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행위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즉, 우리가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누군가가 어떤 행위를 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서 묻고자 하는 것은 욕망에 의해서 충동되고 도덕에 의해서 조절되는 심리학적 기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의지’까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의도’로부터 출발한 어떤 것이면서, 동시에 신체의 운동으로 드러나서 신체의 ‘바깥’까지 작용하는 것이라는 이중성이 어떻게 해명될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즉 다음과 같이 바꿔 말할 수 있는 문제이다. 세계가 우리 앞에 있고, 우리는 그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고 하자. 우리가 알 수 있을 만한 것은 충분히 안다고 하자. 다시 말해 우리는 세계를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하자. 자연은 그 어떤 개입 없이도 스스로 변화하며 유지된다고 하자. 여기에서 도대체 행위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자연은 자연 내적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고, 그 어떤 생vie도 그 바깥에 있지 않다면, 무엇인가 ‘인위적’으로 보이는 것, 흘러가는 대로의 세계에 변형을 가져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의도’ 혹은 ‘목적’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존재하는 것들, 사물들의 세계 속에 자신을 ‘관철하는’ 듯 보이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편, 행위는 우리가 삶을 지탱하기 위한 일상적 활동 속에서 가장 개별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삶 혹은 삶들을 바꾸기 위한 우리의 일관된 실천 속에서 가장 개별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 이중성은 어떻게 해명되어야 할지가 역시 문제이다.
그런데 우리가 신체로서/써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명확한 이상,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함이 결여된 신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 이상, 함은 삶에 ‘바짝 따라붙어 오는’ 것, 산다는 것에 결부된 ‘첫 번째’ 것임에 틀림 없다. 여기에 더해, 앞서 밝힌 이중의 이중성으로부터, ‘행위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은 정신 혹은 의식이 어떻게 신체 혹은 사물들, (감각적인) 대상들과 관계 맺는지에 관한 문제가 되며, 또한 이것으로부터 도출되는 실천적 함의에 관한 문제가 된다. 바로 이 점들이 우리의 논의를 실존이 ‘거대한’ 철학적 문제였던 1940년대의 프랑스로 이끈다.
 

B. (1)

행위의 문제는 실존의 문제의 안에 ‘접혀있다’. 다시 말해, 제기되는 방식에 있어서의 눈에 띄는 친연성에도 불구하고, 행위의 문제는 직접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실존의 문제를 다루는 철학들에서 ‘행위’는 핵심적이고 독자적인 개념으로서 드러나지 않는다) 실존의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대답들 속에 품어져 있다. 실존의 문제는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여진 실존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 삶의 조건을 밝히고 그 귀결로서 우리 삶의 성격(누군가에게는 자유, 다른 이에게는 부조리 혹은 반항, 또 다른 이에게는 애매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각각의 철학들은 여기에서 곧바로 실천을 이끌어내며, 또한 그것을 나름대로 직접 살아보인다.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여진 실존’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 이전에, 실존이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어떤 것임’, ‘어떤 것으로서 있음’ 이전에 주어진 ‘그저 있음’이며, 다시 말해 ‘있음’이 ‘~임’을 앞서 나감을 말한다. 실존의 문제란 존재에서 ‘있음’과 ‘~임’이 분리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인간이 그 어떤 것이기 이전에 이미 있는 것으로서 주어진다면, 그리고 이를 스스로 자각한다면, 이는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의식이 단번에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른바 ‘실존의 철학’들은, 각자가 어떻게 이론화되며 저술들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와는 무관하게, 공통적인 출발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그 출발점은 공통된 방법론이 아니라 — 이들 사상들은 사실 방법론의 관점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가 — 하나의 공통된 ‘느낌’, 흔히 ‘실존적 체험’이라고 불리는 것이며, 그로부터 나오는 직관이다. 이 느낌은 세계에 대한 낯설음, 의미(존재 근거)의 탈색에 따른 나와 세계의 분리, 즉 모든 것이 나로부터 멀어지고 나 홀로 덩그러니 남았다는 느낌이며, 바로 이것이 실존이 본래적으로 이중의 실존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세계의 존재 근거도 나의 존재 근거도 찾을 수 없이 나는 ‘그저 있다’. 그런데 나만이 그저 있거나 세계만이 그저 있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가 있다면 ‘근거 없이 있음’ 자체가 문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사로잡는 느낌으로부터 이끌어낸 직관, 실존이라는 사실은 곧 다음과 같다. 세계의 실존 그리고 인간(또는 의식)의 실존.
 

