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험적 종합을 이야기하다 (1)

이상한 학문들이 있다. 수학, 형이상학과 같은 이른바 “기초학문”들 말이다. 왜 이상하냐고? 이 학제에서의 주장들은 경험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상하다. 그것은 또 왜 이상하냐고? 경험적으로 정당화되지 않으면, 연역적으로 논증될 수 있다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도저히 이 학문들 안에서의 “의견 차이”가 있는 것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수학사나 철학사를 보면 알 수 있듯, 이 학문들에서는 늘 의견 차이가 있어 왔다.

어떤 학제에서 의견 차이가 있다는 것은 그 학제에서의 모든 주장이 자명하게 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그 학제에서 적어도 어떤 주장들은 자명하지 않게 참이 된다는 것은, 또한, 그러한 주장들은 우리의 지식의 폭을 넓혀준다는 것을 뜻한다. 즉, 단지 우리의 말장난이나 사전 편찬 작업 등으로는 할 수 없는 류의 작업이라는 소리이다. 이러한 작업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질문을 함과 동시에, 우리는 “선험적 종합”의 가능성의 문제에로 돌입한다.

세가지 축

철학을 시작하면서 으레 배우는 세 축이 있다. 선험-후험으로 대비되는 정당화의 축, 분석-종합으로 대비되는 진리의 축, 필연-우연으로 대비되는 양상의 축이 그것이다. 정당화의 축은 그것이 어떻게 알려지는지 묻는다. 경험 독립적으로 알려진다면 선험적 지식, 경험 의존적으로 알려진다면 후험적 지식이다. 진리의 축은 그것이 어떻게 참인지 묻는다. 그것의 의미에 따라(이 정의는 후대의 것이긴 하다) 참이라면 분석적 명제, 그렇지 않다면 종합적 명제이다. 양상의 축은 그것이 어떻게 성립하는지 묻는다. 어떤 경우에도 성립한다면 필연적 사실, 어떤 경우에만 성립한다면 우연적 사실이다.

예시를 통해 조금 더 명확히 해 보자. 모든 총각이 결혼하지 않은 성인 남자라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 사실이 성립하지 않는 경우는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왜 이 사실이 성립하는가? ‘총각’의 의미가 그 자체로 ‘결혼하지 않은 성인 남자’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성인 남자이다’는 분석적 참이다. 그렇다면 이 문장이 참임을 알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 문장을 이해하는 능력만 있으면 된다. 굳이 모든 총각의 수를 세고, 모든 결혼하지 않은 성인 남자의 수를 센 뒤, 둘이 항상 같은 집합이 된다는 등의 관찰을 할 필요가 없다. 이는 선험적으로 알려진다.

반면 여정이 집에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려질까? 여정이 집에 있는지를 확인해 보아야만 알 수 있다. 즉, 여정이 집에 있다는 것은 후험적으로만 알려진다. 왜 그런가? 여정이 집에 있음은 우연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내가 학교에 있다면, 이는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이것이 성립하지 않는 것인가? 우리는 ‘여정이 집에 있다’라는 문장 자체만으로부터 그것이 참이거나 거짓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여정이 집에 있기 위해 어떤 조건이 만족되어야 하는지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총각-결혼하지 않은 성인 남자라는 구태한 사례를 통해 필연적 사실과 분석적 진리, 선험적 지식에 관해 보았다. 또 여정-집에 있음의 사례를 통해 후험적 지식과 우연적 사실, 종합적 진리를 보았다. 상식적으로 볼 때, 이 세 축에서의 앞부분에 해당되는, 선험-분석-필연, 그리고 뒷부분에 해당되는, 후험-종합-우연은 하나로 늘 묶여 있는 것 같다. 즉, 분석적으로 참인 명제는 선험적으로 알려지며, 필연적으로 성립한다. 종합적으로 참인 명제는 후험적으로 알려지며 우연적으로 성립한다. 일상적으로 이런 쌍이 성립한다는 점은 칸트 역시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한동안 철학자들은 이와 같은 이항대립이 성립한다고 생각했다.

