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미지. 2019. 《Mother and Lover》.

문제는 우리 모두가 여성의 몸속에 있다가 태어났다는 사실이 아니다.
우리 모두 태어나자마자 여성에게 의존했다는 사실이다.
여성에게 한때 의존했다는 당혹감은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잔존한다.

도널드 위니캇

“Just find me”

올해 6월 발매된 천미지의 데뷔 앨범 《Mother and Lover》는 온통 축축하면서 난폭한 욕망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간단한 구조의 영어 문장(혹은 제 열기를 이기지 못해 문장이 되기 전에 터져 나온 구에 가까운 것)들로만 이루어진 가사는 다소 헛웃음이 날 정도로 직설적이고 때로는 원색적이다. “put you into me, die in me”를 몇 번이고 반복하는 그의 포효는 ‘뭐야, 이 사람, 진심인가?’ 싶은 (즐거운) 당혹감만큼이나,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을 정도로 길티(guilty)한 이 노래의 제목처럼 의미심장한 짜릿함을 가져다 준다. 노래의 제목은 〈I Want To Be Your Mother〉. 심지어 노래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put you in to me, die in me, where you were born”.

진정한 사랑을 찾아 어딘가를 헤메는 한 ‘미친 여자’가 자신을 만족시킬 누구도 나타나 주지 않으며/않을 것이며 그에 앞서 자기 자신부터가 누군가를 만족시키기에 역부족인 현실​*​에 앙심을 품고는 이렇게 외친다. “Show me your love or you will be dead”(〈Searching For Lovers〉). 다음 트랙에서 그녀는 사랑하는 이의 팔을 총으로 쏴 빨갛게 물들이고는 난데없이 초록색 들판을 데굴데굴 구른다. “Green hills/Green hills/Rolling Green hills/Let’s roll Let’s roll/Let’s roll forever”(〈My Satisfiable Baby〉). 이 미친 여자의 욕망이 낯설고 두려운가? 그렇다면 다음의 구절은 당신을 향한 것이다. “Don’t be scared of me”, “Just find me”(〈Don’t Be Scared〉).

직설적인 음악 속에서 제 헐벗은 정체를 숨기지 않는 욕망의 상(象)은 날카롭고 선명한 정념의 파편들이 벼려지고 쌓여 완성되어 갈수록 더욱더 의문스럽고 낯선 것으로 종합되고 불명확한 형태로서 포착된다. 그녀가 보여주는 이 낯선 욕망의 풍경이 당신에게 두려움뿐만 아니라 그 두려움을 압도하는 매혹으로 다가왔다면, 당신 또한 자신을 찾아 달라는 그녀의 요청(“Just find me”, 〈Don’t Be Scared〉)에 응답하게 될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시작하게 되었듯이.

Girls

이 앨범은 크게 앞서 언급한 거칠게 자신의 정념을 폭발시키는 곡들(〈Searching for Lovers〉, 〈My Satisfiable Baby〉, 〈I Want To Be Your Mother〉, 〈Don’t be Scared〉)과 뒤이어 언급될 축축하고 어두운 그러나 향수 어린 기억을 회상하는 듯한 잔잔한 곡들(〈Love Song〉, 〈Wet Kitty〉, 〈Girl〉, 〈도피〉)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두 축은 언뜻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단지 무관한 채 나란히 놓여 있는 것만은 결코 아니다. 앨범명 《Mother and Lover》의 ‘Mother’와 ‘Lover’를 ‘and’라는 간명한 접속사를 통해 연결해낸 직관력의 강렬함만큼이나 두 축은 서로를 작동하게 하는 동력으로서 강하게 연관되어 있다.