B. (2)*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에 의해 존재론이 된 현상학을 다시 한 번 현상학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의식에 대한’ 현상학적 존재론(이것이 『존재와 무』에 붙은 부제이다)으로 방향 전환한다. 『존재와 무』에서 그는 일단 ‘실존적 체험’의 생생함을 잊고 실존 자체만을 가져와서 이것을 면밀히 분석한다. ‘의식은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라는 지향성으로부터, 즉 모든 것이 의식에 외재적이라는 사실로부터 의식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 내용 없이, 본질 없이 그저 실존하는 것, 무로서 존재하는 것이 된다. 이에 반해 의식의 대상들, 사물들은 ‘그 자체로’ 존재하며, 다시 말해 그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정당화되지도 않은 채 그것 자신으로서 우연히 존재한다. 사르트르는 이와 같이 존재를 두 양식(‘그 자체로 있음être en soi’과 ‘자신에 대해 있음être pour soi‘)으로 나눈 다음, 각각을 세계 인간에 할당한다. 이것으로서 최초의 출발에 있었던 직관이 부활하며, 이제 존재의 두 영역 간의 관계가 문제가 제기된다.
의식이 무로서 존재한다는 것, 사물에 대한 것으로서만 실존한다는 것으로부터 곧바로 자유가 발견된다. 그런데 자유는 곧 기투(던짐)이며, 세계에 대한 기투로서 실현된다. 의식 자체는 아무 내용도 갖지 않지만 의식은 늘 구체적인 상황 속에 있으며 따라서 매 상황 속에서 기투하여 스스로를 형성해나가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르트르의 자유를 이해한다. 그것은 스스로를 만들고 변혁하는 자유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서 미래를 향해 자신을 세계에 던지는 것이다. 인간은 의식으로서의 인간이며, 아직 아무것도 아니면서 앞으로 될 어떤 것이다.
무인 의식이 곧 기투라는 것, 이것이 사르트르의 대답이다. 그리고 기투라는 개념 속에 행위가 접혀져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사르트르에게 행위는 의미나 가치를 규정할지언정 그것에 의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저것이 아닌 바로 이것을 행하기로 택해야 하는가? 행위들간의 어떤 차이도 변별의 근거 혹은 체계도 없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며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가? 바로 이 때문에 『존재와 무』에서 도덕의 문제가 예고되지만 이 책 속에서는 예고된 채로 그친다. 사르트르에게 기투는 의식만큼이나 ‘텅 비어있다’. 아마도 이 때문에 사르트르는 자유로부터 도약해서 역사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B. (3)

