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것들의 수수께끼

‘수수께끼’로 돌아오자. 내가 제안한 수수께끼는 이것이었다: “우리의 일상적 발화를 구속하는 어떤 실재적 대상이 발화에 선제되어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을 해명해야 하는가?” 파상과 단현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 수수께끼를 풀었다. 파상은 그런 형이상학적 선제를 논의하는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단현은 ‘행위’의 개념을 분석하며 진리가 수행성에 의해 구성된다고, 따라서 “순수한” 진리(그의 표현을 응용하자면, ‘사실’)는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들의 답변은 수수께끼를 해소하기에 적합한가? 오히려 그들은 그렇게 답하면서 어떤 절대적인 형이상학이 선제되어있어야 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수수께끼는 풀리기는커녕 발견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았던 셈이다.

파상.

<처음에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사이에서 어떤 ‘다른 점’이 발견된다면…>(파상) 그 “발견”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에 의하면 그것은 <‘같고 다름’이라는 논리적 현상>에 기인한다. 그런데 “같고 다름”은 정말 논리적 현상일까? 그렇지 않다.

일단은, 주관적 현상의 의미에서 “논리적 현상”이란 없다. 어떤 것이 논리적 사실이라면 그것은 다른 논리적 명제로부터 선험적인 것으로 드러나거나(이 경우엔 보통 귀류법을 통해 증명된다), 개별 현상의 귀납적 발견 없이도 구해져야 한다. 그런데 어떤 것이 주관적 현상이라면 그것은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공유될 수 없다. 현상으로부터 어떤 발견을 하면, 그것을 언어로써 공유한다. 공유할 때에는 논리 규칙 위에서 공유한다. 이것이 논리와 현상에 대한 일반적 관계이다.

어떤 의미에서, 같고 다름은 논리적 “기능소”이다. 어떤 둘이 같거나 다르다는 것은 논리적 사고를 위한 함수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둘을 같거나 다른 것으로 발견하는 조건적 현상은 그러한 기능소가 아니다. 우리는 후자 또한 ‘같고 다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같고 다름”이라는 함수에 의해 논리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현상은 그러한 함수와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이는 ‘같고 다름’이라는 함수의 외연을 구성하기 위한 사건이다.

‘같고 다름’이라는 논리적 존재자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 같고 다름에 해당하는 사건이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같고 다름이라는 현상에는 실재적인 “같고 다름”이 선제된다. 지시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어떤 대상(의 현상적 형상)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면서 동시에 ‘저것을 보라’라고 말할 수 없다. 또, ‘저것을 보라’라고 했을 때 그 대상이 공유되지 못하는 오로지 현상일 경우(환시, 환상) 우리는 그 대상이 실재한다는 믿음을 저버리거나 나의 표현이 잘 전달되지 않았다는 새로운 믿음을 얻을 것이다.

따라서 실재에 어떤 질서가 놓여있다고 믿지 않으면서도 과학적 발견이나 실제 대상에 관한 직접지시를 수행할 수 있다는 파상의 주장은 의심스럽다. <실재에 정말로 그러한 질서가 절대적으로 있다>는 주장(진지한 존재론)이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존재론적 태도 <실재에 그러한 질서가 있다>는 우리의 언어 행동을 위해 요구되고 있다. 그런데 세부적으로 어떤 명제들이 그 태도를 이루고 있는가? 이 질문에는 철학적 답변이 관여한다.

단현.

<세계 속에 뚝 떨어진 인간. … 이것은 … 하나의 신화다.>(단현) 그렇다. 세계와 독립적인 실체로서 인간이 있다는 생각은 하나의 신화이다. 모든 존재론 내지 형이상학은 신화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마찬가지로 모든 신화는 어떤 존재론적 태도를 일관되게(후대에 그렇게 편집되었다 하더라도) 유지한다. 소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소설이 갖는 하나의 세계관은 하나의 존재론적 태도를 갖고 있다.

그런데 그게 왜 문제가 되는가? 세계와 독립적이지 않은 인간을 상상한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신화적으로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은 세계와 독립적이거나 세계에 의존적이다(또는 세계가 인간에게 의존적이다: 단현의 입장은 두 예를 모두 포용한다). 이 주장도 하나의 신화이다. 인간의 실체적 이해가 “초월적인 구분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후자는 세계와 인간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초월적 주장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 상호의존성이란 인식의 틀 안에서 발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상호의존성은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의 세계관일 뿐이다.

“상호의존성은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의 세계관일 뿐이다.” 세계와 인간의 상호의존성을 주장하려면 이 주장을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호의존성 주장을 진지하게 여긴다면 상대주의자들이 겪는 것과 유사한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모든 진리는 상호의존적이므로 우리가 그 진리를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진지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바로 그 주장에 있어서도 우리는 어떤 진지한 태도도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상대주의 내지 ‘아이러니즘’의 변형은 조금 약화된 형태의 주장을 해야만 일관된 논리를 가질 수 있다. 첫째로, 모든 진리의 체계가 상호의존적, 시대의존적이다. 따라서 어떤 진리의 체계를 지나치게 진지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이 때 배제되는 진지함은 외적인 진지함이다. 그럼에도, 둘째로, 어떤 진리들은 진지하게 여겨질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진리 체계가 참인 것으로 간주하는 명제를 참이라고 할 수 있고, 아이러니스트의 기본 테제를 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우리는 그 진리를 진지하게 대한다. 그 진지함은 내적인 진지함이다. (로티는 이러한 약화를 지지하지 않는 듯 보인다.)

