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는 이른바 ‘포스트모던 철학’이라는 것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오히려 이하의 논증은 포스트모던을 위한 변호에 가깝다. 비판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포스트모던 철학이 아닌 포스트모던을 오해하는 독법이다.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비판되는 것은 포스트모던 철학을 오독한 단순한 선동 행위이다.


저항 논제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다: <저 제도는 단지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관습일 뿐,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저 제도에 저항해야 한다.> 이와 같은 주장들을 묶어 편의상 ‘저항 논제’라고 부르자. 그런데 저항 논제의 전건은 “모든 제도는 발생사적으로 사회문화적 요인에 따라 형성된 관습이므로 저 제도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와 “저 제도는 발생사적으로 사회문화적 요인에 따라 형성된 관습이므로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를 모두 선제할 수 있다. 두 경우를 나눈 뒤, 형태롤 보다 일반화시키면 이하의 두 도식을 얻을 수 있다. 편의상 둘을 보편 저항 논제(UP)와 특수 저항 논제(SP)라고 부르자:

UP:

(전제) 모든 제도는 발생사적으로 사회문화적 요인에 따라 형성된 관습이다.

(소결론) 따라서 어떤 것이 제도라면 그것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결론) 우리는 그 제도에 저항해야 한다.

SP

(전제) 어떤 제도가 발생사적으로 사회문화적 요인에 따라 형성된 관습이다.

(소결론) 따라서 그 제도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결론) 우리는 그 제도에 저항해야 한다.

저항 논제는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저항 논제가 그 자체로 타당하지는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일단 저항 논제의 소결에 사용된 ‘절대적인’이 <통시간/통세계적으로 항상 참인>을 의미로 갖는다고 하자면, 저항논제의 전제가 참일 때 소결론이 참이다. 그러나 전제들로부터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결론은 당위 명제를 내포하는 반면 전제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결론이 그 전제들로부터 연역된 것이라면 결론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전제에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그 제도에 저항한다” 역시 전제에 포함되어있지 않다. 결론이 취하는 두 전제를 어떻게 분석하더라도 그것에 저항한다는 것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저항 논제의 결론인 <우리는 그 제도에 저항해야 한다>가 타당한 결론이 되기 위해서는 이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전제를 찾아야 한다.

따라서 저항 논제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어떤 명제를 숨겨진 전제로 가져야 할 것이다. 즉 저항 논제에 있어 일반적으로 선제되는 주장이 있다. 그 주장은 보편적 당위 명제를 갖고 있어야 한다. 두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우선 저항 논제가 일상적으로 사용될 때, 그것은 특정한 대상을 가리키지만 그럼에도 소결론을 전제로 하여 결론이 도출되는 과정은 그 대상과 독립적이다. 소결론과 결론의 관계는 완전히 일반화된 경우에도 특정 대상에 대한 저항 논제에 있어 그것들의 관계와 동일하다. 다른 이유는 매우 단순한 것이다. 저항 논제는 소결론과 그것에 앞선 전제를 전제로 하는 결론을 갖는 연역 추리의 형태를 갖고 있다. 어떤 것이 연역적으로 참이려면, 그것을 구성하는 개체들과 별개로 형식만으로도 참이어야 한다. 따라서 완전히 일반화된 근거가 소결론과 그것을 전제로 갖는 결론 사이에 있었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숨겨진 전제인가?

