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리의 그림자로 밀려날 때 저 밑바닥으로부터 번져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우리의 어둠으로 몰려갈 때 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은 무엇인가. 뒷모습은 뒷모습으로 말한다. 뒷모습은 뒷모습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우리의 뒷모습으로 살아남아 오래전 그 해변을 걷고 있다. 그 옛날의 우리로서 오늘의 이 해변을 걷고 있다. 누군가의 손이 누군가의 손을 잡았을 테고. 누군가의 마음이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렸을 테고. 누군가의 눈이 누군가의 눈을 지웠을 테고. 누군가의 말이 누군가의 말을 뒤덮을 테고. 노을은 우리의 뒤쪽에서부터 서서히 몰려왔고. 서서히 물들였고. 서서히 물러났고.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보려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마치 죽어가는 사람처럼. 언덕. 둔덕. 언덕. 둔덕. 언덕. 둔덕. 언덕. 둔덕.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진창에 빠지는 기분으로. 울음. 물음. 울음. 물음. 울음. 물음. 울음. 물음. 한 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점점 더 물러나는 기분으로. 그때에도. 이미. 벌써. 여전히. 아직도. 이것이 우리의 끝은 아니라고 믿는 마음이 있었을 테고. 순도 높은 목소리 사이사이로 몇 줄의 음이 차례차례로 울렸을 테고. 뒤가 없는 듯한. 이미 뒤가 되어버린 듯한. 어떤 나지막한 목소리 사이사이로. 어떤 풍경이. 어떤 얼굴이. 어떤 기억이. 어떤 울음이. 점점이 들렸을 테고. 귀신에 들리듯. 바람에 날리듯.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너는 지금 사라져가는 무언가를 보고 있다고. 너는 지금 사라져가는 무언가를 듣고 있다고. 사라지는 것과 사라지는 것 사이. 그 사이와 사이. 다시 그 사이와 사이사이의 사이. 사라지는 이 순간만이 오직 아름답다고. 우리가 우리의 목소리로 사라질 때 저 너머에서 다가오는 것은 무엇인가. 밤은 밤으로 다시 건너가고 있는데. 하루는 하루로 다시 기울고 있는데.

이제니. 「이것이 우리의 끝은 아니야」 전문.

이제니의 시집을 처음 읽었을 때는 의아했다. 스타일에 비해서 담고 있는 내용이나 감정이 별것 없어 보였다. 스타일이 압도적, 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인용한 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언덕. 둔덕. 언덕. 둔덕.’ 이나 ‘울음. 물음. 울음. 물음.’ 식으로, 혹은 ‘뒷모습은 뒷모습으로’, ‘밤은 밤으로’, ‘하루는 하루로’ 식으로, 반복을 활용한 리듬감이 두드러진다. 다른 시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적극적인 방법으로 리듬을 만드는 시인이다. 그래서 이 시인의 좋음은 시를 직접 발음하며 따라 읽는 경험에 있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동시에, 그걸 빼면 어쩐지 안일하고 의뭉스럽지 않은가도 생각한 것이다. ‘뒷모습은 뒷모습으로’, ‘밤은 밤으로’ 같은 말들은 리듬을 만들 뿐 시의 깊이를 만든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인용한 시 이외에도 이런 문장들이 정말 많이 나오는데, 어쩐지 언어를 확장하지 못해서 찾아낸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시적 대상을 사유하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춰버린 게 아닌가 하는 의문.