따라서 진리 체계의 절대성 문제를 해소하는 것과 어떤 진리의 절대성 문제를 해소하는 것은 별개이다. 상호의존성 논제는 전자를 수행하고 있으나 후자는 수행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후자를 철학에 요구하곤 한다. 왜 살아야 하는가? 내가 지금 보는 세계가 제대로 된 세계인가? 옳음이란 무엇인가?

물론 이런 질문은 일상적이지 않다. 대부분의 철학적 질문은 망상 비슷한 의심이다. 그러나 그것이 망상이기 때문에 철학이 그 망상에 답해야 한다. 이 망상을 철학적 답변으로 해소하는 것이 철학이 수행해 온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 진리 체계의 상대성만을 반복해 주장하며 모든 것을 비평이나 정치의 문제로 옮기는 것은 적절한 처방이 될 수 없다. 그 답이 질문을 해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적절한 처방은 그 답을 직접 해소하는 것이어야 한다.

선험적 발견

어떤 이들은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논의가 아무런 실용적 용도를 갖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참임’, ‘좋음’, ‘옳음’과 같은 개념은 축소주의적, 규약주의적, 정의주의emotivism적 방식으로 이해되어도 무방하다. <P가 참이다>는 <P>와 같다. <A하는 것이 좋다/옳다>는 <당신이 A하기를 요구한다>와 같다.

이러한 관점에서 ‘참이다’는 어떤 개인이 어떤 명제를 주장하기 위해 덧붙이는 표현에 불과하거나, 단순히 하나의 언어 공동체가 그 명제를 정당화했다는 의미만을 갖는다. 가치 술어 역시 어떤 개인이 어떤 사태에 쾌감을 느끼거나 공동체가 그것에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는 의미만을 갖는다. 언어 생활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근대인이 ‘신’을 폐기했듯 우리는 ‘참’과 ‘좋음’을 폐기해야 한다.

과연 언어 생활 밖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으로부터 형이상학의 무용성이 나오는 것일까? 그들의 주장은 불안한 토대 위에 있지는 않은가? 공동체의 규약이나 개인의 느낌에 모든 것을 환원한다면, 다음의 물음으로 인해 그 논리 안에서부터 그 결론이 무너진다: “당신의 주장은 언어 공동체에 의해 정당화되어 있는가?”

언어 공동체 밖에 아무런 대상도 없다고 하자. 그것은 현대 철학의 언어를 사용하는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다. 하지만 철학의 분석 대상인 일상적 언어가 어떤 형이상학적 대상을 선제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는가? 신을 선제하는 공동체에게 ‘신’을 폐기하라고, 참을 선제하는 공동체에게 ‘참’을 폐기하라고, 소박한 실재론을 선제하는 공동체에게 ‘실재’를 폐기하라고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우리의 공동체가 객관적 대상을 선제하고 있다면 그러한 대상에 대한 제거주의적 접근은 참인 주장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일상적 발화는 모종의 형이상학적 태도를 전제한 채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태도를 두고 ‘소박한 실재론’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그러한 태도를 갖고 살아가는 것은 일상생활이 가능한(!) 모든 일반인이다. 철학자들이나 이 믿음에 의문을 가질 뿐이다. 나는 지금 내가 나의 랩탑으로 이 글을 쓰면서 옆에 태블릿 컴퓨터를 켜 두고 게임을 하고 있음을 정말로 믿는다. (또 하루가 지나 글에 살을 붙이는 지금은 그 태블릿 컴퓨터가 켜져 있지 않음을 정말로 믿는다.)

이 대상들이 기껏해야 나에게 주어진 현상에 불과하다거나, 또는 “관념”일 뿐이라는 주장은 철학적으로나 그럴 듯하지, 일상적 태도에서 수용할 법한 것은 아니다. 마치 이는 어떤 것을 빨간색이라고 믿으면서 동시에 그것이 파란색이라는 지식을 갖는다거나, 사각형이면서 둥근 것이 있다는 지식을 갖는 것과 유사하다. 그런 지식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우리의 경험에 앞서 주어진 논리 규칙이 그것의 가능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선험적 발견이란 이런 규칙을 발견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논리 규칙의 형태로 제시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논리적인 것이라고 해서, 실제 대상들과 동떨어진 존재론적 위치를 갖는다는 결론을 낼 수는 없다. “저 대상은 하나이면서 둘이다”는 단일한 존재론적 태도를 갖고는 이해될 수 없는 진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험적 틀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 주장을 이해하기보다는, “저 대상은 어떤 존재론적 태도 위에서는 하나로 여겨지지만, 다르게는 둘로 여겨질 수 있다”와 같이 우회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그 대상이 하나이거나 둘인 것이 단지 현상의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존재론의 문제이다. 하나의 존재론 안에서 두 현상이 동시에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재론적 사실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어떤 실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장님 나라에서 애꾸눈이 왕 노릇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게 오히려 정반대이다. 애꾸눈은 장님 나라에서 왕이 아닌 장애인 내지 실험 대상이 될 것이다. 오늘날 이른바 ‘공감각자’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소비되는지를 생각해 보라. 장님 나라에서 애꾸눈은 광대에 가깝다! 진지한 철학적 태도는 장님 나라에서 애꾸눈이 되는 것보다는 시각을 사용하지 않는 이들의삶의 형식을 탐구하는 것에 가깝지 않을까?