가능한 후보들

예상 가능한 첫번째 전제는 이렇다: <어떤 제도가 발생사적으로 사회문화적 요인에 따라 형성된 관습이라면, 그 제도에 저항해야 한다.> 이 명제가 숨겨진 전제였다고 주장하는 것이 직관적으로는 가장 적절해 보인다. 저항 논제는 그것의 소결론이 생략된 형태로도 진술되곤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자본주의에 저항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단지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규칙일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을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명제가 저항 논제에 선제된 주장이고, 또 그것이 일반적으로 옳다고 한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는 대부분의 제도들이 발생사적으로 사회문화적 요인에 따라 형성된 관습임을 관찰을 통해 알고 있다. 위의 명제가 참이라면 우리는 모든 제도에 저항해야 한다. 대부분의 제도가 사회문화적 부산물이므로 우리는 그 제도에 저항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제도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명제는 우리가 찾고 있는 전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두번째 가능한 전제는 첫번째 것을 약화한 판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어떤 제도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제도에 저항해야 한다.> 이 또한 소결론을 전제로 할 때 소결론으로부터 나오는 결론을 연역적으로 타당하게 할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가부장제는 절대적이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가부장제에 저항해야 한다”를 매우 타당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명제 역시 직관적으로 그럴듯한 후보이다. 하지만 이 역시 숨겨진 전제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우리는 절대적이지 않은 제도에 저항하지 않거나, 더 나아가 그것에 저항하지 않는 것이 윤리적인 행위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가부장제의 예를 생각해 보자. 가부장제에 저항한다는 것은 가족에 대한 모든 제도의 파괴를 결과로 갖는가? 그렇지 않다.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이들은 가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더 다양한 방식의 가족 형태를 실현하는 제도를 형성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러한 제도는 절대적인 기준인가? 그렇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어떤 것이 절대적인 기준이라면 그것은 (강한 의미에서) 어떤 경우에도 참인 기준이거나, (약한 의미에서) 언어 공동체에게 주어진 선험적 기준일 것이다. 하지만 풍성한 가족 형태를 실현하게 하는 가족 제도의 구상은 두 경우 중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강한 의미에서 ‘절대적인’이 적용된다면, 그것이 어떤 경우에도 도덕적으로 옳다고 단언할 수 없기에 거짓이 된다. 약한 의미에서 ‘절대적인’이 적용된다면, 우리의 윤리적 풍습의 근거를 바꾸자는 저항 논제가 그 윤리적 풍습의 근거로 이미 반가부장제적 사고가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 되므로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가장 풍성한 가족 형태를 실현하게 하는 제도가 절대적인 제도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러한 제도에 저항하는 것이 윤리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제도를 실현시키는 것을 윤리적이라고 한다.

저항 논제가 내포하는 조건절을 정당화할 수 있는 두 가능한 전제가 모두 부조리한 결론을 이끌어낸다는 것을 위와 같이 알 수 있다. 다른 우회로를 찾을 수는 없는가? 일단 “어떤 제도에 저항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 제도에 저항해야 한다.”와 같은 형태의 주장은 우리의 후보에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그것은 동어반복적이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어떤 제도에 왜 저항해야 하는지의 근거를 전혀 제공하지도 않으며, 저항 논제의 두 전제와 아무런 논리적 관계도 갖고 있지 않다. 단순히 “우리는 그 제도에 저항해야 한다.”를 선제한다면 어떨까? 이또한 저항 논제를 정당화할 수 없다. 논점을 선취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또 동어반복적 전제와 마찬가지로 이 주장 역시 저항 논제의 두 전제와 아무런 연관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새로운 후보는 동어반복적이지도, 논점 선취의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으면서 저항 논제를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한다. 덧붙여 그것은 내포하는 조건문의 전건과 지나치게 강한 연관을 가져서도 안된다. 우리는 그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두 후보를 검토한 결과 모든 경우에서 부조리한 결론이 나온다는 것을 위에서 보았다.

우회

새로운 후보를 찾을 나의 방법은 이렇다. 어떤 제도에 결부되는 특정한 사태(일단은 그것을 임의로 P라고 부를 생각이다)가 있고, 그 사태는 <x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등과 독립적이라고 하자. 그리고 P로부터 저항의 당위를 끌어낸다. 그리고 저항 논제의 전제들과 P에 관한 어떤 명제가 논리적 연관을 갖게 한다. 여기에서 두가지 명제가 나올 것이고, 그 둘이 모두 저항 논제에 선제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두 명제는 모두 통속적인 윤리적 직관에 비추어 타당한 것이어야 한다. 물론 하나의 규범 안에서 P가 오로지 하나뿐일 이유는 없다. P는 저항의 충분 조건이기 때문이다. P1, P2 … Pn이 저항의 충분조건이고, 따라서 P를 야기하는 어떤 제도에 저항할 의무가 있다라는 식으로 우리의 규범을 제시할 수 있다.

