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웰의 Mind and World(MW)를 중심으로

⎯ 세계와의 만남: 후기분석철학자들의 시선 (2)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empty하며, 형식 없는 직관은 맹목적blind이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J.  맥도웰은 현재 영미 철학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형이상학적-인식론적 주제가 상기한 칸트의 간단한 정식 속에서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순수이성비판』의 백미를 장식하는 위 정식은  칸트의 비판 철학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맥도웰이 주목하는 바는 단순히 칸트의 철학에 대한 탁월한 요약이 아니다. 맥도웰은 위 정식을 주의 깊게 탐구하는 것만으로도 셀라스 이후 분석철학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형이상학적 문제를 구마exorcise할 수 있다고 말한다. (MW, 8)

그 문제는 다름 아닌 “어떻게 우리가 행하는 세계에 대한 기술이 가능한가” 이다. (MW, xvii ) 어떤 발언이 세계와의 연관을 (어떤 형태로든) 갖지 않는다면 그 발언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따라서 세계와 관련 없이 무의미한 공회전revolving을 반복할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당화의 요구는, 우리가 세계와 만나는 가장 원초적인 지평인 감각sense이 애초에 개념적conceptual으로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왜냐하면, (맥도웰에 따르면) 개념적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 감각자료들은 우리의 판단judgment을 정당화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다. 맥도웰은 여기서 내용(혹은, 감각) 없는 사고가 공허한 “사고”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내용이 없는 곳에 공허한 사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용의 관여 없이는 사고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유thought는 언제나 감각 경험을 필요로 한다. 이는 감각이 단순히 비개념적인 데이터가 아니라, 그 자체로 개념적 내용을 지니고 우리 사유 활동에 구성적constitutive인 탓이다. 혹자가 감각은 비개념적이고 그것은 우리의 판단을 일으키는 원인으로서 인과적 관계만을 갖는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인과적 원인이 정당화의 근거와는 동치가 아니라고 대답해야 한다. (MW, xv) 따라서 신경화학적으로 이해된 감각 작용에 대한 고도의 이해도 인식론적 정당화를 제공해줄 수는 없다. (더멧Michael Dummett은 여기서 맥도웰과 충돌한다.)

감각은 세계와 우리의 유일한 접점이다. 이는 칸트가 비판 철학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준 바 그대로이다. 따라서 우리가 세계와 만나기 위해서는, 감각 경험이 우리와 세계를 이어주는 개념적 심급tribunal이어야 한다. 그러나 칸트는 그가 철학적 정언으로 채택한 초월적transzendental 방법론의 한계 때문에 감각 소여를 확실히 개념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따라서 맥도웰은 감각을 개념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선험성을 재정립revision하는 것이 Mind and World의 작업이며, 이를 통해 『순수이성비판』에서 의도된 비판 철학의 이상 또한 달성될 것이라고 자부한다.

소여의 환상과 자연주의적 오류

맥도웰은 Mind and World의 철학적 기획이 비판하고자 하는 철학적 문제들은 셀라스에게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고 말한다. (MW, xiv) 그는 셀라스가 제기한 소여의 환상Myth of the Given이 자신이 구마exorcise하고자 하는 주된 철학적 문제들의 심장부에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문제에 대한 답answer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마’한다는 맥도웰의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셀라스나 데이빗슨을 위시한 철학자들이 응답하고자 애쓰는 “어떻게 감각 내용이 가능한가?”, 혹은 “어떻게 우리는 세계에 대해 알 수 있는가?” 와 같은 인식론적-형이상학적 문제들은, 애초에 대답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현상에 대한 지독한 오해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MW, xiii) 맥도웰은 우리의 언어 사용이 이미 작동하고 있고, 세계에 대해 의미 있게 진술하고 있다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듯, “우리를 사로잡는 혼란들은 말하자면 언어가 일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헛돌고 있을 때 일어난다.”(『철학적 탐구』, 132절.)

