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계의  아래쪽 오른편에서 나는 거의 견디기 어려운 광채를 지닌 무지갯빛의 작은 구체 하나를 보았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빙빙 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나는 그런 움직임이 그 구체 속에 담긴 현기증 날 정도의 광경들 때문에 생겨난 환영이라는 것을 알았다. 알레프의 직경은 2~3센티미터 정도 되는 것 같았지만, 우주의 공간은 전혀 축소되지 않은 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각각의 사물(예를 들자면 거울의 유리 표면)은 무한히 많은 사물들이었다. 그것은 내가 우주의 모든 지점들에서 그 사물을 분명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이 붐비는 바다를 보았고, 여명과 석양을 보았으며, 아메리카 대륙의 군중을 보았고, 검은색 피라미드의 한가운데에 있는 은색 거미줄을 보았으며, …

(중략)

모든 지점에서 알레프를 보았고, 알레프 안에서 지구와 또다시 지구 안에 있는 알레프와 알레프 안에 있는 지구를 보았으며, 내 얼굴과 내장을 보았고, 네 얼굴을 보았으며, 현기증을 느꼈고, 눈물을 흘렸다. 내 눈이 그 비밀스럽고 단지 추정적인 대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대상은 사람들이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만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것, 그러니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우주였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알레프’ 중에서. (단편집  “알레프”, 송병선 역, 민음사)

집의 지하실에서 세계를 볼 수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세계의 모든 것을, 모든 공간과 모든 시간에서. 일어난 것들과 일어나는 것들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다면 그는 어떤 사람이 될까. 상상하기 쉽지 않다. 아마 현자 아니면 미치광이가 될 것이다. 보르헤스 자신은 작품의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거리에서, 콘스티투시온 광장의 층계에서, 지하철에서, 나는 모든 얼굴들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 어떤 것도 이제는 나를 놀라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내가 이미 보았던 것에서 다시는 자유로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다행스럽게도 며칠 밤의 불면 끝에 다시 망각이 내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세계 앞에 홀로 선다는 건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다행스럽게도 망각이 작동’했다고 끝을 맺었겠지만, 다른 곳에서 보르헤스는 ‘기억의 천재’에 관해서도 썼다. 경험한 모든 것을 그대로의 연속성과 개별성을 유지한 채 완전히 기억하는 사람.

그는 1882년 4월 30일 동틀 무렵 남쪽 하늘의 구름 모양을 알고 있었으며, 기억 속의 구름과 딱 한 번 보았을 뿐인 어느 책의 가죽 장정 줄무늬, 혹은 케브라초 전투 전야의 네그로 강에서 어떤 노가 일으킨 물보라를 비교할 수 있었다.

보르헤스, ‘기억의 천재 푸네스’ 중에서.  (단편집 “픽션들”, 송병선 역, 민음사)

그는 ‘알레프’와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딴지를 걸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에게는 일반적인 사고, 즉 플라톤적인 사고를 할 능력이 실질적으로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개’라는 속(屬)적 상징이 형태와 크기가 상이한 서로 다른 개체들을 포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으며, 또한 3시 14분에 측면에서 보았던 개가 3시 15분에 정면에서 보았던 개와 동일한 이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사고하는 데는 그리 훌륭한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해 본다. 사고라는 것은 차이점을 잊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화하고 추상화하는 것이다. 푸네스의 비옥한 세계에는 상세한 것들, 즉, 곧바로 느낄 수 있는 세세한 것만 존재했다.”

‘푸네스’가 ‘알레프’를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러나, 장담컨대, 그는 아마 경험한 것 이외의 어떤 유효한 말도 해낼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껏 얘기했던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죄다 경험해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알레프 안에서 맴돌 것이다. 기술된 모든 것 안에서. 이것은 이러이러하며 저것은 저러저러하며, … (언뜻 비트겐슈타인을 떠올리게 된다)

말인즉, ‘알레프’는 결과나 결론이어서는 안된다.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혹은 애초에 ‘없는 것’이어서, 향하려 하는 순간 함정에 빠진다고 해야 한다.

