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소 쿠아론. 2018. 〈로마〉

그런 카메라가 있다.

클레오가 주인집 아이를 재운다. 또 다른 아이 토뇨를 지나쳐 1층으로 내려온다. 넓은 거실에서 클레오는 6개의 조명을 끄고, 1개의 스탠드를 켠다. 씻어야 할 찻잔과 함께 부엌으로 나간다.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카메라는 계속해서 패닝한다. 패닝하고, 또 패닝하다가 360도를 넘기기까지 한다. 이 때 카메라는 그 무엇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여기서 일반적 영화 기법에서 등장 인물이 갖는 ‘프레임에 대한 우위’는 전복된다.

장-피에르 우다르나 스티븐 히스 같은 봉합론자들이 카메라와 관객의 관계를 어떻게 조정하려 했는지와 상관 없이, 적어도 카메라는 줄곧 관심의 대상을 ‘포착’하기 위해 일련의 노력을 취해왔다. 허나 <로마>에서는 놀랍게도 카메라와 등장 인물 간의 관계가 재조정된다. 등장 인물의 위치, 행동과 관계 없이 일정한 속도로 패닝하는 카메라 속에서 클레오는 마치 어떻게든 카메라가 쥐어준 제한 시간 동안 본인의 임무를 완료하고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바둥거리는 것과 같다. 프레임이 등장 인물, 심지어 ‘주인공에 대한 우위’를 점한다. 카메라와의 경주는 그녀가 가정부로 일하는 ‘집’을 벗어나서까지 계속된다. 카메라가 주는 임무, 타임 어택은 외부로까지 범람한다. 클레오는 자신과 같이 일하는 가정부 친구와 함께 식당으로 달린다. 카메라는 달리 트래킹으로 빠르게 앞으로 나아간다. 한 명이 차에 치일 뻔하면서 프레임에서 벗어나는가 싶다. 카메라는 기다려주지 않고, 등장 인물들은 간신히 목표 지점에 도달한다. 이 모든 기획 속에서 카메라는 흘러가는 무심한 시간과도 같다. 그렇게 영화라는 하나의 완결적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역설적이게도 ‘주변부 인간’이 된다.

탈색된 영화는 시간에 대해 말하면서 반(反)-시간적이다. 본 영화의 탈색은 감독의 회상적 이미지들을 위해 쓰였다. 자신을 돌봐주었던 유모 ‘리보’를 위한 헌정이 엔딩과 함께 등장하고, 흑백처리된 영화는 한층 더 빛바램의 정당성을 얻는다. 그러면서도 흑백 영화는 모든 것들의 외적 차이를 지운다. 유사성의 세계에서 탈색되어 남는 건 운동과 소리 뿐이다. (이 지점에서 흑백 영화는 반(反)-시간적이게 된다.) 그리고 주변부 인간이 된 클레오는 이 ‘운동’과 ‘소리’에 의해 세상에의 주인공성을 빼앗긴다. ‘운동’과 ‘소리’는 그녀의 세계, 그녀의 영화에 침투, 침범, 침입한다. 먼저 운동을 보자. 흑백 영화에서 시선은 자칫하면 길을 잃는다. 이곳에서 포획은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히 이 영화에서처럼 클로즈업을 자제하고 공간에 많은 것들이 작게 배치되어 있을 때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응시를 통해 먼저 주인공을 찾아보려 한다. 이 때 또한 우리는 움직이는 것, 그리고 소리나는 것에 반응한다. 그리고 움직이는 것과 소리나는 것은 번번히 주인공이 아닌 어떤 것이다.

