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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함정에 빠지고 싶을 때가 있다. 그 중 하나가 ‘굳이 이유를 찾는 일’ 혹은 ‘이름짓는 일’이다. 물론 세상 모든 것에 이유가 있고 이름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이러해야만 할 정당한 이유를 찾는 일, 확실히 정의내리려는 일은 도움을 준다. 함부로 무언가를 확정짓거나 하나의 답으로 너무 많은 것들을 판단해버리지만 않으면 된다. 그러려고 이유를 찾는 것 아니냐고? 글쎄. 애초에 함정이었다니까. 물음은 도움을 주지만 세상은 물음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지평>을 시작하고 나서 이미 두어 번은 인용한 것 같지만, 그래도 한 번만 더 하자. (사실 몇 번 더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미셸 푸코Michael Foucault는 근대적 ‘비판’ 개념의 정립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저런 원리의 이름으로, 이러저러한 정신 규범으로, 그리고 저러한 절차에 의해서, 저런 식으로가 아닌, 저것을 위해서가 아닌, 저들에 의해서가 아닌 방식으로, 어떻게 하면 저런 식으로 통치되지 않을 것인가.” 혹은 이런 것도 있다. “비판은 자발적인 불복종이자 성찰을 통한 비순종의 기법일 것입니다. 비판은 한마디로 진실의 정치라고 할 수 있는 게임 속에서, 본질적으로 탈예속적일 것입니다.” (“비판이란 무엇인가” 중)

이런 이야기다. 오랫동안 ‘별 생각 없이 생각했던 것들’이 있다. 문득 당연하던 것들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한 번쯤은 찾아온다. 그 감각을 꽉 붙잡고 나면 다른 것이 온다. 별 생각없이 생각하던 것들을 돌아보고 속아넘어갔던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의외로 많은 것들이 의외로 당연한 게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면 그 다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 글은 그러기 위한 ‘자발적인 불복종’이다. 혹은 괜한 트집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필요하다 믿는다. ‘하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를 문제삼는 것은 귀찮지만 치열한 지평-넓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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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비판’ 개념을 인용한 데는 이유가 있다. 물으려는 건 이것이다.

비평의 문제들 ─ “문학비평을 왜 하는가?” 혹은 “문학비평의 책무/목적은 (있다면) 무엇인가?” “문학비평에 ‘좋음’이 있다면 무엇인가?” 등등.

그러니까, 비판을 비판해보자는 이야기다. 답을 내리고 쓰는 글이 아니다. 그래서 무책임한 글이 될 수도 있겠으나, 오해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 변명을 먼저 붙인다. 말했듯이 이건 ‘괜한 트집’이라는 것을 알고 하는 ‘자발적 불순종’이다. 아니, 트집이겠지만 ‘괜한 것’은 아니라 믿는다. 지금 비평의 가능영역과 위치를 묻는 것은 넓게는 문학의 영역을 묻는 것이기도 하며, 더군다나 나는 아직 문학과 문학비평이 우리의 삶과 강하게 교섭할 여지가 남아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주지하건대, 나는 비평의 무용성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혹은 ‘하나의 비평’을 확보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조금은 멍청하게(!) 지금의 문학비평을 뜯어봄으로써 소설과 시와 그에 관한 말들이 내 삶에 들어앉은 자리를 확실히 지키고 싶다. 그럴 수 있다 믿고, 그렇게 하고 싶다. 또한 이 작업은 내 나름대로의 비평언어를 정립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어떤 대목에서는 그 가능성들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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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내 관심사가 문학에만 치중되어 있었던 탓에, 이 글에서는 ‘비평’을 말할 때 다른 언급이 없는 한 ‘문학비평’만을 의미하게 됐다. 원래 예술비평 일반을 다루고 싶었으나, 최근 글 하나를 읽고 ‘거기까진 함부로 하면 안 되겠구나’ 싶어 관뒀다. (남다은, 임근준 , 조일동 , 김홍중. “비평의 비애, 비평의 자랑.” 문학동네, (2013): 1-52)

