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한국 영화 속 음주 모티브에 대하여

진실은 술 속에 있다. 오늘날 진실을 이야기할 기분이 되기 위해서는 취해야 한다. – 리케르트

독일은 예로부터 벨기에와 더불어 맥주의 나라라고 불려왔다. 맥주는 그들의 문화이며, 흔히 우리가 생각하기에 질병과 만악의 근원이 되는 알코올 이상의 것이다. 리케르트를 비롯해, 괴테, 칸트 등의 저명 인사들이 술을 예찬한 것은 문화적으로 보았을 때 당연한 수순이었다.

  외국인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가장 신기해하는 것은 음주 문화이다. 각각의 나라마다 대표적인 술이 있다. 러시아는 보드카를, 프랑스는 와인을 주로 마신다. 우리 나라는 단연코 소주일 것이다. 소주는 한국의 문화를 드러내는 어쩌면 가장 완벽한 오브제일 것이며, 좁게는 ‘한국 영화’라는 문화 현상에 있어서 반복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것이 우리의 정서와 조응하고 나아가는 방식을 드러낸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이번 연구를 통해 이해하고자 하는 바는 도대체 왜 유독 한국 영화는 이리도 술에 집착하는가?이다.

*

소주만큼이나 우리 나라의 음주 문화를 대표하며, 과거에는 그 이상의 역할을 했던 주종은 막걸리이다.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은 대부분 왁자지껄한 소리를 동반한다. ‘바보들의 행진’에서 대학생들은 막걸리 마시기 대회를 열고 웃고 떠든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과 ‘오발탄’에서 흔들거리는 술잔만큼이나 흔들거리는 분위기를 표상하는 막걸리가 보여주는 공통적인 정신은 ‘연대’이다.

군인(혹은 상이군인)들의 음주는 소속감과 연대감의 강화라는 목적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집단적일 수 밖에 없으므로 자연스레 왁자지껄함으로 귀결될 것 같지만, 그 사이에는 독특한 ‘전위’가 있다. 위계 질서는 군대의 필요 조건이다. 그렇기에 그 속에서의 술은 위에서 아래로 전달되는 하달적 대상이다. 소련의 문예학자였던 바흐친은 ‘카니발 이론’을 우리에게 소개했다. 카니발은 모든 것이 한 데 뒤섞인 축제이다. 카니발은 자유와 창의가 허락되는 분위기에서 진행되며, 전적으로 무질서한 상태가 허용되는 시기이다. 이 축제의 핵심은 ‘웃음’과 ‘참여’이다. 공식 문화에서 신분, 지위, 연령 등에 속박되어 있던 인간의 행동은 카니발에서 모든 계급으로부터 해방되게 된다. 야자 타임에 모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웃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이만희, 1963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서 한 병사는 동료에게 술 마시기에 동참하기를 적극적으로 권유하며, 중대장의 말투를 따라하면서 조롱하기도 한다. ‘오발탄’에서도 마찬가지로 상사로 최고 대우를 해주지만, 분위기는 위계 없는 편안함 그 자체에 놓여진다. 이러한 전도된 삶, 뒤집혀진 삶은 곧바로 영화라는 매체와 밀접한 연관을 갖게 된다. 영화는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삶의 전도’, 네 삶을 내 삶으로 바라보고 다양한 삶의 양식 속에서 위계를 버리고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막걸리와 소주 사이에는 맥주가 껴 있다. 막걸리만큼의 떠들썩함은 아닐지라도 맥주는 분명 막걸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역할을 한다. ‘바보들의 행진’에서 젊은 대학생 남녀들은 만남을 시작하는 매개로 맥주를 사용함과 동시에 곧이어 어색함을 떨치는 방편으로 본다. ‘안개’에서 기준이 인숙을 처음 만날 때도 맥주는 그녀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하고, 급격히 친밀해지도록 돕는다. 맥주는 그러한 어색과 긴장의 줄다리기 사이에서 스스로로 하여금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무방비 상태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바보들의 행진’에서 온갖 소음에 둘러싸여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영철이로 하여금 뭔가 결핍된 무언가를 드러내도록 하고, 이 부조화 속에서 그는 갈 길을 잃은 것처럼 통금 내려진 거리를 활보한다.

