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1995. 〈환상의 빛〉

왜 우리는 늘 과거를 숨긴 채 사랑해야 할까? 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과거에 늘 상처받고 마는 걸까?

너희는 장례 행렬만치 죽음을 홀려 따르고, 남겨진 우리는 이끼 낀 너희를 따라 그 멀리를 눈으로 좇는다. 이것은 시각적 애도의 밤.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이렇게 적었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다리를 건너간다. 고향에서 죽기 위해 고향으로 간다고 했다. 아이는 으레 그랬듯 누군가 집으로 모셔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끝내 다리를 건너가버렸다. 꿈에서 깨어난다. 아이는 어른이 되었다. 꿈 속에서 자전거를 타던 소년은 아이의 남편이 되어 곁에 있다. 아이는 자신이 할머니를 포기한 것만 같아 두려워진다. 어릴 적 같이 놀던 소년과 소녀는 결혼을 했고, 3개월 된 아기도 있다. 그들은 소박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간다. 훔쳐온 자전거를 같이 녹색으로 칠하고, 웃고, 장난친다. 서로를 응원하고, 믿고 의지한다. 그리고 남자가 자살한다.

문장들이 빗겨나간다. 이미지들도 문장들을 따라 빗겨나간다. 서로를 응원하고, 믿고 의지하다가, 그리고 남자가 자살하다니? 온갖 의뭉스러움이 관객들을 덮친다. 그들은 30분도 채 안 되는 스크린타임을 기억으로 훑으며 남자의 행동들을 더듬어본다. 여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그가 훔쳐온 자전거를 타고 그가 걸어왔을 터널과 전차께를 훑는다. 도대체 왜 자살했을까? 그녀는 줄곧 고민한다. 자전거를 끌며 고개를 떨군 채. 그를 앗아간 전차는 무심한듯 순환하고, 계속해서 그녀 뒤로, 옆으로 지나쳐간다. 이윽고 화면이 검어진다. 

Fade In. 자전거에 녹이 슬었다. 아기는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고, 그녀는 전차 소리가 듣기 싫어져 중매로 이어진 남자의 고향으로 떠난다. 마지막으로 그와의 사진들을 들여다 본다. 전차를 타고 도망친다. 전차의 소음을 떠나 파도의 소리 곁으로. 여자는 정물(靜物)과도 같은 이미지로 현상된다. (사람이) 비어있는 공간의 풀샷은 인서트이다. 그것은 장면과 장면 사이의 전환을 위해 각종 영화들에서 ‘삽입’된다. 허나 일반적으로 그러한 인서트는 전후 화면의 사운드와 함께 가기에 실제로 ‘비어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여자가 바닷가로 이사온 후 유독 인서트의 이미지들이 영화 곳곳에 흩뿌려진다. 그러나 그것들은 비어버린 사운드와 함께 온전히 빈 공간으로 작용한다. 빈 공간들이 차례로 이어진다. 신발장의 신발, 비어버린 계단, 그리고 정물이 되어버린 주인공이 등장한다. 앞선 이미지들과 별다를 것도 없다는 듯이. 다시 한 번 집. 복도. 다리미판. 시계. 그리고 여자. 앞선 이미지들과 별다를 것도 없다는 듯이.

그리고 많은 것들이 바뀌어간다. 자전거 대신 하얀 차를 끌며, 지배적이었던 녹색은 새로운 집 그 곁의 바다, 그것과 같이 푸른색으로 대체된다. 이는 ‘물들어감’과 전적으로 다르다. 이쿠오와 유미코는 훔쳐온 자전거를 들키지 않기 위해 그 위에 녹색 페인트를 칠했다. 이제 그녀의 새로운 삶을 가득 채우는 파란색은 훔쳐온 것 위에 덧칠한 페인트이다. 영화의 분위기 자체도 갑작스레 변하는 듯하다. 그녀와 자살한 전 남편 사이의 아들과, 현 남편의 딸아이가 뛰어논다. 바닷가를 넘어 자꾸만 뛰어간다. 그들은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넘어 잔잔한 호숫가에 자신들의 반영을 가득 담고 뛰어간다. 단박에 영화는 아이들의 생기를 이어받는다. 그들의 일상들이 뛰어놀고, 심지어 여자가 가족과 수박을 먹으며 영화에서 최초로, (그리고 최후로) 웃기까지 한다.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라는 일종의 트라우마들을 그녀는 이겨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로 이겨낸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트라우마들은 이겨야만 하는 것일까? 서두에 적었던 최초의 슬픈 문장이 되살아난다. 왜 우리는 늘 과거를 숨긴 채 사랑해야 할까? 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과거에 늘 상처받고 마는 걸까? 그녀는 과거를 숨긴 채 사랑했지만, 사랑하기 위해 과거를 숨긴 것이 아니다. 그녀는 살아가기 위해 과거를 숨겼다. 숨겨진 것은 없어지지 않고 사진첩에 적은 시각적 문장처럼 되살아난다. 남동생의 결혼을 위해 찾아간 본가에는 숨겼던 그와의 기억만이 있을 뿐이다. 그녀가 그곳으로 가기 위해 타야 하는 것은 전차이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것은 터널이다. 그곳은 자전거와 전차가 내는 소리로 뒤덮인 세계이다. 그것은 그와 살았던 공간에서 ‘살아 있는’ 것들이다. 유독 영화는 전 남편에 대한 애도 작업을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 자체가 서둘러 일을 수습하고 그녀가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여자가 처음 바닷가 집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죽어버린 시어머니의 위패가 있다. 시아버지는 새로운 여자를 아내로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애도의 권리를 누리며, 여자는 그러지 못한다. 과거를 덮어놓은 채 사랑하고 살아간다.

