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진지한 이야기를 너무 오래 했다. 잠시의 휴식을 가진 뒤, 셋잇단음의 지면으로 다시 돌아오며 내가 가진 한가지 다짐은 이런 것이다: “그만 진지해지자!” 우리는 윤리적인 문제에, 비평의 근거에, 정치적 정당성에 너무 진지하게 눌러앉은 나머지 우리끼리 이야기하면서는 답하기 어려웠던 문제들까지 답해야 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자리도 아닌 곳에 가 싸워야 했다. 태권도 전공자가 검도장에 가면 허술할 수밖에 없다. 무에타이 수련을 했어도 권투 룰에 따라 싸우려면 손발이 제대로 안 움직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잠시 쉬어가려 한다. 진지한 이야기, 안녕! 새로운 셋잇단음, 안녕!

때로 우리는 그런 것들을 상상한다

불가능한 것이라고 하면 어떤 것이 있을까? 으레 나오는 예시는 네모난 삼각형이나 전부 빨간색이면서 전부 노란색인 표면 같은 것이다. 이런 것은 물론 좀체 상상되지 않는다. 개념화될 수 없는 탓이다. 일단 우리는 개념을 통해 무언가를 상상하는 것 같은데, 애초에 개념상 이상한 이런 상황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런데 어떤 것들은 불가능함직하면서도 상상될 수 있다. 우리가 빛보다 빨리 갈 수 있다면 어땠을까? 내가 나의 양친으로부터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우리가 실제로는 가상 세계에 살고 있다면 어땠을까? 맨 앞이야 물리적으로만 불가능할 뿐 형이상학적으로는 가능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다음 둘은 형이상학적으로도 불가능한 어떤 것처럼 보인다. 나의 생물학적 본질이 아니고서 대체 누구를 나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우리 모두가 가상 세계에 살고 있다는 주장은 퍼트남이 “통 속의 뇌” 사고실험을 통해 훌륭하게 반박한 것이었기도 하다.

이러한 상상은 단지 상상에서 그쳤던 것도 아니다. 이들 상상은 우리의 문화적 풍토 자체를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빛보다 빨리 갔었더라면,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가는 기괴한 상황에 놓일 것이라는 상상력이 있었다. 그들은 시간 이동물을 만들었다. 우리가 전부 가상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때로 우리를 섬뜩하게 했다. 이 섬뜩함을 발전시킨 이들은 전설적인 매트릭스 시리즈를 만들었다.

철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어떤 사물의 질료적 성질은 그것의 본질이다. 어떤 속성이 무언가의 본질이라면, 그것이 그 속성을 갖지 않은 경우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상상을 한다. 도날드 트럼프가 사람이 아닌 비글이었다면 어땠을지,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가 플라스틱이 아닌 황금이었다면 어땠을지, 하늘에서 떨어진 이 물방울이 비가 아니라 사실은 하느님의 눈물 또는 침(또는 곁땀(?))은 아니었을지. 이런 상상들은 소소하게나마 우리를 즐겁게 한다.

소설의 이야기가 아니야

이런 불가능한 상상은 단지 소소하고 문학적인 데에서만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수학의 경우를 보자. 얼마 전 미국의 마이클 아티야가 도전했고, 죽을 쒀 먹어 화제가 되었던 리만 가설. 리만 가설은 “제타 함수의 자명하지 않은 모든 근들의 실수부는 1/2이다”라는 주장이다. 수학을 잘 모르니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바보들을 비롯해 똑똑한 수학자들까지도 이 주장이 참인 경우와 거짓인 경우를 모두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보같은 우리들조차도 알기로, 수학적 진술은 필연적으로 참이거나 필연적으로 거짓이다. 그런데 모두 알다시피 리만 가설뿐 아니라 어떤 수학적 진술도 보자마자 그것이 참이거나 거짓임을 우리가 알지는 못한다. 필연적이라는 것은 그것의 역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필연적으로 거짓이라면 그것은 가능하지 못하다. 그런데 우리는 수학적 진술의 증명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참인 경우와 거짓인 경우를 모두 상상한다. 그런 상상이 필요 없었더라면 증명도 필요 없는 것이다. 앗! 그렇다. 우리는 이 때에도 불가능한 것을 상상한다.