<바보들의 행진> 하길종, 1975

소주는 막걸리, 그리고 맥주의 단 맛, 고소한 맛과는 완연히 다른 쓴 맛을 가지고 있다. 그 맛만큼이나 소주와 막걸리가 한국 영화에서 가지는 기능은 명백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가정 불화의 모티브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이 부모의 알코올 중독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소주는 아버지의 병나발 이미지 만큼이나 이용되어 개인에게 불행한 과거, 트라우마의 오브제로 자주 활용되어 왔다. 술은 완전하게 성인의 영역에 속한 것이므로 그것은 아이에게 침범 불가의 존재이자, 금기이자, 권력이다. ‘칠수와 만수’에서 만수가 “제가 한 잔 마셔도 되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아버지의 앞에 앉아 술을 마시는 장면은 프로이트적 부친 살해 콤플렉스의 대체물로서 술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꼭 아이만을 위한 트라우마는 아니다. ‘똥파리’에서 가정 폭력(그것을 넘어선 살해)의 죄의식에 갖혀 사는 아버지 또한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똥파리> 양익준, 2008

소주의 역할은 술에 취하는 것으로 인해 유발되는 어지럼증, 기억 상실 등으로 현실로부터 다소간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일상이 고달프면 고달플 수록, 받아들이기 어려우면 어려울 수록 술의 도수와 빈도는 올라간다. ‘칠수와 만수’에서 칠수는 술을 어디든 들고 다녀야 할 정도이다. 그는 사회에 대한 마지막 도피처이자 망루인 그의 작업물 위에 올라갔을 때 조차도 술을 마셔야만 한다. 그곳이 도시의 가장 높은 부분이면서 하늘에 가장 가까운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곧 더 이상 도피할 수 없는 곳이 없는 막다른 길에 봉착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점에서 술은 부조리에 대한 소극적 저항이다. ‘휴일’에서 허욱은 죽어가는 연인을 살릴 수 없는 스스로의 오발탄 같은 처지와 이 세계를 잊기 위해 독한 양주 쯤 먹어줘야 했다. 하지만 도피하게 만드는 소주는 결국 씁쓸한 맛일 수 밖에 없으며, 후유증은 거대하다. 누군가를 사회로부터 격리될 수 있게 만들어준 술은 누군가를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버리기도 한다. 이는 이후 설명하게 될 술집의 개방성이라는 특질과도 연관되는데, ‘야행’에서 미스리는 술을 마시러 술집에 들어가지만 남자들이 관음 대상으로 전락하며, ‘초우’에서 영희 또한 같은 처지이다. ‘박하사탕’에서 야유회는 완전히 탁 트인 열린 공간에서의 술판을 보여주지만 역으로 그 안에서의 이해 받을 수 없는 인간 소외를 보여준다.

<야행> 김수용, 1977

고정시키려는 욕망은 악마적 근성이다. – 데리다

술은 사람들로 하여금 앉게 만든다. 한국의 술 문화는 최근 빠르게 들어온 클럽식의 입식 음주 문화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같은 음주가무라고 할지라도 많은 영화들이 보여줬던 것처럼 한국인은 노래방에 앉아서 그것을 즐긴다. 좌식과 입식의 차이가 보여주는 동양권과 서양권의 문화 차이를 차치하더라도, 엉덩이를 붙인 사람들에게 그 공간은 필히 대화의 장이 될 수 밖에 없다. 정적인 이미지가 될 수 밖에 없는 필연성 때문에 이미지에 무게가 실리는 영화라는 매체는 술자리를 꺼려한다. 술은 소설로부터 영화로의 이행을 역행시킨다. 한국 영화에서 표현되는 술, 나아가 술자리에 대해 논할 때 홍상수 감독은 항상 그 담론 속에 있다. 그의 영화는 취기오름의 영화이다. 

그 속에서 술의 역할을 설명하기 위해서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간접적으로 인용하고자 한다. 데리다는 기존의 형이상학적 구조가 갖는 ‘이원 구조’의 허구성을 드러내면서 이를 자동으로 해체되도록 만든다. 그에게 구조는 ‘차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데, 그 ‘차이’라는 것의 실상은 무한히 연기되며 교묘히 빠져나가기를 무한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차이’라는 단어를 사전에 검색해보면 ‘서로 같지 아니하고 다름. 또는 그런 정도나 상태’라고 정의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서로, 같다, 아니하다, 다르다, 정도, 상태’ 등의 무수한 기표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뜻하게 되고, 또 다시 각각의 단어들을 검색해보면 이런 식의 반복이 절대 끝나지 않을 것임을 받아들여야만 하게 된다. 낮과 밤, 남자와 여자, 선과 악 등의 모든 이원 구조 또한 타자를 통해 정의된 것일 뿐이고, 그 정의마저도 가변적이며 또 다른 기표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의존한다. 이러한 사고를 통해 이원 구조는 자동적으로 해체된다. 비록 헤겔은 이러한 정-반의 구조 속 무한 부정이 새로운 합의 결과로 지양된다고 보았지만, 데리다는 이 또한 이미 반대되고 거부된 것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진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모든 것을 한데 뒤섞고 이원 구조를 포기하는 태도는 또 다시 ‘카니발’이라는 화합물로 귀결된다.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홍상수, 2016

