. 즉, 이것의 참은 필연적이면서 그것의 정당화는 경험을 통해서만 알려진다. 왜 그럴까? 우리가 샛별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금성이 새벽에 뜬 것을 두고 부르는 것인 반면 개밥바라기라고 부를 때는 저녁에 뜬 것을 두고 부른다. 따라서 두 이름이 붙여지고 사용되는 맥락이 다르다. 그러나 둘은 동일한 대상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크립키는 이름이, 그것과 동일한, 모든 가능세계의 대상에게 붙박이로 달린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샛별이 어떤 대상 o라는 것과 개밥바라기가 그 o라는 것이 둘 다 필연적이며, 동일성 관계의 이행성에 따라, 샛별은 개밥바라기이다.

(ii)는 선험적인 우연성 문장이다. 즉, 이것의 참은 우연적이면서 그것의 정당화는 경험 독립적으로 알려진다. 왜 그럴까? 미터원기가 1미터라는 것은 물론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가 “~가 1미터이다”라고 할 때 그것은 사실 우리 세계의 그 미터원기가 어느 시점에 갖던 길이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 시점의 그 미터원기는, 조금 더 길거나 짧았을 수 있다. 따라서 미터원기는 필연적으로 1미터였다기보다는, 우연히 그 길이였다. 따라서 이는 선험적이고 우연적이다.

이렇게 크립키는 적어도 하나 이상의 반례가 선험-필연 대 후험-우연의 이분법에 포섭되지 않음을 보였다. 그렇다면 분석 대 종합은 어디로 가야 할까? 선택은 셋 정도일 것 같다. 둘 중 어디에도 이것이 의존하는 관계가 없다고 하거나, 둘 중 하나에만 의존한다고 하거나, 둘 다에 의존한다고 하거나.

그런데 의미에 대한 가능세계적 환원으로부터 양상에, 그리고 언어의 경험 제조적 특성으로부터 정당화에, “의미로부터의 참” 여부는 의존하는 것 같다. 그러니 앞의 둘을 고르기엔 어려움이 있고, 자연스러운 답은 마지막에 해당한다. 즉, 선험적 필연 문장은 분석적으로 참이다. 나머지는 비분석적으로만 참이다.

아! 그렇다면 선험적 우연 문장은 분석적으로 참이 아니기에, 선험적 종합 판단의 일종일까? 그렐링(Grayling 2005, 138)이 말하듯, 그렇다고 하기에는 아직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적어도 크립키가 생각하는 그러한 예시들은 칸트가 염두에 두었던 그런 류의 “선험적 종합 판단”과는 다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크립키의 선험적 우연 사례를 종합적 판단으로 받아들이기 싫다면, 비분석적이지만 종합적이지 않은 그러한 명제들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이 경우에는 모든 명제가 분석적이거나 종합적이라는 관점이 차단되는 듯 보인다. 이것은 이분법을 내적으로 무너뜨리는 일이다. 이런 답이 싫다면 다시, 크립키의 예시를 선험적 종합 판단의 일종으로 여겨야 한다. 이 때에는 결국 진리-정당화-양상의 이분법이 무너진다. 어떤 경우에도, 모든 것이 선험적으로 알려지고 필연적으로 성립하는 분석명제이거나, 후험적으로 알려지고 우연적으로 성립하는 종합명제라고 간주하던 관점은 무너진다.

그래서, 선험적 종합은요?

지금까지 우리는 칸트로부터 오늘까지 내려오는 지난한 논쟁을 살펴봤다. 결론은 사소하다. “선험적 종합”을 무마하려던 이분법은 탄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글의 제목이자 계기에 해당하는 “선험적 종합은 어떤 의미에서 가능한가?”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다. 단지 철학사적 흐름이, 그 둘을 논리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는 쪽으로 흐르고 있음을 소개했을 뿐이다. 물론 이는 나의 철학사적 평가이기 때문에, 학문적 권위를 가진 주장은 아니기도 하다 🙂 여하간 선험적 종합이 어떤 의미에서 가능한지에 관해 엉성한 소견을 밝히며 글을 맺겠다.

나는 “개념적 틀”이라는 것이 우리의 가능성의 폭을 제한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을 비판하기 위해 예시로 드는 것을 번Peter Byrne의 책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그 출처가 분명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틀이 세계 자체를 만든다거나 없앤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 세계가 될 수 있던, ‘명제적’ 내지 ‘실재적’ 상황이라고 불릴 법한 그러한 것은 고정되지만, 그 상황들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가 개념적 틀에 의존적이라는 점에서, 개념적 틀이 가능성의 폭을 제한한다는 말이다.

한편 이러한 개념적 사실들에 관한 우리의 진술은 선험적으로 참인 것 같다. 우리는 개념으로부터 경험한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개념도 우리가 갖고 있지 않다면, 어떤 경험도 의미있게 알려질 수 없다. 그러나 그 선험적 체계는 단일한 것 같지는 않은데, 우리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만 쓰이며 동시에 쓰일 수 없는 여러 개념적 체계, 가령 종교적 개념들과 과학적 개념같은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과학이 어떻게든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흔히 말하는 “패러다임”, 즉 동일한 논역 안에서 양립 불가능한 두 개념 체계를 생각해도 좋다. 한 명의 사람이 동시에 두 패러다임에 관해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제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내가 어떤 개념에 관한 사실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과 다른 개념 체계에 종속된 다른 개념에 관한 사실들을 생각한다. 오잉? 두 사실이 모두 필연적이다, 또는, 두 사실이 모두 동일한 가능세계들에서만 참이다, 또는, 두 사실이 모두 동일한 현실적 대상 및 가능적 대상에 대해 참이다. 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두 개념이 동일한 것을 지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믿음인 것일까? 이 믿음이 참이라면, 어떤 식으로 참인 것일까?