요컨대, 우리는 “감각 내용이 어떻게 가능한가?” 를 묻기보다는, “우리의 언어 사용이 의미 있기 위해서, 다시 말해 세계에 대한 기술이기 위해서 감각은 어떠해야 하는가?” 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언어 사용은 이미 규범적normative이다. 인과 관계와 같은 자연적 요소로 언어의 규범성을 설명하려는 일체의 시도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맥도웰은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오류는 인식론의 오래된 고질병이기도 하다.) 맥도웰은 기존의 잘못된 철학적 문제제기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 자체를 기각하거나 적절하게 변형함으로써 인식론의 고질병을 고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셀라스는 소여의 환상을 통해 어떻게 “잘못 제기된” 문제들에 응답하는가? 그리고 이 응답은 어떻게 인식론과 형이상학에서 변주되어 왔는가? 맥도웰은 셀라스와 데이빗슨을 중심으로 이들의 주장을 최대한 칸트주의적인 용어들Kantian terms로 번역하고, 이를 통해  그들 각각이 어떤 인식론적 난관에 봉착하는지 선험 철학의 관점에서 진단한다[1]. 먼저, 셀라스는 일찍이 소여의 환상Myth of the Given 을 통해 우리 지식의 원천이 감각 소여에 있다는 입장에 강한 의심을 나타낸 바 있다. 앎에 대한 우리의 판단 근거는 감각 소여가 아니라, 이유들의 논리적 공간Logical space of Reasons에 위치한다[2]. 셀라스의 주장을 최대한 칸트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판단에 대해 감각 자체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반면 인간의 능동적인 사유 활동, 즉 지성이 판단을 정초한다는 것이다. 이유들의 논리적 공간은 인간의 경험 세계와 원칙적으로 구분되는 사유의 영역이다. 감각 소여와 사유의 경계를 나눔과 동시에 셀라스는 자연적 소여(대표적으로, 감각 경험)에서 정당화의 근거, 혹은 규범적 성질을 찾으려는 모든 시도를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로 규정하고 철학에서 추방하고자 한다.

데이빗슨Donald Davidson 또한 경험과 구별되는 이유들reasons의 영역에서 사유의 근거를 찾고자 한다는 점에서 셀라스의 문제 의식을 계승한다. “믿음의 근거는 오로지 또다른 믿음이다Nothing can count as a reason for holding a belief except another belief[3]”라는 그의 정식은 감각 경험 자체로부터는 판단은 물론 믿음 일반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우리의 믿음은 오로지 다른 믿음 체계로부터만 정당화될 수 있다. 합리성rationality으로 대변되는 데이빗슨의 철학은 이러한 믿음체계 간의 연쇄와 충돌을 기반으로 사유를 설명하는 전체론적 정합주의Holistic coherentism의 양상을 띤다. 여기서 감각 경험 자체는 믿음 체계가 덧씌워지는 대상이지, 그 자체로 언어를 “규범적으로” 정초할 수 있는 심급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데이빗슨은 칸트가 시도한 도식과 세계의 이원론The dualism of scheme and world을 경험주의의 세번째 독단으로 규정한다. 경험과 사유 간의 밀접한 관계를 정초하려는 모든 철학은 좌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셀라스에서 데이빗슨으로 (혹은, 콰인으로) 이어지는 이러한 인식론의 흐름에 대하여 맥도웰이 제기하는 문제의 핵심은 단순하다. 지식이 세계와 주체 사이의 연관에서만 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철학은 주체가 세계와 갖는 관계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불충분한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MW, 60)  소여의 환상은 이유들의 논리적 공간에 주체를 침잠시킴으로서 우리의 지식이 “어디서 오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혹은, 지식의 출처를 세계가 아니라 주체에 한정시킴으로서 정당화에 대한 요구를 매우 불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충족시킨다. 마찬가지로, 데이빗슨 또한 감각 내용을 단순히 수용적receptive인 것으로만 파악하고, 그것에 갖춰진 개념성conceptuality 을 거부함으로써 경험과 판단 간의 긴밀한 연관을 파악하지 못했다. 여기서 데이빗슨은 경험적 의미Empirical significant를 감각 수용체Neuro-physical receptors의 자극에 한정시킨 콰인과 궤를 같이 한다. 두 철학자 모두에게서 세계에 대한 해명은 달성될 수 없다. 그들의 철학에서 주체의 판단은 주체 내에서 맴도는 순환을 이루지, 세계에 대해 정향될directed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맥도웰의 “개선된” 선험 철학