홍 감독을 구조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내가 이해한 홍 감독은 해체주의자이다. 그의 영화는 구조에 대한 거부이며 악마적일 정도로 고정시키려는 것에 대해 저항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인물과 배경, 극소의 상황만을 정한 상태로 촬영 당일을 맞이하며 시나리오 또한 그 날 아침에 일어나서 쓰는 파격을 보인다. 또한 영화와 현실이라는 또 다른 ‘이원 구조’를 극복하고자 카메라 기법과 편집 스타일의 사실주의 뿐 아니라 촬영 그 자체 또한 사실주의 스타일을 고집한다. 영화가 흐르는 시간대와 동일한 시간대, 동일한 순서로 촬영을 진행하며, 배우들은 실제로 술을 마시면서 연기한다. 배우 이선균은 그의 영화를 촬영하다 정말로 취해버렸고, 그의 ‘끝까지 파고, 가고’의 잊을 수 없는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우리 선희> 홍상수, 2013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술은 해체의 망치이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 속에는 막걸리, 맥주, 소주, 양주를 넘어 고량주까지 주종을 가리지 않고 수두룩한 술들이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그러한 통섭적 손아귀에는 장소, 사람까지 두루 들어와 있으며 이는 무서운 강박으로까지 보여진다. ‘하하하’에서 등장 인물들은 탁 트인 야외 공간에서 술을 마신다. ‘강원도의 힘’에서 등장 인물들은 지붕만 놓인 야외에서 술을 마시고, ‘북촌방향’에서는 실내포장마차로 들어가 술을 마신다. 등장인물들은 ‘우리 선희’에서와 같이 민속 주점에서 술을 마시는가하면 ‘밤의 해변에서 혼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및 숱한 영화들에서 해장국 전문점 같은 허름한 술집에서 소주를 기울이기도 하고, ‘자유의 언덕’, ‘클레어의 카메라’에서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술잔을 부딪힌다. 술집의 스펙트럼 또한 치킨집, 포차, 일식집, 중식집 등등으로 끊임없이 변주되기 때문에 술이 종류 또한 다양하다. 그의 영화가 취하는 이러한 변용과 대체의 방식은 무한히 연기되는 구조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좋은 방편이 되며, 사실 이 방식은 데리다의 해체적 글쓰기 방식과 흡사하다. 그는 또한 외국인을 한국으로 불러들여 같이 술을 마시게 하고, 한국인이 외국으로 나가 술을 마시게 하기도 한다.

<자유의 언덕> 홍상수, 2014

공간은 단순히 물질적 대상 사이의 공간적 관계의 총합으로 이루어진다. – 라이프니츠

술집이라는 공간은 앞서 말한 예시들과 같이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를 범주화하게 되면, 우리는 그 범주를 술의 종류에 따라 나누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 테이블이 놓여져 있는 술집은 양주를 연상시킨다. 우리는 허름한 포차에서 결코 발렌타인이나 조니 워커를 마시지 않을 것이다. 또한 아리랑, 황진이 같은 이름을 가진 민속 주점에서는 막걸리를 마시며, 일반적인 포차에서는 소주를 선호하고 스포츠 펍에서는 맥주를 마신다. 어쩌면 술과 공간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나아가 앞서 언급한 막걸리와 소주의 차이만큼이나 다양한 정신과 행동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음을 시사할 것이다. 술이라는 대상은 분위기라고도 말로 일축할 수 있을 성질을 공간에게 부여한다.