클레오와 페르민이 영화관에 있다. 등장 인물들이 전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면의 중심부에 위치한 스크린 속에서 영화 속 이미지는 끊임없이 운동하면서 시선을 끈다. 바르트가 말한 바와 같이 영화관은 ‘영화’를 ‘꿈, 환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모든 집중을 한 곳으로 이끄는 공간이다. 클레오는 페르민에게 임신 사실을 알린다. 페르민은 좋다고 말하지만 도망친다. 영화는 멈추지 않는다. 드디어 영화가 막이 내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퇴장하는 운동 속에서 클레오는 함께 밖으로 나온다. 클레오가 계단에 앉아 페르민을 기다린다. 이제 침입하고 침범되는 그녀의 시간을 온연히 보여주는 쇼트가 시작된다. 계단에 앉은 클레오를 잡고 있는 프레임의 왼쪽으로는 봉지에 무언가를 담아 팔고 있는 상인의 팔이 들어와 있고, 우측 상단에는 또 다른 상인의 팔에 의해 이리저리 튀겨지고 있는 난잡한 풍선의 움직임이 침투해 있다. 그리고 가장 놀랍게도 좌측 상단으로 다리가 걸려 있는 상인이 자신의 상품을 소개하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아예 프레임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자신의 것들을 팔기 위해 끊임없이 관심을 요구하고 소리친다.

도망간 페르민을 찾아 클레오가 교련장에 찾아갈 때에도 동일한 상황이 반복된다. 버스에서 내린 클레오가 전경에서 후경으로 물러갈 때, 그 뒤에 거대한 스펙타클이 자리하고 있다. 대포 같은 것을 통해 쏘아져서 트램펄린을 하는 서커스 같은 장면이 소리와 함께 우리를 집중시킨다. 그리고 그 속에서 클레오는 서서히 작아진다. 다음 쇼트에서도 클레오는 방해받는다. 그녀가 가는 길 앞으로 먼저 한 아이가 이상한 양동이를 뒤집어 쓰고 뛰어 다닌다. 그 소리지르는 작은 짐승에 의해 우리의 목적성은 온데간데 없어진다.

소리치는 것들. 그들은 관심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런 소리들로 가득차 있다. 이는 비단 화면 안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화면 바깥의 것들마저 우리를 클레오로부터 떨어뜨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앞서 언급한 영화관 장면 뿐만 아니라 클레오, 그리고 그만큼이나 남편 앞에서 무력했던 사모님이 자신의 남편을 떠나보낼 때, 군악대의 행진 소리가 시끄럽게 들린다. 이윽고 남편의 출발과 진행 방향을 같이 한 카메라에 의해 그 군상이 프레임 인하게 되고 후경의 등장 인물들을 가리며 전경을 침범해 간다. 감독이 사운드를 폭력적으로 가공하는 또 다른 방법은 놀랍다. 클레오와 친구가 휴게 시간에 찾아간 식당에서, 그리고 집에서의 여가 시간에 영화는 그 시퀀스들을 TV화면의 클로즈업을 통해 시작한다. (또 어떤 장면은 레코드 판이 돌아가는 것을 시작으로 진행된다.) 그 후, 전자의 다음 쇼트는 그들의 식사를, 후자의 다음 쇼트는 TV를 바라보는 가족들 사이에서 일하고 있는 클레오를 비춘다. 이 때 우리는 직전 쇼트들의 잔상을 느낀다. 즉 충분히 작아졌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TV의 소음을 의식하게 된다. 후자의 장면에는 또 다른 무언가가 숨어 있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이 시퀀스 속에서 마찬가지로 패닝하는 카메라 속에서 클레오를 제외한 가족은 온전히 TV를 보며 웃고 있다. 클레오는 분주히 일하며 틈틈히 웃는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일을 정리한 후 그들보다 낮은 좌식 방석에 합류해 웃기 시작하고, 아이가 그녀를 감싼다. 그 순간 사모님의 지시로 또 다시 클레오는 주방으로 향한다. 그녀와 그들은 가족이 아님이 확실시 된다. 심지어 사모님의 어머니와 클레오가 곧 태어날 그녀의 아기를 위해 침대를 사러 갈 때는 직접적으로 사운드가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들이 2층의 가게로 들어가 물건을 고르려고 할 때, 시위대와 경찰대가 충돌하기 시작한다. 거대한 사운드와 스펙터클로 인해 주인공들을 포함한 가게 안 사람들은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마치 우리가 줄곧 그래왔던 것처럼. 심지어 가게 안으로 시위대와 무장 단체가 ‘침투’한다. 총소리가 ‘침투’한다. 무장 단체 속 페르민이 클레오에게 총을 겨눈다. 페르민은 그녀를 쏘지 않지만, 마치 총을 쏘는 듯한 시선을 쏜다. 총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마땅히 있어야 하는 소리의 부재. 이것 또한 감독의 기획에서 확장된다. 클레오에게 가장 큰 폭력은 무소음으로 다가온다. 시위대로 인해 그녀 일행은 제 때에 산부인과에 가지 못 한다. 의사가 클레오를 절개한다. 아이가 나온다. 그러나 울음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당연히 들려야 할. 이 때부터 클레오는 말수가 적어지고, 소리를 잃는다.