일단은 저항 논제를 약화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하자. 약화된 논제가 P와 저항 논제의 표면적 전제들의 가교 역할을 할 것이다. 상기했듯 ‘절대적인’이 통시간/통세계적 참이라는 (강한) 의미를 갖는다면 어떤 것이 사회문화적 요인에 따라 형성될 때 그것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타당하게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두 전제로부터 결론이 나올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로부터 타당한 귀결이 될 수 있는 방식으로 결론을 약화하는 것이 하나의 우회로가 될 것이다. 어떤 것이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는 것은 모든 도덕 법칙에 있어 참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p 해야 한다'[의무(p)]와 ‘p 할 수 있다'[허용(p)]가 <의무(p)=def. ~허용~(p)>; <허용(p)=def. ~의무~(p)>와 같이 상호참조적으로 정의된다는 일반적 이해를 고려할 때, 모든 도덕법칙에 있어 참이지만은 않다는 것은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용된다’와 같다. 따라서 어떤 것이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면 그 기준에 따르지 않는 것이 허용된다. 즉 그것에 저항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나오는 약화된 특수 저항 논제(WSP)은 다음과 같다:

WSP:

(전제) 어떤 제도가 발생사적으로 사회문화적 요인에 따라 형성된 관습이라면 그것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결론) 우리는 그 제도에 저항할 수 있다.

WSP는 저항 논제를 위한 유일한 숨겨진 전제일 수는 없다. WSP는 “저항할 수 있다”라는 당위적 가능성만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어떤 제도에게 저항해야 한다는 의무가 주장되기 위해 새로운 조건이 요구된다. 이 조건은 앞서 말했듯 어떤 사태 P에 관한 문장으로 표현될 것이다. (그 P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이 제안 안에서 다루어질 것은 아니다.) 예컨대 어떤 제도가 P를 발생시키는 경우, 우리는 그 제도에 저항해야 한다는 조건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일단 P를 임의의 변항으로 볼 때 이 조건 자체는 직관적으로 타당하다. 이 조건이 타당하지 않다면 저항해야 할 제도들 각각이 공통적으로 야기하는 결과가 하나도 없어도 된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하나의 규범 목록에 P1, P2 등이 공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P에게는 일종의 공통점이 있기는 할 것이다. 예컨대 ‘그것에 저항해야 한다는 대중의 기분을 형성한다’와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하나의 공통점을 두고 (강조표시된)P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상적인 조건이 마련될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P를 찾으려는 시도는 이어지고 있다.

(*다시 강조하자면, P는 단순히 ‘그것이 저항되어야 한다’와 같은 것과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 그 때 우리는 자연주의자가 되는 셈인데, 자연주의는 엄밀한 윤리학적 기반을 형성하기 어렵다. (이것이 P의 중요성을 사실상 포기하는 시도임은 McPherson(2015) §5.3 첫번째 문단에서 소개되는 반론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또 그 경우 P가 이미 당위 문맥을 내포함에 따라 경험 명제의 진리조건으로 당위 명제의 진리조건을 환원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사라진다. 그 장점에 대해서는 다음 주를 참조.)

(**말하자면 저항 의무가 P에 수반supervenience되는 셈이다. 의무를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P에 수반되는 것으로 간주함에 따라 우리는 의무라는 경험 불가능한 대상의 진리조건을 경험 가능한 대상의 것에 환원시킬 수 있다. 이로써 검증 불가능한 대상에 진리값을 부여할 때 생기는 부담을 덜어낼 수 있다. 한편 이 접근은 <사실로부터 당위가 추론될 수 없다>라는 흄의 비판도 회피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P의 진리조건으로 저항 의무의 진리조건이 환원되는 것이지, 의무가 사실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덕철학에서의 수반 논제에 대해서는 McPherson(2015)를 참조.)

