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지기 어려운 이야기, 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1년 전이었다. 서투르게 끄적거린 독후감이 운좋게도 상을 받았다. 김혜진 작가의 『딸에 대하여』(민음사, 2017)라는 여성 퀴어 서사를 읽고서였다. 시상식에 가기 위해 처음으로 부산이라는 도시엘 갔었다. 식장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한 여자가 혹시 일반부 수상자세요,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그 여자를 보니 그녀의 표정은 온통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조금 후 왼쪽 가슴에 수상자 명찰을 단 그 여자를 보다가 문득 궁금해져 수상작품집을 펼쳐 그 여자의 이름을 찾았다. 나와 같은 책을 읽은 그 여자는 자신의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살면서 두 번의 커밍아웃을 했다, 라고. 그 문장과 뒤따르는 다른 문장들을 눈으로 오래 곱씹다가 어쩔 수 없이 당사자성, 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고 좀 망연해졌던 것 같다. 퀴어 문제에 관심이 있어 그 책을 읽고 글을 썼지만 나는 어쨌거나 헤테로섹슈얼이었기 때문에. 그 책을 쓴 작가도 아니었고 수많은 일반 독자 중 한 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를 함부로 해도 되었는지, 그럴 자격이 부족하지는 않았는지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이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당사자의 목소리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 번 호흡을 고른 이후에도 선뜻 말해지기 어려운 이야기들. 

경계에 선 자들의 이야기를 사유하고 싶다는 초반의 각오가 있었음에도 그 사유를 오랫동안 유보했던 건 바로 그 때문이기도 했다. 자격 미달로 인해 혹 빚어질지도 모를 실수와 그에 따라 져야 할 책임에 대한 두려움은 말하고자 하는 욕망보다 컸다. 요컨대 나는 늘 바른 방식으로 말하기를 원했지만, 어느 방식이 좀더 올바른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해져야만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좋은 서사는 당사자성과 관계없이, 또는 당사자성을 뛰어넘어 가장 올바르고 섬세한 언어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어떤 이야기들은 결국에는 말해져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스스로 입증한다. 임대형 감독의 <윤희에게>(2019)는 바로 그러한 영화다. 

‘이게 내가 해도 되는 이야기인가?’라는 생각은 모든 감독들이 갖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하지만 내가 어디 멀리 있는 외계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야만 할까 싶기도 했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선 얼마간 이중적인 태도가 필요했다. 내 한계점을 명확히 인지하려고도 했다. 기꺼이 오해받고 의심받고, 또 스스로도 그렇게 살피면서 한땀 한땀 만들고 싶었다. 

<씨네21>, 감독 인터뷰 ‘오타루에서 윤희가 코트를 입은 이유는’ 중 

LGBTQ에 대한 관심은 이 영화가 세상에 꼭 나와야 하는 이유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많이 하면서 확신으로 이어졌다. 한국 중년 여성의 퀴어 서사는 아직 아무도 하지 않은 이야기다. 왜냐하면 여러모로 너무 어려우니까.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2019년을 살아가는 창작자로서 스스로 부여한 책임감과 부담감이 있었다. 

<씨네21>, 감독 인터뷰 ‘오타루에서 윤희가 코트를 입은 이유는’ 중 

<윤희에게>는 중년의 윤희가 이십 년 전 사랑했던 쥰으로부터 편지를 받고 딸 새봄과 함께 쥰이 있는 오타루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오타루의 흰 설원, 영화를 관통하는 편지와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 등을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윤희에게>로부터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1995)를 연상한다. 그러나 사실 <윤희에게>는 앞서 언급한 소설 『딸에 대하여』와 비교하는 편이 더 적절할 듯하다.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라는 점, 어머니가 경계로 밀려난 비주류 여성이라는 점(<윤희에게>의 윤희는 남편과 이혼하고 공장에서 배식 도우미를 하며 딸 새봄을 홀로 키우는 고졸 여성으로, 『딸에 대하여』의 ‘나’는 딸을 낳고 온갖 궂은 직업을 전전하다 남편과 사별하고 요양 보호사로 일하는 노년 여성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여성 퀴어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까지, 어떻게 보면 두 서사의 구도는 마치 거울을 가운데 놓고 들여다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딸에 대하여』에서 퀴어의 주체가 젊은 딸로 설정된 반면, <윤희에게>에서는 어머니인 윤희가 그 역할을 담당한다. 더 말해지기 어려운 서사가 반드시 더 올바른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임대형 감독 자신이 밝혔듯이) 한국 중년 여성이 퀴어 서사의 주체에서 지금껏 배제되어 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윤희에게>가 비주류 집단 내에서조차 주목받지 못하던 중년 여성을 주체로 포용했다는 점은 분명 멋진 일이다. 그렇다면 감독이 구사하는 <윤희에게> 속 언어는 어떠한가. 