이런 구조의 문장들이 일종의 수수께끼 혹은 선문답을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X는 Y다’ 식의 진술이 아닌 ‘X는 X다’ 식의 진술에서는 아무래도 새로운 의미가 즉각적으로 발생하지는 않으니까. 이제니는 이런 종류의 진술로 질문과 답을 하곤 하는데, 읽을수록 속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어려운 걸 있어 보이게 풀어 놓는달까. 그러다보니 결국 리드미컬한 스타일을 위해서 단어들을 희생하고 있는게 아닌가 의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그런 의문들 때문에 이 시집을 두 번째 두 번째 읽게 되었는데 안일한 건 나였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시를 어떻게 읽냐고 시가 너무 어렵다고 혹은 시 그 재미없는 거 왜 읽냐고 했던 지인들에게 그동안 나는 이렇게 답해왔다. ‘그거 고등학생 때처럼 해석할라구 해서 그래. 그냥 있는대로 읽어.’ 물론 ‘있는대로 읽어’라는 말에는 약간의 어폐가 있지만. 중요한 건 앞의 말이다.

시는 해석하려고 하면 참 이상해진다. 시인이 숨겨놓은 의미를 찾으려고 돌아다니다 보면 점점 시에서 멀어질 때가 많다. 애초에 시인은 보물찾기의 기획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 이면의 의미 찾기’에 경도된 읽기는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우스운 꼴이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데 내 꼴이 그 꼴 비슷한 건 아니었는지. 시어들 하나하나의 의미를 해석하려 했던 정도는 아니지만, 나 역시 시를 지나치게 시꺼먼 마음으로 읽기를 고집했던 거 아닌지. 그런 생각이 퍼뜩 들게 됐다.

나무는 숲으로 이르고 숲은 바람으로 이른 아침 여위어가는 얼굴로 바람이 말한다 사물들을 가만히 두어라 아무것도 움직이지 말아라 그저 가만히 놓아두어라 이미 그러하다 이미 그러했다 말라가는 가지들처럼 마른 바람이 불어온다
[…]
순간의 감정을 대신할 또 다른 감정을 찾기를 포기하라 사물들을 가만히 두어라 아무것도 움직이지 말아라 그저 가만히 놓아두어라 그저 가만히 놓여 있어라 보이지 않는 입이 있어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있어 무수히 되뇌었던 말들을 다시 소리 내어보는 것인데
[…]이제니. 「나무의 나무」 일부.

다시 읽으면서 눈에 들어온 시다. 어쩌면 이제니의 스타일은 적극적인 기획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사물이나 감정을 수사하는 다른 말을 찾지 않고 그대로 두려는 시선이 그 출발점이다. 누군가의 뒷모습은 그저 뒷모습일 뿐, 그 등이 짓는 표정은 바로 그 등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 다른 말을 찾으려 하면 자주 실패한다. 하나의 대상이 갖는 의미를 다른 대상으로 돌려 대신 말하려는 일은 오히려 원래의 대상에서 멀어지곤 한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말하는 일, 시가 잘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는 그런 게 아닌가. 오히려 뒷모습을 뒷모습으로 둘 때에야 ‘바로 그 뒷모습’을 가장 잘 전할 수 있는 길이 생기는 거 아닌가. 이제니의 동어반복은 의미를 고정하지 않고 열어 두는 셈이다. 한 언어를 다른 언어에 종속시키지 않음으로써, 그 열린 공간에서, 바로 그 언어가 곧게 선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포기나 유보가 아닌 것 같다. 어쩐지 그렇게 변호하게 된다. 오히려 하나의 방법을 찾은 쪽이라 하겠다. ‘울음. 물음. 울음. 물음.’ 하고 중얼거리는 화자, ‘한 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점점 더 물러나는 기분으로’ 단어들을 발음하는 화자가 여기 선명하게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의 끝은 아니라고’ 믿으면서, ‘우리가 우리의 목소리로 사라질 때 저 너머에서 다가오는 것’을 물으면서. 언어로 쉽게 응결하지 않고 사라지기만 하는 것들을 보면서, ‘사라지는 것과 사라지는 것 사이. 그 사이와 사이. 다시 그 사이와 사이사이의 사이’를 파고들면서.