한편 위에서 예로 든 조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떤 제도가 P를 야기하는 경우에도 그것이 절대적인 제도인 탓에 저항 대상이 될 수 없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연 현상에 있어, 우리는 어떤 재난에 의식적으로 저항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오로지 그 재난이 야기하는 피해를 감소시킬 수 있을 뿐이다. 태양광은 피부암을 야기하고 이것은 다른 비윤리적 사건들과 같은 불쾌함을 만들 수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자연 법칙에 도덕적으로 저항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이 윤리적 사건이 아니지만 비윤리적 결과를 초래하는 것들 중 어떤 사건들에게는 저항이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올바른 조건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P를 야기하는 그 제도가 저항 가능한 것임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은 의무와 허용에 대한 일반적 이해에 따라서도 타당하다. 어떤 것이 도덕적 의무라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허용되는 것도 당연하다. 이는 의무 논리가 수용하는 공리 D: <의무(p)→허용(p)>에서도 잘 드러난다. 허용은 의무의 필요조건이다. 따라서 어떤 제도에 저항 의무가 부과된다면, 그것에 저항 가능함이 전건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저항 조건(PC)을 도입하자:

(PC) 저항이 허용되는 어떤 제도가 P를 야기하는 경우, 우리는 그 제도에 저항해야 한다.

이제 PC와 WSP를 결합해 저항 논제를 정당화해 보자:

특수 저항 논제:

어떤 제도가 발생사적으로 사회문화적 요인에 따라 형성된 관습이다. (SP 전제)

그러한 제도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SP 소결론)

[우리는 그러한 제도에 저항할 수 있다. (WSP 결론)][저항이 허용되는 어떤 제도가 P를 야기하는 경우, 우리는 그 제도에 저항해야 한다. (PC)][어떤 제도가 P를 야기한다. (?)]

우리는 그 제도에 저항해야 한다. (SP 결론)

보편 저항 논제:

모든 제도는 발생사적으로 사회문화적 요인에 따라 형성된 관습이다. (UP 전제)

어떤 것이 제도라면 그것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UP 소결론)

[우리는 그러한 제도에 저항할 수 있다. (WSP 결론)][저항이 허용되는 어떤 제도가 P를 야기하는 경우, 우리는 그 제도에 저항해야 한다. (PC)][어떤 제도가 P를 야기한다. (?)]

우리는 그 제도에 저항해야 한다. (UP 결론)

(*[]는 숨겨진 전제임을 의미함.)

나는 PC와 WSP를 결합하는 것이 저항 논제를 정당화하는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두 조건은 논점을 선취하지도, 동어반복적이지도, 저항 논제의 전건과 강한 연관을 갖지도 않으면서 SP를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WSP는 저항 대상으로 제시될 바로 그 제도가 저항 가능한 대상임을 주장한다. WSP는 SP의 약화이긴 하지만, UP의 소결론이 역시 특칭 명제였으므로 WSP와 논리적 연관을 가질 수 있다. PC는 그 제도가 P를 발생시킬 때 그것에게 저항해야 함을 주장한다. 따라서 그 제도가 P를 야기하기만 한다면 그것에 저항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그런데 저항 논제는 어디에서도 P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PC가 저항 논제의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저항되어야 하는 바로 그 제도가 P를 야기해야 한다. 규범의 상대성 주장만으로는 건전한 논증을 할 수 없기에 도입한 P가 이제 결정적인 조건이 된다. (상기했듯, 그 P가 정확히 어떤 사건을 지시하는지는 아직 논의될 것이 아니다.)

다시 문두로 돌아가 SP의 대전제를 생각해 보자. 그것이 사회문화적 요인에 따라 형성된 관습이라는 점은 최소한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제도에 있어 참인 것으로 보인다. 또 어떤 제도가 별안간 등장하지 않은 한 그것은 항상 이전에 있던 제도와 발생사적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으므로 SP의 전제가 참이거나 더 나아가 (귀납적으로는) UP의 전제가 참이다. 그런데 SP의 대전제는 WSP의 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WSP가 타당하다면 WSP의 결론은 대부분의 제도에 대해 참일 것이다. 그렇다면 WSP가 논리적으로 타당함을 보였으므로, 거의 모든 제도들에 있어 저항이 가능할 조건은 PC뿐이다. 거의 모든 제도가 저항 가능할 것이기 때문에, 어떤 제도가 P를 발생시킨다면 그것만으로 그 제도는 저항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저항 논제 자체가 의심되어야 한다. 표면적으로 저항 논제는 가능한 모든 형태에서 그 대상에 저항해야 할 근거를 그것의 발생사적인 사회문화적 형성에서 찾는다고 보였다. 그러나 사실 그 형성 자체는 저항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보인다. SP의 전제가 참이거나 귀납적으로 UP의 전제가 참이라면 저항 논제의 전제는 어떤 버전에서도 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지 어떤 제도의 상대성 내지 사회문화적 구성성만으로는 저항이 정당화되지 않는 사례들이 있음을 보았으므로 저항 논제의 전제들은 저항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한 조건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전제들은 선제되어 생략되어도 무방하다. 거의 모든 제도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므로, 어떤 것에 저항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조건은 그 제도가 P를 야기하는지의 여부이기 때문이다. 즉 P의 진리조건이 어떤 제도에 대한 저항 의무의 진리조건을 결정한다.

