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와의 만남: 후기분석철학자들의 시선 (1)

참과 앎, 다시 말해 진리와 지식 사이에는 모종의 간극이 있어 보인다. 아니, 있어야만 한다. 플라톤이 『테아이테토스』에서 최초로 정의했다고 알려졌으며, 지금까지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지식의 개념은 “정당화된 참된 믿음”이다. 이 정의 자체는 아주 사소한 것이다. 이 중 하나라도 부정해 보자. 어떤 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을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 어떤 것이 정당화된 믿음일 뿐 참되지 않다면, 이것은 독단에 불과하다. 어떤 것이 정당화되지도 않은 참된 믿음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독단이 우연히 들어맞았을 뿐이다. (이것을 “인식적 행운Epistemic Luck”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어떤 것을 우리가 믿고, 그것의 내용이 참이며, 또한 그 믿음이 정당화되었다면, 그것을 우리가 알지 않는다고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정당화된 참된 믿음이 곧 지식이다.

이제 진리와 지식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해 보자. 그렇다면 “정당화된 믿음”이라는 것이 무의미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참됨”과 “참되고 정당화되었고 믿어짐”이 동등하다고 할 때, 양쪽에 있는 “참됨”을 소거한다면 왼쪽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으면서 오른쪽에는 “정당화되었고 믿어짐”만이 남는 탓이다. 그런데 어떤 것이 정당화된다는 것과, 어떤 것이 믿어진다는 것은 충분히 유의미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실 “참됨”이라는 것에는 별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지식과 정당화된 믿음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역시 뭔가 이상하다. 이러한 주장이 맞다면, 지식에 있어서 “참됨”은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는데, 단지 정당화된 믿음이 참이라면 우리가 정당화에 있어 실수하는 일들이 이해될 수 없어 보이는 탓이다. 다시 말해 이런 귀결은 상당히 괴상하다. 그러니 차라리 우리는 지식과 진리 사이에 간극이 있다고 보아야 할 듯하다.

그런데 그 간극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우리의 체계 안에서 정당화된 믿음이, 진정한 지식이 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가?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진리 이론 연구가들의 책임이 된다. 딱 보면 알 수 있듯,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진리”란 거창한, 실존적 내지 종교적인 진리가 아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것이 참이라고 주장할 때 그것이 받아들여질 조건, 즉 진리 주장의 수용 조건에 관한 것이다. 진리와 지식의 관계를 통해 볼 때 진리 주장의 수용 조건과 단순한 믿음의 정당화 조건은 다른데,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드냐는 것이 진리 이론의 (내가 보기엔) 핵심적 과제이다.

발단: 고전적인 두 관점

고전적인 진리에 관한 관점은 크게 둘로 나뉜다. 대응 이론과 정합 이론이 그것이다. 때로 “실용 이론”을 제3의 관점에 두곤 하지만, 이 관점은 앞의 둘과는 미묘하게 층위가 구분된다. (이 셋에 관해선 Glanzberg 2018을 참고하라.) 그러니 실질적으로 고전적 관점은 대응 이론과 정합 이론의 둘인 셈이다. 대응 이론은 어떤 진리 담지자(명제, 문장, 진술 …)가 사실과 대응될 때, 그리고 바로 그 때에만 참이 된다고 본다. 예컨대 “하니가 군대에 갔다”라는 명제가 참이 되려면 이에 대응되는 사태인 <하니가 군대에 갔음>이 존립해서, 주장과 대응되는 사실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은 실재론, 특히 이른바 “형이상학적 실재론”에 보통 어울린다. 정합 이론은 어떤 진리 담지자가 우리의 믿음 체계와 정합적일 때, 그리고 바로 그 때에만 참이 된다고 본다. 예컨대 “하니가 군대에 갔다”라는 명제가 참이 되려면 이 명제와 모순되는 것이 우리의 믿음 체계에 없어야 한다. 이 관점은 반실재론 중에서도 관념론과 어울린다. (두 관점이 진리의 “정의”가 아닌 “조건”에 관한 것임을 유념하라.)