어떻게든 말을 하고 있는 이 화자, 무기력이 아니라 구체적인 자세와 감정을 가진 화자, 수사와 비유에 휩쓸리지 않고 정확하게 보고 말하려는 화자가 이제니식 시론詩論의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중얼중얼 단어들을 반복하면서 구축하는 리듬은 스타일 뿐인 스타일이 아니라 그 화자의 ‘언어적 몸’으로서 정당성을 갖게 된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 다른 의미를 찾으려는 내 시도는 실패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를 직접 따라 읽으며 이제니의 화자가 되어 보는 경험, 같이 중얼중얼거리며 언어들을 반복하고 거기서 바로 그 언어들과 가까워지는 경험. 그게 생각보다 중요했다. 나는 시작된 적 없는 보물찾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니의 화자는 아무것도 숨긴 적 없다.

*

얘기하다 보니 생각나는 화자가 하나 더 있다. 소설가 박솔뫼의 화자다. 지금 문단문학 장르에서 가장 특이한 문체를 가진 작가 중 하나가 박솔뫼일 것이다. 그의 화자는 혼자 묻고 혼자 답한다. 하나를 이야기하다가 다른 곳으로 새었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통사에 어긋난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문장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방심하고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길을 잃는다. 처음 읽으면 퍽 당황스럽다.

혼자서 기차역 같은 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보면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게 될 때가 있다.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지나가고 가끔 누군가는 홀로 지나가고 나는 부산에 여러 번 왔습니다 나는 부산을 기억하고 부산은 나를 기억하고 하지만 누구도 나를 증언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역을 빠져나왔다.

박솔뫼. 「부산에 가면 만나게 될 거야」. 120p.

이런 식이다. 마침표도 없이,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혹은 말하는 것을 그대로 서술하곤 한다. 박솔뫼의 이 스타일도 내게는 꽤 오래 의문이었다. 이 화자는 왜 이렇게 말할까. 그런데 최근에 이제니를 읽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어쩌면 박솔뫼의 화자도 ‘적당히 말하는 일’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닌가 하고.

박솔뫼의 「부산에 가면 만나게 될 거야」는 ‘가장 중요한 것은 말입니다’ 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그것은 말입니다라고 대답한 사람을 알고 있다. […] A가 어떻게 그 대답을 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질문에는 나라도 침을 한 번 삼키고 같은 대답을 했을 것이다. 간신히 힘을 짜내서 말입니다 하고. 말입니다라고 말하는 말의 힘을 몸의 아래에서부터 느끼며. (113)

박솔뫼. 앞의 글. 113p.

그리고 화자는 작가다. 정황이 명료하게 주어지지는 않지만 출판사와 계약 하나를 하고 심란해진 모양이다. 계약서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고 한다.

A4용지에 박힌 말들은 흥미로웠다. 손해배상 같은 단어는 확고한 형태였으나 그 단어와 합해지는 동사는 ‘있다고 할 것입니다’로 결론을 못 내리고 미적거리고 있었다. 그 둘이 합해지면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같은 이상한 리듬을 가진 문장이 된다. 읽다 보면 어쩐지 ‘있다고’에서 한 번 쉬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려고 그러는 것도 아닌데. 나는 ‘있다고 할 것입니다’가 반복되는 내용증명을 다시 읽었다. 있다고 할 것입니다 있다고 할 것입니다 있다고 할 것입니다.

박솔뫼. 앞의 글. 115p.

‘있다고 할 것입니다’는 아무래도 ‘오염된 말’, ‘적당한 말’이다. “갈팡질팡하고 미적지근한데 신중하지는 못하고 될 대로 되라는 느낌에 어쩐지 너를 괴롭힐 수 있다는 분위기를 풍기며 A4용지에 박혀 있는”(126) 말이다. 이런 모호하고 치사한 말 앞에, 화자는 상상 속에서 출판사 사람들을 다그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말입니다.’ 그래서 화자는 이 말에(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또 있다는 사실에) 어쩐지 위안을 얻게 된다. 말로 말과 싸울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화자는 부산의 거리에서 ‘있다고 할 것입니다’들을 뜯어내 바닥에 던져 버린다. 그리고 이 적당하고 오염된 말들을 없애버릴 마땅한 말을 찾는다. 그러나 말과 싸울 말을 찾아내기도 전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들은 제들끼리 치고받고 하다가 서로를 다 죽여버린다.

