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예린. (2019.) 〈Point〉.《Every Letter I sent you》

1. “There is no point, That is the point”

이 곡은 언뜻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는 고전적인, 그러나 다소 진부한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진다. 가벼운 읊조림으로 노래의 시작을 알리며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There is no point, That is the point”라는 구절도 ‘point’라는 단어가 맥락에 따라 갖는 다양한 의미를 활용한 아주 간단한 수준의 역설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곡에서 우리가 들어낼 수 있는 것은 그런 사랑스러운 말장난 이상의 것이다. 이 곡이 담고 있는 세계는 단어보다, 단어들의 총합보다 크다. 그리고, 움직인다.

〈Point〉가 정말 ‘이유 없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 맞다면, 맹목적인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것 치고 이 곡은 애절하지도 정열적이지도 않다. 침착한 사운드와 보컬, 같은 멜로디와 가사의 계속적 반복은 오히려 그 담담함을 통해 듣는 이를 매료하는 축에 속한다. 이쯤에서 ‘낭만적인 주제의 냉담한 표현’이라는 아이러니함을 이 곡의 두 번째 역설로 삼고선 글을 끝내 버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다음과 같은 의혹을 제기하는 쪽을 선택하고 싶다. 어쩌면 이 곡의 주제는 애초부터, ‘이유 없는 사랑’이나 ‘사랑의 이유’ 같은 것이 아니었으며 음악가 또한 듣는 이에게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는 오래된(그리하여 진부해진) 진실을 설득할 생각이 별로 없었던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2. 바다 모델로서의 바다와 사막

노래의 화자는 사랑의 이유를 물으며 혼란스러워하는 연인에게 도리어 질문을 던진다. 아니, 질문의 형태로 가장된 답을 제시한다.

you could ask me
“how much you love me?
as the ocean?
as the desert?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이 질문에 등장한 비유가 유발하는 이미지와 감각들이다. 이 신선한 비유의 매력은 사막과 바다가 완전히 대조되는 가운데서 가지는 은밀한 공통점에 있다. 모래빛으로 바싹 말라붙은 사막과 물빛으로 영롱하게 반짝이는 바다는 그 표면의 질감, 또 양감, 촉감, 색감 등에서 전혀 다른 감각들을 불러일으킨다. 이 감각들의 불협화로 인해 화자를 향해 겨냥(point)되었던 질문의 핵심(point)은 흩어지고 그의 연인은 자신에게 답이 아닌 질문의 모습으로 돌아온 사막과 바다의 거대한 이미지 속에, 그 수수께끼 같은 광활함 속에 덩그러니 남겨지게 된다.

이 두 가지 이미지의 충돌은 노래의 세계관을 순식간에 넓어지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사막과 바다의 비유 앞에서 듣는 이들은 ‘이유(point)가 없다는 사랑의 이유(point)’라는 귀엽고 가벼운 말장난 혹은 ‘점(point)’을 넘어선, ‘공간’을 도무지 마주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그 공간은 불협화로 가득 찬 수수께끼임과 동시에, 연인의 물음에 대해 화자가 제시한 해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공간에는 단지 그 공간이 있을 뿐, 우리가 원하는 형태의 응답과 관련되어 보이는 어떠한 중심(point)도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고정된 형태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은 그저 흩날린다. 그저 소용돌이친다. 매 순간 모습을 바꾸면서도, 여전히 사막은 모래로 가득하며 바다는 물로 가득한 그대로다. 역시나 모래를 뒤섞으며 제 모양을 바꾸는 사막과 일렁이고 파도치는 바다의 풍경은 안정적인 사랑보다는 혼란, 또는 환시와 더 깊은 관련을 맺는 듯하다.

