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 : 이 글은 소설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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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상에게 ‘여정적 지식’은 많이 없다.”

우스갯소리로 운을 떼자. ‘지평’에 연재되어 온 일련의 글들을 관심 있게 읽어 온 독자라면, 아마 어느 정도 이해할 것이다. 지금껏 여정은 그의 관심사―언어, 지시, 자연종, 이름, 인식, 함수, 양화, … 넓게 ‘분석철학’으로 통용되는 영역―를 가감없이 드러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생각에 저 문장을 독자들이 이해하는 데는, 지금껏 여정이 보여준 어휘들이 어떤 영역에서 특징적으로 사용되는 것인지에 관한 사전적 지식이 필요 없다. 그러니까 ‘분석철학’이 무엇인지, 저 수많은 어휘들이 무슨 뜻이고 서로 어떤 관련을 맺는지에 관한 지식 말이다. 그럼에도 ‘여정적 지식’이라는 우스갯소리(!)는 통할 것이다.

이 ‘지시’가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같고 다름’이라는 논리적 현상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원래 ‘A priori’를 정말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같음과 다름은 애초에 거기 있다고 말하겠다. 언어 전에도 있었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같거나 달랐기 때문에 언어가 가능했다. 갓난아기에게도, 원숭이나 강아지, 고양이, 모든 동물들에게도, 심지어 식물이나 미생물에게도 마찬가지다. 조금이라도 인식하고 반응하는 모든 주체들이 이 현상을 감각하고 있다. 하다못해 분자와 원자의 상호반응도 그렇다. 양성자가 하나 있다. 주변에 뭔가 있다. 그런데 그게 전자다? (혹은 ‘전자’와 ‘같다’?) 그러면 붙어서 수소 원자가 된다.

내게 ‘여정적 지식’이 없어서일까. 그래서 생각보다 간단해 보인다. 어떤 것의 같고 다름을 문제삼느냐, 는 것이 문제다.

* ‘같고 다름’이라는 논리적 현상에 관한 덧붙임 ; YES or NO나 + / – , 0과 1, 그러하다 혹은 그러하지 않다, 등으로 생각할 수 있는 binary한 논리적 기능소素라고 봐도 좋다. 굳이 ‘현상’이라 한 것은 명명과 지시, 인식 과정에서 언어주체가 판단하기 이전에는 ‘세계는 그저 그렇게 있다’라는 지금까지의 입장을 괜히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술할 것이다) 사실 논리적 ‘구조’라고 써서 선험성을 더 강조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이해해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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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종의 문제 :

“목이나 속, 종과 같은 생물학적인 분류가 자연에 실재”(여정)한다고는 확신할 수 없다. 단지 어떤 분류를 가능케 하는 (비)동일성이라는 현상이 있다. 분류는 자의적일 수 있으나 분류를 가능케 하는 것은 자의적이지 않다. 어떤 공동체는 크기를 너무나도 중요시해서 크기에 따라 동물을 분류한다고 하자. 그게 가능한 것은 임의의 크기 1과 크기 2가 ‘같거나 다르기 때문’이다. 또는 색을 중시하는 부족이라면 백조와 흑고니를 다른 무엇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공동체는 없다는 경험적 사실이 있어도 분류의 자의성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거기에 과학이 통시적으로 기여하는 것뿐이다. 과학은 어떤 대상을 분류할 수 있는 가장 엄밀한 기준을 찾아나간다. 그게 절대적 진리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과학의 신빙성 문제). 처음에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사이에서 어떤 ‘다른 점’이 발견된다면, 그리고 그 다른 점이 인간의 사유에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다준다면(편리함이든 엄밀함이든), 그 다른 점을 기준으로 새롭게 분류한다. 생각건대 ‘흑고니’의 문제는 이런 것이다. 백조의 색깔은 ‘다를 수 있음’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고니속 내에 ‘더 유의미한 같음’이 있다! 그 유의미함을 결정하는 것은 첫째로 수많은 개체들 사이의 ‘최소공약 소素’일 것이며, 둘째로는 앞서 언급했던 편리함이나 엄밀함 등의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둘은 혼재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언어공동체 내에서 공유된다. 다른 층위에서 반복되는 말이지만, 이 공유 또한 ‘같고 다름’에 의해서 가능하다.