카뮈 역시 ‘실존적 체험’이라는 느낌 속에서 출발한다. 『시지프 신화』에서 카뮈는 바로 그 느낌에 “부조리의 감정”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는 이것을 묘사하고 보존하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곧바로 부조리 자체를 명확히 정의하기에 이른다. 부조리란 두 항의 절연, 단절, 대립이며, 즉 의미를 요구하는 인간의 호소와 의미라곤 없는 세계의 가증스러운 침묵 간의 만남, 이해하려는 정신과 우연한 사물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다. 이것은 실존의 이중성에 대한 미묘한 변주이면서 독특한 해석이다. 카뮈는 바로 이 정의 자체가 함축하고 있는 결론을 겉보기만 “추론”인 논의 속에서 곧바로 이끌어낸다. 그 결론은 실천적 요구 혹은 모든 행동에 앞선 태도이자 원칙으로 드러나는데, 그것은 바로 이 대립, 즉 부조리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 부조리를 지탱해나가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 의식을 지우지 않으면서, 의미를 묻는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서 동시에 세계에는 의미가 비어있다는 사실로부터 눈 돌리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인간은 구원을 호소하며 다시금 삶의 의미나 역사, 혹은 신과 같은 초월성으로 뛰어들어서도 안 되며 자살을 택해서도 안 된다. 이 결론을 카뮈는 바위를 끝없이 산 정상으로 밀어올려야 하지만 결코 그 운명에 진 것이 아닌, 시지프(시시포스)라는 부조리한 영웅의 이미지로 그려낸다.
같은 방식의 정의와 추론이 반항에 관해서도 전개된다. 반항은 침해당한 원칙을 긍정하는 동시에 그 침해라는 폭력에 반대한다. 이것로부터의 귀결이 오히려 두 항 간의 긴장 관계를 더 명확히 보여주는데, 그것은 불의에는 마땅히 반대해야 하지만 불의에 맞서기 위해서 또 다른 불의라는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항은 스스로에 한계를 긋는다. 부조리를 지탱하는 것이 인간을 존엄하게 만들었듯이, 이번에도 바로 긴장 관계를 지키는 것이 인간을 존엄하게 만든다. 만약 폭력에 반대하여 세르게이 대공을 죽이려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대공과 함께 탄 어린 아이까지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라, 인민을 해방시키기위한 암살이였을지라도 그 살해 자체가 또 다른 폭력이며 그것은 불가피할지라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으므로, 대공의 살해자인 이반 칼리아예프는 사형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인다(『정의의 사람들』). 시지프는 이번에는 칼리아예프가 되어 빛난다.
두 개의 항과 이들을 이어주면서 대립시키는 관계, 두 항 모두를 저버리지 않음으로서 이 관계를 지탱해나가야 한다는 실천적인 요구이자 원칙. 이것이 카뮈의 사유의 전부이다. 카뮈에게는 행위의 문제는 사르트르의 경우보다 더욱 불투명하게 숨겨져 있다. 카뮈는 행위를 단숨에 존재의 방식과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 혹은 실천의 균형으로 제시한다. 카뮈는 행위가 가능한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카뮈에게 중요한 것은 가능하지 않은 행위를 배제하려는 실천적 요구에 충실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카뮈의 답변이다. 행위가 어떻게 가능한가? — 그것은 부조리에 의해 가능하다. 다만 부조리와 반항을 지탱하는 마땅한 요구를 저버리지 않음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카뮈에게 실천은 명확하고 가시적인 폭력에 반대하는 것 이상을 넘어서기 힘들다. 왜냐하면 카뮈의 반항은 관념들의 조직을 흔들고, 그 앞에 새로운 관념들을 심는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카뮈는 옳다. 카뮈는 언제나 옳으며 그보다 더한 모범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불의에 반대하고 폭력에 맞서기 위해 또 다른 폭력을 추가하는 것은 설령 불가피할지라도 결코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노동자에 대한 억압을 제거하기 위해 여성에 대한 폭력을 눈감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은가? 카뮈는 행위에 한계선을 긋는다. 카뮈의 사유는 균형의 사유다. 그러나 그는 권력의 교묘함에 대응하여 어떤 정교한 행위를 펼쳐야 할지에 관해서는 말해주지 못한다. 그는 옳았지만 우리에겐 무엇인가가 더 필요하다. 반대해야 할 것, 거부하고 맞서야 할 것이 오늘날에는 그의 시대에 비해 덜 명시적이고 그러므로 더욱 더 교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유의 태도, 실천의 원칙들, 특히 한계에 대해서 여전히 카뮈주의자로 남아 있어야 하지만 실천의 방법, 구체적인 생을 위해서는 그것을 넘어선 철학적 정교성을 요구해야 한다.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는, 카뮈가『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의 제사(題詞)로 인용한 파스칼의 격언처럼,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탁월한 사유란 일견 대립되거나 모순된 두 항 사이에서 어느 한 극단으로 쏠리지 않은 채 그 양자 모두에 닿아 있는 것으로서 남아 있다. 다만, 모든 경우에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때로는, 전제처럼 주어진 구분을 문제 삼고, “어떻게, 그리고 어디까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가를 알아내려는 노력”**을 거쳐, 그 구분 자체를 넘어서는 일로 나아갈 때가 있는 것이다.
 

C.–0.