첫 트랙 〈Love Song〉은 앨범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사랑의 원형을 그린다. 곡의 앞부분에 삽입된 빗소리와 그에 어우러지는 노이즈, 그리고 약간의 울림과 함께 레코딩된 보컬은 과거 혹은 유년으로부터 발신된 메시지의 인상을 주며 금세 웅크린 소녀와 그녀가 자리한 비 오는 방의 풍경을 불러낸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그 소녀는 기다림이라는 행위와 어울리지 않는 체념의 정서를 품은 채 사랑이 무엇인지를 나지막이 노래하는데, 그녀에게 사랑이란 의식(“ritual”)과 같은 것이다. 그 의식은 짧은 꿈(“daydream”)처럼 잠시 찾아온 누군가가 이내 ‘영원히’ 떠나버리는 것이며 그것은 그녀에게 매우 명백한(“obvious”) 과정일 뿐이다. 자신이 이 의식의 무한순환에 갇혔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의 태도는 슬프게 담담하고, 연인을 자유롭게 해주겠다는 결의(“I’ll let you free my lover and Never come back to me”)는 담담한 것을 넘어 의연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연약하고 불안한 음조 속에서 반복적으로 읊조려지는 결의란 아무래도 의연함이라기보다 지옥-보다 끔찍한 외로움-속에 갇힌 자기 자신을 구하는 제의(ritual)에 가까울 테다. 소녀가 주문‘처럼’ 반복해서 외우는 노래는, 어쩌면 ‘정말로’ 주문이다.

기다림을 포기한 채로 기다리는 사랑을 반복하는 〈Love Song〉의 사랑 모델은 그 기다림이 가운데에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지 않고 사랑의 주변부를 뱅글뱅글 맴도는 의식을 치르며 사랑의 상처가 태어났던 시공간을 아주 흐릿하게만 소환한다. 앨범은 후반부로 전개되며 이 흐릿한 시공간에 〈Love Song〉의 사랑 모델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이는 한 인물을 점차 구체적으로 영사하는데, 그 인물은 뜻밖에 공포스럽고도 매혹적인 분위기를 지닌 어린 여성이다. 〈Girl〉에서, 어둠 속에서 나(I)를 내려다보는 고압적인 그녀의 태도(In darkness what I saw was her face looking down on me)와 절대로 울지 않는 그녀(She never cried in front of me)의 강인함과 신비로움은 나를 압도한다. 나는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증오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사실 벗어나기 힘든 묵직한 애증의 고백일 뿐, 그녀는 내 삶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서 그녀 이후에 체험되는 모든 사랑의 방식을 지배하고 있는 자이다(The girl you most hated in the world will be the most important in your life).

이 매혹적인 여성, ‘the girl’의 정체는 사실 나의 엄마다. 〈Girl〉이 아스팔트 위를 일렁이는 아지랑이처럼 천진하고도 어지러운 선율 위로 불러내는 시공간은 뜨거운 한여름의 유치원이다. 혼자 유치원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나는 나와 그녀가 이 여름처럼 뜨거운 여름에 처음 만났다는 것을 곱씹는데, 단순히 자신의 ‘출생’에 불과한 것을 이다지 낭만적으로 술회하는 그녀의 행위는 기묘하고도 의미심장하다. 엄마를 낭만적 사랑의 사적 모델의 중심에 두고 광기 어린 목소리로 폭주하는 이 앨범의 욕망, 그리고 허기진 슬픔은 Mother(엄마)와 Lover(성애)를 한데 묶어내는 데 성공한다.

이쯤에서 떠오르는 텍스트가 하나 있다. 바로 《Mother and Lover》 발매보다 3개월 앞선 3월에 한국에서 출간된 앨리슨 벡델의 그래픽 노블 『당신 엄마 맞아?』가 그것이다.

퀴어 바깥의 퀴어

정신분석 이론의 용어들이 내걸린 각 장의 소제목들이 보여주듯, 이 책에는 백델이 어머니와 자기 자신의 애증적인 관계를 들여다보고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정신분석 이론을 깊이 탐구한 흔적이 남아 있다.