또한 논리의 경우를 보자. 논리적으로 누가 말한다고 할 때, 적어도 그 사람이 지키고 있었어야 할 형식적 기준들이 있다. 어떤 것이 P이면서 동시에 P가 아닐 수는 없다. 또한 어떤 것이 P이면서 동시에 P라고 전제한다면, 그로부터 무슨 주장이든 따라나오게 할 수 있다(이를 논리학에서는 ‘폭발률’이라고 부른다). 또 p이면 q라는 것과 p임이 전제된 경우 q가 거짓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의 주장은 비논리적이다.

수학에서처럼, 논리학을 잘 모르는 우리도 논리적 진술이 필연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임은 안다. 그런데 수학에서와 비슷한 일이 여기서도 일어난다. 우리는 때로 비논리적인 주장을 하곤 한다. 또 어떤 논리학자들은, 위와 같은 자명해보이는 논리적 규칙들(이를 ‘고전 논리’라고 부른다)로부터 나올 수 없는 것들이 나오는 논리 체계를 고안하곤 한다. 비논리적인 주장을 하는 우리가 바보는 맞지만, 이 논리학자들마저 바보는 아닐 것 같다. 여튼간, 그런 주장과 고안이 가능하다는 것은 우리가 논리에 대해서도 불가능한 것을 상상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종교의 경우에는 어떨까? 도스토예프스키(속칭, ‘도끼’)는 이렇게 말했다: “신이 없다면, 무엇이든 허용된다.” 딱히 동의하고 싶지도 않고, 무슨 의미에서 도끼가 이렇게 말한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흥미로운 점은 사실 다른 데에 있으니 상관 없다. 신이 있다거나 없다고 할 때, 그 신은 필연적으로 있거나 없다고 주장된다. 어떤 세계에는 신이 있고, 어디는 없다는 주장은 딱 봐도 뭔가 이상하다. 그런 것이라면 그게 그냥 제왕이지 뭔 신인가.

도끼의 말에서도 나오듯 우리는 신이 없는 상황을 상상하곤 한다. 또 무신론자는 신이 있는 상황을 상상하곤 한다. 심지어 서로 다른 두 유신론 종교의 신자는 서로의 신에 대해 “저자들의 신이 신이었을 경우”를 상상하기도 할 것이다. 말했듯, 신이 있거나 없거나 어떤 식으로 있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있거나 없거나 어떤 식으로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은 경우를 상상한다. 아하! 여기에서도 불가능한 것의 상상이 발생한다.

어떻게 우리는…

이제 나올 법한 철학적 질문은 이것이다. 어떻게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이 나오는 이유는 상상가능성conceivability과 가능성possibility 사이에 으레 상정되어 왔던 관계 때문이다. 어떤 것이 가능한지 여부를 우리는 그것의 상상가능성에 비추어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가능성이란 일상적으로 쓰이는 “개연성probability”과는 구분되는, 넓은 의미에서의 가능성이다. 일단 둘의 차이를 말해 보자.

귀엽지만 공부는 못 하는 당신의 동생이 “나 연세대학교에 합격할 수 있을까?”라고 하면 우리는 으레 “그럴 리가. 네 점수를 봐봐라.”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연적이지 않을 뿐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쩌다 보니 그가 수능을 아주 잘 치게 될 수도 있고, 커트라인이 아주 내려갈 수도 있다. 어찌되었건 동생은 사람이고, 대한민국 국민이고, 고등학교 졸업 예정자이고, 등등의 요건을 갖고 있으니 그가 연세대학교 학생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아 보인다.

