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적인 것에 관하여” (2)  

나는 이 글에서 추상적 존재자에 관한 어떤 이해의 경향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것은 곧 추상적 존재자와 인식 주체가 직접적인 인지적 관계를 맺는 것이 그 추상적 존재자에 관한 그 인식 주체의 앎을 형성한다, 내지 정당화한다는 이해이다. 이러한 이해를 소개하는 것은 최근 소개한 문제와 연관된다. 이전 글, “추상적인 것에 관해 논쟁하기”를 통해 나는 우리가 이미 모종의 추상적 존재자를 객관적인 것으로 여겨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고 논증했다. 그리고 글의 말미에서, 그렇다면 어떻게 그 존재자에 관한 앎이 가능한지가 문제시된다고 제안했다. 이하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제시되어 온 응답의 첫 단계이다.

영미철학의 영웅들

현대영미철학에 비추어 “누가 영웅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지체 없이 답을 줄 수 있다. 러셀과 크립키가 그 영웅이다. 그리고 내 개인에 비추어, 이들 외에 누가 영웅이냐고 묻는다면, 퍼트남이 그 영웅이라고 답할 것이다. 이 세 사람은 썩 관계가 좋은 입장들을 갖고 있지는 않다. 러셀이 고유명에 관한 기술주의자였다면 크립키는 지시주의자였다. 러셀이 감각자료sense-datum를 승인했다면 퍼트남은 이를 거부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그저 러셀을 옛날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기분인데.)

그러나 이들은 추상적 존재자에 관한 지식에 있어서만큼은 유사한 입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내게 보인다. 물론 이들이 대표하는 입장은 다르다. 크게 이 셋은 (다시 러셀을 옛날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지만) 러셀과, 크립키-퍼트남 둘로 나뉠 수 있다. 러셀의 주장은, (i) 속성, 적어도 가장 단순한 속성은, 면식 관계acquaintance relation에 따라 알려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크립키-퍼트남의 주장은, (ii) 술어, 적어도 자연적 속성을 표현하는 술어는, 직접 지시direct reference에 따라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원리상 두 주장은 동일하지 않다. 일단 둘이 대변하고자 하는 입장부터가 다르다. 러셀은 이름에 관한 기술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그 기술구를 구성하는 술어들이 인지적으로 유의미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데에서 추상체에 관한 그의 면식 이론을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반면 크립키는 이름에 관한 지시주의를 옹호하는 과정에서, 퍼트남이 지적한 자연적 속성의 문제가 이름에 대한 그의 해결과 동일하게 해결될 수 있음을 발견함에 따라 그(들)의 직접 지시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나는 이하에서 둘의 동기가 다를지언정 각각이 확장될 때, 몇 조건에 따라 둘은 사실상 다음과 같은 주장에 수렴한다고 입론한다. 그것은 곧 추상적인 것과 우리가 적합한 인지적 관계를 형성할 때에만, 그것에 관해 유의미한 발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입론은 이전 글, “추상적인 것에 관해 논쟁하기”에서 밝힌 점과 관련지어볼 때, (파상이 “흠터레스팅”이라고 코멘트한) 흥미로운 주장으로 나아가게끔 한다. 이에 앞서 두 영웅적 입장부터 이해해 두도록 하자.

직접적 관계에 관한 논증들

러셀의 경우

(i)과 (ii)는 단순히 직관에 호소한 주장이 아니다. 두 주장이 나오기까지의 논증을 간단히 보자. 러셀은, 그의 명저 “면식에 의한 지식과 기술에 의한 지식Knowledge by acquaintance and knowledge by description”에서 지식의 두 종을 나눈다. 하나는 면식에 의한 것이고, 하나는 기술에 의한 것이다. 면식은 직접적인 인지적 연관이다. 기술은 “이러저러한 것”이라는 표현이다. 이 중 보편자 또는 추상체에 관한 지식은 어디에 속하는가? 면식적인 데에 속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존재자를 생각에 품음으로써conceiving, 또는 그것에 관한 개념에 대해 면식을 가짐으로써 그것에 관해 알게 된다.

왜 그런가? 이미 우리가 어떤 것에 관한 개념을 갖지 않고서는, 즉 보편자 또는 추상체와의 면식 관계를 갖지 않고서는, 대체 그러한 개념을 표현하는 술어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는, 오로지 대상 사이의 유사성만이 존재하며, 보편자같은 것은 없다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때에도 우리는 “유사성”이라는 속성을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야 하며, 또한 그 때에도 각각의 개별적 존재자들은 어떤 추상적 속성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여전히 보편자와 추상체와의 면식 관계는 유지된다.