이후의 꼭지들은 한 편의 짜여진 글이라기보다 문제들의 정식화─어떤 부분들에 대해서는 그럴듯한 답을 찾아가는 것 같지만─과정이다. 공부하며 다음 책을 참조했다 : 소영현. “올빼미의 숲”. 문학과지성사(2017).  좀 더 많은 시간을 고민한 후 짜여진 글로 묶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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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은 판단과 평가를 포함할 수밖에 없는가. 혹은 포함해야만 하는가. 말인즉 판단과 평가가 비평의 본질적인 요소를 이루고 있는가.

바꿔 생각해보자. 판단과 평가가 빠진 비평을 비평이라 할 수 있을까. 빼고 나면 무엇이 남나. 감상이나 취향의 나열 아닐까. 감상문이나 에세이와 비평을 가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얼핏 자명해보인다. 작품을 비평함직한 것으로 문제삼았다면 그것을 깊이 읽고 이 작품이 어떤 것인가 판단하며 작품 속의 어떤 요소들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를 엄밀히 파고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비평’이라는 이름을 달고 혹은 ‘비평가/평론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는 사적인 감상이나 에세이를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다. 비평을 굳이 비평이라 할 수 있는 이유에 관한 이야기다. 반대로 말하여,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적인 장에 의견을 노출하고 그것에 책임을 지는 일이 ‘비평’이라는 이름을 달 자격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조금 다른 방향으로 물으려 한다. 판단하고 평가한다는 것은 애초에 어떤 기준을 선제한다는 것이다. 말인즉 어떤 것이 좋고 나쁜가, 좋고 나쁘다면 왜 좋고 나쁜가를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 기준은 무엇인가. 비평가의 개인적인 가치관인가. 혹은 이데올로기인가. 그렇다면 판단하고 평가하는 비평은 선제하고 있는 틀로 작품을 재단하는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지 않나. 그건 최소한 작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은 아닐 것이다. 다른 말로, 작품을 왜곡시키고 기존 가치관의 자기강화나 이데올로기의 선전을 위해 봉사하게끔 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과장일까)

그런 비평은 좋은 비평인가. 아닐 것 같다. 여기 비평이 빠지는 함정이 하나 있다. 텍스트를 진지하게 대하는 일은 일종의 줄다리기다. 텍스트를 통해서 다른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텍스트를 벗어나는 위험을 맞게 된다. 그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리고 그것을 비평가 개인의 역량 문제로 둘 것인가 비평의 방법론 자체로 문제삼을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다.

그리고 여기서 돋아나는 문제가 하나 더 있다.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대한다는 것─이른바 바르트 식의 이상적인 텍스트 이론에 관한 것이다. 텍스트의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텍스트를 읽을 때, 그러니까 텍스트를 ‘다른 무엇인가를 반영하는 통로’ 정도로 이해할 때, 텍스트 자체에서 음미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빠져나간다. 맞는 지적인 것 같다. 그러나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대한다는 게 가능한가. 그리고 그것이 과연 비평이 지켜야 할 룰인가.