두 관점에는 각각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먼저 대응 이론은 진리 자체를 마술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대응 이론은 어떻게 우리가 표상하는(이 표상은 일단 마술적이지 않다고 해 두자) 진리 담지자가 사실과 대응될 수 있는지 설명할 책임을 진다. 가장 쉬운 답은, 명제가 구조화되어있다거나 진리 담지자가 문장이라고 한 뒤에, 그것이 갖고 있는 구조적 특성과 대응되는 무언가를 실재가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술어나 이름 또는 속성과 개체의 개념에 대응되는 개념이 실재를 구성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속성이나 개별자가 실재에 있다는 관점을 요구한다. (그래서 대응 이론이 실재론과 결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대답이 옳다면 우리가 술어로 표현하는 그러한 것이 실재에 이미 있어야 한다. 그런 것이 있다고 어떻게 우리가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앞서 이미 어떤 것이 있고, 그것이 세계 밖에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 머릿속으로 들어와서, … 등등의 그런 관계가 자연스럽게 맺어진다는 것인가? 이런 생각은 상당히 괴상하다. 하나의 답은 크립키-퍼트남 의미 이론, 즉 인과적 지시 이론에 근거한다. 우리가 모종의 인과적 관계를 맺은 대상으로부터, 그것의 특성이 되는 그 속성이 바로 우리가 부른 그 술어와 일치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 역시 괴상하다. 모든 대상은 여러 특성을 갖는데, 대체 우리는 어떤 특성을 지시했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어떤 대상과 관계맺는 순간 그 특성이 결정된다는 것은 역시 마술적이다.

그렇다고 정합 이론이 받아들일 만한가? 그렇지도 않다. 정합 이론의 전형적인 관점을 생각하자면, 진리가 정당화된 믿음과 동일하다는, 우리가 부정하려 했던 그 주장과 동일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크립키와 퍼트남이 주장했던, “The meaning of ‘meaning'”에서의 퍼트남의 논증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무언가를 표상할 때, 그것은 단지 머릿속에 있지 않다. H2O와 XYZ가 질적 특성이 같을 때에도 우리는 그 둘을 볼 때 다른 것을 표상한다. 이것은, 믿음을 구성하는, 표현의 의미, 또는 어떤 것에 대한 표상이 마음 바깥의 것에 의존한다는 증거이다.

대신 정합 이론가가 퍼트남(Putnam 2002)이 주장했던 “내재적 실재론”의 진리 이론, 즉 참인 믿음은 “이상적인 상황에서 합리적으로 수용 가능한 믿음”이라는 관점을 취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관점 역시 뭔가 나사가 하나 빠진 것처럼 보인다. 대체 “이상적인 상황”이 무엇인가? 또한, 어떤 체계에서 이상적인 인식적 조건이 거짓 믿음을 산출하는 그런 경우도 충분히 가능해 보이지 않는가? 또 이 때에도 역시 왜 위의 외재적 의존 관계가 나타나는지 답하기 궁색해질 것만 같다. 적어도 퍼트남은, 그의 저작에서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공박하는 데에 힘을 뺀 나머지 이 점에 관해서는 큰 답을 주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사정은 그의 논문집, Philosophical Papers Volume 3: Reason and Reality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제3의 길?

퍼트남의 80년대의 관점이 대응 이론을, 퍼트남의 70년대의 관점이 정합 이론을 모두 봉쇄해버림에 따라, 우리에겐 둘 모두에 해당하지 않는 그러한 선택지가 필요해지고 만다. 단순히 허구주의를 이 대체물로 삼을 수 없음에 유의하자. 여기에서 다뤄지는 것은 진리 일반의 문제이다. 허구주의는 어떤 범주에 관한 반실재론, 즉 국소적 반실재론을 다루기에 적합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어떤 범주의 논의를 다른 범주의 논의로 환원하는 과정이어서, 총체적 반실재론 주장이 아닌 또다른 국소적 실재론의 주장이 되고 만다. 지금 필요한 것은 총체적인 존재론적 주장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주장은, 지금의 논의에서는 사실 전부 무용지물이다.

나는 여기에서 후기분석철학자들 중 퍼트남과 데이빗슨에게서 보이는, 배식한(2009)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른바 “제3의 길”에 해당하는 경향성을 그려보려 한다. 이 경향은 데이빗슨에게 보다 논증적으로 옹호되었고, 퍼트남에게서는 (내가 보기엔) 보다 명료히 주장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허나 데이빗슨과 달리 퍼트남은 “변절”을 통해 제3의 길로 나아갔으므로, 퍼트남의 전환의 계기를 먼저 볼 필요가 있겠다.