퍼트남-크립키의 경우

(ii)는 퍼트남의 쌍둥이 지구 논증과 이에 대한 크립키의 확장으로부터 옹호된다. 퍼트남은, 역시나 그의 명저인, “‘의미’의 의미The Meaning of ‘Meaning’”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어떤 행성 “지규”를 생각해 보자. 그곳에는 XYZ라는 화합물이 있어서, 그 행성의 사람들이 마실 수 있고, 무색투명하며, 흐르는 성질을 갖고… 등등 지구에서의 H2O가 갖는 모든 질적 속성을 갖고 있다. H2O가 뭔지 모르는 유학자 여정 씨를 떠올려 보자. 그가 지규에 가서 XYZ를 보고, 그것의 질적 속성에 근거하여, ‘저기에 물이 있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왜 그런가? 그가 본 것이 H2O가 아니기 때문이다. 퍼트남이 이로부터 발견하는 것은, 어떤 술어의 의미는 그것의 질적 기술과 다르다는 것이다. 즉, “의미는 머리 밖에 있다.”

크립키는 그의 강의 《이름과 필연Naming and Necessity》에서 이를 발전시킨다. 단지 한 세계에서의 두 지구뿐 아니라, 우리는 어떤 세계에 있어서도 물이 H2O가 아닌 XYZ인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금의 예시를 통해 논증한다. 우리가 금의 정의적 속성을 “노란 금속임”이라고 했다고 하자. 그런데 어떤 반사실적 상황에서는, 물리적 여건이 다름에 따라, 금이 파란색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세계는 금이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세계인가? 당연히 아니다. 또한 금의 정의적 속성을 “원소번호 79번임”이라고 했다고 하자. 그런데 어느날 사실 모든 물리화학적 이론이 그릇되었음이 밝혀질 수 있다. 그렇다면 금은 사라진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왜 그런가? 금은 질적 특징이나 이론적 정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금이나 물과 같은 자연적 속성은 대체 무엇인가? 둘이 공히 주장하는 바는, 그것이 지표적 속성indexical properties이라는 것이다. “나”, “이것”, “저것”, “지금”과 같이, 이들 속성은 어떤 것을 그것 그대로 지시하게끔 한다. 어떻게 그러한 지시가 가능해지는가? 그들에 따르면, 직접지시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의 어떤 자연적 속성을 명명할 때, 그 명명은 그러한 자연적 속성을 갖는 모든 현실적 존재자들과 가능체들에 관한 명명이다. 여기에는 질적 속성에 대한 기술이 개입하지 않는다. 즉, 자연적 속성의 이름은 그 자체로 (크립키의 표현으로는) 고정지시자regid designator이다.

확장

이제 이들의 입장을 확장해 보자. 먼저 러셀이다. 그의 추상체에 대한 면식 가설은 지레짐작하듯 경험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노란색”과 같은 감각자료 외에도, 생각에 품어야만 하는 추상적 관계를 예로 든다. ‘이전에before’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 이전이나 이후에 관한 감각적 대상을 갖지 않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튼 우리는 어떤 것 이전에 어떤 것이 일어났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그것의 예시와는 별개로 이해할 수 있다. 차라리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선후 관계를 떠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선후 관계의 예시들은 ‘이전에’의 의미와 같을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이전에’의 개념과 면식을 갖는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사용된 그의 논증은 다음 단계로 전개된다:

(1) ‘이전에’는 인지적으로 유의미하다.

(2) 그러나, ‘이전에’의 예시들은 그것의 유의미성을 해명하지 못한다.

(3) 따라서, ‘이전에’가 표현하는 추상체, 곧 선후 관계는 면식에 의해 알려진다.

(1)-(3) 외에 그가 필요로 하는 논제도, 그가 제시한 논제도 있지 않다. 또한 오로지 ‘이전에’만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 어떤 지표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논증의 일반화가 가능할 것 같다:

(1*) 추상적 표현 e가 인지적으로 유의미하다고 하자.

(2*) 그러나 e의 예시들은 그것의 유의미성을 해명하지 못한다고 하자.

(3*) 그렇다면, e가 표현하는 추상체는 면식에 의해 알려진다.

이 일반화가 가능하다면, 러셀은 ‘이전에’에 관한 그의 논증을 위해 다음 논제를 선취하고 있던 셈이다:

(R) 인지적으로 유의미하면서, 그것의 예시만으로는 그 유의미성이 해명되지 못하는 어떤 추상적 표현 e에 있어서도, 그 사용자와 면식 관계를 갖는 추상체가 존재한다.