우리는 ‘행위가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이 분리된 두 계열 사이의 틈에서 지탱되고 있는 것을 본다. 그 물음은 물음 자체의 형식으로 말미암아 전제된 구분을 끌여들인다. 다시 말해 ‘행위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이 문제 삼아진다는 것은 그 물음이 ‘의식이 사물들에 작용하여 그것들을 변형하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좀 더 구체적인 물음, 그러나 결국 같은 것인 물음으로 둔갑한다는 것을 뜻한다. 세계 속에 뚝 떨어진 인간. 혹은 세계 앞에 서서 세계를 마주한 인간. 이것은 그럴 듯하긴 하지만 역시 초월적인 구분을 전제로 한 — 구분을 받아들일 뿐 분기 혹은 분화를 생각하지는 않는 — 하나의 신화다.
(우리가 여기서 미처 다루지 못한 또 한 명의 ‘실존의 철학자’인 메를로-퐁티는 죽기 약 2년 전인 1957년 7월의 연구 메모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지각의 현상학』에서 제기된 문제들은 해결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각의 현상학』에서 나는 의식과 대상의 구분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자유가 칸트의 초월론을 거친 이래로 그것은 거의 제한된 방식으로만 사유되었다. 그리고 행위는 늘 자유의 정초 또는 요청과 도덕(법칙)의 보편적 확립 사이에 끼인 채, 그 둘에 의해 부수적으로 따라 나오는 항 정도의 취급을 받았으며 행위 그 자체로서 사유되지 못했다. 그런데 일단 우리가 가장 개별적인 것, 스스로를 유일한 것으로 세우는 것으로서 사건을 발견했다면(앞선 글, 《기억하기-사건에까지 도달하기-자기가 되기》 참고), 행위는 사건 중에서도 유별나게 독특한 것이라는 점을 알아보게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재의 부분과 전체를 움직이는 내재적인 법칙들을 전혀 벗어나지 않으면서, 자신 또한 다른 (행위가 아닌)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사실이 되면서, 실재 즉 사실들 혹은 더 나아가 관념들(의 체계)에 변형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사건들 중에서도 돌연변이적인 것, 가능한 예외이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물음의 전환이다. 행위는 어떻게 하여 행위인가(행위임을 ‘획득’하는가)? 만일 행위가 행위임을 부정당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저 사건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 어떤 것도 전제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요청하지 않으며, 그 어떤 초월성도 끌어오지 않는다면, 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은 사건들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사건들이야말로 가장 개별적이고 고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음은 다음과 같이 전환된다. 하나의 사건은 어떻게 행위가 되는가? 무엇으로 어떤 한 사건이 행위임을 알아보는가?
 

1.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는 어떤 것은 일어나는 것들로, 오직 일어남들, 즉 사건들로 가득 찬 곳일 터이다. 그러나 우리가 실재라고 부르는 것은 변화하는 관념들이 변화하는 사물들과 같이 뒤섞여 일렁이는 덩어리임에 틀림 없다. 단적으로 말해서, 만일 실재 속에서 우리가 관념과 사물, 생각되는 것과 감각되는 것, 혹은 (메를로-퐁티의 표현을 빌리자면) ‘의미와 무의미’의 구분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두 계열이 본래 구분된 채로 실재에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발견 과정 속에서 실재가 그러한 두 계열로 분기되는 것이라고 해야 하며, 발생론의 철학은 바로 그 효과, 그 작용을 밝혀내야 한다.
그렇다면 실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실들이며, 아직 분기되지 않고 변동하는 사실들의 덩어리lump 혹은 조직tissue — 이 말을 기관organ 또는 조직체organization와의 대립 속에서 읽어야 할 것이다 — 이다. 사건이 죽어서 사실이 된다. 사실들은 사건들에 대한 사실들이다. “사건들은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자리를 잇따른 사건들에 내어주고는 죽는다. 사건들은 죽어서 사실들이 되고 사건들이 죽어서 쌓이는 바로 그곳에서 사건들이 태어난다.” 사실은 오로지 사실이며, ‘아직’은 명제도 문장도 아니다. 사실에게는 참과 거짓의 구분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로서 실재 속에 쌓이며, 이로써 실재는 매 순간 지금으로 거듭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번거롭더라도 일단은 이것을 해명해야만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는 세계가 비국소적non-local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수많은 양태들과 속성들을 유일 실체로 ‘끌어 모은다’.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있으며, 그것이 곧 신이다. 그리하여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다.”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양태들과 속성들을 단일한 원리 속에 통합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연과 동일시 된 유일 실체는 자연 전체의 원리 혹은 법칙이 아니며, 시공간적인 전체, 혹은 사물들의 집합적 전체도 아니다. 신은 속성들과 그 변용들인 양태들을 연역해내고 산출해내는 원인으로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양태들의 운동과 동시에 운동하는 것이다. 양태들 각각은 유일 실체를 위해 있지 않고 그 자체로 긍정되지만 또만 유일 실체 속에서만 파악하고 긍정된다. 스피노자가 유일 실체 개념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세계가 유일한 가능세계라는 것이다. 만일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국소적local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건이 죽어서 된 사실들은 수많은 사실들과 관계하며 또한 조건들이 되어 잇따른 사건들을 일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사실들은 숨겨지지 않으며 결코 무시될 수 없다. 이곳에서 어떤 사람이 죽은 세계는 이미 그 사람이 죽지 않은 세계와는 다르게 될 뿐 아니라 그 사람이 죽지 않은 세계를 가능하지 않게 한다.
사건들은 각각이 가장 개별적인 것이지만 사실들은 그 어떤 것도 개별적이지 않다. 다시 말해, 사건의 차원에서는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이 그 어떤 위계의 조직도도 그리지 않는다. 자동차가 건물 벽면을 들이받은 사건은 분명 자동차 앞면을 이루는 각각의 분자 혹은 원자들과 콘크리트를 구성하는 다양한 분자들 각각이 정전기력을 주고 받는 수많은 사건들의 일어남으로서 가능하다. 자동차가 하나의 물체처럼 지탱되는 것도 그것을 이루는 가장 작은 요소들끼리의 사건들에 의해 가능하며…… 이런 식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그런데 거시적인 사건 역시 하나의 사건이며, 수많은 미시적인 사건과 마찬가지로 개별적이고 고유하다. 즉, 거시적인 사건과 미시적인 사건은 동등하게 개별적이며 고유하다. 자동차가 건물을 들이 받음으로 인하여 광자는 저 입자가 아닌 이 입자와 충돌하게 되고, 한 사람의 죽음은 진행 중이던 두 나라의 외교 관계를 단숨에 얼어붙게 한다. 사건들은 조직도를 그리지 않고 모두가 각자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죽는다.
사실들은 그렇지 않다. 사실들은 연언에 의해서 연합함으로써 좀 더 거시적인 사실들이 된다. 그런데 사실들의 연합은 서로 다른 사실들을 인접하게 하는 작용 속에서 가능하다. 이 작용은 사건에 이은 사건들의 일어남 속에서, 실재에 사실들이 더해지는 사건의 죽음 속에서 이루어지며, 따라서 실재-사실들은 연합에 의한 ‘무늬’ 혹은 지형를 갖고 있다.
 