진리와 정당화의 균열

그런데 칸트는, 이 이항대립이 전적으로 탄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어떤 학문들에서는 이 대립이 지켜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서두에 언급한 학문들이 그런 것에 해당한다고 볼 법하다. 수학이나 철학에서 어떤 주장을 정당화하는 데에는 어떠한 경험적 증거도 요구되지 않는다. 다만 이들 학문에서 주장은 적합한 논증의 방식, 이를테면 논리적 추론을 통해 정당화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철학이나 수학에서 참인 명제들이 분석적으로 참인 그러한 것인가? 이 점을 면밀히 검토해 보자.

우리가 단어를 잘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단어들의 의미를 잘 알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는 단어를 잘 사용할 수 없다.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그 사용이 표현의 의미와 같다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겠지만, 적어도 그 의미를 아는 것은 그 표현을 사용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그렇다면, 표현들을 잘 사용하는 것만으로 모든 분석적 진리들은 알려질 수 있겠다. 표현을 잘 사용한다면, 그 의미를 아는 것이며, 우리가 논리적 절차를 따른다면, 의미들로부터 모든 분석적 진리가 따라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논리적 절차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미를 알고 논리적 절차를 알기에, 논리적 절차가 무엇인지와 표현의 사용 방법에 대해 일치하는 이들 사이에는 철학적/수학적 불일치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실제로 불일치가 일어난다! 누군가는 선택 공리가 자명하다고 주장하는 반면, 누군가는 선택 공리를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누군가는 모순율이 자명하다고 주장하는 반면, 누군가는 모순율 없는 체계가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누군가는 형이상학적 실재론이 자명하다고 주장하는 반면, 누군가는 그것이 아주 혼란된 태도라고 주장한다.

각 주장이 자명함에 관한 것이 아닐 때에도, 여전히 불일치가 일어난다. 누군가는 이러저러하게 생각할 때 연속체 가설을 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그것은 자명한 전제들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누군가는 이러저러하게 생각할 때 ‘p 라면 q’가 ‘p가 아니거나 q’와 동치라고 하지만, 누군가는 그것은 배중률이라는 근거 없는 전제로부터 나온 정의라고 주장한다. 누군가는 형이상학적 다원주의가 거부되지 않을 좋은 이유가 있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그 역시 일원론으로 붕괴될 수 있으며, 애초에 다원주의는 오류 있는 전제에서 출발한 주장이라고 반론한다.

이렇게 볼 때 철학이나 수학을 분석적 작업이라고 볼 수는 없는 듯하다. 물론 이렇게 답할 수는 있다. 불일치하는 두 학자는, 사실은 같은 어구로 다른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또는, 두 학자는, 사실은 같은 표현들에 다른 추론 규칙을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이상한 응답이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철학자들의 논쟁을 보건대, 그들은 충분히 서로가 사용하는 추론의 방법을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서로가 사용하는 개념들에 관해서도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러한 개념과 추론 규칙에 동조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이 응답은 그릇되었다.​*​ 혹 우리가 이 응답을 따르게 된다면 사태는 더 심각해지는데, 의견대립이 일어나는 수학적 문제나 철학적 문제에서 실제로는 의견대립이 일어난 적조차 없다는, 또한 따라서 그 문제에 대해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지도 알지 못한다는 귀결을 갖는 탓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른바 수학이나 철학이 종합적 진리를 선험적으로 알아내는 활동이라고 이해했다. 세부적인 계기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 칸트가 수학을 선험적 종합의 활동으로 이해할 때 생각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부분이었다. 수학은 선험적이지만 공허하지 않다. 단지 수학이 분석적 활동이려면 그것은 말놀이이고, 공허해야 했다. 그런데 수학이 공허하지 않다. 따라서 수학은 선험적이면서도, 분석적 활동은 아니다. 분석적이지 않다면 종합적이다. 고로, 수학은 선험적 종합의 활동이다.

진리와 정당화의 봉합

선험적 종합의 지지자들이 일으킨 균열은 머잖아 봉합될 조짐을 보였다. 수학에서의 논리주의자들의 등장과, 철학에서의 논리실증주의자들의 등장이 이 계기가 되었다. 수학적 논리주의자들의 논제는, 선험-분석-필연의 축을 봉합시키는 듯 보였고, 논리실증주의자들은 후험-종합-우연의 축을 봉합시키고자 했다. 어떻게 그러한 봉합을 시도했는가? (같은 집단에 의해 동시에 지지되곤 했던) 두 입장이 각각 어떤 중심적 주장을 갖고 있는지, 간략하게 보도록 하자.