퍼트남-크립키의 논증을 확장하는 것은 다소 까다로운 일이 될 것 같다. 그들이 원래 염두에 두던 것은, 과학적 대상들에 한정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퍼트남이 《이성, 진리, 역사Reason, Truth, and History》 이후의 저작들에서 든 가치어의 예시들을 생각하자면 상황은 조금 달라진다.

‘합리적인’과 같은 평가어를 생각해 보자. 이것은 분명 자연적 속성을 표현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합리성은 어떠한 물리적 여건 같은 것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한편 합리성의 내포, 즉 어떤 것이 합리적 판단이냐는 통념은 시대마다 다르다. 그렇다면 그것의 외연 역시 달라질 것이며, 표현 ‘합리적이다’는 시대마다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두 시대의 ‘합리적인’이 동일한 개념을 말하고 있다고 여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차라리 우리는 이런 류의 추상적 속성이 객관적 대상으로 주어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퍼트남이 내재적 실재론, 또는 상식적 실재론을 옹호하기 위해 주장한 바이다.

이 입장은 (ii)의 확장을 요구한다. (ii)가 자연적 속성을 표현하는 술어에 한한 논제라면, 퍼트남의 합리성 논증은 그 논제가 이론적 동일시가 이루어지는 모든 술어에까지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크립키가 발전시킨 방식으로 동일하게 퍼트남의 후기 논증이 발전될 수 있을 것이며, 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이렇다: (ii*) 술어, 적어도 두 개념 체계에서 동일시될 수 있는 술어는, 직접 지시에 따라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직접 지시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응당 그 대상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ii*)가 함축하는 바는, 그러한 술어는 그 대상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다음 논제를 발견한다:

(P-K) 상이한 개념 체계에서 동일시될 수 있으면서, 그 외연과 내포가 상이한 어떤 술어 p에 있어서도, 그와 같이 명명된 대상이 존재한다.

조건화

이렇게 러셀과 퍼트남-크립키의 확장으로부터 나는 두 논제를 끌어냈다. 다음으로 내가 주장하려는 것은 (R)과 (P-K)가 어떤 조건 하에서 동치라는 것이다. 두 논제의 후건은 사실상 같은 것을 말하고 있으므로, 전건이 동치라면 두 논제는 동치이다. 그리고 각 논제의 전건 (r), (p-k)는 다음과 같이 각각 두 연언지로 구성된다:

(r1) e가 인지적으로 유의미하다.

(r2) e의 의미가 그것의 예시만으로는 해명되지 않는다.

(p-k1) e가 상이한 개념 체계에서 동일시된다.

(p-k2) e가 상이한 외연과 내포를 갖는다.

한편 (r1)은 둘로 이해될 수 있겠다. 한가지 이해의 방식은 e가 절대적인 의미에서 인지적으로 유의미하다는 것이다. 즉 어떤 개념 체계가 전제되더라도 e가 유의미하다. 다른 이해의 방식은, e가 상대적인 의미에서 인지적으로 유의미하다는 것이다. 즉 어떤 개념체계에서는, e가 유의미하다. 전자를 (r’1), 후자를 (r’’1)으로 불러 보자.

또 (r2) 역시 둘로 이해될 수 있다. 한가지 이해의 방식은 여기에서 언급되는 “예시”가 현실적 예시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e가 내포적으로 해명되어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r*2)로 부르자. 다른 이해의 방식은, 여기에서 언급되는 “예시”가 가능적 예시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즉, e의 내포 역시 외연적으로 환원하여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를 (r**2)로 부르자.

각각으로 구성된 (r)의 해석을 (r’*), (r’**), (r’’*), (r’’**) 등으로 부르자. 그리고 앞의 두 경우를 합쳐 (r’), 뒤의 두 경우를 합쳐 (r’’), 첫번째와 세번째 경우를 합쳐 (r*), 두번째와 네번째 경우를 합쳐 (r**)로 부르기로 하자. 또, (r’1)과 (r’’1)를 합쳐 (r1), (r*2)와 (r**2)를 합쳐 (r2)로 부르자.

먼저, (p-k)에서 (r’’)로 가 보자. (p-k1)이 참이라면, e는 어떤 개념 체계에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r’’1)이 참이다. 또한, (p-k2)가 참이라면, e가 두 개념 체계 사이에서 동일성이 보장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현실세계 및 가능세계에서의 예시들은 그 동일성을 해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r2)가 참이다. (p-k)에서 (r’’)로의 방향이 확보된다.