여기까지 논의한 지점들을 통해, 우리는 시간을 닮은 카메라가 그 속의 탈색된 세계가 갖는 운동에의 집중, 즉 탈-시간적 이미지와 충돌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이 충돌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이 결합되는 지점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영화가 주인공에 대한 침범의 폭력, 침입을 가하는 방식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영화가 끝까지 이런 비참함만을 이끌고 가는 것은 아니다. 분명 클레오는 치유 받고 나아갈 힘을 얻는다. 그러한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는 지금까지 논의되어 왔던 것이 사라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삶의 폭력성을 인정하는 것. 연대하는 것. 나도 움직이는 것. 나도 말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그저 살아가는 것을 통해서. 클레오가 원치 않던 아이를 갖게 되는 순간과 사모님이 아버지로부터 원치 않는 버림을 받는 순간은 엇비슷하다. 그리고 남편이 자신의 물건들을 가져갈 수 있도록, 그리고 아이를 잃은 클레오를 위로할 수 있도록 사모님이 주도한 여행에서 클레오는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한다. 여기에 거대한 파도가 있다. 거대한 파도는 거대한 사운드와 거대한 운동 그 자체이다. 수영도 하지 못하는 클레오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그 파도를 역행한다. 그리고 아이를 구한다. 사모님과 다른 아이들이 달려온다. 클레오와 아이를 부등켜 안고 그들은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 (흑백의 영화 속 그들의 유사성 덕이다.) 이 때 클레오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내가 원한 아이가 아니라고,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다고.

이 영화의 가장 눈부신 지점은 이러한 변화의 지점 이후의 삶이다. 외적으로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들이 집에 도착할 때 군악대가 시끄럽다. 그렇게 그들의 앞을 지나쳐간다. 카메라는 여전히 빠르고 일정한, 특유의 무심한 패닝으로 클레오에게 임무를 준다. 그녀가 빨래를 널러 옥상으로 향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청소하는 물에 비친 비행기를 내어보인 그것과 같이 하늘의 비행기를 보여주며 고정된다. 일반적으로 영화 촬영 시 비행기는 애물단지이다. 시끄러운 녀석이 음역대, 볼륨도 다양하여 등장 인물들의 사운드를 깎아 먹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비행기는 마치 ‘시끄러운’ 시간에의 유비처럼 보여진다. 그렇게 겉보기에 삶은 계속된다. 시끄럽고 일정하게, 아랑곳하지 않고 운동하며.

그럼에도 그녀는 이제 괜찮을 것이다. 그녀는 이제 지속을 살아간다.

추신. 세르쥬 다네의 ‘<카포>의 트래블링’을 읽었다. <우게쯔 이야기> 속 카메라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주인공의 죽음을 마주하지 못하고 흔들리고 고개 돌리며, 주인공은 거의 프레임을 벗어날 뻔한다. 파노라마 카메라. <로마> 속 연대 이후의 여전히 무신경한 패닝과 트래킹 속에서 불안과 두려움과 미안함과 속상함이 보이기 시작한다.

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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