조금 곡해될 수 있겠지만, 예시를 통하자면 이렇다. 내가 “하느님”에 관한 사실들을 생각하고, 또 불교도가 된 뒤 “공”에 관한 사실들을 생각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하느님과 공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퍽 많다. 그리고 갑자기 깨닫는다.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던 그것과 ‘공’이라고 부르던 그것은 실재를 가리킬 때, 꽤나 넓은, 중첩면을 갖고 있지 않을까? 이렇게 추측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어떤 식으로 참인가? 그것이 참이라면,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또다른 지식이 있지는 않을까?

나는 수학에 관해 많이 알지 못하지만, 현대수학에서의 여러 연구 방식이나 자연과학에서의 학제 중첩적 학문 역시 이와 유사한 추론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수학적 표현을 기하학적 표현으로, 그리고 그 역으로 바꾸어 쓸 수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아니면 수학적 연역을 통해 물리학적 사실을 도출하는 방식을 생각해 보라. 또한, 인간의 움직임이 갖고 있는 모종의 유사-물리학적 법칙이 있으리라고 믿었던 (초기의) 사회학자들의 주장을 생각해 보라. 이러한 방법과 주장은 어떤 식으로 참인가?

나는 이것들이 “선험적 종합”이라고 할 만한 것의 사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례들은 적어도 분석적으로 진리인 그런 것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경험을 통해 정당화되는 어떤 믿음에 관한 것도 아니다. 선험적이면서, 분석적이지 않은데, 크립키의 선험적 우연 사례들처럼 사소한 것들도 아니다. “선험적 비분석”에서 멈추기엔 이것들은 무언가 정말로 “종합적으로 참인” 그런 주장들처럼 생각된다. 최소한 “서로 다른 두 선험적 체계의 종합”이라는 의미에서 선험적 종합은 가능하지 않냐고 추측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과연 “선험적 지식”과 관련된 무엇이 맞기나 한지를 반문하게 될 수도 있다. 글을 두 개나 써 가며 진행한 공상은 바로 이 반문에서 막혔다. 왜 이 반문에서 막히는가 하면, 그런 식의 종합이 있었다 한들 그것이 과연 “선험적으로 정당화되는” 그런 류의 믿음을 제공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선험적으로, 즉 경험독립적으로 “정당화되는지”의 여부를 보일 수 있어야, 그것은 선험적 종합 판단의 사례로 적합하다. 그렇다면 결국 다시 문제는 “종합 명제를 어떻게 선험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방법론적인 데에 닻을 내리게 된다. (이 닻을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크립키의 선험적 우연 사례가 우연히 걸리지 않겠나 하는 막연한 직관을 갖고 있다.)


“종합 명제를 어떻게 선험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가?” ⎯ 맨 처음으로 돌아온 이 질문은 이제는 나에게 더 심오하게 보인다. 단순히 선험-필연-분석 / 후험-우연-종합의 이분법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정당화는 불가능하다는 봉쇄 전략은 이제 통하지 않기에, 선험적 종합의 옹호자들은 그 가능성을 희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정말로 있을 수 있냐는 권리 근거를 찾는 것이 쉬운 일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이다.

구글스칼라 검색 결과에 따르면, 이 주제는 아주 사소하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탓인지, 그렇게 많은 연구를 촉발하고 있는 것도 아닌 듯하다. 적어도 2000년부터의 논문들을 보면, ‘Synthetic a priori’를 제목이나 키워드에 포함한 논문 자체가 거의 없고, 그 중에서도 정말 가치있어 보이는 논문은 극소수이다. 쓸모없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어려워서일까? 아니다. 쓸모없어보이기 때문이 맞다.

그러나 말미에서 말했듯 나는 개념 체계 간의 종합이 일종의 선험적 종합 판단과 연관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한 종합은 지금 나의 관심 주제와도 유사한 곳에 위치한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그래서 선험적 종합이 어떤 의미에서 가능한데요?”에 대해 “적어도 그것이 완전 불가능하다고는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언젠가 다시 이 주제로 돌아와 이야기하게 될런지도 모르겠다. 그 때에도 이렇게 얼버무릴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일단 말을 더 늘이지 말고 이렇게 맺도록 하자. 다른 방향에서 이 주제에로 돌아올 수 있다면 행운인 것이고, 특히나 이 지면을 통해 이 주제를 다시 고민할 수 있다면 더 재미있는 일이 되겠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은 아니다. 안녕!

참고문헌

  • Grayling, A. C. 2005. 『철학적 논리학』. 이윤일 역. 서울: 선학사.
  • Kripke, Saul. 『이름과 필연』. 정대현 역. 서울: 필로소픽.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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