§

그래서 우리는 얼굴이 없는 이름들을 조합하며 더 나은 윤리적 방법을 고찰해 보아야 한다. 이를테면 개별화는 현실에서의 선택을 결정하고 일반화는 그 선택을 정당화한다. 일관되고 정돈된 도덕을 위해 우리는 보편적인 사례들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의 적용을 위해, 그리고 그 규칙이 옳음을 배우기 위해 얼굴들을 떠올릴 수 있다. 아니, 그것을 떠올리지 않아서는 안된다. 우리의 태도는 대상의 얼굴을 지우는 데에서 출발해서 아주 구체적인 상대들의 얼굴로 향한다.

여정, “복제된 것들과 “그것들”의 윤리” 중.

지금까지 이야기를 나눈 ‘기호 너머의 것들’, 혹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는 그저 어떤 표정을 짓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푸네스’는 소설의 인물에 불과하다. 현실의 우리는 그 앞에 설 수 없다. 애초부터 성급한 문제 설정이었다. ‘구체적인 상대들의 얼굴’로 향해야 하지만 그 모든 얼굴들을 그려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이것도 성급한 결론일까) 어쩔수 없이 ‘대상의 얼굴을 지우’고 보편적인 사고 범주에서 출발해야 한다. ‘일반화하고 추상화’하지 않으면 우리는 사유할 수 없다. (언어적(!) 사유가 아닌 방식을 상상할 수는 있겠지만) 오로지 두려움, 알레프를 상상하는 인간의 두려움만 있다.

‘태도’라는 말은 그래서 적확해보인다. 그 모든 것은 도달 가능/불가능한 무엇이 아니다. 목적어로 다룰 수 없다. 단지 어떤 사유에서든 다 잡아내지 못하는 잉여가 있음을, 그 ‘틈의 감각’을 항상 안고 가는 게 최선일 것이다.

§

이야기라는 것은 오묘하다. 여타 영역과 공약불가능한 문학의 특질이 있다면, ‘애초에 이야기’라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이러이러하게 일어났음, 만을 원재료로 하는 장르. 작가들은 ‘기호로 이루어졌지만 기호가 아닌 것’을 가지고 애써 말하려 싸우는 자들이다.

“만약 말해질 수 없는 것, 기호가 작동하게끔 하지만 결코 기호로 환원될 수는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건 —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 이다.”

“나는 자기가 됨에 이은 자기가 됨……들로서/써, 나에게 일어난 모든 것들로서/써 나로 된다. 그러므로 다시 자기를 들여다본다는 것, 자기가 되기를 꿈꾼다는 것은 가장 개별적이고 고유한 역사성(그러나 이것은 인과성에 따라 체계적으로 조직되는 종류의 역사일 수는 없다) 속에서 기호로 환원될 수 없는 것들을 일어난 것의 일어남 그대로의 모습까지 발굴해내어 보존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을까.”

단현, “기억하기-사건에까지 도달하기-자기가 되기”

어쩌면 가장 훌륭한 ‘책사’는 작가일 수 있겠다. 혹은, 알레프 앞에 선 푸네스는 작가가 될 것이라는 부질없는 상상도 해본다. 과학적 방법에서 출발했지만 종착지는 문학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가능성을 본 것인지 포기하게 된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단현이 보여주는 다른 경로에 주목하게 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찾아가는 소설적 작업은 내가 처음 제시했던 거창한 학문적 목표나 방법론적 의문이 아니라, 절실하고 내밀한 실천 자체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거대 담론에 포섭하려 했던 것이다. 보편이나 인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보편적이고 논리적 체계 안에서 다루려 했다. 이야기로 시작했어야 했다. 혹은 지난 달에 시도한 것처럼 이야기의 영역 안에 있어야 했다. 가장 개별적인 것, 가장 사소하고 내밀한 것에서 시작해야 했다.

§

이를테면 오카 마리는 “기억·서사”(김병구 역, 소명출판, 2004)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2차대전 당시 의아한 일을 겪은 미국인 대위가 하나 있다.