우리는 과거를 잊거나 기억하며 살아간다. 오히려 자주 잊고 가끔 기억하거나 자주 기억하고 가끔 잊으며 살아간다. 한 쪽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녹색은 녹슬어도 녹빛인데, 바래지도록 놔두기만 한다고 잊힐리가 있겠는가? 여자가 새로운 가정에서 안정을 찾아갈 때에도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는 계속해서 인서트로 삽입된다. 파도는 전차이다. 순환하고 순환하며,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 자전거가 차로 바뀌었어도 여전히 굴러가는 것이며, 녹색이 푸른색으로 바뀌어도 여전히 유사성을 띄고 있다. 그리고 자전거 열쇠에 붙여놓았던 방울의 딸랑거림이 있다. 전 남편 이쿠오는 옆집에서 나는 라디오 소리가 독거노인이 살아있는 신호라고 하였다. 방울의 딸랑거림. 그것은 죽은 자의 생존 신고이다. 기억 속에서 그들은 내가 아직 너에게 ‘살아 있다’고 아우성친다.

망망대해를 보며 잊혀져 가는 누군가를 기억하는 것. 언제나 먼 지평선 너머로 그런 기억들이 부유하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또다시 여자는 초반 시퀀스처럼 꿈에서 깨어난다. 앞선 꿈과 이 꿈은 둘 다 블랙으로 쇼트를 단절시킨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둠을 촬영하여 연결시킨 것이다. 이는 전등의 명멸과 창문의 환기로 드러난다. 이러한 장면들은 영화 중반부에 등장한 녹이 슬어버린 자전거 이전의 블랙으로의 장면 전환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꿈을 매개로 기억을 마주할 때 그것은 현재와 과거의 직접적인 만남이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가서 쇼트와 쇼트 사이를 단절시키는 블랙을 끼워넣는 것이 아니다. 현재와 과거는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

토메노 할머니는 거센 파도를 헤엄쳐 살아 돌아온다. 유독 어르신이 많은 이 고령의 동네에서 그들은 많은 이들을 떠나보내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떠난 이들을 애도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들 앞에 놓인 먼 지평의 바다에서 시아버지처럼 담배 한 대를 물고서. 여자는 다시 한 번 도망치려는 듯하다. 이 때 다시 방울이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가 죽었고, 검은 무리가 일렬로 걸어간다. 그녀는 그 행렬을 따라간다. 걸어간다. 모두들 주근깨 정도의 크기로.

바다 사이에서 그녀가 드디어 불을 피웠다. 온 몸으로 그를 애도한다. 후경에는 파도가, 전경에는 잔잔한 물에 비친 그녀가 있다. 그녀가 남편에게 묻는다. 그는 도대체 왜 죽었을까요. 나는 이해가 안 돼요. 남편이 말한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유혹하는 빛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남편은 영화 내내 묻는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졌는지, 그리고 지금 여기가 싫어졌는지. 그녀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녀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과거를 현재로 데려올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우리의 삶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 불명> 같은 터널을 갖고 있지 않다. 터널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행시켜주지 않는다. 온갖 기대로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의 빛을 향해 내딛을 때, 나와보면 여전히 ‘삶’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그저 우리가 좀 더 편하게 걸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아이들이 뛰어놀던 장면을 다시 기억해보자. 그들은 기어이 푸른색들 속에서 터널을 찾아냈고, 저 멀리에서 찬란한 녹색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 녹색은 영화 전반에 걸쳐 있는 탁한 색이 아닌, 진정한 녹‘빛’이다. 그것은 다른 세계가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공간. 자동차를 탄 어른들은 결코 바닷가를 떠나 좁다란 도랑과 웅덩이들을 뛰어다니지 못했고, 그랬기에 찾기에 힘들었던 광채들. 아이는 자전거를 배우기 시작한다.

지아 장 커의 <플랫폼>처럼 이 세계도 유독 클로즈업이 적고 정적인 고정 쇼트들로 인해 건조하다. 감정과 인상에 녹이 슨다.

산화되고 남은 부식물도 여전히 감정이라는 것이 퍽 신기한 밤이다.

밤비
tpdyd830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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