개연성의 경우에는, 오로지 상상가능성에 비추어 판단되지 않는다. 개연성의 판정은 현재 상황과 가장 유사한 상황 속에서, 어떤 것이 미래 또는 현재에 일어날 수 있는지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반사실적 판정에 해당한다. 반면, 가장 넓은 의미에서 가능성은 단지 그것이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하기만 하다면 지지된다. 으레 우리가 ‘원론적으로는 가능하다’,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라고 말할 때 사용하는 ‘가능성’이 바로 이 의미에서의 가능성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원론적으로 가능함이 대체 무슨 뜻인가?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영 이상하지는 않다는 말이다. 또는 그것과 모순되는 상황을 생각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어느 경우에든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생각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비추어 그것의 가능성을 판정한다는 말이다. 앞에서 말한 ‘상상가능성’이 바로 이것과 관계한다. 위에서 언급한 상상가능하다는 것은, 그것을 이미지화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 경우가 생각될 법하다는 뜻이다. 즉, 우리의 가능성 판정은 늘 상상가능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불가능한 것은 상상될 수 없어야 하지 않을까? 이와 동치인 물음으로, 적어도 상상가능하다면 모두 가능해야 하지 않을까? 위에서 보았듯 분명 불가능할 것인데 상상가능한 일들이 있다. 이러한 상상가능성은 가능성의 판정에 관한 우리의 확신을 무너뜨린다. 학문적으로 말하자면, 불가능한 것의 상상 가능성은 가능성에 관한 인식론적 문제를 야기한다.

몇가지 응답들

이에 관해 댈 법한, 또한 대어져 온 변명거리(?)들이 있다. 모든 응답들을 학문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지면에 비추어 보아도, 나와 여러분의 지성에 비추어 보아도 버거운 일이니 가볍게 소개해 보자. 일단 입장들은 다음으로 나뉠 수 있겠다. (1) 세계의 양상(가능성, 필연성)에 관한 모든 진술은 사이비 진술이다; (2) 상상가능한 모든 것이 가능하다; (3) 상상가능한 불가능성과 상상가능한 가능성 사이에는 경계가 있다; (4) 상상가능한 불가능성은 다른 의미론이 적용된 가능성이다; (5) 상상가능한 불가능성은 가능성이 재조합된 가능성이다. 다른 응답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논의될 법한 것은 이 다섯이다. 각각을 설명해 보자.

(1)이 가능성에 관한 모든 말을 사실상 못하게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편 (2)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2)는 상상가능한 모든 것을 가능하다고 주장함에 따라, 분명 불가능해보이는 것조차도 가능한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이런 결과가 우리가 원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리만 가설이 필연적으로 참이거나 필연적으로 거짓인 것이 너무나 분명한데, 둘 모두가 상상가능하며, 따라서 둘 모두가 가능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기 때문이다. 이는 차라리 가능성이라든가 모순에 관한 우리의 생각이 잘못되었거나, 우리의 상상가능성 직관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게 한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가능성에 관해 잘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이 둘은 가능성 담화에 관한 회의주의로 나아갈 것 같다.

(3), (4), (5)는 그러한 회의주의를 만들기보다는 “단순히 상상가능한 것”과 “정말로 가능한 것” 사이의 어떤 경계를 만들고자 한다. 먼저 (3)을 보자. 이 입장은 상상가능한 것이 가능한 것을 전부 알려준다 하더라도, 정말로 우리가 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그 중에서도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한 것”에 한정된다고 말하고자 한다. 즉 상상가능한 것 안에 진정으로 가능한 것을 떼어 두는 기준선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준선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냐는 것이다. 알지 못한다면, 다시 (3)은 위의 회의주의로 소급된다. 알 수 있다면,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냐고 물어야 한다. 경험적으로도, 상상가능성에 의존해서도 아니라면 어떻게 진정한 가능성을 알 수 있을까?