물량면에서 위력을 발휘한 미군에 대해 탄약마저 바닥이 난 일본 병사들은 적군을 놀라게 하려고 영어를 부르짖으면서 돌격했다. 당시 그 미국인 대위는 말하기를, 돌격해 오는 일본 병사들 중 한 사람이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헬 위드 베이브 루스!(Hell with Babe Ruth : 베이브 루스와 함께 지옥에나 떨어져라)”라고. 베이브 루스란 물론 과거에 유명했던 미국 야구 선수의 이름이다. 그런데 “어찌해서 베이브 루스인가”라고 하면서 그 노년의 대위는 의아해 했다. “‘헬 위드 루즈벨트’라면 이해가 가지만”이라고 그는 말했다.

헬 위드 ‘베이브 루스’! 아마 ‘루즈벨트’였다면 대위는 이 일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베이브 루스’라는 단어의 이물감은 큰 역할을 한다. 사건은 불가해하게 남는다. 그야말로 논리와 역사에 포섭되지 않는 잉여부분이다. 대위는 ‘그런 일이 있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곱씹게 된다. 그가 사건을 영유하는 게 아니라 사건이 기억을 통해 그를 영유하고 있다.

“헬 위드 베이브 루스” ……. 죽음을 향하여 돌격하는 그 순간 왜 그러한 말이 입에서 발설되었는지, 당시 일본 병사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왜 베이브 루스인가. 그러나 베이브 루스라는 이름과 함께 그 고개에서 그 당시 한 일본 병사가 부조리하게 죽어간 바로 그 ‘사건’의 기억이─그때 그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의 어둠 속에 비밀로 남겨진 채─우리에게 회귀한다. ‘사건’이라는 것의 바로 그 잉여부분, ‘서사’에 떡 벌어진 아주 컴컴한, 바닥을 알 수 없는 개구부가 있는 곳을 지시하고 있는 듯이.

” ‘서사’에 떡 벌어진 아주 컴컴한, 바닥을 알 수 없는 개구부”. 여기 개인과 세계가 만나는 통로가 있다. 단지 우리는 먼저 사건에 다가갈 수 없다. 사건은 단지 출현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타자도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그런 언어가 있다. 또는, 언어 너머에 있으면서도 우리의 언어와 닮은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지각되지만 개념 틀 안에서는 포착되지 않은 채 획득된다. 어디에서 그런 것이 획득되는가? 아마도 세계를 인식할 때, 구조화되지 않았고 또 그러할 수 없는 대상을 조우함에 따라 그것이 획득된다. 모든 순간 우리는 어떤 고유한 것을 경험하며 아무리 정교한 언어가 구성되어도 이러한 만남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타자가 등장한다.” – 여정, “복제된 것들과 “그것들”의 윤리” 중)

§

그러니까 우리는 접근가능한 사실들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그것들은 항상 전체로 드러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알고 사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것을 목적삼아서도 안 된다. 이를테면 식보다 미지수가 많은 연립방정식 체계와 같다. 변인들의 값이 완전하게 알려지기 전까지는 모든 변인들의 값이 확정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과학을 발전시킨 건 그 미지수들에 대한 열망이었다. 논리로는 달성 불가능한 영역을 관찰과 귀납으로 메꾸어왔다. 많은 상수들이 있고 많은 논쟁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과정이 ‘완벽한 상수’가 가능하다는 믿음 위에 있지는 않았다. 과학은 과학이다. 신의 언어나 ‘알레프’가 아니다.

포착할 수 없는 잉여분. 이 모든 것들을 지금의 말로는 다할 수 없음을 감지할 때 사유는 한 계단씩 발전했다는 것이다. 다만 그 동력은 ‘모든 것을 말로 해내겠다는 강박’이 아니어야 한다. 사건들이 출현할 때마다, 사건이 우리를 영유할 때마다, 그저 예민해야 한다. 가만 우리를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을 기억해야 한다. 그 불가능성은 극복해야 할 것이 아니다. 단지 명심해야 할 것이다. 타겟이나 방법론이 아니라 태도가 되어야 한다.

그래, 우리에게는 ‘알레프’가 없다. 우리는 ‘푸네스’가 아니다.

파상
studien618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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