성인이 된 후부터 불명확한 불안과 우울 증상을 겪게 된 백델의 곁에는 십 년이 넘도록 그 증상의 핵심인 모녀의 애증 관계를 치밀하게 받아쓰는 두 명의 여성 정신분석가 조슬린과 캐롤이 함께다. 백델은 ‘여자아이의 성기를 깨끗이 닦는 의사’ 그림을 일부러 엄마가 볼 수 있는 곳에 숨겨두었던 기억, 엄마가 매일 밤 기다리던 굿나잇 키스를 더는 해 주지 않게 되었을 때의 기억 등등을 모조리 불러내며 천미지와 같이 Mother와 Lover 사이를 서서히 and로 연결하게 된다. 돌연 발작적으로 자신의 과거를 받아쓰는 상담사들에게 성애적 애정을 갈구하기도 하면서.

Mother와 Lover로 채 분리되지 않은 채 그들 심연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소녀(Girl)로부터 시작된 이 두 이야기는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하지만 이 질문에 대답하기보다는, 왜 내가 이 두 이야기 사이의 같고 다름을 엄밀히 논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불안은 분명 다음과 같은 사실에 영향을 받고 있다; ‘Lover’를 다루는 축에 놓인 천미지의 곡들이 형상화하는 욕망의 대상은 모두 남성으로 드러나고 있다; 반면 앨리슨 백델은 잘 알려진 대로 레즈비언이다.

『성의 역사 3 : 자기에의 배려』에서 푸코는 성적 관계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무의식을 성적인 꿈을 분류하고 해석한 아르테미도로스의 《해몽의 열쇠》로부터 찾아낸다. 아르테미도로스는 근친상간의 꿈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분석한다. 1) 아버지와 어린 아들의 근친 관계, 2) 아버지와 장성한 아들의 근친 관계, 3) 아버지와 딸의 근친 관계, 4) 어머니와의 근친 관계.

눈여겨볼 만한 지점은 아르테미도로스 본인은 부모와 자식 간의 근친상간을 제외하고는 다루지 않겠다고 말하긴 했으나 남매 간의 근친상간을 3) 아버지와 딸에 포함시키며 사실상 다뤄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어머니와의 근친 관계는 아들과 딸로 분리되어 다뤄지지 않으면서도 당연하게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인 것으로서 다뤄진다. 즉 아르테미도로스의 책에서는 여성 간 근친상간적 관계의 가능성이 완벽하게 지워져 있다. 근친상간적 욕망이 비도덕적이고 무익한 것으로 의미화되는 동안 여성들 간의 관계는 고려되지도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았다.

근친상간적 욕망을 사회적 성애의 규범을 이탈한 일종의 퀴어한 욕망으로 볼 때, 퀴어라는 주변화된 영토에서 다시 한번 배제된 여성인간의 욕망을 가시화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나의 이 질문을 ‘우리가 할 일이 남아있다니, 그나마 다행 아닌가?’ 식의 희망찬 것으로 오독하지 않기를 바란다.

퀴어는 정상성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다. ‘성소수자’와 ‘퀴어한 욕망’이 각각 엄연히 다른 것을 지시하고 있으며 후자가 전자와 ‘똑같이 배제되어 있다’고 말하기 이전에, 아버지와 딸 그리고 엄마와 아들 사이의 근친상간에 대한 욕망/비유/도식이 얼마나 이성애-정상성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는지, 또 성적인 것을 완벽히 억압하는 식으로 유지되는 남성들 간의 동성애적인 연대(호모소셜homosocial)가 얼마나 권력의 중심에 자리해 있는지, 그리고 그런 것들에 대한 비밀이 얼마나 은폐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