윤희에게 

잘 지내니? 오랫동안 이렇게 묻고 싶었어. 너는 나를 잊었을 수도 있겠지. 벌써 이십 년이 지났으니까. 갑자기 너한테 내 소식을 전하고 싶었나봐.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지 않니? 뭐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윤희에게> 중

뭐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 라고 아버지가 죽은 후 쥰은 쓴다. 아버지의 죽음 덕분에 윤희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고. 그러나 쥰에게 정말로 참을 수 없었던 건 그녀를 고모에게 떠맡긴 아버지의 죽음보다도, 남자와 선을 볼 것을 억지로 권하는 주변 사람들의 무심한 폭력이었을 것이다. 한국인 어머니를 둔 사실을 숨긴 채 살아와야 했던 이방인의 설움이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편지를 썼지만 이미 결혼한 윤희에게 전하지 못한 채 묵혀두었던 쥰의 독백은 고모 마사코가 몰래 편지를 부침으로써 비로소 발신인의 그것이 된다. 

쥰아, 나는 나한테 주어진 여분의 삶을 벌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동안 스스로에게 벌을 주면서 살았던 거 같아. 

<윤희에게> 중

수신인 윤희의 삶 역시 고단하기는 마찬가지다. 성 정체성을 이유로 가족들로부터 정신병자로 낙인찍히고 원치 않은 결혼을 감내해야 했으니 그럴 수밖에. 이혼한 후 딸을 홀로 키워야 하는 그녀는 고졸 여성이기에 힘겨운 육체 노동 이외에는 선택권이 없다.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겠다는 윤희에게 친오빠가 던진 말은 ‘네가 무슨 기술이 있어, 경력이 있어?’이다. 그러므로 이혼한 후 불쑥 집 앞으로 찾아온 전 남편의 ‘그렇게 힘들게 살 거 없잖아.’란 말은 우습다.) 윤희에게 딸 새봄 외에는 어떤 뚜렷한 희망도 목표도 보이지 않는다. (‘엄마, 엄마 뭐 땜에 살아?’라는 새봄의 말에 윤희는 아주 작게 한숨을 쉬고 자식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녀에게는 웃을 힘도, 큰 소리로 화를 낼 힘도, 하다못해 제대로 울 힘조차도 없어 보인다. 그녀는 그야말로 하루하루를 그저 삼키고 견디며 산다. 그것은 그녀가 자처한 형벌이었으나 본의 아니게 주변 사람들까지 외롭게 만들었다. (‘너네 엄마는 뭐랄까, 사람을 좀, 외롭게 하는 사람이야.’, ‘난 엄마한테 그냥 짐이었던 거 같애.’) 

– 새봄이, 인물 사진은 안 찍니? 

– 네, 전 아름다운 것만 찍거든요. 