논리주의는 프레게로부터 기획되어, 러셀에 의해 발전된다. 이들의 목표는 수학을 오로지 대상들 및 논리적 관계를 통해서 정초하는 데에 있었다. 프레게는 러셀보다도 이 정신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러셀이 (체르멜로, 폰 노이만 등이 그러했고 일반적으로 오늘날 수의 정의를 위해 사용되는) 집합론적인 자연수 정의를 할 때, 프레게는 그것이 집합이라는 존재자에게 개입한다는 이유로 오로지 “개념의 외연”만을 수의 정의에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심철호 1990, 39)프레게의 이러한 기획이 성공적이라면, 수는 대상들 및 그것의 논리적 관계로부터 설명되며, 이는 모든 수학적 진리가, 논리적 진리와 마찬가지로 선험적일뿐 아니라 분석적이게 할 것이다.

논리주의자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던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논리주의자들이 선험적 지식을 분석적 진리와 동연적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후험적 지식을 종합적 진리와 동연적으로 만들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분석적으로 참이지 않은 명제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그것의 검증 조건을 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의 검증 조건을 분명히 알기 어려운 명제인 “신이 존재한다” 따위의 명제들은, 무의미한 것으로 추방된다. 우리가 그것의 검증 조건을 알고, 또한 경험적으로 그것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그러한 명제들만이 종합적으로 참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의자가 여기 있다”와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알려져 있듯 논리주의와 논리실증주의의 삶은 오래 가지 않았다. 오래가지 않았던 이유는, 무언가 더 우세한 이론이 나와서라기보다도, 이 입장들이 그 자체로 부조리한 결과를 낳기 때문이었다. 논리주의의 경우는 이른바 “러셀의 역설”을 낳았다. 러셀의 역설 자체는 집합론적 역설이었지만, 프레게의 개념 정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역설이 발생했다.(심철호 1990,41;최원배 2007, 29) 이를 오늘날의 신-프레게주의자들은 “흄의 원리”라는 추상화 원리를 통해 해소하고자 하지만, 이는 실제로는 논리주의의 기획을 흔드는 시도가 될 뿐이다.(최원배 2007)

논리실증주의는 총체적으로 결국 거부되고 말았다. 그들의 시도는 몇가지 어려운 사례들을 설명하는 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들은 귀납논리학의 정초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어서 등장한 콰인의 유명한 반론은, 의미론적 전체론에 근거하여 분석성과 종합성이 엄밀한 경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Godfrey-Smith 2014)의미론적 전체론을 우리가 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전자의 경우가 문제가 되고 말 것이다. 분석적이지 않은 모든 진리에 대한 경험적 검증이 가능하다고 간주할 때, 우리는 기껏해야 귀납적 사실에 관한 주장을 (굿맨의 ‘초랑/파록’ 예시처럼) 단순히 우리의 투사projection에 불과하다고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하간 진리와 정당화는 이들이 등장함과 함께 봉합되는 듯했다. 엄격한 논리주의가 지지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오로지 분석적인 진리만이 필연적이고, 그것은 선험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이라는 태도는 철학자들을 지배했다. 콰인의 반론과 귀납논리학의 수수께끼가 남아 있었음에도, 후험적인 지식은 오로지 종합적이고, 우연적인 것이라는 시각은 한동안 철학자들을 지배했다. 무언가 찜찜한 이 봉합은, 이후 크립키와 루이스가 발전시킬 가능세계의 철학을 통해 다시 문제시될 것이다.


이어지는 글: 선험적 종합이란 어떤 의미에서 가능한가? (하)

참고문헌

  • Godfrey-Smith, Peter. 2014. 『이론과 실재: 과학철학 입문』. 한상기 역. 파주: 서광사.
  • Inwagen, Peter van. 2010. “We’re Right. They’re Wrong.” In Disagreemen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0–28.
  • 심철호. 1990. 「프레게의 수 개념과 논리주의」, 『철학논구』 18: 29–44.
  • 최원배. 2007. 「흄의 원리와 암묵적 정의」, 『논리연구』 10 (2): 23–46.

  1. ​*​
    이 문제에 관해서는, van Inwagen(2010)을 참조하라.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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