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적인 것에 관하여” (1)  

어떤 개념들은 창시자에 의존적이다. 하이데거의 “무”가 그렇고, 플라톤의 “이데아”가 그렇고, 벤야민의 “아우라”가 그렇다. 루이스의 “상대역”이 그렇고 크립키의 “고정지시어”가 그렇고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자”가 그렇다. 공자의 “인”이 그렇고 노장의 “도”가 그렇고 함석헌의 “씨알”이 그렇다. 이 각각의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저작을 살피어 보아야만 한다. 그들의 저작을 살핀 이후에야 우리는 그들이 제안한 개념에 대해 논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개념들이 창시자 의존적임에도 다음과 같이 행동할 수 있어 보인다. (1) 개념에 관한 창시자의 진술로부터의 논리적 귀결이 아닌 것을 그 개념에 대해 정당한 방식으로 주장한다; (2) 개념에 관한 창시자의 진술을 논박한다; (3) 복수의 개념들에 관한 복수의 창시자들의 진술들에서는 부정되는, 예컨대 임의의 두 개념의 구조적 동형성을 발견한다.

어떻게 이러한 것들이 가능한가? 오로지 나만이 보았던 어떤 사람이 있었다고 해 보자. 임의로 그의 이름을 “라구”라고 부르겠다. 나는 라구를 작년 여름에 만났다. 라구는 키가 170cm였고 곱슬 머리였다. 그는 뿔테 안경만을 쓰는데, 안경은 시력 교정용이 아닌 오로지 패션용이다. 어쩌다보니 이 라구라는 사람이 아주 중요해졌다. 사람들은 이제 모두 라구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모두가 알듯 라구에 관한 믿을 수 있는 진술을 한 것은 나뿐이다. 또한, 가설적으로, 라구를 만난 뒤 그가 뿅하고 승천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앞으로도 그에 관한 믿을 수 있는 진술을 한 것은 나뿐이다. 그러므로 라구에 관한 이후의 모든 담화는 나의 진술들에 기초하게 될 것이다. 그러던 중 내가 죽었다고 하자. 이제 사람들은 내가 했던 말들에만 기초하여 라구를 이해할 수 있다. 적어도 나의 진술과 모순되게 그를 이해할 순 없어 보인다.

왜 그럴까? ‘라구’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공동체가, 바로 그 라구에 관한 적합한 인식적 관계를 갖지 못했던 탓이다. 오로지 그들은 “라구는 p이다”의 형태를 갖는 기술 문장으로만, ‘라구’라는 이름과 관계했다. 라구와의 직접적 면식은 (이미 죽은) 나 외에는 누구도 형성하지 못했다. 그러니 라구는 라구라는 어떤 대상 자체가 아닌 그에 관한 기술 문장을 통해서만 공동체에게 의미를 갖고 있으며, 따라서 라구는 나의 기술과 독립된 어떠한 방식으로 생각될 수 없어야 할 것 같다. 조금 더 엄밀히 말하자면 이런 이야기이다. 어떤 대상을 지시할 수 있는 방식이 오로지 어떤 기술구를 통한 것으로만 있다면, 그 대상을 그 기술구와 모순되는 방식으로 기술하는 것은 반드시 모순이다.

다시 추상적인 것들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우리는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개념들에 관해, 단지 그것을 이해할뿐 아니라, 그것을 맨 처음 주장한 사람을 반박하기도 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 그 개념들은, 공동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던 한, 최초의 주장자에게 귀속되어 있다. 그 개념을 설명하는 것은 오로지 그의 저서들인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우리는 그 저서들을 논박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이데거가 무를 잘못 이해했다고, 플라톤이 이데아를 오해했다고, 화이트헤드가 현실적 존재자에 관해 오류를 저질렀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한가지 가능성은, 그들의 묘사에 내적 모순이 있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지 가능성이 되지는 못한다. 가장 단순한 경우로, 묘사 안에 단 하나의 결정적 모순이 있다고 하자. 즉 그의 묘사는 대립되는 둘 중 하나로 이해될 수 있는데, 그 둘이 모두 골고루 그의 저서에 있다. 이 때 우리는 둘 중 하나의 경우를 선택해야만 하는 경우에 놓인다.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가 묘사한 개념이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리며, 따라서 이 개념에 관해 논하는 일은 공허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선택이 가능하다면, 이미 우리는 그의 묘사와는 별개로 그 개념이 지칭하는 대상을 알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것이 가능하다면 개념은 저자 귀속적이지 않다.