철학자가 장님 나라의 애꾸눈이처럼 행동한다면, 그는 참된 발견을 한 탐구자로 여겨지기보다는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지! 참 대단해!”같은 말을 듣는 예능인으로 생각될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어떤 철학자들은 그렇게 대해진다. 유의미한 철학적 과제를 선험적인 것의 발견에 둔다는 것은 일상인의 사고를 존중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야 철학이 무언가 의미있는 것을 생산할 수 있다.


* 상기했듯, 대부분의 존재론적 진술은 절대적으로 진지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어떤 진지한 진술이 있다면 “저것이 정말로 있다”라는 진술이다. 이 진술은 모든 존재론적 태도에 앞서 전제되기에(존재론은 존재하는 것을 다루므로) 대부분의 경우 진지하게 진술된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존재론적 진술의 대상들은 결코 ‘실재가 아닌 현상’이 될 수 없다.

형이상학의 재발견

형이상학적 개념이 우리의 일상언어에서 이미 말해지고 있다. 예컨대 “지금이 여섯 시라고? 아니야. 지금은 일곱 시야.”라든지, “내 뒤에 네가 있는 것이 아니라, 네 뒤에 내가 있는 것이겠지!”, “잘 했어. 그런 나쁜 놈은 어서 잊어버려!”와 같은 매우 일상적인 진술들도 진리, 시간, 공간, 가치, 기억, 행위와 같은 형이상학적 주제를 갖고 있다. 형이상학적 물음은 이런 일상적인 발화의 장에서 등장한다. 형이상학적 개념을 포함한 진술이 잘 작동하지 않거나,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기 애매한 경우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분석이 요구된다.

어떻게 우리는 그것에 답할 수 있을까? 형이상학적 방법으로만 가능하다. 그런데 그 방법은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가져오는 것과는 다르다. 형이상학적 답변은 일상언어 안에 이미 놓여 있어야 하며, 또한 정말로 그렇기 때문이다. 하물며 중세의 고대의 ‘우시아’나 중세의 ‘천사’, 근대의 ‘정신’조차도 그 사회 안에서의 나름의 쓸모를 갖고 있었다.

오늘날 형이상학이 배척되는 것은 오늘날의 형이상학이 영혼과 천사, 실체를 진지하게 말해야 할 것이라는 강박적 망상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그런 형이상학이 있던 적이나 있을까? 누군가가 세계와 동떨어진 존재론을 갑자기 들이댄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그를 미치광이 취급할 것이다. 어떤 형이상학이 수용된다면 그것은 저잣거리에서 물어지는 물음에 맞추어 적절한 대답을 해냈기 때문이다. (위기의 시대에 철학이 부흥했던 것도 이런 점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의 주석가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두고 ‘처방주의적 철학’이라고 말한다. 그의 과제는 철학을 통해 새로운 지식(말하자면, “선험적 종합”)을 얻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난무하는 오해들로부터 철학을 끄집어 내려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시도는 철학적 물음의 해결이 아닌 해소에 있었다. 실재론 대 반실재론 논쟁에 있어 그는 담담히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할 수 있다”라든지 “스스로의 눈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등으로 논쟁을 무마하려 한다. 검증주의자들에게 그는 “정당화를 시도할 수는 있지만, 그 정당화라는 것에는 끝이 없다”라는 경구를 남긴다.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어느 지점을 넘어서는 더이상 생활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 철학의 첫째 의무였다.

어떤 방식의 형이상학은 비트겐슈타인의 방식과는 조금 다르게 처방주의의 맥을 잇는다. 그들은 질문이 무의미하다고 하거나 그 질문 앞에서 우리가 겸허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신비주의나 실존주의 대신 그들은 실용주의적 노선을 택한다. 그들은 질문에 진지하게 답하는 것은 우스꽝스럽지만, 그럼에도 어떤 방식으로 답할 수는 있으리라고 믿는다. 진리가 구성되는 것이라면 진리는 말해질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가 구성되는 것이기에 오히려 진리 물음은 무의미하지 않고, 진리가 구성되는 것이기에 적절한 탐구가 이루어진다면 진리 물음에 답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믿을 만하다.

탐구로써 질문에 잘 답할 때에도 일종의 해소는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면, 단순히 질문을 무마하는 것보다도 더 나은 처방을 기대할 수 있다.

2018. 7. 13. <존재론의 수수께끼> 끝.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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