<윤희에게> 중

적막하기 그지없던 윤희의 일상 속에 쥰의 편지가 느닷없이 날아들고 윤희는 동요한다. 쥰의 편지를 받자마자 답장을 쓰면서도 그녀는 편지를 보내기를 주저하지만, 결국 생업도 과감히 그만두고 새봄과 함께 쥰이 있는 오타루로 떠난다. 즉 수신인에서 발신인이 된 윤희의 여정은 쥰을 향한 것인 동시에 윤희 자신의 내부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에서 윤희는 기차가 질주한 후 텅 빈 선로를 황망히 돌아보지만, 이후 떠날 것을 결심하고 걸어가며 영화가 시작한 지 40분 만에 처음으로 희미한 웃음을 띤다. 그녀의 뒤로 빠르게 지나가는 기차는 곧이어 오타루의 해변을 달리는 기차의 씬으로 이어진다.) 고된 일과 후 낡은 패딩을 입고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던 윤희는 이제 코트를 입고 오타루의 설원에 서서 멋지고 우아하게 (그리고 맛있게!) 담배를 피운다. 아름다운 것만 찍고 싶어서 인물은 찍지 않는다던 새봄은 그 모습을 홀린 듯 보다 사진을 찍고는 ‘이쁘다.’ 하고 웃는다. 한결같은 새봄의 능청에 어이없어하면서도 웃음을 짓는 윤희는 이제 자신과 주변 사람마저 집어삼킬 것 같던 외로움에서 조금은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작 오타루에 온 이유인 쥰을 만난다는 건 아직도 윤희에겐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언젠가 내 딸한테 네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용기를 내고 싶어.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거야.  

<윤희에게> 중

오타루에 사실 옛 친구가 산다고, 윤희가 새봄에게 말하는 장면은 그래서 더 애틋하다. 오랜 시간 숨겨야만 했던 쥰의 존재를 처음 인정하는 동시에 쥰에 대한 그리움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용기를 낸 윤희의 고백에 새봄은 윤희와 쥰이 만나도록 이끄는 것으로 화답한다. 이십 년 만에 해후한 그들은 각자의 위치로 담담하게 돌아간다. 윤희는 새봄과 함께 서울에서 새 출발을 하는 것으로, 쥰은 끝없이 눈이 쏟아지는 오타루에서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라는 마사코 고모의 말을 이어받는 것으로. (자신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료코에게 정체성을 숨기라고 말하던 쥰이 눈이 계속 내릴 것을 알면서도 그치기를 바라는 고모의 말을 읊는 것은 그녀가 억압과 폭력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맞설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너는 네가 부끄럽지 않다고 했지. 나도 내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윤희에게> 중

편지의 이 구절이 흘러나올 때 서울로 가는 트럭 안에서 윤희가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장면은 윤희가 이력서의 학력 란에 당당히 ‘고졸’을 적는 다음 장면으로 이어진다. 여성인 쥰을 사랑했던 것, 딸이라는 이유로 오빠와 달리 대학에 가지 못했던 것 모두 윤희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윤희는 더는 부끄럽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원하려는 식당 앞에서 이력서를 들고 긴장한 와중에도 새봄의 카메라 앞에서 처음으로 환하게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긴장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까.

남성 감독인 임대형이 당사자성을 뛰어넘어 <윤희에게> 속 서사를 풀어내는 방식은 섬세하다. 그는 과장된 묘사나 신파적 눈물 따위를 과감히 포기한다. 이십 년 만에 윤희와 쥰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서로를 마주하는 장면에서도 감정은 함부로 남용되지 않는다. 대신 (쥰이 편지에서 썼듯이) 오타루의 눈과 달, 밤과 고요, 그리고 ‘오랜만이네.’, ‘그렇네.’와 같은 간결한 말들이 그 자리를 메운다. 지극히 절제된 그 말들 안에는 그리움과 애틋함, 그 동안 각자 견뎌왔던 고달픈 삶에 대한 위로가 담겨 있다. 오래된 상처를 들여다보고 그간 용서하지 못했던 스스로와 화해하는 것은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 진통을 겪는 타인을 묘사하는 것 역시 용기가 필요한데, 그 이유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고통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겠다는 섬세한 감각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임대형은 그 모든 일을 멋지게 해낸다. 말하자면 그가 <윤희에게>에서 보여주는 건 치열한 사유 끝에 빚어진 가장 올바른 형태의 언어다.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윤희에게> 중

멋지다는 단어를 여러 번 썼다. 이토록 멋진 영화. 윤희와 쥰은 앞으로도 서로의 꿈을 꿀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윤희와 쥰이 꾸는 꿈은 계속해서 이야기될 것이다. 올바르고 멋진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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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미지는 영화 <윤희에게> 속 장면을 편집하여 사용했다.

초하
choha@yonsei.ac.kr
나, 너, 그리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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