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wel Pawlikowski. 2019. 〈Cold War〉

운명적인 사랑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랑은 낭만적인 사랑으로 치환되나요?
다르게 묻겠습니다. 인생에서의 단 하나의 사랑을 믿습니까?

시니컬한 독자들은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말할지도 모르니, 에리히 프롬이 말했던 ‘성애性愛’라고 해 보자. 진부한 얘기이지만, 현대의 연애관은 낭만주의 시대 이후의 소산이다. 그 이전의 시대까지는 (결혼의 형태로는) 중매혼이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사랑마저 영웅적인 서사의 전유물이었다. (오르페우스 신화, 오디세우스 신화 등이 이를 예증한다.)

이전 시대의 사랑들은 운명적이었다. 오이디푸스로 대표되는 신화들에서, 그리고 Netflix의 드라마 The Witcher 등과 같은 고古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에서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것,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조차 없는 불가역적인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늘 거대한 신탁에 의해 좌우되며 개인의 감정 너머의 것이었다. 또한 그러한 운명 속에서 개인의 실패와 성공은 온전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그 책임조차 운명에게로 돌아간다.

그리고 현대의, 우리들이 마주하는 운명이 있다. 영웅적 서사 속에 놓이지 않은 범인凡人. 고중세를 지나 신탁의 고삐를 풀어버린 신인류. 우리에게 운명이란 미래적인 것이며, 불가지의 영역이다. 이 속에서 우리가 운명을 말할 때, 그것은 의지적인 어조이며, 힘이다. 이는 사랑에 관련지어질 때 더욱 도드라진다. 한 개인이 타인을 만나 감정을 느끼고 소위 사랑에 빠질 때, 그리고 어떤 난관들을 마주하게 될 때, 그들은 서로를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앞으로 나아간다. 현대의 운명은 가시可視되지 않은 신탁에의 믿음에 기초한다.

<콜드 워>는 사랑과 운명에 관한 영화다. 제목과 앞선 말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 본 작품은 냉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물들의 사랑을 다루었다. 냉전 속, 이데올로기는 그들의 운명이다. 사회주의 진영 폴란드, 명망 있는 예술가 빅토르가 민요를 녹음하고, 악단을 꾸린다. 줄라가 악단에 들어간다. 빅토르와 줄라. 그들은 첫눈에 사랑에 빠짐으로써 운명적 사랑의 첫 단추를 꿴다.

그들은 이제 사랑과 운명의 진창으로 끌려들어간다. 너무나 당연스럽게도, 그들을 바라보는 카메라에 의해. 대부분의 영화에서 마찬가지겠지만, 유독 <콜드 워>에서 카메라는 ‘운명’이며, ‘시대’이며, ‘신’이다. 영화의 초반부, 악단의 사무국장 카치마레크가 바람을 쐬다가 폐허가 된 교회를 마주한다. 화면은 윤곽이 사라진 채 ‘눈동자’만이 남은 신의 초상을 잡는다. 카치마레크가 하늘을 본다. 수직의 로우 앵글(올려다봄)로 구멍난 교회 천장과 그 안에 펼쳐진 하늘이 보인다. 곧바로 이어지는 쇼트는 수직으로 내려다보는 하이 앵글이다. 형체가 뭉개진 신을 담은 벽화와 닮은 알 수 없는 이미지가 제시된다. (이는 흑백으로 인해 생겨난 유사성이다.) 이윽고 차가 화면 밑에서 위로 들어오며, 카메라는 그 피사체를 쫓아 Tilting​*​한다. 요컨대 한 인간이 신의 형상을 보았고, 하늘을 보았다. 이어 신이 인간들을 내려다 보았다. <콜드 워>의 카메라는 인간들을 미장센으로 배치하며 내려다보는 신이다.

운명은 응시하는 시선이다. 신神-카메라의 내려다봄은 이 영화 속 대부분의 쇼트에서 나타난다. <콜드 워>는 대단히 독특한 앵글과 설정으로 개인을 왜소하게 만든다. 피사체는 미디엄 내지 바스트 쇼트라고 불릴 만큼 타이트하게 자리하지만, 헤드룸​†​이 화면의 반을 차지한다. 여기에 앞서 언급했던 내리는 시선(하이 앵글)이 중첩된다.

이렇게 작아진 등장 인물로 인해 비어버린 ‘배경’에는 무엇이 자리하는가? 무엇이 사방에서 그들을 덮어버리고 빈 공간을 메우는가? 그것은 얼굴들이며, 결국에는 시선들이다.

자료에서 볼 수 있듯, 줄라와 빅토르는 각각 미디엄과 바스트의 사이즈로 자리하지만, 그들의 후경Background에는 수많은 얼굴들이 있다. 그리고 배경들은 주인공과 같은 복장이며, 흑백 영화 고유의 유사성까지 더해졌다.

줄라가 악단원들과 노래할 때, 그들의 입은 너무나 일치하게 움직여서 마치 모두가 인형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오히려 어떨 때에는 서사의 주인공들보다 후경에 더욱 눈이 가게 만든다. 또한 주인공들의 뒤에 자리한 배경인들은 물리적으로 높은 위치에 놓이고, 하이 앵글의 왜소함을 벗어나 있다.