어떤 제도에 저항할 것을 요구하기 위해 저항 논제를 드는 것은 적절한가? 지금까지의 논의에 비추어보자면, 그렇지 않다. 어떤 제도가 절대적이지 않다라는 것만으로는 그 제도에 저항할 근거가 마련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제도가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특정한 제도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은 특수한 경우(예컨대, 종교의 교리)를 제외하고는 생략되어도 무방하다. 중요한 것은 어떤 제도가 절대적인지의 여부가 아니라 어떤 제도가 특정한 사태를 야기하느냐의 여부이다. 그래서 저항 논제에서 PC가 생략되었던 것과 반대로, 생략되어도 무방한 것은 저항 논제의 전제와 소결론이다. 더 나아가 WSP 또한 상식적으로 참인 저항 논제의 전제들로부터 논리적으로 귀결되는 논제이기에 생략되어도 무방하다. 따라서 세 명제, PC: <저항할 수 있는 어떤 제도가 P를 야기하는 경우, 우리는 그 제도에 저항해야 한다.>와 경험 명제인 <어떤 제도가 P를 야기한다>, 그리고 저항논제의 결론: <우리는 그 제도에 저항해야 한다>만으로도 어떤 제도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타당히 논증하기 위해 충분하다.

철학의 과제가 비판이라는 것에 대해

철학이 저항이나 비판 등을 수행할 수 있고 수행하여야 한다면 우리는 단순히 발생사로부터 그 근거를 찾아서는 안된다. 저항의 타당한 근거 마련을 위하여 우리는 “저항을 위한 조건 P는 도대체 어떤 사태인가?“나 “저 제도는 P를 야기하고 있는가?” 등의 질문에 답하려 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후자는 사회과학적 탐구 대상이므로, 철학이 체제 변혁에 기여할 수 있다면 주어진 문제는 전자일 것이다. 또 앞의 질문이 해명되어야만 뒤의 질문에 답할 수 있으므로 전자가 더 큰 철학적 중요성을 갖는 질문이다. 어떤 제도가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면, 아주 미시적인 탐구만으로도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 어떤 제도가 직전에 갖고 있던 형태가 지금 갖고 있는 형태와 다르다면 그것은 구성된 제도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제도에 있어서 사정이 다르지 않다. 저항 논제의 전제들이란 이렇게 소박한 주장이다. 그 주장들로부터는 저항 논제의 결론조차도 타당히 이끌어내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저항 논제의 숨겨진 전제를 찾아야 했던 것이 아니라, 약화된 저항 논제를 숨겨진 전제로 두면 충분했을 것이다.

저항 조건을 통한 저항의 정당화는 다음과 같이 응용될 수 있다. (1) 누군가가 주장한다: “우리는 여성혐오에 저항해야 한다.” 일단은 여성혐오를 <여성에게 열등한 상징을 결부하는 풍조>라고 간주하자. 여성혐오에 저항해야 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여성혐오의 정의로부터 여성혐오에의 저항을 정당화하기 위해 <어떤 집단에게 열등한 상징을 결부하는 것>이 P에 해당한다고(또는, P의 (진)부분집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일반적인 직관에 비추어 어떤 집단을 일반화해 열등한 상징을 결부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 그런데 그러한 부당한 풍습을 어떤 제도가 강제한다면 그 제도에 저항하는 것이 마땅히 옳다. 따라서 주장 “우리는 여성혐오에 저항해야 한다”가 정당화된다. (2) 누군가가 주장한다: “우리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처벌하는 것에 저항해야 한다.” 왜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풍조와,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제도에 저항해야 하는가? 우리는 양심적 병역거부의 정의로부터 현행법체계에의 저항을 정당화하기 위해 <개인의 양심적 자유가 침해되는 것>이 P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규범적으로 옳지 않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국가의 어떤 제도가 그러한 침해를 생산한다면 그 제도에 저항하는 것이 마땅히 옳다. 따라서 주장 “우리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처벌하는 것에 저항해야 한다”가 정당화된다. 철학은 이러한 논증적 방식으로 저항에 기여한다.