2.

실재-사실들은 덩어리져 있고, 뭉쳐 있거나 풀려 있으며 평평하지 않고 올록볼록하다. 사실들의 지형은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사실들이 쌓임에 따라 강화되거나 약화된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의 사실과만 연합하지 않으며, 여러 다른 사실과 연합할 수 있다. 어떤 사실들은 이 사실을 위해 저 사실을 저버릴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사실들은 지형의 무늬에 어긋나게 추가되며, 이것들은 지형의 요철을 강화하는 것과는 다른 변형을 가져올 것이다. 이 지각 변동의 사건, 사건들의 일어남에 이은 일어남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돌연변이 사건, 이것이 바로 행위이다.
여기서 우리는 실재-사실들이 행위와 근본적으로 관계 맺고 있음을 본다. 사실들의 지형은 행위가 일어날 틈을 주거나 혹은 행위를 밀어낸다. 그런데 행위를 통해서만 사실들의 지형은 변동하며, 사실들은 그러한 변동을 유도하거나 요구한다. 행위란 엄청난 파괴 혹은 기막힌 창조이기 이전에, 아주 사소할지라도, 자신이 만드는 사실들을 실재-사실들의 지형 속에 던져 넣음으로써, 그것들이 사실들의 덩어리와 또 다른 사실들의 덩어리…에 다르게 얹힘으로써, 여러 사실들 간의 관계를 드러내 보이는 것, 요컨대 하나의 사실을 덧붙임으로써 여러 사실들간의 관계의 그림을 시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실재에서 관념을 본다면, 다름 아닌 이 행위, 즉 사실들의 관계를 변동시키면서 또한 드러내는 행위를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관념은 단지 발견되는 것도 오로지 창조되는 것도 아니다. 관념은 실재-사실들 속에서 혹은 관념들 속에서 관념과 부딪치면서 얻어낼 수밖에 없다. 관념은 실재에 뿌리박고 있으면서도 돌연 솟아나게끔 되는 것이다. 그것은 행위가 실재-사실들과 관계하는 방식인 동시에 또 다른 행위와 관계하는 방식, 다시 말해 실재-사실들을 공유하는 (아마도 유일한) 방식이다. 실재는 아마도 이런 작용들을 통해 감각적인 것(공유될 수 없이 남은 것)과 공유되는 것으로 분기하는 것 같다.
실재-사실들은 행위와의 만남으로써 변동하고 관념을 분기한다. 그리고 사실들 간의 관계(연합 또는 비연합), 즉 사실들의 지형들 간의 배치에서 솟아나는 구획인 관념은 강도를 가진다. 관념을 약화시키는 일 또는 강화시키는 일, 새로운 관념을 관념들의 체계 속에 세우거나 공고한 관념을 무너뜨리고 나아가 잊히게 만드는 일은 곧 실재-사실들의 변동을 통해 가능할 뿐 아니라 그 변동을 일으키며, 요컨대 실재의 변동 자체이다. 서로 영합하는 관념들 그리고 서로 배치되는 관념들 속에서 행위는 어떤 관념들은 강화하고 다른 관념들은 약화하며, 관념들의 체계를 보존하거나 재편한다. 따라서 행위는 실재-사실들의 어떤 영역에 의해서는 환영받고 유도되며, 어떤 사실들에 의해서는 요구되며, 또 어떤 사실들에게는 거부당하고 배척당한다.
요컨대 행위는 실재적이고, 실재는 행위적이다. 실재는 행위와 결부되어 있다. 즉 행위는 실재에 전혀 초월적이지 않으면서 실재와 얽혀있다. 이제 우리는 이 유동적인 얽힘을 정치적이라는 말로 부를 수 있다. 행위는 실재를 변동시키고, 실재는 행위를 유도하거나 요구하거나 배척한다는 것, 우리가 실재와 맺는 관계가 감각(지각)적 혹은 인식적이기 이전에 행위적이라는 것, 이것을 두고 정치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실재는 정치적이며, 모든 행위는 정치적이다.
 