(아마 크립키의 ‘지시 인과론’에 대한 일반적 반박, “그 의사소통의 인과고리가 어떻게 가능하냐!”에 대한 주관적 해답이 되겠다)

‘Mental file’도 마찬가지다. 비유적으로 말해, 처음 A라는 사람을 만나면 점이 하나 생긴다. 만나는 순간 그 사람은 어떻게든 ‘유의미’해지기 때문이다(Robin Jeshion의 significance를 생각하며 썼다)그 점 하나에 ‘A와 같다’고 인식한 것들(기술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이 달라붙는다. 그렇게 덩어리가 생기고, 이후 ‘같고 다름’을 재판단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떨어질 것은 떨어지고 새로 붙을 것은 붙는다. 인간관계상의 ‘filing’에 있어서, 통상적이지 않은 것에 같고 다름을 적용하는 괴짜가 있을 수 있겠다. 이를테면 ‘파상’ = {x ; x=파란색, 창문, 웅덩이, 물병, …} 같고 다름을 판단하는 공간이 자의적인 것뿐, 같고 다름이라는 논리적 구조를 기준으로 한다는 점은 확고하다(자의적이지 않다). 언어공동체 기준에서 보편적인 판단공간이 아니라 소통에는 문제가 있겠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저런 사람이 많지는 않으니까. (지인 중에 몇 있다)

색깔 사례는 조금 더 재미있다. 질적 연속성 때문이다. 여기에는 아무래도 언어공동체에서 약속된 구획이 있을 것이다. 다만 그 구획의 ‘최초 명명’은 역시 같고 다름이 기준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빨간색과 파란색이 있다. 혹은 주황색분홍색도 있다. 이렇게 선명하게 구분되는 색깔들을 일단 다르게 명명했다. (필요나 관습에 의해 그 사이의 어떤 색도 명명한 경우가 있을테지만) 확연하게 구분되는 이 색깔들을 중심으로 언어공동체에서 명명이 이어져왔고, 그 사이사이에 ‘덜 빨간색’ 혹은 ‘더 파란색’, ‘애매한 파란색’과 그 어디쯤의 색깔들이 있다.

‘얼마나 가깝냐’가 질적 연속성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준다. 동일성에 의해 엄밀히 분류하지만, ‘같고 다름’의 논리가 그 사이의 연속적인 색들을 ‘엄밀한 이름들’에 수렴시키기 때문에, 우리는 질적 연속성을 사고할 수 있다. 이런 애매한 색을 이야기할 때, 정확히 배정되어 있는 이름이 없는 한, 파란 것 같기도 하고 초록색도 보이고, … 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파란색과 초록색이라는 동일성이 굳건히 거기에 있다. 그래서 그 사이 어디쯤의 이런 색도 쓸데없는 미분 없이 ‘부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생각건대 그 동일성은 우연히 정립된다. ‘어떤 언어 공동체에서도 어떤 대상을 하나의 덩어리로 여기는 기준이 같을’ 것 같지는 않다. 현존하는 모든 언어 공동체가 같은 기준으로 대상을 분절한다 하더라도, 개인적으로는 그 ‘기준’의 일관성이 필연적인 것이라 보기는 힘들다. (물론 이 직관을 확신하기는 스스로도 이르다고 생각한다―사실 이런 논의는 내 ‘지평’ 밖이다) 대신 반복해서 주장 (창작)중이듯 ‘원리’의 일관성은 필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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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시사 :

지시사의 수수께끼에 동의한다. ‘저것’을 손을 들어 가리키는 일은 최초의 명명 중 하나였을 것이다. 전前언어적으로 존재하던 세계를 언어로 끌어들이는 최전선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지시하는 방식이 완전히 자의적이지 않다는 것, 다시 말해 직접지시의 대상이 지시하는 언어적 표현과 모종의 관계를 이미 맺고 있다는 것이 지시사의 미묘한 부분이다.”(여정)