부산에 찾으러 온 건 말과 싸울 말, 말을 넓힐 말이었는데, 찾기도 전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들이 다 죽어버렸으면 이 화자는 실패한 건가? 소설은 조금은 모호하게 끝난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말을 쉽게 찾을 수 없는 게 당연한지도. 그거야말로 중요한 걸지도. 이를테면 이런 중얼거림들은 성패에 상관없이 유효하다.

노래가 들리고나 바람이 불거나 오염된 말로부터 나의 말을 지키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할 수밖에 없다 그 모든 것을 하고 목소리는 반복해서 말하고. 그래서 당신의 말은? 오염되지 않은 말인가? 하는 질문이 귓가를 맴돌고 그 모든 것을 증언하고 증명하고 죽이고 그들 스스로 죽는 것을 목격하고 싸우는 것을 쓰고 말하고 입을 벌리는 것을.

박솔뫼. 앞의 글. 129-130p.

그저 계속할 수밖에 없는 걸지도 모른다. 다만 말들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적당하고 오염된 말들을 조심하면서. “천천히 이인삼각하듯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움직여야 할 것이다.”

박솔뫼. 앞의 글. 132p.

‘천천히 이인삼각하듯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박솔뫼 화자의 말투가 바로 이게 아닌가. 우리가 이야기를 할 때 아무렇지도 않게 적당한 말들을 내뱉곤 하니까 그런 말들은 종종 문제인데 문제를 삼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인지 원래 문제여서 문제인 건지 알 수 없지만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다 보면 그건 확실히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말들을 문제없이 내뱉게 되므로.

그러니까 박솔뫼의 문체는 정확한 말을 하기 위해서 말을 머릿속에서 곱씹고 곱씹는 화자의 말투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서술은 어쩌면 그런 주체의 내면이 가장 사실주의적으로 드러난 사례, … 그런 사례…

라고 할 수, 있을 것, … 이다.

이런 세상에.

*

적당한 말로 끝내지 않으려 했는데 참 어렵다. 비평은 적당한 말이 아닐 수 있나. 정확한 비평이 가능한가. 대체 비평이 뭘까. 잘 모르겠다. 텍스트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만 정확히 말하고 싶다. 그럴 수 없다면 그럴 수 없는 이유를 정확히 알고 싶다. 적당한 말은 이제는 정말이지 그만하고 싶다.

이번 글을 준비하면서 적당한 희열과 적당한 불안을 느꼈다. 사실 비평에 재미를 붙이고 나서부터는 매번 그렇다. 텍스트만 가지고 텍스트를 벗어나는 일, 같은 말들을, 나는 아직은 적당하고 무책임하게 쓰고 있다. 작년에 그렇게 고민했으면서도 답을 내리지 못한 문제들이 많고, 그 문제들에 나름의 답을 내리기 전까지는 내 모든 비평은 적당한 꾸밈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계속해서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언어 언어 언어를 가만 입안에서 굴려 보는 이제니의 화자처럼, 혹은 이인삼각하듯 천천히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옆으로 샜다 하는 박솔뫼의 화자처럼. 말의 어려움에 짓눌리지 않고 어떻게든 말해내는 방법을 찾아낸 이 화자들처럼, 혹은 이들과 함께.

아무래도 연초부터 좋은 동반자를 만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문헌

이제니. (2014).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서울: 문학과지성사.
박솔뫼. (2017). 『겨울의 눈빛』. 서울: 문학과지성사.

파상
studien618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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