(4)는 최근의 철학자들이 제안한 입장이다. 이 입장은 가능성 자체는 일원적이지만, 우리가 어떤 의미론을 채택하냐에 따라 그 가능성이 두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이런 식이다. 우리는 1+1=2가 필연적으로 참인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의 의식에 표상되는 방식에 근거하여, 1+1=3인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다. 우리는 물이 두 개의 수소알갱이와 한 개의 산소 알갱이로 이루어진 화합물임을 알지만, 물이 우리의 의식에 표상되는 기능적 방식에 근거하여, XYZ가 물과 같이 기능하는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다. (5) 역시 (4)와 유사하게 이해될 법하다. 이는 가능성들 중 모순되는 것들을 조합한 것이 불가능성이라는 입장이다. (둘의 차이를 깊이 있게 말하는 일은 이 지면에서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다음 발걸음

우리는 재미있어 보이는 이야기가 재미없어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여기까지 이어지다보면 슬슬 드는 생각이 둘이다. 하나, 이런 입장들을 아는 것이 대체 무슨 쓸모가 있지? 둘, 불가능한 것을 상상한다는 것이 고작 이런 재미없는 문제들로만 이어질 수 있는 거야? 이런 입장들이 대체 무슨 쓸모가 있냐고? 모르겠다. 그런데 이 재미없는 문제들이 중요하다는 것만큼은 잘 안다. 이런 재미없는 문제들을 건너 뛰고 자신의 생각을 펼쳐가다 보면, 다 지은 성이 무너지곤 한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나에게 중요하다.”(파상이 말을 참 멋있게 잘 한다.) 특히 우리가 불가능한 일을 상상하는 데에 큰 의의를 두곤 한다는 점에서 이것이 중요하다. 말이 멋있어서인지, 불가능한 것을 상상할 수 있음으로부터 우리가 뭔가 엄청난 것을 해낼 수 있게 된다는 점을 끌어내려는 욕심이 들곤 한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할 때 우리는 사실 (2)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고, 이는 결국 우리가 어떤 가능성도 모른다는, 더 암울한 결론을 내리게 한다.

사실 이런 괴짜스러운 현대 형이상학의 주제들 말고도, 전통 형이상학의 많은 담론을 통할 때 우리는 마찬가지의 모르겠음을 느끼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모르겠는 말을 하는 길은, 비록 재미없지만 중요한 문제들로 향하는 길이다. 위에서의 이야기는 이를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예시이다. 불가능성에 관한 학술적 논의들은 불가능한 것을 상상한다는 것이 단순히 “퉁치기”로 해결될 문제는 아님을 보여준다. 우리는 몇몇 생각을 할 때 분명히 불가능한, 또는 불가능하다고 상정되는 그런 것들을 표상하곤 하며, 그러한 표상을 쉽게 넘어서려는 (1)이나 (2)는 무언가 찜찜한 결론을 남긴다. 결국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표상할 수 있는지를 해명하는 것은 중요한 철학적 과제중 하나가 된다.

잘못된 선택을 내릴 때가 우리에겐 너무 많다. 말이 멋있어서, 뭔가 낭만적인 결론을 줄 것 같아서 빠지는 함정들이 있다. 그런 실수들을 집어내고, 다시 가던 길을 가게끔 우리의 지성을 교도하는 것이 철학이 할 수 있는 일 중 중대한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다음 발걸음은 당분간 그런 것이 되고자 한다. 누군가가 어떤 선택을 했을 때, 그것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인지 검토하는 일. 그 “누군가”가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짓궂고 답하기 힘든 글에 답할 두 명의 동료일 수도 있고, 아예 우리 셋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될 수도 있다.

뭐 어쨌건. 나는 그런 교정 작업, 흥미로운 질문이 나아갈 방향을 잡아주는 일에 기여하는 것이 철학하는 사람의 권리이고 임무라고 생각하는 교활한 사람이다. 이 교활한 사람은, 과하게 낭만적인 지점으로 흩어지는 생각을 좀 더 세밀한 데에로 모아지게 다그칠 것이다. 또 중대한 부분을 건너뛰는 사유의 흐름이 좀 더 촘촘하게 이어지도록 요구할 것이다. 요구를 안 듣고 다그쳐도 달려간다면, 내 나름의 수정을 가할 것이다. 그 정도로 나의 위치를 잡고, 이번 셋잇단음의 지면을 열어보도록 하자.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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