들뢰즈˙가타리는 『천 개의 고원』에서 바다를 ‘바다 모델’이라는 일종의 철학적 모델로서 분석 및 제시한 바 있다. 육지생물인 인간은 육지에서처럼 능숙하게 바다를 측량하거나 탐사, 또는 정복하지 못한다. 바다는 인간에게 미지에의 흥미를 자아내면서도 미지에의 공포를 유발하는 곳, 또 낯선 곳, 그 표면 위에 집을 지을 수 없는 곳, 언제 폭풍우가 집어삼킬지 모르는 곳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이와 같은 혼란의 장소로서의 바다를 듣고 보고 느끼는 데 필요한 것 또한 “측정이나 소유보다는 징후나 평가”(『천 개의 고원』, 새물결(2001), 915)이다. 인간적인 기준들을 모두 무용하게 만드는 크고 작은 파도와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잔물결의 소음과 멀찍이서 전해오는 모래알들의 충돌에 ‘매번 새로이’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은밀한 공통점이란 바로 여기에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분류법을 따르자면, 사막과 바다는 둘 다 ‘바다 모델’이라는 속에 포함되는 종이다. 이들은 각각 모래/물방울이라는 단일한 질료의 다수성과 충돌로 이루어진 거대한 공간이자 움직임이다. 이들은 사랑에 대한 비유가 되는 데 있어서 그 광활함 뿐만 아니라 ‘중심 없음(pointless)’, ‘고정된 형태 없음’, ‘계속 움직임(변화함)’의 측면에서 깊이 연관된다. 물론 곡에 제시된 것 이상으로 사막과 바다의 속성을 고려한 확대해석이라는 비판이 가능하지만, 막상 그 말마따나 ‘곡에 제시된’ 대로의 음악적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이러한 방식의 해석이야말로 오히려 이 곡의 숨겨진 흐름을 밝힐 수 있는 적절한 접근법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곡에 제시된 상황을 다시 돌이켜 보건대, 화자는 불안해하는 연인에게 자신의 사랑을 다소 냉정하다 느껴질 정도의 담담한 어조로 해명하고 있다. 연인이 불안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 또 둘의 관계에서 문제시되는 것이 무엇인지는 곡의 후반부에 삽입된 LOOPY의 랩 파트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There’s no point
의미 없지 다
너 없이 여기는 폭풍우가 부는 밤
찾아보자 그 때처럼
너와 나의 이유를 다시
색이 없어 뿌옇게 빛 바랜 도시
문제투성이일 뿐
정답이 없는 기분
Pointless

그는 화자와 자신이 내던져져 있는 광활한 사랑의 장소를 “폭풍우가 부는 밤”에 비유한다. 이때 거대하고 중심이 없으며 계속해서 형태를 바꿔나가는 움직임인 ‘폭풍우’는 앞서 화자가 던진 답이자 질문인 그 비유에 등장한 ‘사막’ 그리고 ‘바다’와 절묘한 연관성을 드러낸다. 그는 지금 자신이 둘의 관계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며 ‘사랑의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 혹은 ‘이유가 없다는 사랑의 본질 자체’에 대한 불안과 혼란을 끊임없이 토로하지만, 그의 호소가 간곡해질수록 사랑을 묘사하는 그의 말들은 화자-그녀가 사랑에 대해 내렸던 정의와 점점 같은 모양새를 띠게 된다. 아니, 완전히 같아지게 된다. 다시 말해, 완전히 같은 가운데서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마치 사막과 바다의 비유가 그랬던 것처럼.

시종일관 미니멀하게 이어지던 곡의 운영은 이 순간에, 연인-그가 가장 거대한 혼란에 도달한 순간에, 최초로 기타의 선율을 흘려 넣으며 바로 이 지점이 곡의 클라이막스임을-즉 ‘point’임을 암시한다. 또다시 아이러니하게도, ‘pointless’에 도달한 순간이 이 곡의 ‘point’가 된 것이다. 기타의 선율은 잔잔하고 몽환적인 멜로디로 두 사람이 주고받은 비유와 상징의 대립,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긴장감을 모조리 와해시키며 듣는 이들을 사막 그리고 바다와 같은 ‘pointless’한 장소(point)에 던져 놓는다. 그러면 노래하는 이는 다시, 이 모든 과정이 영원히 반복될 거라는 듯-그래도 나쁠 건 없다는 듯 조용히 읊조리는 것이다.