칸트에 대해 맥도웰이 행하는 비판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1) 우리의 언어, 혹은 개념 사용을 무리 없이 정당화하는 동시에 (2) 감각을 비개념적인 것으로 상정할 수 있는가?” 맥도웰은 (2)를 전제하면서 (1)을 보여주는 것이, 최소한 선험 철학 내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감각은 개념적으로 구성되어 있어야만 한다. 감각이 애초부터 개념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자신의 입장의 논쟁적 측면을 내다본 맥도웰은, 다양한 설명을 통해 자신에게 기대되는 반론들에 응답한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1) 관념론idealism의 혐의, (2) 정당화 문제, 그리고 (3) 동물과의 차이이다. 맥도웰은 상기한 세 반론에 대해 모두 독창적인 응답을 내놓음으로써 자신의 입장이 철학적으로 큰 무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칸트적이라고 주장한다.

첫째로, 맥도웰의 철학은 (1) 관념론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다. 여기서 관념론이란, 주체의 관점에서 세계를 주조하는 철학적 태도를 의미한다. 우리의 경험 일반에서 주어지는 감각 내용 자체가 이미 개념적이라는 맥도웰의 주장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관념론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는 자칫 세계 자체가 우리의 개념체계를 따르고 있다는 플라톤적 이상주의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맥도웰은 자신의 제안하는 개선된 칸트주의Revised Kantianism가 관념론과는 엄격히 구별된다고 단언한다. (MW, 26-28) 일반적으로 관념론은 주체와 유리된 세계에 주체의 사유 구조를 투영project하는 독단의 일종인 반면, 자신의 개선된 칸트주의는 칸트가 제시한 선험 철학의 정신을 정확히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맥도웰이 주장하는 바는 ‘세계와의 접점인 경험에서 우리의 개념 작용이 이미 작동하고 있다’이지, 우리의 경험 바깥의 세계가 개념적이라는 것이 아니다. ‘개선된 칸트주의’는 경험의 영역을 넘어가지 않으면서 세계와의 연관을 정립하려는 선험 철학적 기투이다. 여기서 경험은 주체와 세계의 만남의 장소이며, 세계가 자신을 주체에게 개방하는 곳이다. (MW, 116) 맥도웰은 자신의 대안이 주체와 세계의 ‘관계’를 탐구하는 것이지, 주체와 유리된 어떤 세계상을 그리는 것과는 구별된다고 말한다. 후자가 극단적 플라톤주의Rampant Platonism라면, 전자는 자연화된 플라톤주의Naturalized version of Platonism라고 맥도웰은 말한다. 자연화된 플라톤주의는 사유 행위Act of thought와 사유의 영역Sphere of thought을 구분한다. 전자가 인간의 의식적인 활동인 Thinking이라면, 후자는 사유 가능한 것들The Thinkable의 총체적인 영역이다. 맥도웰이 감각은 개념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때에, 그는 감각 내용을 사유 가능한 것들의 지평으로 끌어오고자 하는 것이다. 맥도웰은 자신의 선험 철학이 감각 경험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서도 감각 안에서 사유 가능성을 획득한다고 말한다. 자연화된 플라톤주의에서 주체는 다음과 같이 자부한다:  “사유 안에서 나는 자유롭다. 왜냐하면 나는 다른 것the other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4]

