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게 “어느 복음서가 가장 좋으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곧장 “루가의 복음서입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왕같은 예수를 그리는 마태오도, 인간 예수를 그리는 마르코도, 진리요 신성인 예수를 그리는 요한도 아니다. 나는 루가의 예수가 좋다. 배척되었고, 아픈, 고통받는, 거절당하는 사람들이 모여 복음을 확장해 나가는 그의 복음이야말로 내겐 정말 무거운 복음인 탓이다.

목자들을 생각한다. 흔히들 예수 탄생 이야기를 이야기하노라면 “세 명의 동방박사” 또는 “세 명의 왕”에 관해 생각한다. 어떤 이국의 유력한 이들이, 큰 별이 뜬 것을 보고, 작은 마을에 태어난 예수를 찾아 축복하고자 이스라엘 전역에 소동을 일으킨다는 이야기. 이것은 마태오가 전하는 예수의 탄생이다. 반대로, 아주 조용하고 별 볼 일 없는 탄생 이야기가 또다른 흐름에 있다. 루가의 목자 이야기가 그것이다. 선선한 들 위에 목자들이 모여 앉은 와중에 천사들이 그들을 방문하고, 그들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가 메시아라고 주장한다. 목자들은 그 말을 듣고 정말로 아기를 찾아 그의 탄생을 축하했고, 그가 메시아라는 주장을 전했다. 그러나 주위의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고귀한 왕들과 비천한 목자, 떠들썩해진 이스라엘과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동네 사람들, 모두가 볼 수 있는 하늘의 별과 목자들만이 보았을 천사들. 마태오와 루가의 탄생 이야기는 비슷한 주장을 하는가 싶으면서도 영 다르다. 루가가 전하는 예수의 탄생에 고귀한 이들은 관여하지 않는다. 비천한 목자들과 약한 소녀 마리아가 전부이다. 다른 인물들은 목자와 마리아가 받은 복된 소식을 조금조차도 믿지 않는다. 오직 직접 계시를 받은 목자와 마리아만이, 자신이 받은 것을 전하고, 서로를 신뢰하고, 서로의 말과 행동을 마음에 새겨 즐거워한다.

<목자들에게 예수 탄생을 알림>, 요아킴 위터발, 1606.

위터발Joachim Wtewael은 루가의 예수 탄생을 그려 냈다. 물론 조금은 다르다. 전형적인 목자들은 온데간데 없고, 시장통에 강림하는 천사들을 그려 놓았다. 언뜻 보기에 이 그림은 오류다. 전혀 성서 본문을 고증하지 못했다. 하지만 루가의 예수 탄생 이야기가 말하려던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자면, 위터발의 글은 루가의 복음서 그 자체이다. 시장통에서 밤을 지새우는 천하고, 서로 약한 사람들. 그들 가운데에도 천사가 온다. 그들에게 내려진 소식을 통해 저들은 메시아를 찾으러 갈 것이다. 고된 중에도 도래할 평화가 있으리라고 믿고, 그렇게 말하는 이웃을 신뢰할 것이다. 신뢰 속에서 약한 이들은 차츰 연대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신뢰나 연대가 현실을 바꿀 리 만무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서사가 다른 서사들에 비해 비관적인가. 그렇지도 않다. 동방박사가 이스라엘에 왔던 때에도 식민지의 인민들은 해방되지 못했다. 로고스가 사람이 되었다고 함에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 한다. 예수가 이 땅에 왔다는데도, 그가 죽고 다시 살고 그러기를 반복한 것이 이천 년이 지났지만, 세상은 여전히 고되다. 뭔가 큰 일이 있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그런 큰 일을 하는 것은 약한 사람들에겐 너무나 힘들다. 이미 사는 것도 힘든데, 무슨 큰 이야기를 하라는 것인가.