반대 방향으로도 가 보자. (r’1)이 참이라면, e는 어떠한 개념 체계에서도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p-k1)이 참이다. (r**2)가 참이라면, e의 의미는 외연과 내포 모두에서 차이남에도 두 도식에서 동일시되는 바, 그것의 의미가 해명되지 않는다. 따라서 (p-k2)가 참이다. (r’**)에서 (p-k)로의 방향이 확보된다.

(r)과 (p-k)가 동치인 조건을 찾아 보자. 먼저 (r’)과 (r’’)이 동치가 되는 상황을 찾아야 한다. 보건대, 논의되는 개념 체계 모두에서 e가 유의미하다면, 둘은 동치이다. 그런데 (p-k)가 갖는 상황은 이미 특정한, 비교되는 개념 체계에서의 외연과 내포의 상이함이다. 그러므로, 조건 “논의되는 모든 개념체계들에서 e가 유의미하다”가 추가된다면, (r’)과 (r’’)의 구분은 무관한 것이 된다. 그 다음으로는 다음과 같은 형태의 가능세계 의미론을 전제하면 된다: “어떤 개념 체계 하에서 e의 의미, 즉 외연은, 그것의 현실적 외연과 가능적 외연 모두이다.”

따라서 논의되는 개념체계 모두에서의 e의 유의미성과 가능세계 의미론이 전제되는 상황에서 (R)과 (P-K)는 동치이다. 즉, (R)과 (P-K) 모두 다음 논제를 함의한다:

(T) 가능세계 의미론이 옳고, 논의되는 개념체계 모두에서 e가 유의미할 때, 그것의 가능적 외연만으로 그 유의미성이 해명되지 못한다면, 그 e가 표현하는 대상 O가 실재한다.

지식 습득

한편 러셀과 퍼트남-크립키가 원래 갖고 있었던 것 같지만 (R)이나 (P-K)에 포함되지는 않은 논제를 고려해 보자. 그들은 하나같이, (T)가 언급하는 그러한 대상 o에 관한 지식을 얻으려면, 그것과 적합한 인과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러셀은 그러한 관계를 “면식”이라고 불렀고, 퍼트남-크립키는 그러한 관계를 “직접 지시”라고 불렀다. 러셀은 여기에서 지각에 대해 이야기하던 것이고, 퍼트남-크립키는 술어에 대해 이야기하던 것이므로 둘은 방향이 다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인과를 통해 어떤 원초적 술어의 의미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해명했다는 점에서, 두 방향은 하나의 선으로 수렴된다.

그렇다면 (T)와 그리고 그들이 염두에 두었을 인과 이론을 통해 생각할 때 이런 결론을 얻는다. 가능세계 의미론이 옳고, 논의되는 개념체계 모두에서 e가 유의미한 상황을 생각하자. 그리고 e의 가능적 외연만으로는 그것의 유의미성이 해명되지 못하는 경우를 생각하자. 이 때, 우선 e가 표현하는 대상 O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또한 우리는 그 o와의 인과적 관계를 통해 e에 관해 알 수 있다.

여기까지가 e의 의미 그리고 그것이 표현하는 대상 O과의 인과 관계까지가 정당화되는 과정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전에’나 ‘금’, ‘물’과 같은 표현들이 어떤 속성을 지시한다는 것이 의심스럽지 않고, 또 그러한 추상적 존재자와 우리가 인과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 의심스럽지 않듯, 이전 글에서의 문제 제기였던 “형이상학적 개념과의 면식”은 썩 의심스럽지 않게 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믿고 있는 것을 조금만 확장하면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냐는 문제에 이어서, 그렇다면 그것에 관한 논쟁이 어떻게 옳거나 그를 수 있는지 묻게 되는 탓이다. 앎이라는 것이 단순히 형식적이라기보단 실질적으로 이러저러함을 말하고 있어야 하기에, 그 실질적인 것이 어떻게 채워질 수 있느냐가 다음 문제가 된다. 채워질 수 있다면, 우리는 형이상학적 일원론이 받아들일 만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없다면, 우리는 형이상학적 상대주의 또는 다원주의를 받아들이게 된다.


추상적 대상의 앎에 대한 실질적 문제를 다루는 것은, 일단 본고의 주제는 아니다. 이전의 논증들로부터 “추상적인 것을 어떻게 알게 되는가?”에 관한 입장을 밝히는 것으로 이 지면은 충분히 찼다. 그러니 여기에서의 논의는 이것으로 맺자. 실질적인 부분에 관해서는 다른 주제를 통해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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