다른 가능성은, 우리가 실제로 그들의 진술과 모순된 진술을 내포하는 주장을, 정당하게 할 수 있는 경우이다. 이 역시 개념을 저자 귀속적일 수 없게 만든다. 이 개념에 관한 또다른, 정당한 이해가, 그 개념에 관한 최초의, 또한 독점적인 것으로 상정된, 기술들과 모순될 수 있다면, 이는 그 기술들 외에도 이 개념에 관한 결정적인 지식이 존재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념은 이 경우에도 저자 귀속적일 수 없다. 가능한 두 경우에서 모두 그렇기에, 추상적인 것에 관해 정당하게 논쟁할 수 있다면, 그 추상적 개념은 저자 귀속적일 수 없음이 따라 나온다.

그러나 다시,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대부분의 철학적 개념들은 철학자가 직접 만든 것들이다. 물론 어떤 철학적 개념들은 분명 일상적 표현들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 때에도 철학자는 개념의 적절한 변경을 통해 그것을 철학적 직관에 맞게 수정한다. 결국 철학 고유의 개념들은 하나같이 일상적 표현과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지는 않게 된다. 그러니 철학 바깥의 개념들로부터 이 개념들을 이해하는 것 같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가능할 법한 설명은, 이름의 경우에 유비할 때, 우리가 철학적 개념의 지칭체들에 관한 직관을 이미 갖고 있다는 것이다. 즉 새롭게 만드는 것으로 보이는 철학적 개념들에 관해서도, 우리는 모종의 지적인 면식을 얻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개념에 관한 모든 논쟁은 기껏해야 공허해진다.

따라서 나는, 다소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적어도 어떤 형이상학적 개념들은 경험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의 직관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이와 같은 추상적 개념들이 오로지 말놀이 상에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로 원초적이며, 직관을 통해 이해되는 철학적 개념이 있다고 전제하지 않는다면, 공허하지 않아 보이는 몇가지 논쟁들마저도 공허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 철학적 논쟁에 참여하는 한 우리는 “모든 철학적 개념들은 말놀이일 뿐이다”라는 가벼운 태도를 가지는 것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해진다.

한편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함의를 생각할 수도 있겠다. 만일 어떤 개념에 관한 논쟁이 오로지 공허하기만 하다면, 즉 그것을 부정하든 긍정하든 우리의 일상적 직관에 큰 문제가 안 생긴다면, 그 개념은 형이상학적으로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어떤 개념에 관한 논쟁이 경험 가능한 사실들이나 철학 바깥의, 일상적 표현들의 의미로부터 해소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이 때에도 그 개념은 경험적 사실이나 의미론적 사실들로 환원될 수 있음에 따라, 형이상학적으로 무의미하다고 간주될 법하다.

이상으로 나는 철학적 논쟁이 가능하려면 그 논쟁 대상에 관한 면식 내지 직관이 가능해야만 함을 논증했다. 여기까지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존재만으로 모든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 논쟁을 이어가느냐에 있기 때문이다. 즉, 그러한 면식 내지 직관에 관한 인식론이 필요하다. 어떻게 그러한 인식론이 제안되어 왔으며, 그 제안들 중 어떤 것을 적합한 것으로 여겨야 할까? 이 질문을 미뤄둔 채 이 글을 마치도록 하자.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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