There is no point,
that is a point
that’s how I love,
that’s what I love.

이 조용하고도 간결한 반복이 이 곡의 마지막 장소다.

그곳에서, 우리는 오로지 모래 알갱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로만 가득한, 소용돌이치는 사막의 신성한 고요를 본다. 햇빛이 부서질 때마다 발생하는 찬란한 충돌로 가득한 바다의 일렁임을 본다.

너무도 고요하여 아름다운 혼란을 본다.

3. 투명한 진실, 투명한 비밀

먼 길을 돌아왔지만, 이 곡은 ‘사랑의 이유(없음)’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그 ‘없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러나 잘 인식되지 않는, ‘혼란’이라는 잔물결에 대한 것이며 그 미세한 움직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해석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원령공주》(1997)에서, 타타라바 마을의 지도자 에보시는 더 좋은 마을을 만들기 위해 신들을 몰아내려 한다. 생명을 관장하는 신이자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기도 한 시시가미 신(사슴신)은 그러한 작당에 의해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목숨을 잃게 된다. 놀라운 것은 시시가미의 목이 베어진 그 순간 숲의 생명들과 숲이 모두 죽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시가미가 숲의 생명을 관할하는 신 혹은 숲의 심장(생명을 담당하는 기관)을 넘어 숲의 생명이자 숲 자체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시가미의 잘린 목을 들고 도망가는 지코보 일당과의 치열한 사투 끝에 주인공인 아시타카와 산은 시시가미의 목을 시시가미에게 돌려주는 데 성공한다. 바로 이때 사멸과 소생, 숲의 일부와 숲의 전체 사이의 대립을 아름답게 교차시키는 이 영화의 명장면이 등장한다. 목을 되찾고 죽어가는 시시가미의 시체가 쓰러지며 죽어가던 숲을 되살린 것이다. 이토록 죽음과 생명이 동시일 수 있을까? 이토록 한 생명체와 한 공간의 생명 사이의 구분이 와해되는 순간을 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 이 질문을 다소 감상적으로 되뇌이며, 나는 앞선 문장의 일부분을 수정하고자 한다. 시시가미는 ‘죽어가며’ 숲을 ‘죽음’으로부터 구해낸 것이 아니라, 잘린 목을 되찾아 ‘되살아나며’ 숲 그 자체인 자신의 존재에 관련된 진실을 고백하고 자신이 앞으로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숲이 ‘살아나는’ 풍경을 통해 말이다.

물론 그 진실은 누구의 입으로도 발설되지 않았다. 시시가미는 말이 없다. 심지어 그 진실은 의도적으로 은폐된 적조차 없다. 숲은 높은 하늘과 드넓은 대지를 향해 뻗어 있으며, 그 누구에게도 닫혀 있지 않은 공간이다. 여기서 진실은 진실이자 비밀이다. 비밀이자 진실이다. 그리고 구분 불가능한 그것은 오로지 뭔가가 살아나거나 죽어가는 떨림,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서만 포착이 가능한 투명한 것이다.

백예린의 〈Point〉 또한 자신의 연인에게 끊임없이 사랑의 진실을 고백하며, 그 진실 자체가 혼란스럽고 비밀스러운 것이라는 점까지를 고백하는 방식으로, 사랑의 비밀을 보호한다. 그리고 그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연인을, 듣는 이들을 초대한다.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애초부터 숨겨진 적 없었던 투명한 진실이자 마찬가지의 투명함으로 사랑의 공간을 온통 휘젓고 있는 혼란스러운 비밀이다.

기고자 치커리(connect2chicory@gmail.com)
철학, 현대시를 전공했다.
새소년 기타/보컬 황소윤의 작품세계를 분석(음반 《여름깃》,《 so!yoon!》)한 「nature & creature」를 다음 글로 게재 예정이다.

치커리
kjs97083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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