혹은 그 사이의 무언가는 없을까. ‘작품에 내재적인 것들’에만 공허하게 천착하지 않고, 작가가 아니라 비평가로서 말해내야만 할 것들을 충분히 말해내기. 그러나 텍스트를 다른 무엇을 위해 봉사하게끔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대하기. 이것은 동시에 성취할 수 없는 것인가. 텍스트 안에만 머물면서 텍스트 바깥을 말해내는 일은 불가능한가. 판단과 평가가 아닌 방식의 비평언어는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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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론적 비평은 필요하다. 이건 좀 쉽게 말할 수 있겠다.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인가. 혹은 어떤 글이 잘 쓴 글인가. 물론 이것은 시공간적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해당 언어공동체(혹은 장르, 혹은 문학장) 안에서는 최대한 건실하게 서 있어야 한다. 세계의 모든 것은 예술적일 수 있지만 모든 것을 예술이라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모든 예술을 좋은 예술이라 할 수는 없다. 창작은 기술이며 우연이 아닌 이상에야 잘 갈고 닦은 기술이 좋은 작품을 만든다. 창작론적 비평은 해당 장 내에서 창작 활동을 채찍질하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런데 창작론적 비평은 예술장의 언어에 불과한가. ‘그것 뿐이냐’면 간단치 않다. 이를테면 서사 기반 문학은 태생적으로 재현과 관련된다. 이러저러하게 있는 세계의 어떤 것을 재현할 것이냐가 첫째가 되고, 그것을 ‘어떻게’ 재현─어떻게 서사화할 것인지가 둘째가 된다. 세계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고 배열하는 작업은 윤리와 연관한다. 비평장에서 자주 등장하는 ‘재현의 윤리’라는 단어는 괜한 것이 아니다. 어떤 주체를 선택하고 그 중 누구를 발화하게 하며 어떤 이를 조연적 역할로 등장시킬 것인가,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는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

대표적인 예로 최근의 <귀향>(조정래, 2016) 영화 논쟁을 들 수 있겠다. 물론 이는 영화라는 장르 특성상 서사 외에도 카메라의 시점, 시각적 재현 문제가 중첩되어 더 적나라한 예시에 해당할 것이다. (자세한 것은 손희정, 그리고 여기서 촉발된 “문학동네” 제23권 제2호(통권87호)에 [논쟁]으로 실린 송효정과 권명아의 글을 참조 ─이 논쟁은 창작론을 넘어 대중과 정동이라는 문제까지 확장되었으며 언급한 것들 이외에도 영화비평계에서 수많은 논의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창작의 방법론을 묻는 비평의 영역은 우리의 삶을 확실히 겨냥하고 있다. 무엇을 선택하는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서사화하는가,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어떤 정치사회적 조건 아래에서 통치되고 있는가를 가시화하는 물음이다. 창작의 기술을 넘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통치되는/하는 일’을 물을 수 있는 삶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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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과 시간의 문제. 오래 전의 작품을 지금 여기서 묻는 일은 의미가 있는가. 문학사적 의미 이상이 있는가. 혹은 비평은 ‘현재성’, ‘현장성’에 집중해야 하는가.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면 왜 벗어날 수 있는가. 다른 말로 하여 비평의 시의성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그런데 그 전에 시의성은 비평의 책무인가? 어쩌면 이 물음은 문학이론과 비평 혹은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구분(소영현)을 묻는 일이기도 하다. 비평은 문학을 학문적으로 다루는 것에서 그치지는 않는 것 같다. (아카데미즘을 평가절하하는 말은 아니다) 그러니까 비평은 지금 여기를 염두에 둘 때 ‘비평으로서의 효과’를 가진다.

그렇다면 문학 작품을 통시적으로 조망하는 일은, 이러저러한 것들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서사화해 왔음을, 이러저러한 방식의 통치가 작동하고 있었음을 드러낼 수 있다. 시의적으로! 그렇다면 비평은 과거의 작품까지도 정당하게 영역삼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구분은 견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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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물음들은 동질이형으로 보인다.

  • 공시적 고찰은 어떠한가. 같은 시대에 태어난 다른 작품들은 공시적으로 무엇을 공유하고 있는가. 공유하고 있다면 얼마나 공유하고 있는가. 그러니까 비평이 그것을 공시적으로 다루고 분석─재배열─의미화하는 일이 가능할 만큼 ‘지금 여기’와 잘 연관하고 있는가.
  • 작가에 관한 총론(작가론)은 어떻게 가능한가. 한 작가의 커리어를 훑으며 ‘이 작가는 대체적으로 어떤 작가다’ 혹은 ‘이 작가가 이 시기에 쓴 작품은 이러이러한 바를 말하며 다른 시기의 작품과는 이러이러한 차이를 보인다’와 같은 식의 비평.
  • 비평이 작품을 ‘해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 비평은 우리의 삶과 어떻게 관계맺는가. 다만 여기서는 서두에 인용한 푸코의 비판 개념보다 좀 더 좁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하자. 비판이라는 자세, 가 아니라, 작품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말하는 상식적인 의미의 비평─출판/유통되는 텍스트들 자체를 염두에 둔다.

