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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말을 따라하며 글을 열자: <여정에게 ‘비평에 관한 지식’은 많이 없다.>(인용기호가 필요한가?) 그러나 비평에 관한 어떤 신념은 있다. 그 윤곽은 대략 이러하다. 모든 종류의 비판, 또는 비평은 동일한 잠재력을 공유하며, 그 잠재력이 발휘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비평을 ‘좋은 비평’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비판”이란 이런 것들을 포괄한다. 가장 좁은 의미에서, 문학 비평, 그리고 점차 범위를 넓히며 문화 비평, 도시학, 메타문학, 종교학, 메타철학, … 더 나아가 철학 일반까지. 내가 비평학에 관한 지식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비평에 관한 신념을 갖는 것이 이러한 까닭이다. 적어도 내게 철학과 비평은 분리될 수 없고, 철학은 철학의 문체로 쓰인 비평이다. (무엇의? 삶 일반의!)

건너 들은 바로는, 로티는 이를 두고 철학의 과제는 “교화적 대화”(메타철학이란 무엇인가, 쇠렌 오버가르 등, 생각과사람들, 2014. 61면에서 재인용)라고 했다는 모양이다. 즉 철학은 다른 비과학적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사람 사이의 대화 가능성을 열어주기 위해 사용되는 하나의 형식이다. 따라서 철학에 객관적 진리란 없다. 철학은 애초에 객관적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형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이 답을 오롯이 수용하지는 않는다. 나는 철학이 비평의 한 방식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비평은 어떤 방식으로 정답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전의 나의 글을 사려 깊게 읽은 독자라면, 이제 나의 답이 어떻게 구성될지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으리라.)

일단 나는 나의 신념이 정확히 어떤 것이냐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 좋은 비평이란 무엇인가?

2

나도 멋지게 누군가의 말을 인용해 볼까 한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존재는 … 그의 전통에 빠져버린다. 이 전통은 그에게서 자주적인 처신, 물음과 선택을 빼앗는다. … 전통은 … [그것의 내용을] 은폐해버린다.”(까치, 1998. 61면.) 번역하자면 이렇다. 우리의 해석은 전인식적인 규범에 의존할 경우가 많다. 따라서 그 규범은 오도된 해석을 유도하곤 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철학에 비판(그의 말로는, “해체”; 나는 일단 이 표현을 그대로 사용할 작정이다)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철학에 있어 무엇이 올바른 비판 방식이 되겠는가? 과거의 철학을 그것이 설명되어 온 전통이 아니라 해석학적 방식에 근거하여 오늘의 말로 번역하는 일이다. 이 때 비판은 비판 대상을 바라보는 통속적 태도에 대한 비판이 된다.

모든 방식의 비평은 하이데거의 “해체”를 수행해야만 한다. 어떤 발화의 의도가 부조리하다면(즉 발화자가 발화 내용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거나 발화자의 발화 방식이 필연적으로 오해⎯예컨대, 지시의 실패⎯를 만든다면) 그 발화는 성공할 수 없다. 원숭이가 운 좋게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쳐 냈다 하더라도 그것은 원숭이의 저작 활동이 성공한 경우라고 볼 수 없다는 점이나, 내가 파상을 단현으로 오인한 채 오인된 파상에 대해 한 진술은 단현에 대해 참인 발화를 구성하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해 보라.

마찬가지로 어떤 대상에 대해 적합한 해석이 없는 채로 비평을 수행한다면 그것은 실패한 비평이다. 그런데 바로 그 해석은 우리가 ‘해체’라는 범주로 지칭하는 과정 속에서 나온다고 했다. 따라서 어떤 비평도 해체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해체로서의 비평에 대해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하나 있다. 해체는 어떤 작품에 대한 우리의 향유 방식을 근본적으로 뒤집으려는 맹목적 노력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해체란 오히려 문법학자의 작업에 더 가깝다. 문법 연구자는 오늘날의 대중이 어떤 식으로 어휘를 사용하는지 관찰한다. 이로부터 발음이나 조사의 사용 등에 관한 일반 규칙을 만들고, 모순이 있는 부분에는 수정이 필요함을 제안한다. 문법학자는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행동해야 함을 주장하지 않고, 이렇게 저렇게 행동해 왔음을, 그리고 그 행동에 이러한 내적 문제가 있음을 밝힌다.