3.

꿈 속에서는 내가 무엇인가를 하면서도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무엇인가를 하게 되는데, 어떻게 해서 하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으며 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도 없다. 그저 이야기가 흘러간다. 그러다가 잠에서 깨서 현실(reality, 실재)로 돌아온다. 내가 했다는 것, 그 행위의 사실이 이 세계 속에 없다는 것에 나는 안도한다. 그것으로서 현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또한 이제 다시 모든 행위가, 행위의 사실이 세계 속에 영향을 미치고, 그 어떤 사건도 되돌릴 수 없으며, 행위가 다른 행위에게 말을 거는 것과 다름 없는 곳, 행위가 동의 혹은 거부를 말하는 것과도 같은 곳, 행위에 책임을 묻는 곳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도 깨닫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기쁘게, 깨닫는다. 이제 다시 나는 발을 딛고 서 있는 것만 같다.
 

4.

행위는 행위의 사실을 실재에 덧붙임으로써, 실재 속에서 시사함으로써 어떤 관념 또는 관념들의 관계, 체계, 흐름에 동의하거나 반대한다. 혹은 어떤 관념을 거부하는 동시에 또 다른 관념에 찬성할 수도 있다. 행위로써 실재는 스스로를 보존하고 사실들의 지형을 공고히 하지만 또한 오직 행위로써 실재는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것 이상의 변동을 만들어낸다. 행위는 ‘의도’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정확히 말해서 우리는 ‘의도’나 ‘의지’ 이전에 공유된 관념들을 받아들이고 관념들의 관계면을 구성하는 행위인 사유라는 개념을 먼저 확립해야 하겠다). 그러나 행위의 정치성은 결코 ‘의도’된 것이 아니다.
모든 행위는 정치적이다. 실재는 이미 다른 수많은 행위들과 관계하고 있으며, 그럴수록 행위는 다른 행위들과도 영향을 주고받고, 그럴수록 행위들 각각은 더 강하게 정치적이다. (‘순수한’) 선행도 악행도 존재하지 않는다. 행위는 그것의 정치적임으로부터 판단되지 도덕 법칙에 부합하는지 여부로 판단되지 않는다. 행위의 정치성은 윤리 혹은 도덕에 앞서도 한참 앞서 있다. 혹은, 윤리란 어떤 정치성을 발견하고 선택할 것인지의 문제가 된다. 유니세프를 통해 먼 나라의 아동을 후원하는 것은 (선행이라고 말해지기 훨씬 이전에) 정치적이다. 홀로코스트를 지시한 것, (아이히만이 그랬던 것처럼) 그 학살의 과정 중 하나에 기여한 것, 이것 또한 (악행이라고 말해지기 훨씬 이전에) 정치적이다. 아침에 사무실에 출근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먼저 상사에게 인스턴트 커피를 타 주는 것, 자진해서 30분 늦게 퇴근하는 것, 자신보다 직급이 낮고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도 반말하지 않고 해요체를 쓰는 것,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쓰는 것, 광고 회사에 취업하는 것…… 이것들 모두가 정치적이다. 여성 아이돌 그룹의 노래를 듣고 뮤직비디오를 보고 화보를 사는 것, 이들에게 애교를 부리게 시키는 TV쇼를 아무렇지 않게 보는 것, 여성 신입생들의 얼굴과 몸매를 ‘품평’하며 시시덕대는 것, 화장하지 않은 직장 동료를 흉보는 것, 브래지어 끈이 블라우스 너머로 보이는 여성을 욕하는 것, 포르노그래피를 소비하는 것은 제각각의 행위이지만 모두가 특정한 관념들의 체계를 옹호하고 강화시키는 행위일 수 있다.
어떤 행위는 실재-사실들, 관념들의 체계와 흐름에 의해 아주 쉽게 나온다. 그러나 또한 아주 어렵게 나오는 행위, 관념들의 체계와 맞서면서 비로소 가능한 행위도 있다.
 