비평은 “이중의 불확정성”(소영현)에 놓여 있다. 비평은 태생적으로 대상의존적인데(이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을까) 그 대상인 문학 또한 확정적으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이 물음들은 문학 내지 작품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먼저 묻지 않으면 답을 내리기가 어려울 것이다.

먼저 해석으로서의 비평을 묻자. 바르트를 다시 언급할 수 있다. 그는 책 “저자의 죽음”에서 작가와 작품의 분리를 이야기한다. (편의상 그의 작품─텍스트 두 개념을 구분하지는 말자) 작품은 작가의 의도를 드러내는 창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혹은, 전술했듯, 텍스트를 다른 무엇을 의미하는 기호로’만’ 읽는 것도 텍스트를 쉽게 곡해하는 길이다. 물론 비평은 작품을 진지하고 엄밀하게 대할 때에 비평이 되는 것이지만, 판단과 평가가 비평의 본질(부분)임을 전제하고 나서도 그 방법이 오직 ‘해석’ 뿐인가 하는 물음은 여전히 문제다. 작품을 다른 의미에 봉사하게끔 하는 일은 오히려 작품을 진지하게 대하지 못하는 일이다. 텍스트는 ‘지금 여기’, 혹은 독자 개개인에 강하게 연관할 때에야 오롯이 텍스트로 선다.

작가론의 가능성을 비슷한 결에서 물을 수 있지 않을까. 한 작가의 작품을 한데 묶을 수 있나. 묶을 수 있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작가론은 사실 세계-작가-작품의 고리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가 있고 작가는 무언가를 느낀다. 혹은 경험을 쌓고 알게 모르게 세계에 의해 구성된다. 그리고 작가는 그것을 작품에 담는다. 비평은 작품에 담긴 작가를, 작가에 담긴 세계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는 작품을 작가에 섣불리 복속시키는 일이 아닌가. 한 사람이 쓴 텍스트라는 것 이상으로 작품들을 연관시킬 당위가 있는가? 작가론이 그런 섣부른 시도가 아니라고 한다면, (치사해 보이지만) 이 물음에 답해야 할 것 같다. 이 작가는 이러저러한 소재와 이러저러한 서사화 방식을 자주 사용하며 문체는 어떠하고 어떤 인물들을 조명하며, … 그러나 만약 저자를 가리고 작품들을 만났을 때도 이런 분석이 가능할까. 생각건대 한 작가의 작품들이 논의가능한 유사성을 가진다는 것은 애초에 그 작품들에는 작가가 필요없다는 것일 수도 하다.

생각건대 작가론은 ‘실제로 작가와 작품 사이에 강한 연관이 있으며 그것이 분석 대상으로서 유의미하다’ 와 ‘이것은 단지 작가의 이름을 분류명으로 하는, 애초에 유사성이 있으며 그 자체로 서로 연관성을 보이는 텍스트들에 관한 연구이다’ 사이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극 사이의 가치판단이 필요해 보인다. (필요하지 않을까)

(이는 어쩌면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구분을 묻는 일의 반복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공시적 고찰은 어떠한가. 텍스트들은 ‘같은 시대를 사는 저자들’을 경유하지 않고 묶일 수 있는가. (물론 ‘저자의 죽음’에 매몰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세계와 연관하는 저자들, 그들이 같은 시공간에서 쓴 텍스트라는 반영론적인 관점이 그렇게 굳건한가. 반영론적 관점─이 물음은 그래서 ‘비평은 우리 삶과 어떻게 연관하는가’와 거의 같다. 작품은 세계의 반영인가. 반영이라면 그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그것을 메커니즘화할 수는 있는가. 또 작가가 세계를 드러내 주는 좋은 이야기꾼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증하는가.