앞서 언급했던, 보편화된 P를 여기에서 다시 생각해 보자. 만일 P가 발견될 수 있다면, 그 자리에 우리는 무엇을 둘 수 있을까? 단순하게는 ‘자유가 감소한다’, ‘도덕적 감수성이 약화된다'(간접 의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불쾌감을 느낀다’ 등을 후보로 들 수 있겠다. 실제로 자유주의자와 칸트주의자, 공리주의자들이 각각 그것이 가장 적절한 후보임을 논증해 왔다. 모든 시기와 모든 세계에 있어 저항의 조건은 동일한가?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우리는 공리주의가 (약한 의미에서) 절대적으로 참인 세계를 생각할 수도 있으며, 의무론이나 자유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상상을 할 수 있다. 또 완전히 반대로, 국가에 오로지 복종하는 것을 방해하는 제도에 저항해야만 하는 도덕적 공동체의 가능성을 상상할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 적용되는 저항 조건은 강한 의미에서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조건은 우리 사회 안에서는 약한 의미에서 절대적이다. 그것은 우리의 윤리적 판단에 자리잡은 선험적인 근거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실 세계와 윤리적으로 매우 유사한 어떤 세계가 다른 P를 갖는것도 가능하다. 우리 세계의 P={P1, P2, P3}과 달리 어떤 세계는 P’={P2,P3}을 갖는 경우가 상상 가능하기 때문이다. 메타윤리학의 접근은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어떤 윤리 체계를 승인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지를 판단하려는 시도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어떤 윤리 체계가 적절함을 주장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의 윤리적 판단에 있어 그 체계의 공리에 위배되는 경우가 없음을 보이거나, 있더라도 그것을 공리들을 통해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검증을 통해 그것이 승인될 만한 윤리 체계가 아님이 드러난다면, 제 3의 길을 찾아야 한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족쇄에 저항해야 한다.” 우리는 이 주장에 이렇게 다시 물어야 했다. “어떤 족쇄에 저항해야 하는가?” “저항해야 한다면, 어떤 이유에서 그것에 저항해야 하는가?” 여기에 적절한 답을 들 수 없다면, 그는 단지 궤변과 선동을 늘어놓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반면 그가 적절하게 답할 수 있었다면, 그는 굳이 그것이 족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어도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주장하는 편이 훨씬 명료하고 타당한 저항의 근거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 근거를 제시하는 행위를 두고 이른바 ‘윤리형이상학의 기초 놓기’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어떤 행위가 하고 싶기 때문에 한다면 그것은 타당한 실천적 주장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행위는 윤리학의 비평 대상이다. 어떤 행위를 해야 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거기에는 어떤 보편타당한 근거가 있는지, 그리고 그 근거가 우리의 윤리적 직관에 비추어 마땅한지 등을 주장하는 것이 실천적 주장을 구성한다. 이와 같은 메타윤리적 검토를 적당히 덮어두고 철학자들의 말을 적당히 발췌하며 멋있어 보이는 주장만을 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주장은 비겁하지 않은 주장이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나의 다짐이다.


참고문헌

  • Garson, James, “Modal Logic”,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pring 2016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spr2016/entries/logic-modal/>
  • Jackson, F. 1998. From metaphysics to ethics: A defence of conceptual analysis. Oxford University Press.
  • McNamara, Paul, “Deontic Logic”,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Winter 2014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win2014/entries/logic-deontic/>.
  • McPherson, Tristram, “Supervenience in Ethics”,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Winter 2015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win2015/entries/supervenience-ethics/>.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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