해체가 일어나고 나면 우리는 우리가 향유하는 대상의 어떤 부분을 덜고 어떤 부분을 더해야 할지 가름할 기준을 얻는다. 해체는 그 기준을 주는 것을 역할로 갖는 것이며, 어떤 것의 가감에 대해 역할로 주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이미 스스로를 규범화하고, 스스로 대상의 어떤 면을 은폐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비평의 권위에 대해 비평 수용자의 권위가 우선한다.

해체의 근본적 역할인 번역만으로 비평의 모든 과제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비평은 번역에 더하여, 그 번역이 오늘날의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설명해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평은 문제의 발견과 문제 제기를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원래 텍스트가 어떤 문제제기도 하지 않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나 난 그런 텍스트는 비평될 가치가 없는 텍스트였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주장에는 더 많은 해명이 요구된다.)

그런데 이 수행은 과정적으로 번역에 후행할 따름이다. 번역은 오늘날의 언어로의 번역이며, 피번역물이 어떤 문제제기를 하고 있었다면 번역물은 그 문제제기를 오늘날의 문제로 번역한 것을 포함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비평과 해체는 동일하다. 비평은 지나간 것(또는, ‘사실’)을 새로운 사건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시도이다. 물론 시간이 지난 뒤엔 그 비평 또한 지나간 텍스트가 될 것이다. 그러나 처음 비평을 만나는 그 사람에게 충분한 번역을 제공했다면 비평은 충분히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3

비평은 분석이고, 비평은 해체이다. 비평이 해체의 작업이라는 것은 비평의 좋고 나쁨을 평가할 객관적 지표가 적어도 하나는 있음을 의미한다. 일단은 텍스트 자체가 그 지표를 제공한다. 그것을 해체라고 부르든 분석이라고 부르든 비평의 과정은 언제나 어떤 텍스트를 오늘날의 의미에 맞게 변환하는 것인데, 어떤 것을 변환한다는 것은 이미 그 변환 대상이 주어져 있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사변적이지 않은 예는 넘친다. 당장 우리는 <로빈 후드>와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다른 텍스트임을 알고 있다. 어떻게 아는가? 그것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그 내용이 우리의 비평 후에 비로소 발생하는 것이라면 어떤 우연의 일치로 로빈 후드와 해리 포터는 동일한 비평을 낳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경우를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비평의 과정에 놓인 두번째 지표는 “오늘날”의 맥락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반복해 말해 왔듯 비평은 어떤 텍스트를 오늘날의 의미에 맞게 변환 내지 해명하는 작업이다. 만일 이 작업의 결과물인 비평문이 오늘날의 감수성을 전혀 자극하지 못한다면 이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비평된 텍스트가 무의미하거나, 올바르게 변환 작업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단 나는 어떤 문제제기도 하지 않는 텍스트를 비평할 가치가 없는 텍스트로 위에서 둔 바 있다. 그 경우를 제외하자면 가능한 것은 하나 뿐이다. 즉 오늘날의 감수성을 자극하지 못하는 비평은 올바른 비평이 아니다. 오늘날의 감수성을 어떻게 자극할 수 있을까? 비평문이 읽히는 맥락을 잘 살펴야 가능하다. 그 맥락은 다름 아닌 비평 수용자들의 감성 능력을 통해 형성된다.