5.

관념의 정치성으로 인하여 우리는 정치된다. 그러나 또한 관념의 정치성은 우리가 행위의 정치성을 통해 정치됨에 응수할 수 있게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정치한다. 이것이 바로 비판한다는 것이며 사유한다는 것이지 않겠는가. 관념 자체는 축복도 억압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정치적이다. 행위 또한 그 자체로는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아니다. 다만 사유 없는 행위, 비판 없는 행위는 실재를(즉 현실을) 오로지 보존하고 강화하고 재생산한다. 실재 또한 그 자체로는 정치적일 뿐 전적으로 옳지도 전적으로 그르지도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재에서 그 어떤 것도 비판하지 못하고,  현실의 그 어떤 문제점도 변화시키려 하지 않은 채 정치되는 삶만을 영위하는 것, 이것만은 거부되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실재와 행위의 정치성을 부정할 수 없으며 부정해서도 안 된다. 모든 것이 여기에서 시작된다. 정치적이지 않은 실재도 정치적이지 않은 행위도 없다.
결코 ‘순수한’ 문학, ‘순수한’ 예술은 있을 수 없다. ‘순수한’ 언론, ‘순수한’ 교육, ‘순수한’ 역사(기술)…은 있을 수 없다. ‘순수한’ 실천도 ‘순수한’ 삶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단언컨대, 정치적인 것에 테두리를 그어 그것을 가두고, 그 반대편에 — 그런 것이 있기라도 한 듯이 — ‘순수한’이라는 수식어-명찰을 달아주는 것보다 더 ‘정치적’인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정치됨으로 밀려나면서도, 계속해서 흐름을 거슬러 정치하여 나아간다.***
 
 
 


 ∗ 이 절에서는 다음 두 권의 책을 주로 참고하였음을 일러둔다. 피에르 테브나즈,『현상학이란 무엇인가』, 김동규 옮김, 그린비. 프레데릭 보름스,『현대 프랑스 철학』, 주재형 옮김, 도서출판 길. 또한 어떤 지점에 관해서는 본인의 해석과 이 저자들의 해석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있었으며, 두 저자들이 말하지 않은 본인만의 해석도 본문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짚어둔다. 아울러 서술에 있어서 특정한 문장 전체를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나름대로 바꾸어 쓰거나 두 권의 책을 번갈아가며 참고하는 일이 많았을 뿐 아니라 지면의 특성 상 각주를 달기가 어려워 일일히 인용부호를 달아 페이지 수를 명시하지 못한 점에 양해를 구한다.

∗∗ 미셸 푸코, 『성의 역사』 제2권 『쾌락의 활용』, ‘서문’. 디디에 에리봉, 박정자 옮김, 『미셸 푸코, 1923~1984』에서 재인용

∗∗∗ 원문은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의 그 유명한 마지막 문장.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로 밀려나면서도, 계속해서 물결을 거슬러 노 저어 나아간다.)” 번역은 필자 본인.

단현
danhyun012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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