작품을 ‘징후’ 혹은 ‘사후적 지표’로 읽는 것은 어디까지 정당하냐는 (치사한) 물음이다. 그러나 생각건대 내재적인 것에만 머물러서는, 최소한 ‘사회비평’은 달성할 수 없는 포기 상태로 남는다. 비평이 ‘이러저러한 방식의 통치’를 문제삼는 것이라면 잠정적으로라도 텍스트 바깥으로 걸어나오는 바로 그 일이 중요하다고 해야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텍스트를 수단화하지 않는 방식, 그리고 텍스트를 작가에 복속시키지 않는 방식은 계속해서 실험되어야 한다. 비평은 스스로를 당연시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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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물음들이 빼놓고 있는 것 하나 ; 비평은(문학 또한)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비평’장’은 실재하며 그 안에서 수많은 비평 작업들이 길항하여 담론장을 형성한다. 그렇다면 비평은 하나의 작품-비평문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벡터합의 모습일 테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다 합쳐놓고 보면 어떻게든 잘 흘러가겠지’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비평장이 문제시되고 있는 사태들을 상기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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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과 독자의 문제도 있다. 비평은 독자를 고려해야 하나. 아니라면 비평은 문학장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존재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가. 독자를 고려해야 한다면 어떤 독자를 고려하는가. 문학을 충분히 향유할 수 있을만한 지식수준과 여유를 갖춘 독자들인가, 아니면 문학장에 포섭될 수 있는 잠재적 독자들─이들은 비평이 ‘지금 여기’를 겨냥한다면 항상 의식해야 할 이들인데─까지인가. 후자라면 비평은 문학의 독자를 늘리는 데 기여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비평은 어디까지 ‘낮게 내려올’ 수 있어야 하는가. 그러나, 그것이 전반적인 비평 질 저하를 부르지는 않아야 할 텐데 그 중심 잡기는 가능한가.

지금 비평을 읽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람들은 이제 소설 권말의 해설도 잘 읽지 않는다. (나도 별로 신용하지 않는다─물론 이것은 ‘주례사 비평’에 한정될 수도 있겠다) 비평의 과녁이 ‘지금 여기’에 있다면 (그것을 철회하지 않는 한) 어떻게든 독자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비평은 문인들이 전유해서는 의미 없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어떻게? 어떻게 폐쇄적인 공론장에서 빠져나올 것인가. 그것은 제도나 자본논리에만 결부되어 있는 것인가, 혹은 비평의 방법론까지 문제삼을 수 있는 주제인가. 방법론까지 문제삼는 것은 온당한가? 그러니까 필요 이상의 책임론인 것은 아닌가? 내게는 아직 간단한 문제로 보이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Axt”, “문학3” 등 일련의 문단 사건들 이후로 등장한 독립 문예지들에 주목하고 있는데 이런 시도들의 궤적을 앞으로도 예민하게 쫓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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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을 독자적인 예술이라 부르는 것은 가능한가. 작품을 다루며 등장하는 텍스트가 그 자체로 다시 작품이 될 수 있나. ‘유려한 문체의 비평문’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이는 미적인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도 연관한다.

혹은 ‘메타소설’은 비평이라고 이름할 수 있나. 최소한 ‘비평적’이라고 이름하는 데는 문제가 없나. 문학의 방법을 묻는 문학 작품들은 언제나 있어왔다. 그들을 ‘비평적이다’, 라고 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 이 물음 또한 비평 혹은 ‘비평적’인 게 무엇인지와 닿겠다. 역전시킬 수도 있는 일이다. 메타소설이 비평이 될 수 있다면 비평은 메타문학적 문학이 될 수 없을까.

이건 계속 실험해보아야 할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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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모든 정식화(혹은 간략한 답변)는 어떤 전제 위에 서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전제 위에 서 있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 전제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은 문제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함정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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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무엇인가, 라는 답변은 비평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확정적인 답을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질문을 확정할 수 있다. 생각건대 다음 물음, 더 본질적인 물음은 문학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어야 한다.

파상
studien618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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