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을 공유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아는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또, 내가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점이 분명해지지 않고서는 공유니 융합이니 하는 것은 정말이지 무의미하다. 마치 종교 간의 대화가 각자의 종교가 서 있는 궁극적 토대에 대한 성찰 없이 이뤄진다면 단순한 혼합주의Syncretism로 전락하듯 말이다.

이번달 우리가 나눈 대화는 이런 토대에 관한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좀 더 멋지게 말하자면, 각자가 선 출발점이 어느 트랙 위의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데에 이번 대화의 의의가 있었다. 나는 재미 있어 보이는 것들의 이면에 있는 재미 없는 주제를 꺼내는 것을 나의 경기로 보았다. 단현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로부터 건설적 확장을 하는 일을 그의 경기로 삼았다. 파상은 비평 대상 그 자체만을 갖고 비평 밖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그의 경기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지평뿐 아니라, 우리가 가는 방향 자체도 다름을 보여준다. 좀 더 상세히 이야기해 보자.

단현의 방향. 단현은 그가 작업해 왔던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수학과 물리학에서의 “체계의 확장” 사례를 통해 유비했다. 그는, 마치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허황되어 보이는 존재자들을 기존의 이론적 존재자들과 동등한 지위에 있는 것으로 추가한 사례들을 들면서, 단순한 상상가능성과 구분되는 “확장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러한 확장이,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사례에서도 가능하지 않을지 생각한다. 단순히 한 체계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받아들여지고, 또한 요청되는 그러한 체계의 확장. 그것이 그가 잡은 그의 방향이다.

분석. 그의 길이 성공적이려면, 그가 먼저 보여 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정치나 윤리가 정초하는 존재론적 근거에 관한 것이다. 실천이라는 것이 만일 오로지 자의적이 것이고, 그것이 근거하는 실재적 바탕이나 일관된 논리가 있지 않다면, 수학이나 물리학에서와 달리 “체계적 확장”은 불가능하다. 오로지 그곳에는 자의적 선택 또는 집단의 규약이 있는 데에서 그칠 것이다. 그리고, 윤리나 정치가 실제로 단지 규약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늘날의 시각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각에 반대할 수 있는 적절한 이유를 드는 것은 그의 책임으로 놓이고, 이 책임의 이행은 아주 핵심적이고 불가피한 것이다.

이로부터 이어지는 또다른 책임이 있다. 실천이 근거하는 어떤 바탕이나 원리가 있다고 할 때, 실천이란 일원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은 단현의 원래 의도와는 반대되는 것이 될 것 같다. 그의 글들로 미루어보건대, 궁극적으로는 자유나 결단이 힘을 쓸 수 없는, 즉 자유가 오로지 명목적 자유인 그런 실천론은 그가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은 아닌 탓이다. 이렇게 볼 때, 그는 결국엔 실천론의 고질적인 딜레마에 동일하게 봉착한다. 자유와 근거 사이에서의 딜레마 말이다. 이 딜레마를 극복하는 것은, 그의 주제가 철학이 되든, 문학이나 정치 일반이 되든 마찬가지로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파상의 방향. 파상은 그의 문학 편력을 통해, 문학을 읽음에 있어 그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밝혔다. 그는 외재적인 것들로부터의 온갖 해석을 곁들인 비평이 아닌, 텍스트 자체로부터의 감상을 통한 비평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중요할 뿐 아니라 그러한 비평이야말로 “정확한” 비평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그 “정확한 비평”이 나이브한 감상으로 떨어지지는 않기를 원한다. 나이브하지 않으면서, 텍스트 밖으로 나아지 않는, 정확한 비평. 이것이 그가 잡은 그의 방향이다.

분석. 비평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해석이라는 생각은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해석은 언제나 해석자의 관점을 포함하고 있고, 해석자의 관점이라는 것은 으레 생각하기로는 작품 바깥에 존재하는 무엇이다. 그러니 파상은 여기에서 두갈래길에 놓이는 셈이다. “정확한 비평”의 이념이 실현 불가능함을 인정하거나, 비평의 대상이 감상자와 독립된 대상이 아님을 주장해야 한다. 사실, 후자는 이미 나이브하다고 불러도 될 정도로 인정되어 있는 점이기에, 여기에서의 선택은 어렵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의 문제에 있다. 비평의 대상이 해석 이후의 텍스트라면, 어떻게 비평이 어떤 것에 대한 비평으로 공유될 수 있는가? 한편으로는 단지 그 “어떤 것”이 명목적으로만 있다고 할 수 있겠고, 다른 편으로는 모종의 이유에서 어떤 해석 공동체는 어떤 텍스트에 관한 동일한 또는 유사한 해석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제3의 길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둘 중 어떤 것을 따르는/논증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어려움은 “정확한 비평”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닥칠 큰 상대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방향은 위의 두 분석에서 드러난다. 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문제의 정체를 밝히는 데에 더 큰 관심이 있다. 어떤 문제이든 그 해결책은 문제의 정체를 밝힌 뒤에야 마련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탓이다. 문제를 분석한 뒤엔 문제가 해결 가능한 것인지, 단순히 개념적 오해인지, 경험적인 방식으로 해결되어야 하는지, 어떤 선택을 하든 상관 없는 것인지의 여부가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아직 문제가 덜 이해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문제의 분석을 계속하면 될 일이다.

