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란 실재하는가? 다원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들은 무의식적으로 자기검열을 하곤 한다. 어떤 것이 진보라는 직감이 올 때에도, ‘아니다.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다. 따라서 이것은 진보가 아니라 다름이다. 진보는 폭력적 개념이다.’라고 말하며 어떤 것이 진보했음을 부정하려 한다. 여기에서 질문이 나온다. 반드시 진보를 부정해야만 우리는 이른바 ‘포스트 모던’의 미덕을 보여주는 것일까? 포스트모던 좌파가 진보의 가능성을 앞에 두고 갈팡질팡하는동안 우파는 그 틈을 타 좌파의 목을 노린다. 그들은 포스트모던이 진보의 의지를 없애 생산적이지 않은 사회를 만들며, 실제로 삶에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를 뒤로 하고 공허한 개념 놀이만을 추구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주장은 포스트모던뿐아니라 좌파 일반을 겨냥하게 된다. 오늘날의 학문적 좌파는 포스트모던의 소양을 가지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곤 하기 때문이다.

진보는 환상일까?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진보를 경험했다. 개화기 이전 사용하던 호롱불에 비해 오늘날의 형광등은 훨씬 효율적으로 세상을 밝히고 있다. 반달돌칼이나 청동 거울에 비해 현대식 식칼과 거울은 훨씬 적은 자원으로 초월적인 성능을 낸다. 6월 항쟁 이전의 미숙한 “자유민주주의”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유주의 및 민주주의는 훨씬 성숙해 있다. 트랜지스터는 진공관의 모든 기능을 대체하면서도, 더욱 효율적이고 내구도 높은 시스템 구축을 가능하게 했다. 아이폰 3G에 비해 아이폰X의 성능은 매우 뛰어나다. 이것이 진보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누군가는 ‘그것은 가치에 관한 것이 아니므로 잘못된 예시이다’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세월호 이전과 세월호 이후 우리 사회의 가치 기준은 진보했다. 아우슈비츠 이전과 아우슈비츠 이후 서구 세계의 가치 기준은 진보했다. 미국 시민 전쟁 이전과 북군의 승리 이후 미합중국의 가치 기준은 진보했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의 난민 논쟁과 여성주의 논쟁 등이 지나간 후에 우리 사회의 가치 기준은 진보할 것이다. 진보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세월호 이전, 탄핵 이전, 아우슈비츠 이전, 시민 전쟁 이전, 6월 항쟁 이전의 것으로 가치 기준을 돌리자는 데에 이의를 가질 이유가 없다. 유대인과 흑인을 혐오하는 것이 단순히 사회에 따라 상대적인 기호의 문제일 수 있을까? 선박의 안전과 정치의 투명성을 재고하는 것이 진보와 무관히 일어난 ‘단지 하나의 사건’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는 그저 이 사건들 이후의 반성을 두고 진보라고 불러 왔다. 따라서 미시적인 진보란 정말로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모든 행위에 우위의 기준을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컨대 상투를 트는 것과 삭발을 하고 가발을 쓰는 것 중 어느 풍습이 진보되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넌센스다. 두 풍습은 서로 다른 목적을 갖고, 서로 다른 문제의식에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위의 기준을 두고 진보를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예컨대 우리는 서양의 펜이 동양의 붓보다 현대적 글쓰기에 더욱 효율적인, 진보된 도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효율성은 다른 산업의 효율성으로부터 수반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특정한 정치적 이익에 편향되어있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역사가 진보를 단순히 담보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고대 근동의 동해보복법과 오늘날의 손해 배상 제도를 비교해 보자. 현대 법정에서의 재판 제도는 민사 사건과 형사 사건을 보다 명시적으로 분리하고, 각 사건에서의 처벌을 일원화했다는 점에서 보다 효율적인 사법행위를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동해보복제도는 보다 노골적으로 탈법적 행위를 금기시한다는 점, 그리고 피해자로 하여금 더 통쾌한 복수의 경험을 하게 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사법 제도가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을 실현하고 있기도 하다. 이 경우에서 알 수 있듯, 미시적인 진보가 연속되었다 하여도 어떤 이유에서 조상격 되는 제도를 온전히 계승하지만은 않을 수 있다.

잘 정돈된 진보의 개념을 얻는다면 아마도 그 영향은 이러할 것이다. 우리는 더이상 두 행위 사이의 우위를 부정하려는 편집증에 사로잡힐 이유가 없다. 체계 밖의 어떤 행위를 두고도 당당히 ‘그것은 부당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현재적이지 않은 가치를 옳은 것으로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자문화우월주의로 나아가지 않게 할 근거를 또한 얻는다. 어떤 특정한 문제의식에 대해 더 문제를 잘 해결한다는 것이 모든 측면에서 문제를 잘 해결한 것이라는 것을 담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문제에 대해 그것이 더 훌륭한 해결책을 낸다면, 다른 측면에서 열위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방식을 채택할 수 있다. 말하자면, 어떤 체계에 대한 다른 체계의 진보는 동일한 문제들에 대한 더 큰 효율성이다. (이것이 너무 상식적인 주장인가?)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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