루가의 복음서가 전하는 다른 이야기를 생각한다. 자캐오는 식민지 부역자이다. 그러나 부역자라고 딱히 큰 일 하는 것도 아니다. 동네 사람들 세금 걷는 것이 그의 일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멸시한다. 자기 배만 불리는 녀석. 제국의 부역자. 상종해서는 안 될 놈. 그의 집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집에 예수가 방문한다. 동네 사람들에게 끼어서 예수를 볼 엄두는 안 나니, 나무에 숨어서 그를 보던 것을 예수가 발견한 것이다. 방문한 예수는 그의 집에도 평화가 임했음을 선언한다. 동네 사람들 골목 대장 노릇을 하던 예수가 자캐오를 환대하자고 말한 셈이다. 그 환대에 감동한 자캐오는 적극적으로 자선하고,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나무에 숨어서 겨우 예수를 보았던 사람, 키가 작은 만큼 작은 자존감으로 겨우 살아가던 시민 자캐오. 예수는 그런 그를 불러 내어 공동체 가운데에 데려 온다. 데려올 뿐 아니라 다른 이들로 하여금 자캐오를 환대할 수 있게까지 만들어준다. 자캐오의 죄가 사라졌다.

차라리 시장통에 강림한 천사들이었더라면. 소녀 마리아는 꿈에 나온 천사의 이야기를 잊을 뻔하던 와중에 목자들을 만났고, 목자들이 전한 소식은 그의 마음의 새기어졌다. 차라리 자캐오의 집에 방문한 예수였더라면. 자캐오는 멸시받는 공무원이었지만, 예수는 그의 집에도 평화를 전했고, 그의 방문은 자캐오를 이스라엘 공동체에 돌아올 수 있게 했다.

자캐오가 정말로 예수의 환대에 감동했다면 그는 큰 일을 해 냈었을 것이다. 그의 약속만 보아도, 그는 자신의 재물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불의하게 받은 돈들을 정의로운 데에 사용하겠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정말로 그의 이웃들은 그를 다시 환대했을 것이다. 여전히 “높으신 분”들은 그러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낮은 곳에서는 평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마리아가 목자들의 말을 마음에 새기지 않았더라면 그는 예수를 키워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잠깐의 백일몽에 나타난 수태고지가 뭐 별 것이라고. 예수가 보인 신묘한 행동들을 그저 감춘 채, 평범한 아이로 만들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목자들 역시 자신과 같은 말을 들었음을 마음에 새겼다. 아무도 그 천한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적어도 마리아는 믿었다. 그렇게 마리아는 메시아를 키워 낸다.

차라리 시장통에 강림한 천사들이었더라면. 차라리 자캐오에 집에 방문한 예수였더라면.


마리아의 중년, 예수의 말년을 생각한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안나를 데리고 그의 무덤을 찾아갔다. 무덤은 비어 있었고, 삼십 여 년 전의 그 날처럼 천사는 마리아에게 말한다. 그가 죽음에서 일어났고, 그가 참 메시아임이 증명되었다고.

조심스레 목자들의 말을 마음에 새기기만 하던 마리아. 이제는 그 날 목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의 부활 소식을 그의 제자들에게 전한다. 천사들이 나에게 나타나 예수의 부활을 전했다고 전한다. 물론 여전히 그 말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어머니, 당신이 헛것을 보았겠죠. 어머니, 어떻게 사람이 살아 납니까.

마리아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나는 마리아의 말이 그렇게 거절되는 와중에도 마리아가 희망을 가졌으리라고 믿는다. 아무도 나의 아이가 메시아임을 믿지 않을 때에도 내가 그것을 마음에 새겼듯, 나의 아이가 부활했음을 아무도 믿지 않을 때에도 누군가는 그것을 마음에 새겼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루가는 전한다. 베드로가 바로 그 사람이었더라고.

그런 베드로 위에 교회가 섰다. 성탄을 기념한다는 것은 그런 교회의 탄생을 기념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을 때에도 서로를 신뢰하고, 서로와 연대하는 그러한 공동체의 탄생 말이다.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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