무엇이 문제였는가 – 퍼트남의 경우

퍼트남이 내재적 실재론의 진리 이론을 포기했다고 선언한 것은 1999년의 강의록, The Threefold cord에서였다. 그의 입장은 이 저술이 발간될 즈음인 90년 말엽 실재론으로 돌아갔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번의 실재론적 전회는 그가 종전에 지지하던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입장으로의 것은 아니다. 그는 내재적 실재론의 논제 중 진리 이론에 관한 것만을 포기하면서 실재론자의 입장으로 돌아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삼아야 할 것은 왜 그는 진리를 수용 가능성에서 보던 입장을 포기했는가이다.

먼저, 왜 그가 정합론에 “이상화된 인식적 상황”이라는 조건을 추가했는지를 말하도록 하자. 그가 이러한 조건을 추가했던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단지 어떤 인식적 상황에 있다는 것만으로 믿음이 참이 될 경우 오류를 낼 수 있음이 분명했던 탓이다. 그래서 “이상화된 상황”이 상정된다고 한 뒤,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의 합리적 수용 가능성을 두고 우리는 진리라고 부른다는 논제를 옹호했던 것이다. 그런데 90년대의 퍼트남에 따르면, 이러한 생각 뒤에는 주체와 대상 사이에 어떤 접촉면(interface)이 있어야만 한다는 가정이 있다. (이를 ‘접촉면 가정’이라고 불러 보자.) 즉 주체와 세계는 분리되어 있고, 그 분리된 것 사이에 세계를 주체에게 드러내는 과정이 있어야만 한다는 가정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퍼트남은 이러한 가정은 철학적 질병에 불과하다고 보았던 모양이다.

그래. 이제 접촉면 가정을 포기해 보자.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가? 단지 어떤 상황이 표상되는 것만으로, 그것에 관한 믿음이 정당화된다. 이제 퍼트남은 “소박한 실재론”의 태도에 상당히 가까워졌다. 그런데 그러한 주장이 옳다면 우리의 믿음은 거짓될 수 없어야 하지 않는가? 퍼트남은 여기에서 선언주의(disjunctivism)의 입장을 취한다. 선언주의를 간단히 다음으로 정식화해 보자:

지각 주체 s와 대상 o, o에 대한 지각 경험 e, e와 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경험 e*에 있어,
(D) BsPo→Ese∨Ese* (B: ~를 믿다; P: ~를 지각하다; E: ~를 경험하다)

(D)는 정말 간단한 소리이다. s가, o를 지각했다고 믿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것은 정말로 o를 지각해서이거나, 단지 그 때와 구분 불가능한 경험을 했다는 소리다. 더 쉽게 말하면, 정말로 o를 지각했거나, 단지 환각을 봤다는 말이다.

띠용? 아무런 설명력이 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이렇게 막 한다니? 그런데 사실 (D)가 의미있어지는 것은 그 이후의 논변에서이다. (지금은 퍼트남의 선언주의 논변만을 들도록 하자.) 퍼트남은 그의 외재주의 논변을 다시 꺼내 든다. 의미는 머리 속에 있지 않다. H2O와 XYZ의 경우를 보자면 그렇다. 그렇기에, e와 e*가 질적으로는 구분되지 않을지 몰라도, 그 둘은 동일한 경험이 아니다. 따라서 오직 e의 경우에만, s가 o를 경험한다는 것이 정당해진다. 이렇게 볼 때, 선언주의는 타당하다. (여기까지가 The Threefold cord의 전반을 아우르는 퍼트남의 입장이다.)

이 입장은 실재론이지만, 형이상학적 실재론 내지 대응 이론과는 구분된다. 퍼트남에 따르면, 이 입장들은 접촉면에 해당하는 이른바 “감각 자료sense-data”라는 것과 세계의 일치를 가정한 것인데, 퍼트남은 그러한 감각 자료 없이 직접적으로 세계가 지각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세계와 일치하지 않는 그러한 감각 자료가 주어진 탓에 오류가 생긴다기보다는, 그저 우리의 믿음이 제대로 된 경험으로부터 나온다면 참된 것이며, 질적으로만 같은 허위 경험에서 나온다면 그릇된 것일 뿐이다. 또한 이는 지식의 정당화를 우리의 믿음 체계 안에 두지 않고 세계에 두기에, 정합 이론 내지 관념론 역시 아니다. 이렇게 그의 후기 입장이 정리된다.