그러나 지시는 애초에 현상이다. 비유컨대 현상학적 단계다. 의식의 지향이 있고 대상은 의식과의 관계 속에서 정립한다. 나는 ‘최초의 지시’를 상상(!)하려는 것이다. 그 말이 무엇이었든 간에, 아직 아무 이름도 없는 X를 타인과 공유하려는 욕구에서 지시사는 탄생했다. 같은 말로, 지시사는 전前언어적 세계와 인간의 관계에서 탄생했다. ‘언어적으로 환원되기 이전의 세계’와 ‘세계를 양화하려는 의식’ 모두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아니, 거창하게 ‘최초’라 말하지 않아도 되겠다. 지시사는 지시하는 순간에만 발생한다. X를 ‘저것’이라고 지시하기 전에는 X는 ‘저것’이 아니라 X다.

그리고 같거나 다름이 지시를 가능케 한다. 내가 X를 ‘저것’이라고 지시하는 것은, ‘저것’이라는 언어가, 혹은 그것으로 표상/공유하는 관념이 실재 X와 같거나 다르기 때문에 가능하다. 약하게 말하여, 최소한 그 속성이나 부분이 같거나 다르기 때문에 가능하다.

또한 지시(혹은 사실을!)를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지시하는 대상에 얽힌 여러 이해가 논리적으로 공약가능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한순간에 뿅, 하고 나타난 것이 아니다. 논리적 공약가능성 위에서 인간의 언어는 통시적으로 구성되어왔다. 지시와 이름은 자의적이다. 그러나 그 원리는 자의적이지 않으며, 자의성에도 불구하고 공유를 가능케 한다. 제한적 자의성 문제는 이렇게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다만 이 모든 것은 실재에 새겨진 게 아니다. 세계는 ‘여하한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논리는 그런 ‘존재 방식’이 아니다. 논리는 표상하려는 주체와 세계가 만날 때 발생하는 현상이다. 세계의 살이 아니라 뼈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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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갯소리의 수습 :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출처) 썸네일이 아쉬워서 항상 이미지를 넣으려 한다. 믿기지 않겠지만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와 ‘틀린 그림 찾기’는 거의 비슷하다.

애초에 ‘여정적 지식’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실 나는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명명하지 않았다. 그럴듯하게 그려진 모호한 실루엣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애초에 명확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는 지시다. 하지만 실패할 수도 없는 지시다. 나는 사실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누군가에게 무엇인가가 전달된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여정적 지식’이라는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렸기 때문이다. 거기서 같고 다름이 출현한다. 각자가 저마다의 대상을 가지고 같고 다름을 판단한다. 이건 하나의 현상이다. 확정적인 의미도 없는 이름을 공유하는 이 상황은 차라리 게임이다.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다시 말하건대 이 모든 것은 실재에 새겨진 게 아니다.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이름하고 지시할 수 있다. 그리고 공유할 수 있다. 그때 논리라는 형식, 원리가 나타난다. 사실(세계)은 주체 밖에 그저 그러하게 있으며 단지 그 사실들을 향유(사유)가능케 하는 원리가 있다. 존재가 아니라 현상의 방식으로. 세계의 뼈대이지 살이 아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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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

언어에 관한 논의는 중요하다. 사실들을 명료하게 해준다. 논리를 사용하여 선명하게 밝혀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밝혀내야 한다. 다만 그 ‘가능영역’을 모두 채워도 남는 것이 있다. 미美와 정의와 가치판단들, 혹은 사랑, 내지는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가와 같은 물음들. 그것들을 binary하게 다루는 일을 아직은 상상할 수 없다. 그러하다와 그러하지 않다, 같다와 다르다, 등으로 단순하게 쪼개지지 않는 것들이다.

세계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문은 거기에 있다.

파상
studien618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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