이 방향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어떤 선택을 하든 상관 없는 문제 아닌가?”라는 상대주의가 가장 큰 적이다. “모든 것이 검증 가능성의 문제 아닌가?”라고 물었던 논리실증주의자 역시 철학의 큰, 또한 오래된 적이다. 이 둘과 더불어 “모든 것이 결국에는 답해질 수 없는 문제 아닌가?”라고 묻는 회의주의자의 도전에 맞서는 것도 철학이 갖는 과제에 해당한다. (물론 이런 적들로부터 철학의 역할을 옹호하면서도, 철학의 실질적인, 세상과 닿아 있는 그런 문제들을 다루는 균형이 필요하다. 나는 종종 그 균형을 잃고, 방어에만 전념하곤 한다. 그러나 그런 전념은 무의미하기도 하고, 별 성과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필요한 방어이지만, 방어와 공격에는 균형이 필요하다.)

종합. 이렇듯 우리가 각자 서 있는 출발선은 아주 다르다. 그 방향도, 위치도 영 같지 않다. 언젠간 만나게 될, 궁극적인 문제 역시도 상이하다. 그렇다. 우리는 다른 경기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애초에 우리가 함께 했던 것이 큰 의미가 있었을까? ⎯ 회의론의 발아.

그런데 잠깐만. 잘 살펴 보자. 종합은 거기에서 끝나지는 않는 것 같다. 서로의 궁극적인 문제의 형태를 볼 때엔 유사한 것이 있어 보인다. 각자의 주제가 어떤 근거 위에 있는 것인지, 각자가 다루는 대상이 일원적이지 않으면서도 완전히 개방되어있지는 않은 근거가 어디 있는지, 이런 주제들이 언젠가 나타날 그런 것들이었다. 앗, 그런데 이 주제들, 우리가 지금까지 다뤘던 그런 것은 아닌가? ⎯ 이 생각과 함께 내가 은연중에 갖고 있던 한 염려가 풀렸다.

나의 첫인사, “우리는 글을 쓰자고 했다“가 2018년 3월 24일에 발행되었고, 오늘이 2020년 3월 25일이다. 이 글까지 포함해 총 마흔 네 개의 글이 이 지면에서 발행되었다. 꼬박 두 해 동안 채운 《셋잇단음》의 기록이다. 처음에는, 우리가 뭔가 착각한 채 지난 2년을 보낸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문득 들었다.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를 애초에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닌가? 그런데, 그런 대화가 불가능한 것이었다면 우리가 이 지면을 통해 서로 상승하는 경험을 가질 수는 있을 것인가? 세 명의 동료가 머리를 맞대고 물었음에도, 어떤 것이 우리의 목적에 딱 맞는 기획의 방향인지조차 정할 수 없었다. 머리를 맞대고 있자니 그 “목적”이라는 것이 무엇이었는가도 모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번 대화는 하나의 전환점이다. 각자의 출발선을 확인한 다음 이전의 주제들을 생각해 보니, 우리는 정말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는 확신이 생겼다. 셋은 상이한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형태상 공유하는 질문들이 있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지난 시간 동안 다뤘던 문제들은 그 공유된 질문들로부터 나왔던 것들이었다. 오잉, 정말 우리는 무언가 하고 있었나보다! 이야기하는 중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이 점이 보다 분명히 보인다. 우리가 하고 있던 것은, 실질적으로 서로의 문제를 해결해주거나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서로의 문제가 갖고 있는 공통된 형식을 발굴해서 그 형식의 문제에 대한 응답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보고 나니 모호함이나 회의감이 훨씬 덜어진다. ⎯ 허나 그 다음은?

다시 시작하기. 생각해 보면 《지평》의 최초의 형태였던 이 《셋잇단음》은 처음부터 실험적인 지면이었다. 시작할 때엔 비록 우리가 “애초에 다른 경기를 뛰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마는.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도 모른 채, 뭘 하는지도 모르면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지나고 나서야, 이제 대충 각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고, 무엇을 했던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조금의 나아진 것은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온 다음 우리가 할 수 있을 것은 무엇일까? 이미 다룰 주제는 다 다룬 것 아닐까?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하게 될지는, 전혀 모른다. 그저 무언가를 하게 되기는 할 테다. 다만 앞선 실험이 나름 성공적이었으니, 그 성공을 믿고 투자를 해 본다.

때로 주변 사람들은 “그래서 지평이 뭔데?”라고 묻곤 한다. 이 물음 앞에서 나는 딱히 답할 것이 없었다. 이젠 좀 낫지만, 앞으로의 우리의 발걸음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후에도 나의 답엔 변화가 없겠다. 그럼에도 바보같은 낙관만을 갖고 올해의 《셋잇단음》을 연다. 이제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을 했는지를 알았으니, 뭘 하게 될지 역시 알게 되리라는 그런 낙관 말이다. 이정도로 이번 기획은 충분하다. 언젠가는 뭔가 말할 것을 갖게 되리라 생각하며, 다시 뜀박질을 준비해 보자.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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