그 중에서도 ‘포장마차’라는 술집의 한 형태를 분석해보는 것은 흥미롭다. 포장마차는 야외에 두꺼운 비닐로 된 가벽을 세운 임시적인 형태로 존재한다. 포장마차에서는 대부분 플라스틱 간의 의자를 사용하며, 식탁마저 접의식 탁자이거나 심한 경우 의자 위에 쟁반을 올려놓은 것일 때도 있다.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신다는 것은 즉 외부와 내부의 중간 지점에 부유하는 것이다. 바깥의 소음과 안쪽의 소음이 한데 어우러지고, 취기는 이에 박차를 가한다. 핵심은 차이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관계’이다. 포장마차라는 공간에서 밖과 안의 관계를 보게 되고,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 또한 양상이 다양하게 전개된다. 그 속에서 개인과 개인 사이의 작은 테이블 만큼이나 그들 간의 거리는 짧으며, 집단과 집단 사이의 간격마저 매우 좁다. 서양의 중세 시대부터 이어져 오던 입식의 사교 문화는 개인이 개인에게 다가감으로써 능동적으로 그들 사이의 거리를 좁힌다. 하지만 좌식 생활을 기반으로 한 동양 문화권에서의 이러한 비좁음 현상은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칠수와 만수> 박광수, 1988

술이 만든 친구는 술처럼 하룻밤 밖에 안 간다. – 로거우

개방화된 공간으로서의 술집에서 폭로되는 것은 지극히 사적인 것들이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적, 개방적 공간에서의 사적 표현이 술집에서 빈번히 행해지고 있다는 것은 술집이 다른 가게에서의 거래와 달리 ‘단골’ 문화가 형성되기 유리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관계에서는 ‘주인’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주인이라는 존재는 술집에서 거의 유일하게 술을 마시지 않는 존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는 행위가 불러일으키는 카니발의 상황, 이질적인 분위기는 일시적이다. 그렇지만 이 일시성마저 반복되면서 누적될 수 있다. ‘칠수와 만수’ , ‘북촌 방향’ 등에서 등장인물들은 술집 주인과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다. 특히 ‘북촌 방향’에서는 아예 주인과 손님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영호, 보람이 자주 가는 술집 주인인 경진의 자리는 늘 비어있다. 영호와 보람은 당연하다는 듯이 직접 술을 가져다 먹는다. 보람은 경진에게 주인이 이렇게 가게를 오래 비우고 다녀도 되느냐고 질타하고 경진은 안주마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또 다른 가게로 사러 나간다. 이 길에는 성준이 동행한다. 가게 주인과 손님의 자리가 전도되고, 결국 그들은 한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기도 하면서 한 데 뒤섞인다. 이 가게의 구조는 술집이라는 공간의 공과 사의 경계 허물어짐을 가장 잘 드러내는 부분이다. 이 술집에는 경진의 방이 붙어 있다. 술집이라는 드러내기의 공간은 이제 개인의 사적 공간과 연결되어 절정에 달한다. 그리고 손님인 성준은 주인의 공간에 들어가고, 몸을 섞는다. 

‘춘몽’에서 등장하는 예리의 가게 또한 이러한 상황의 연장선 상에 놓여있다. 그녀의 가게는 방을 넘어 하나의 가옥에 붙어있다. 예리는 이제 아예 가게를 손님인 주영에게 맡기기도 하며, 그녀의 가게 안에 놓여진 거울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손님과 주인의 관계는 동일자가 된다. 눈 여겨 볼만 한 점은 예리와 익준, 정범, 종빈의 관계이다. 익준, 정범, 종빈은 단순히 술집의 손님, 단골로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이자 그녀에게 사랑에 빠진 포로 같은 자들이다. 그러면서도 종빈은 예리의 건물주이다. 익준 또한 시장에서는 주인의 위치에 놓여있으며, 종빈 또한 누군가(여자친구)에게는 결정권자로 보여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꿈과 같은 환상 속에서 물에 탄 잉크처럼 섞인다. 모든 관계들의 혼재는 ‘북촌방향’과 ‘춘몽’이 흑백의 연출, 시간 순서의 난잡함, 서사의 두서 없음으로 표면상에 드러난다. 차이의 연기, 차연은 무한히 진행되다가 꿈이라는 공간에 그 진행을 떠맡긴다. ‘춘몽’이라는 영화는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펼쳐지는 영화와 현실 사이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가장 완벽한 시도이다. 세 남자 주인공들은 실제 영화 감독들이다. 영화 감독들이 모여 이 영화는 환상이고, 우리가 만든 세계이며, 영화이면서 꿈이면서 현실이라는 카오스적 세계관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춘몽> 장률, 2016

술은 우리에게 있어서 실로 거의 모든 정서와 조응하며, 삶과 관계 그 자체가 되었다. ‘소공녀’에서 미소가 집보다 소중한 한 잔의 위스키와 담배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한국 영화에서의 술 모티브가 가지는 힘을 결집시키는 이행일 것이다.

밤비
tpdyd8304@gmail.com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