따라서 최소한 두가지의 비평 평가 지표가 존재한다. 하나는 텍스트 자체이고(나는 어떤 글에서 이를 ‘텍스트-내용’이라고 불렀다), 다른 하나는 텍스트가 비평되는 맥락의 여건이다(다른 말로는 텍스트가 비평되는 순간의 사태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두 지표를 고려할 때, 좋은 비평인지의 여부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식으로 나뇔 수 있다. 우선 비평은 비평 대상인 텍스트와 충실한 연관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비평은 텍스트를 오늘날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끝으로 그 번역은 원 텍스트로 하여금 비평을 통해 오늘날의 문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단 문제를 드러낸다는 것은 앞선 제한들에 따라 1) 텍스트가 드러낼 수 있는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어야 하며, 2) 비평 수용자들에게 공감 가능한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덧붙여 오늘날 실재하지만 분명하게는 발견되지 않은 문제를 감성의 자극으로 밝혀 내는 것도 비평의 덕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비평의 평가 지표를 객관적인 (적어도, 상호주관적인) 대상으로 환원함에 따라 비평은 오로지 주관적이거나 오로지 상대적으로만 좋고 나쁘다는 과도한 상대주의로부터 벗어나 평가될 수 있다. 객관적 평가 지표는 하나의 텍스트에 대해 동시에 두 상반된 비평이 제기될 때, 어느 한 편을 지지하고 다른 것을 배제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으므로 유용하다.

비평이 텍스트에 운동력을 부여하는 작업이 될 수 있다면 이러한 유용성은 아주 중대하다. 동일한 순간에 서로 다른 방향으로 분열하는 운동은 운동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비평은 객관적 능력을 가질 때에만 텍스트에 운동성을 부여하며, 그러므로 비평의 객관적 평가 지표를 구성하는 것이 좋은 비평을 구분하기 위해 앞서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까지 내가 한 것은 그 예시이다.

4

비평은 일종의 처방전이다. 비평은 과거의 텍스트를 오늘날의 언어로 진단함과 동시에 오늘날의 세태를 과거의 텍스트에 비추어 진단한다. 좋은 비평은 우리가 지금 어떤 문제 속에 있는지를 밝힌다. 더 좋은 비평은 이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 해소될 수 있는지 논구한다. 비평은 텍스트로부터 출발해 그 텍스트에 주석 작업을 적용하고, 우리 문제의 해소를 향해 나아간다.

좋은 비평은 정치적 귀결을 낳는 것이 당연하다. 어떤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 비평은 단순히 주석 작업에 불과한데, 비평의 대상이 감성적 영역에 관계하는 종류의 텍스트라면 좋은 비평은 그 감성을 오늘날의 방식으로 재생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필요한 좋은 비평은 정치적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모든 좋은 비평문이 정치적이기를 의도(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한 정치적 의도를 갖지 않더라도 비평은 이루어질 수 있다. 정치적 의도를 갖지 않는 문학이 훌륭한 정치적 귀결을 낳을 수 있는 것처럼. 오히려 뛰어난 통찰을 가진 문학에, 정치적인 의도 없이 적용된 비평이 큰 정치적 귀결을 낳는 경우야말로 최상의 비평이다. 그러한 비평은 명시적이지 않고서도 자신의 언어로 과거의 통찰을 인용해 오늘날의 감수성을 자극한 것일 터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와 같은 비평이 있다면 그것은 문학과 구분될 수 없겠지마는.

내게 철학은 삶 일반에 대한 비평 작업이다. (그리고 문학은 삶의 실존적 면 일반에 대한 작업이다.) 따라서 정치성에 관한 기준이 철학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좋은 철학적 작업은 실천적 결과를 낳는다. 그것은 우리의 세계 인식을 고쳐서 과학, 예술, 정치 등의 제분야에서의 시각을 코페르니쿠스적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철학이 이 전환을 항상 꾀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지적 호기심에 의해 철학적 작업을 이어갈 때에도 그것은 모종의 연관을 통해 큰 실천적 의의를 남길 수 있다.

과학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을 자연 세계에 대한 비평작업이라고 생각해 보자. 자연과학은 세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연구 프로그램을 구성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더라도(또, 그렇지 않아야만) 세계 자체를 연구하면서 자연 세계에 관한 우리 태도에 큰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가 실제로 그러했듯. 이런 식으로 좋은 비평에 관한 기준은 다른 여러 글들에 관한 기준으로 환원된다.

신학은 어떤가? 신학도 마찬가지로 일종의 비평 작업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된다면 그것은 무엇에 관한 비평인가? 어떻게 신학은 좋은 신학이 될 수 있을까?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하는 신학은 어떤 신학인가? 이제 이 질문들이 남았다.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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