어떻게 앎이 보장되는가 – 데이빗슨의 경우

퍼트남의 문제제기는 잘 들었다. 그런데 어쩌란 말인가?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앎으로 보장되는지에 대해서 The Threefold cord는 별소리를 안 한다. 대신 우리는 유사한 계기에서 정합 이론과 대응 이론을 거부한 데이빗슨의 접근을 따를 필요가 있다.

사실 데이빗슨이 퍼트남과 매끄럽게 이어지는 철학적 입장을 제시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퍼트남의 경우, 아무래도 그의 말년까지 개념적 도식의 유효함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데이빗슨(Davidson 1974)의 경우 개념적 도식이라는 생각은 결국 공허한 것임을 강력히 주장하는 탓이다. (나는 실제로 이 부분에서 데이빗슨과 퍼트남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둘의 입장이 사소한 차이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며, 데이빗슨은 퍼트남의 입장에 제약을 가한 한 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할 생각이다.) 여튼간 데이빗슨의 입장이 퍼트남의 입장을 보완할 수 있다고 생각해 두고, 이야기를 시작하자.

『주관, 상호주관, 객관』에 실린 논문들은 데이빗슨의 이른바 “삼각측량”으로 대표되는 입장을 정리해 보여주고 있다. 그의 논지를 간략히 하자면 이렇다. 세계는 이미 주어져 있다. 진리를 정의하는 것은 이상한 시도이다. 오히려 진리의 개념은 우리에게 원초적이다. 진리는 우리의 의미론적 규약에 있어 표준으로 기능한다. 즉 “[진리] 이론은 곧 의미이론이다.”(배식한 2009, 180)

세계가 주어져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퍼트남과 유사한 관점을 취한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우리는 내포문맥 등을 해명할 때 모종의 주관적 대상, 또는 일인칭적 특권같은 것이 있다고 간주하는데, 이러한 간주 자체가 그릇되었다. Davidson(2001)이 이를 지지하기 위한 논변을 잘 정리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ㄱ) 외부 세계의 지각, (ㄴ) 타인의 마음에 대한 지식, (ㄷ) 자기 마음에 대한 지식은 상호독립적일 수도, 서로 간 환원될 수도 없다. 둘은 동시에 해명된다. (i) 믿음은 지식의 조건이다; (ii)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진리의 개념이 요구된다; (iii) 이러한 개념은 언어의 공유, 즉 의사소통에 의존한다; (iv) 의사소통이 가능하려면 타자와 공유하는 세계가 요구된다. (i)은 (ㄷ)을, (iii)는 (ㄴ)를, (iv)는 (ㄱ)을 고유한 것으로 요청함과 동시에, 서로와 영향을 주고 받는 것으로 만든다.

우리가 주목할 남은 하나는 (ii)이다. 그에 따르면 지식을 위해서는 진리가 요구된다. 어떻게 그런가? 이는 의미에 관한 데이빗슨의 입장과 이어질 것이다. 진리와 의미에 관한 데이빗슨의 입장으로 가기 위해, 타르스키Alfred Tarski의 진리 이론을 설명하자. 그는 Tarski(1935)에서 진리를 메타언어-대상언어의 관계로 보았다. 메타언어는 다른 언어적 표현을 분석할 때 사용되는 언어를, 대상언어는 그 분석에서 대상으로 언급되는 언어를 말한다. 타르스키의 발표문에서, 대상언어문장은 다음과 같이 메타언어적으로 이해된다:

문장 s와 언어 L, 명제 p에 있어,
(T) ‘s’ in L is true iff p (iff: 필요충분조건)

메타언어와 대상언어가 같다면, (T)의 형태는 “‘p’ is true iff p”와 같은 형태가 되겠다. 타르스키는 그의 발표문에서 바람직한 진리의 개념을 논구하고자 했던 것이었기에, 그의 주제는 무엇이 진리 술어의 의미이냐는 것이었다. 그것에 관한 답이 (T)였고, (T)에 대한 그의 해석은, 대상언어문장 s와 메타언어문장 p가 동의어라면 곧 s가 p에서 참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의 1935년 발표문에서는 형식언어에서의 정리로 한정된다.) 이를 오늘날 “의미론적 진리 이론”이라고 부른다.

반면 데이빗슨은 규약 (T)를 옹호하면서 타르스키와는 정반대의 함의를 가져 온다. 그는 의미론이 진리의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의미론의 조건이 된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일단 그가 (T)에 도달한 과정을 살펴보자. 의미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s’는 p를 의미한다”와 같은 꼴의 메타언어문장이다. ‘~를 의미한다’의 의미가 모호한 탓에 의미론은 곤혹을 치르고 있던 것이기에, 더 명백한 연결어인 “iff”와 임의의 술어 T로 이를 대체한다. 그렇다면 나오는 꼴은 놀랍게도, (T)와 동일해진다. (사실 하나도 안 놀라운 일이긴 하다.)