둘째로, 맥도웰은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사적 언어 논증private language argument을 통해 자신의 대안이 적용할 수 있는 정당화의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한다. (MW, 18-23) 사적 언어 논증은 통상적으로 언어의 공약성에 대한 회의주의로 해석되었다[5]. 더 정확히, 그것은 우리 언어의 공유되고 일반적인 의미 내용이 없다는 주장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맥도웰이 사적언어 논증에서 주목하는 것은 사적 언어의 사용자들이 수행하는, 일종의 “사적인 정당화”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특정한 색깔을 보고 ‘빨간색’ 이라고 인식했다고 해보자. 물론, “빨간색”이라는 단어를 공유하는 다른 이들은 그 사람이 본 빨간색을 정확히 공유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 사람이 사용하는 “빨간색”은 일종의 사적인 언어 사용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람이 빨간색을 본 경험이 비개념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사람은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 빨간색[6]”이라고, 자신이 봤던 빨간색을 기억해낼 수 있다. (MW, 48) “빨간색”이라는 단어가 그 경험을 완벽하게 다른 사람에게 공유해 줄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경험의 주체는 “나는 빨간 색을 봤다”라는 판단을 별 무리 없이 정당화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일반적 의미의 정당화는 아닐 것이다) 맥도웰은 이를 통해 우리의 경험 내용 자체가 개념적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개념적conceptual임은 술어적predicative 이지않고, 프레게G. Frege의 의미 이론에 가깝다고 맥도웰은 명시적으로 밝힌다. (MW, 107)

마지막으로, 감각 내용이 이미 개념적이라면, 감각 경험을 수행하는 인간 이외의 동물들 또한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냐는 물음이 개선된 선험 철학에 제기될 수 있다. 맥도웰은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등장하는 관습Habit의개념을 끌어온다[7]. 맥도웰이 보기에 인간의 개념 구조는 학습을 통해 습득된다. 더 정확히는, 그것은 공동체 내에서의 전통tradition을 기반으로 한 훈육에 의해 갖춰지는 것이다[8]. 인간은 유아 때는 동물과 다를 것이 없지만, 전통에 의한 관습의 체득을 통해 동물과는 다르게 ‘사유’가 가능해지고, 이는 인간의 경험 내용 또한 변화시킨다. 사유하는 인간에게 모든 경험은 단순한 자극-반응이 아니라, 개념적으로 구성된 경험 내용의 연속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사유 방식, 혹은 개념구조는 선험적a priori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득적이지는 않다. 인간은 전통 안에서의 훈련과 경험을 통해, 자신의 경험세계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는 물론 후천적인 변화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선험적이지 않다고 할 이유는 없다. 전통을 습득한 인간이 마주하는 경험 내용은 세계 자체가 인간에게 걸어오는 말걸음이라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동물은 세계를 지니지 않는다.” (MW, Lecture VI) 인간의 경험과 동물의 경험은 결이 다르다. 동물은 환경environment 내에서 생존과 번식을 도모하는 반면, 인간은 세계의 말걸음에 주목한다. 인간이 동물에서 벗어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생각하는 동물’로 성장하는 과정을 맥도웰은 “Bildung”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제 2의 천성Second nature”이라고 정의한 관습, 혹은 그 안에서 이뤄지는 인간의 도야를 의미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제2의 본성에서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찾는다.

