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산다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시절입니다. 실상 ‘잘 산다’는 말의 의미 자체가 ‘흔들리는’ 시대입니다. 아마도 이 말은 문자언어로 적히기 이전에, 입에서 입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잘 살기’와 ‘잘살기’의 의미를 오가며 진동하는 듯합니다.

부사 ‘잘’은 맥락에 따라서 여러 다양한 뜻을 갖는데, 표준국어대사전의 뜻풀이를 참조할 때 다음과 같이 크게 둘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1) 옳게, 바르게, 좋게, 훌륭하게, 정확하게, 분명하게, 적절하게, 알맞게.
(2) 익숙하게, 능란하게, 편하게, 순조롭게, 수월하게, 쉽게.

말하자면 우리의 입말에서 ‘잘 산다/잘산다’는 말의 의미는 올바르고 훌륭하게 산다는 것 혹은 쉽고 편하게 순조롭게 산다는 것의 사이 어디쯤에서 진동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수월한 삶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평균적인 ‘경제적’ 생활 수준은 수십 년간 분명히 개선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절대적) 빈곤에 처한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뿐 아니라, 계급은 물론이고 젠더와 인종 등의 사회적 차이에 기반하여 작동하는 차별과 억압에 처한 이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사실로부터 고개를 돌릴 순 없습니다.

어떤 이들에게 삶은 생존(살아남았다는 것/살아남는다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정확히 삶이 생존이 될 때 — 즉  폭력이 할퀴고 간 뒤 가까스로 살아남았을 때 혹은 살아남기 위해 고되고도 반복적인 생활 속에 갇힐 때 — 삶은 수월한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동시에 탁월한 삶으로부터도 멀어지고 맙니다. 오늘날 ‘잘 살기/잘살기’가 처한 위기는 정의롭고 탁월한 삶도, 최소한의 수월하고 평온한 삶도 곤란에 처하고 말았다는 이중의 위기입니다.

‘잘 산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 지면을 통해 고민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생존이 가능하게, 용이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단지 목숨이 붙어 있는 상태를 연장한다는 것 이상의, 이 삶과는 다르고도 더 나은 삶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 이것을 정치적 상상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는 체제와 이념들을 놓고 저울질하는 정치, 정의에 관해 말하는 정치를 구성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조건이라는 점에서, 이미 정치 자체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고민은 아마도 ‘실존’ — 이 말의 엄밀한 철학적 의미에서라기보다는 다소 넓은, 문학적인 의미에서 — 의 문제에 닿아 있는 동시에 정치의 문제에 닿아 있을 겁니다. ‘실존’과 ‘정치’가 맞닿아 있는 지점에 서서, 가장 미시적이고 세밀한 억압과 차별의 작용을 따져보는 일, 그렇게 멀리 우회하여 끝에는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일이 필요하고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습니다.

어려운 작업일 겁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물음은 익숙해진 보통의 상태를 문제삼고 제동을 거는 것을 넘어, 그런 비판 과정에서 흔히 재생산되는 ‘억압하는 주체와 억압받는 대상’, 즉 ‘국가나 자본 및 그것들과 결부된 이데올로기나 제도 등의 구조와 그 구조에 의해 지배되는 개인’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도를 통한 정치 사유의 시효가 만료되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폭력은 삶에 외재적이지 않다”는 단현의 말은 바로 이 지점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무심코 (우리를 살게 하는) ‘구조’에 연루된다는, 그래서 그 누구도 마냥 ‘결백’하지는 않다는 감각. 그 감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새로운 필진 운우가 합류했습니다. 우리 섹션은 이제 단현, 유채, 운우 세 저자가 꾸려나갑니다. 아울러 섹션을 신설할 당시 임의로 붙여 놓았던 다소 긴 이름(‘삶이라는 활시위, 아름답고 정치적인’)을 좀 더 부르기 편한 짧은 이름으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삶을 정치하기’라는 이름으로 간판을 바꿔 달며, 여기에서 ‘다시-가동하게’ 될 글쓰기의 방향에 대해 생각합니다.

삶에 관해서 되묻는 일이 어떻게 윤리 혹은 정치에 관해 말하는 일일 수 있는지, 혹은 (결국 같은 말이지만) 윤리 혹은 정치에 관해 말하는 일이 어떻게 삶에 관해서 되묻는 일일 수 있는지에 관해 쓰려 합니다. 넓고도 세밀한 시야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시즌에 걸쳐 제기된 중심 물음을 가지고 적어도 약 반 년간 글쓰기를 이어 나가고, 적절한 때에 물음을 바꾸어 그 다음 시즌으로 넘어가는 식으로 섹션을 운영하려 합니다.

첫 번째 시즌의 물음은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우리 사회에 밀착해 있습니다. 재난 상황에서의 국가 장치의 대응이 포섭과 배제의 체계에 의해 작동한다는 것, 이 과정에서 고유한 삶은 동일자적인 숫자로 계량된다는 점은 이제 말하기마저 새삼스럽습니다. 이에 더해 우리는, 사실은 이미 일상적인 것이었던 혐오가 비상사태를 빌미 삼아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상황을 목도했습니다. 예외 상태, 일시적 유예는 머지않아 일상과 항상의 영역으로 침투하게 될 겁니다.

비상은 어떻게 일상을 필요로 하며 일상은 어떻게 비상을 필요로 하는가. 단지 국가 장치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영역에서 비상의 일상화일상의 비상화와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특정한 가치 혹은 삶의 양태를 유예하고 배제하는가. 그리고 비상과 일상의 공모 속에서 생존은, 혹은 ‘더 나은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혹은 가능하기는 한가). 비상사태가 배제함으로써 포섭하는 일상의 양태들에 관한 이 물음들을 가지고 논의를 주고받으며, 첫 발을 내딛습니다.

단현
danhyun012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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