데이빗슨은 이 T를 통해 우리가 의미를 이해한다는 점으로부터 과감한 제안을 한다. 실지로 진리 술어라는 것 자체가, 우리가 동의성을 이해하기 위해 쓰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쓰임보다 더 크거나, 더 작은 기능(만)을 진리 개념에 요하는 것은 진리에 관한 우리의 오해가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 더 큰 것을 요한다면 세계와 마음이 분리되어 버리며, 더 작은것을 요한다면 진리가 무의미해진다.

종합: 세계, 참, 앎, 타자

이제 (D)로 정리되는 퍼트남의 입장과 (T)로 정리되는 데이빗슨의 입장을 종합해 보자.

(R) (a) 우리는 세계와 직접적으로 만난다; (b) 그 세계는, 개념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다; (c) 개념은 타자를 통해 얻어진다; (d) 진리는 그러한 타자와의 소통에서 매개적 표준의 역할을 한다.

나는 이 종합 R이 퍼트남과 데이빗슨 둘 다에게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마음과 세계 사이에는 접촉면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 그 둘은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것.

다만 둘이 차이나는 듯한 지점은 무엇을 강조하느냐에 있다는 것이 나의 독해이다. 퍼트남이 세계와 개념을 강조했다면, 데이빗슨은 진리와 타자를 강조한다. 상세하게 말하자면 이렇다. 퍼트남은 세계로부터 직접적으로 “정당화된 참된 믿음”을 얻되, 그것을 우리개념을 통해 기술한다고 생각한다. 데이빗슨은 타자와의 의사소통을 위해 진리를 사용하여, 세계를 파악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굵은 글씨로 내가 쓴) 강조되는 점들로 그들의 입장이 완결되는 것이 아니다. (밑줄친) 강조되지는 않지만, 전제되어 있는 요소와 그들이 겨냥하는 지점이 그들의 논증에는 반복해서 드러난다. 그리고 바로 그 요소와 지점이, 상대에게 강조되는 요소로 나타나고 있다.

퍼트남이 세계의 개념적 의존을 강조한 것은 진리의 정체를 밝히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 때 진리를 보증할, 개념이란 어디에 있는가? H2O-XYZ 논변에서뿐 아니라 본고에서는 소개하지 않은 느릅나무-너도밤나무 논변을 보자면, 우리의 개념 체계라는 것은 단지 우리 머리 속에 있지 않을뿐 아니라, 그 개념을 발전시키기로 위탁된 전문가들로부터 발전된다. 즉 개념 체계가 타자들로부터 보증되고, 보완된다는 것이다.

반면 데이빗슨은 의미 이론을 겨냥하며 타자와 진리를 논구한 것이다. 여기에서도 단지 타자와 진리로부터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 타자와 소통할 때, 그 소통의 주제는 세계이다. 세계에 대한 지각 경험에 관해, 진리를 매개로 하여, 소통한다는 것이 그의 모델이다. 퍼트남이 전제했던 “개념 체계”와 유사한, “의미 이론”이 그 소통의 결과물로 나올 것이다.

참과 앎의 분리로부터 출발해 퍼트남, 데이빗슨의 행적을 따라오며 우리는 (R)을 발견했다. (R)이 보여주는 것은, 소통 없는 개인들, 그리고 의식과 세계의 분리를 전제한 채 진리나 지식을 탐구하는 것이 무용하다는 철학적 교훈이다. 그런 무용한 전제들을 버린 뒤 나오는 상식적 세계관에서 철학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두 명의 철학자가 보여주었던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이다.

실재론은, 근본적으로 비인식적인 대응에 대한 그것의 고집을 지니고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진리에 요청한다. 반실재론은, 진리를 주장될 수 있는 것에로 제한시키면서, 진리로부터 상호주관적 표준으로서의 그것의 역할을 불필요하게 박탈한다. 만약 우리가 진리에 관한 진리를 이야기하길 원한다면, 우리는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서는 안 된다.

Davidson 1991a, p. 368.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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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utnam, Hilary. 1975. “The meaning of ‘meaning'”, Minnesota Studie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 7: 13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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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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