세계에 대한 적합한 기술은 어떻게 가능한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전개되는 칸트의 감성론은 이중적이다. 칸트는 직관intuition이 단순한 자극-수용 반응과는 구별되는, 다시 말해 오성에 의해 개념이 부여될 수 있는 일종의 준 개념적 대상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다른 때에는 개념과는 상관없이 그저 “잡다한” 무엇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9]. 맥도웰은 이러한 칸트의 이중적인 태도를 정확히 파고든다. 칸트의 감각에 대한 애매한 태도가 철학자들로 하여금 감각과 이성을 매개하는 소여에 대한 믿음인 즉 소여의 환상Myth of the Given과, 판단을 감각 경험으로부터 유리시키는 합리적 정합주의Coherentism of rationality 사이에서 양자택일하도록 강요했다는 것이다. 전자는 세계와의 연관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아니며, 후자는 주체와 세계의 철저한 분리를 전제한다. 맥도웰은 관념론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서 주체의 마음과 세계의 연관을 해명해야 하는 선험 철학의 정신에 비추어 볼 때, 두 선택지 모두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칸트에 대한 올바른 해명과 개선revision은 감각 경험에 개념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판단과 경험 간에 이성적 관계rational relation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경험으로부터의 정당화 가능성이 소명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처럼 칸트 철학의 한계를 돌파하고자 하는 맥도웰의 기획에서 감각의 개념적임conceptuality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맥도웰에 따르면, 개념적인 감각 내용만이 소여의 환상에 빠지지 않으면서 주체와 세계의 관계를 정당하게 설정할 수 있게 해준다. Mind and World에서 맥도웰이 세계와의 관계에서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고 보는 바는 크게 두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로, 우리가 세계에 대한 기술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언어의 의미 내용이 보장되어야 한다[10]. 다시 말해, 우리의 언어 사용이 대상-세계에 지향적으로 정향되어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의 언어 사용은 규범적normative이어야 한다. 맥도웰은 언어의 ‘규범적임’을 ‘그것의 의미 내용이 명확하게 있음’으로부터 따라나온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가 언어의 규범성을 따로 강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맥도웰이 인간의 제2의 본성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Bildung은 이러한 규범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인간은 공동체와 그것의 전통 속에서 언어 사용과 개념성conceptuality을 선험적으로 습득한다. 전통 속에서 얻어지는 인간의 이성이 규범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것은 당연해보인다[11].

상기한 두 가지 요소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감각의 개념적임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의 언어가 의미 있는 진술이기 위해서, 혹은 우리의 언어 사용이 규범적이기 위해서는 개념적으로 구성된 감각 내용으로부터 우리의 판단이 정당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언어의 의미 내용과 규범성에 대한 요구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주체와 세계의 관계를 재정립하도록 만든다. 주체는 애초에 감각에서부터 세계와 이성적 관계를 맺고 있다. 이것을 선험적으로 확증하는 것, 당연한 인식론적 전제로 설정하는 것이 바로 Mind and World에서 맥도웰이 의도하는 바이다.

4. 나가며: “… 감각은 잡다하지 않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우리는 사실fact이 없는 곳 어디에도 있지 않다. 우리는 단지 의미한다: 이것은-이러하다-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95절.

이 명제는 실로 단순하지만 심오한, 어쩌면 『철학적 탐구』에서 보여지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핵심적인 통찰을 요약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바에서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미’란 인간이 세계-독립적으로 부여하는 유아론적 언어 게임이 아니다. (크립키의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가 마치 이러한 자폐적 말 놀이를 벌이는 듯한 이미지를 덧씌운다. 크립키의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맥도웰과 라이트C.Wright의 탁월한 비판을 참조하라.) 오히려 의미가 의미이기 위해서는 ‘그것이-그러하다this is such and such’는, 즉 그 말이 대상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볼때,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언어 사용이 요구하는 주체와 세계의 실재적 연관에 대해 통찰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물론, 그러한 연관이 맥도웰의 주장대로 실현되어야 하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우리의 의식이 작동하지 않는 감성계에서 이미 감각 내용이 개념적conceptual이어야만 세계에 대한 우리의 정당화가 가능한 것인지는 아직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덧붙여, 이 개념적임conceptuality의 정확한 정의에 대한 맥도웰의 해명도 Mind and World의 논의만으로는 부족한 듯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철학적 탐구』와 『순수이성비판』에서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는 (크립키는 『철학적 탐구』를 그렇게 읽지 않겠지만) 세계에 대한 실재론적 관심은 우리로 하여금 맥도웰이 제시하는 개선된revised 선험철학을 더욱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세계는 과연 우리의 지성이 그러한 것처럼 개념적인가? 이미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직관은 잡다하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세계를 사유하고자 애쓴, 우리에게 친숙한 자연 철학자인 들뢰즈G. Delueze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칸트의 감성론을 언급하는 짤막한 챕터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 감각은 잡다하지 않다 … 그것은 이미 의미로 넘쳐난다.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1]여기서 맥도웰은 자신의 개선된 선험 철학이 칸트 이후 인식론을 지배해온 철학적 불안을 해소하고, 철학에 평안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말한다. (MW)

[2]Sellars, Empiricism and the Philosophy of Mind

[3]D. Davidson, A Coherence Theory of Truth and Knowledge

[4]G.W.F Hegel, Phenomenology of spirit

[5]S.Kripke, Wittgenstein on rules and private language. 맥도웰은 크립키의 비트겐슈타인이 지니는 일종의 회의주의적인 태도에 대해, 그것이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진정 의도한 바인지 강하게 의심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MW 92-93 참조.