여성으로부터 여성의 애착 유형과 성애적 욕망의 구조가 결정될 수 있다는 단순하고 당연한 이야기가 갖고 있는 퀴어한 에너지에 제 자리와 언어를 찾아주기 위해 그 여성이 ‘어떤 성기와 섹스할 수 있는 여자로 자라났는가’를 중심에 두고 그 에너지의 자리를 단지 이성애자/퀴어 여성이 갖고 있는 진화론적 역사의 태초로 표박해 둔 채 ‘동일한’ 출발점으로부터 도착한 그들의 ‘구분되는’ 현재 사이의 경로를 합리적으로 구상하는 데 최선을 다하게 된다면 그건 굉장히 억지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기존의 퀴어 범주 하에 막 새롭게 터져나오기 시작한 이상한(Queer) 이야기들을 욱여넣으려 하는 것은 여성 간 근친상간적 꿈의 존재하지 않는 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아르테미도로스의 목록들 사이를 방황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나는 천미지와 백델의 이야기 모두를 ‘레즈비언’이나 ‘근친상간’ 따위의 기존 퀴어 범주 바깥에 있는 퀴어한 것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작품이 변태적 욕망의 선정적 전시가 아니라 무엇보다 과거의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두 여성 예술가의 용감한 자기 고백인 이상, 이 두 이야기에서 ‘각각’ ‘이성애자 여성의 욕망에 내재한 바이섹슈얼한 본성’과 ‘레즈비언 욕망의 정신분석학적 기원’을 읽어낸다면 그건 트라우마를 치유의 대상이 아니라 각종 병리적 증상들의 영구적 제일원인으로 도식화한 남성중심적인 정신분석학의 방법론과 다를바 없을 것이다.

내가 단지 짚어두고 싶은 것은 정신분석 모델의 모든 애착은 유년기의 절망과 슬픔, 그리고 사랑에 대한 ‘금기’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금기는 사랑하고 욕망하는 모든 이가 공통적으로 경험한 바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여전히 결핍의 형태로, 허기진 욕망의 형태로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금기시된 욕망’을 가진 이들을 굳이 이해할 필요도, 이해하지 못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금기시된 욕망’은 사랑과 욕망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사랑과 욕망이 태어나는 출발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패한 놀이

처음에, 나는 〈I Want To Be Your Mother〉을 프로이트의 성에 대한 두 번째 에세이 「Female sexuality」에 완전히 기대어 해석하려 했다. 그 에세이에서 프로이트는 유아의 성별에 상관없이 양육을 주로 담당하며 아이와의 깊은 애착을 형성하는 것이 어머니, 즉 여성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남아이건 여아이건 간에 첫 애착의 대상은 여성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기를 거치면서 여아의 애착 대상이 어째서 아버지, 즉 남성으로 바뀌는지에 대해 프로이트는 멜라니 클라인이 주로 사용했던 분석 기법인 놀이 기법(play technique)을 활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낸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자신이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겪어온 수동성을 능동성으로 전환하는데, 예컨대 무기력하게 의사의 손에 내맡겨져 있었던 진찰의 경험을 ‘의사 놀이’를 통해 자신이 의사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능동적인 방식으로 재경험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즐겨 하는 ‘가족 놀이’ 혹은 ‘엄마 놀이’에서는 무력한 아이로서 여아가 갖고 있던 수동성이 엄마의 능동성으로 전환된다. 여아는 남아와 같은 방식의 ‘비정상적인’ 콤플렉스(positive oedipus complex)에서 비로소 긍정적인 혹은 ‘정상적인’ 콤플렉스(negative oedipus complex)의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이 논리를 받아들이자면 직설적이고도 난해한 〈I Want To Be Your Mother〉가 말하고 있는 것이 어느 정도 분명히 드러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천미지는 연인인 남성과 ‘놀이 기법’을 수행함으로써 과거에 자신이 어머니로 인해 겪어야 했던 무기력함과 좌절, 그리고 수동성을 극복하고 성애의 방향을 ‘정상적인’ 축으로 전환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축축한 이미지들과 성적인 고백이 늘어서 있는 이 노래에서 왜 우리가 유아기에 대한 은유와 그 시기의 좌절을 감각하는지에 대해서 또한 이런 방식으로라면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동성에 대한 성적인 애착을 ‘부정적인’ 것으로, 그것이 성장 과정을 거쳐 이성에 대한 성적 애착으로 전환되면서 ‘정상적인’ 전환 혹은 ‘치유’가 발생한 것으로 보는 이 모델의 발상을 전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아들을 어루만지고 씻기며 어설픈 동작들로 최대한 그에게 다정하게 굴어 보려 애쓰는 이 에로틱하고 괴팍한 어머니의 목소리에 녹아 있는 것이 ‘정상적인’ 취향으로의 전환을 통해 치유된 자의 환희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이였던 시절의 상처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자의 좌절과 슬픔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에게서 상처받은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보고 있다고 생각해 본다면, 노래하는 이가 이 연극(play, 놀이)에서 맡고 있는 역할이 어머니인지 아들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녀는 이오카스테이면서 오이디푸스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이에 대한 해석을 비워 두고자 한다. 대신 이 글을 읽는 이들이 천미지의 노래를 들으며 본인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무리 부대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품고 아들의 살갗을 어루만지는 엄마, 축축한 욕조 속에 잠겨 무기력하게 엄마에게 몸을 내맡긴 채 사랑을 갈구하고 또 사랑을 두려워하는 아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가능하던 시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자신이 대체 누구의 자리에서 누구를 욕망하고 있는지를 알아내는 데 실패하는 누군가의 강렬한 정념에 속절없이 휘말려 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미 잊힌 지 오래라고 치부해 두었던 유년기의 절망과 결핍을 한 번쯤 다시 불러내 보기를 바란다.