Background를 직접적으로 제시한 놀라운 쇼트가 있다. 벽면 전체를 덮는 거울에 빅토르와 한 여자가 기대어 있다. 후에 악역이 될 카치마레크가 배면 자세로 들어오지만, 거울에 비쳐 얼굴이 드러난다. 그들의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파티를 즐기고 있다. 그 속에서 아주 흐릿하게 줄라가 빅토르를 바라보고 있다. (여전히 하이 앵글이며, 인물들의 사이즈도 미디엄이다.) <콜드 워> 속에서 카메라의 과제는 그들의 틈에 인간들을 가득 채우고 작아지는 운명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카메라보다 뒤에 위치함에도 거울을 통해 비집고 들어오는.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시선이 있다. 그것은 어떠한 시선보다 크고 강하여 개인을 무색하게 만든다.

신-운명-카메라와 이데올로기-군상의 시선 속에서 그들은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빅토르는 먼저 줄라와 함께 이데올로기의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들은 파리로 망명하기로 한다. 하지만 줄라는 오지 않고 빅토르는 혼자 떠난다. 그리고 이제 매 시퀀스는 약 5초 간의 긴 블랙으로 단절된다. 영화에서 시간의 경과를 심리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디제시스​‡​ 상으로 몇 년의 시간이 지났다고 하더라도, 시퀀스와 시퀀스의 연결 속에서 우리는 그 긴 시간의 흘러감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2년이 지나고, 줄라가 악단과 함께 파리에 왔을 때 그들은 겨우 한 두시간 남짓 함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또다시 1년이 지나고, 빅토르는 유고슬라비아(사회주의 진영)에서 악단 공연을 보러 가지만 또다시 이데올로기의 손아귀에 의해 만남은 성사되지 않는다. 또다시 2년, 드디어 그녀가 이탈리아 인과 결혼해 파리로 넘어온다. 드디어 그들은 함께 사랑하고, 살아간다.

파리에서의 삶 동안 그들은 사랑하고, 살아간다. 질투하기도 하고, 다투며 서로에게 실망하기도 한다. 그들은 아직 신-운명-카메라와 (이데올로기-)군상의 시선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그러한 ‘일상’은 불안정하고, 위험하다. 자유주의 진영 프랑스에도 여전히 시선이 있다.

비록 시선의 위치는 낮아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존재하며 (당연히도) 그들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존재는 항구적이다. 그리고 그 시선 또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응시하는 눈들은 그들의 불화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사랑 싸움을 기다리고 있다. 줄라가 빅토르를 떠나 폴란드로 돌아간다. 빅토르는 이미 조국의 배신자가 되었기에 폴란드로 갈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운명을 거스르기로 한다. 혹은 운명을 따르기로 한다. 이데올로기라는 운명이 그들을 갈라놓지만, 그녀만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으며 의지적으로 나아간다. 빅토르는 밀입국을 하다가 실패하고 감옥에 갇힌다. 그리고 또다시 줄라는 (이탈리아 인과 결혼했던 것처럼) 그를 출소시키기 위해 카치마레크와 결혼한다.

폴란드에서 음악적으로 성공한 줄라가 관객들을 향해 노래할 때, 저 수많은 얼굴들이 초점 없이 뭉개진 채로 놓여 있다. 빛을 받은 채 반들거리는 그 얼굴들은 풍화되어버린 두개골의 형상이다. 더 이상 시선들을 참을 수가 없다.

빅토르와 줄라가 마지막 망명을 시도한다. 신-운명-카메라와 이데올로기-군상의 시선이 없는 곳으로. 운명을 벗어나겠다는 것. 그것은 오만한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만하지 않았다. 그들은 운명 앞에 그들의 사랑을 공고히 하고, 운명에게 그들을 이해해주길 부탁한다.

이 장면과 함께 키르케고르의 ‘신 앞에 선 단독자’가 떠오른다. 그들은 신-운명-카메라 앞에 서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다. 신이 그들을 새롭게 ‘단독자’로 창조한다. 그리고 그들은 동반 자살을 위해 수면제를 나눠 먹는다.

서로가 서로를 가장 사랑할 때, 가장 영원한 것(죽음)을 서로에게 주는 것. 운명에서 빗겨나가 서로에게 운명을 매다는 것.

최후의 쇼트가 있다. 줄라와 빅토르는 버스 정류장이라도 되는 듯한 벤치에 앉아 있다. 약 기운 혹은 자신들을 새로운 세계로 데려다줄 단 하나의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줄라가 빅토르에게 말한다.
─ 다른 쪽으로 가자.
그들이 화면 밖으로 프레임 아웃한다. 카메라의 시선은 최초로 그들을 쫓지 않는다. 벤치 뒷편의 들판에 바람이 인다.

신은 무엇이든 보고 계셔. 신은 늘 우리 곁에 계시고 모든 걸 알고 계셔.
대부분의 신 관념은 전지全知함, 우리 곁의 전능자임을 담지한다.

하지만 때로 그(녀)가 우리를 위해 고개 돌리고, 눈 감는다면,
그것이 조금은 더 자비로운 신이지 않을까요?

꽤나 아픈 채로 이 글을 썼다.


  1. ​*​
    카메라가 좌우 고정된 상태로 상하로 움직이는 것
  2. ​†​
    인물의 머리 위 공간, 일반적으로 한 뼘 정도의 헤드룸을 남긴다.
  3. ​‡​
    내부 서사

밤비
tpdyd8304@gmail.com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