[6]여기서 맥도웰은 지시 대명사 that 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 빨간색이라는 지시 행위는 정확히 주체의 빨강-경험을 지시한다. 이러한 지시를 통해 주체는 자신의 원초적 색깔 경험이 명백히 개념적임을 확인한다. 러셀의 기술 이론과 대비하여 생각해보라.

[7]Nicomachean Ethics 6.13.

[8]맥도웰은 가다머를 지속적으로 인용하면서, 전통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진리와 방법에서 가다머는 주체의 판단이 그 상황과 연관된 선이해pre-understanding 속에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선이해는 주체가 속한 공동체의 전통에 의존한다. 맥도웰은 주체가 경험을 통해 받아들이는 감각내용이 개념적conceptual으로 구성되는 데에는 전통과 관습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인정하면서 가다머와 궤를 같이한다. 물론, 이는 특정한 믿음 체계로서의 전통이 주체의 판단에 관여한다는 측면보다는, 전통을 통해 습득된 주체의 개념 능력 자체가 경험에 작동하고 있고, 이것이 세계를 개방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전통은 인간을 세계와의 만남으로 데려다 준다고 하겠다.

[9]맥도웰은 칸트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들을 언급하면서, 이들 해석이 칸트가 <비판>에서 보여주는 세계에 대한 관심을 외면한다고 비판한다. <MW> 이는 리케르트Rickert, Heinrich의 신칸트학파에 대해 후설이 (동시에, <존재와 시간> 이후의 하이데거가) 가한 비판과 궤를 같이한다. E. Husserl – logical investigations 참조. 맥도웰과 후설은 모두 <비판>을 심리학적인 철학 체계로 해석하려는 일체의 시도에 반대하면서, 이러한 시도들이 칸트의 ‘세계’에 대한 실재론적 관심을 은폐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맥도웰과 후설 모두 칸트가 ‘불가지론적 실재론’ 에 머물고 만다는 점을 또한 비판한다는 점, 또한 칸트의 불가지론적 실재론이 지니는 철학적 함의를 하이데거가 적극적으로 변호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M. Heidegger, Kant and problems of metaphysics 참조.

[10]맥도웰은 그의 다른 저서에서 크립키의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의미 내용을 의심하는 회의주의를 받아들인다고 비판한다. 다시 말해, 언어의 의미내용에 대한 회의론적 입장은 크립키가 받아들이는 것이지, 비트겐슈타인이 <탐구>에서 실제로 관심을 두는 바는 아니라는 것이다. 브랜덤R. Brandom 도 마찬가지로 크립키의 비트겐슈타인이 의미 내용 자체를 철학에서 지워버리는 것에 불만을 표한다. (MIE)

[11]필자는 여기서 브랜덤R. Brandom과 맥도웰이 언어의 규범성에 대해 의견을 같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브랜덤은 Making it Explicit에서 언어 사용자들 간의 동의 여부에 따른 점수기록 모델을 제시한 바 있다. 사용자들의 점수를 기록하는 행위는 언어 사용의 의미 내용과 규범성을 모두 보장한다. (MIE) 맥도웰에게서 언어의 의미 내용은 선험 철학의 탐구에 의해서 획득되는 것이지만, 그것의 규범성 만큼은 전통을 공유하는 구성원들의 언어 사용에 의존한다고 추론할 여지가 다분히 있다. 맥도웰에게서도 언어 사용은 전통 속에서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맥도웰이 명확하게 언어 사용자들의 반성적 피드백이 언어의 규범성을 정초한다고 Mind and world에서 말하지는 않는다.

하니
marks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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