나가며 : 사라진 것과 금지된 것

사실 거의 마지막까지 글 제목의 자리에는 ‘Mother and Lover’가 쓰여 있었다. 비평문이 대상으로 삼는 텍스트의 제목 그대로를 비평문이라는 별개 텍스트의 제목 자리에 방치해둘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보다 적절한 제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이 글에 가장 적절한 제목은 ‘Mother and Lover’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앞서 반복해 언급했듯 접속사 and가 가지는 간명함의 힘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이다.

Mother는 사라진 것이다. 아르테미도로스의 목록에서 사라진 여자들이다. 여성에게 한때 의존했(도널드 위니캇)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존재로 생각하기도 했다는 기억을 통째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상실한 이후 증상의 형태로만 현실을 부유하는 트라우마다.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공포스럽고 매혹적인 어머니 여성의 표상이다. Lover로부터 분리되어 Mother로 표박되기 이전의 들끓는 존재다.

Lover는 금지된 것이다. 여성에게 금지되어 있는 것이 여성애뿐이라고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이다. 여성에게는 모든 종류의 욕망이 금지되어 있다. ‘빠순이 혐오’나 ‘창녀 혐오’, ‘꽃뱀’에서도 엿볼 수 있듯 욕망하는 여성 모두는 못 봐주게 추하다. 욕망하는 여자는 징그럽고 두려운 존재다. 하지만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은 ‘욕망하는 여자의 징그럽고 두려운 표상’이 시스젠더 헤테로 여성의 것으로 완전히 독점되어 있으며 퀴어 여성은 그 표상이 가진 전복적 에너지조차 취하지 못한다는 점을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천미지는 멀리 떨어진 채 신음하던 사라진 것과 금지된 것의 역사를 접속사 and로 간단하게 연결한다. 내가 그 간단함 이후에 덩그러니 남겨진 두 단어의 나열에서 단지 그것에서, 깊고 축축한 슬픔과 그 깊은 공허의 빈자리를 채우려 날뛰는 난폭한 분노를 본다면 이것 역시도 ‘미친 여자’의 환각의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일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국경을 넘어 천미지와 백델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도래했다는 것, 그리고 그곳 그 자리에 and가 놓일 수 있었다는 것은 그 환각의 실재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감각하는 이들의 집단적 존재를 바로 지금 여기 2019​†​년의 한국에서 증명한다.


  1. ​*​
    가사를 직접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Today I’m searching for true lovers/Nobody shows up anyway/I just want to make you happy/But I cannot satisfy you”
  2. ​†​
    이 글은 2019년에 초안이 작성되었음.

기고자 치커리(connect2chicory@gmail.com)
철학, 현대시를 전공했다.
“후에 도널드 위니캇의 이론을 참고하여 내용을 추가할 예정입니다. 본고는 미완의 형태에 가깝습니다” 라는 추신을 보내왔다.

치커리
kjs970831@naver.com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