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엄마는 내가 초등학생일 때 국어국문학과 대학생이 됐다. 그리고 재학하는 동안 단편 소설을 써서 교내 문학 공모에 입상했다. 자기 글이 상을 탔다며 묵직한 상패를 내게 보여줬던 것을 기억한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그걸 다시 떠올렸다.

아들 둘을 낳고 전업 주부로 살다가 마흔이 넘어서 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 엄마의 마음은,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단편 소설을 써서 입상했을 때 엄마의 마음(이런 문장은 엄마를 타자화하는 것 같지만)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명절 때 외가 이야기를 종종 들었던 것 같다. 외가에서 엄마는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엄청 애를 썼댔다. 그래도 대학은 결국 못 갔다고. 엄마는 언제부터 글을 썼을까. 혹은 쓰고 싶어했을까.

아무리 해도 엄마가 글을 쓰는 모습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엄마가 쓴 이야기를 도저히 상상해낼 수가 없다. 게다가 그 제목이 「싱글 라이프」라면. 엄마의 이름과 대학교 이름과 소설 이름을 아무리 입력해 봐도 그 소설을 읽을 방법이 없었다. 언젠가는 물어봐야지, 하고 몇 년이 지나고 있다.

소설가 백수린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Q.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너무 빨리 휘발되고 소진되는데, 사건을 이야기로 만드는 순간 시간을 가지고 기억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A. 21세기에 문학의 자리가 뭐냐고 묻는다면 휘발돼 버리는 기억들, 우리가 손쉽게 외면하고 지나갔던 것들에게 자리를 만들어주는 일이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더더군다나 제가 여성 작가이기 때문에 여성의 역사에 어느 정도 자리를 만들어주는 작업이 소설 작업에서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특히나 단편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더 서사를 넣어주고 싶었어요.

http://ch.yes24.com/Article/View/38408

그래서 소설이 필요합니다. 시간을 갖고 기억하기 위해서요. 소설 없는 세계는 생각만 해도 무서울 겁니다.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80802/91343740/1

이번 발행을 위해 지난 19일 발표된 제65회 현대문학상 수상작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를 읽었다. 나는 아무래도 엄마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의 모든 인용: 백수린.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창작과 비평』 47(1). 154-173.)

*

이런 집에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것은 정말 이상적인 집이었다. 그녀는 늘 그랬듯 언젠가 이런 집을 마련해 아이들과 함께 사는 중년의 인생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네를 두개 매달면 초등학생이 된 아이들이 마당에서 나란히 그네를 타겠지. 엄마, 바닥을 굴러 하늘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면 왜 배꼽 위가 간지러워, 하고 깔깔대며 웃을지도 몰랐다. 여름날에는 남편이 말했던 것처럼 숯을 사다가 바비큐를 해도 좋을 거였다. 남편은 주말이면 차고에서 세차를 하고, 그녀는 마당의 수도에 호스를 끼워 장미에 물을 줄 것이었다.

161-162

화자는 어린 아이가 둘 딸린 엄마다. 작은 애는 아직 걸음마를 못 뗐고 첫째는 어린이집에 다닌다. 그녀는 종종 집 근처의 붉은 지붕의 집에서 사는 일을 상상한다. 화목한 가정의 엄마가 되는 일을.

소설의 서사는 그런 화자가 친구 ‘한나’의 레스토랑 개업 파티에 참석하면서 시작된다. 파티에서 그녀는 무용을 했던 젊은 남자를 만난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붉은 지붕 집 앞을 지나다 “키 크고 군살이 전혀 없는 근육질의 뒷모습”(165)을 가진 중국인 인부를 스쳐 지나간다. 그녀는 인부에게서 지난 파티의 무용수를 연상한다. 인부는 붉은 지붕 집을 공사로 허물어트리고 있었다.

소설의 말미에서 그녀는 허물어진 붉은 지붕 집의 폐허 속으로 홀린 듯이 걸어들어간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그곳에는 지난 번 스쳤던 중국인 인부가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 중국인 인부 위로 파티에서 만났던 무용수가 다시금 겹쳐지고, 그녀의 일상에 침입한 두 남성은 아무래도 의미심장해진다.

여자는 그의 옷을 벗기기라도 할 것처럼 남자를 맹렬히 쳐다보았다. 창틀 아래로 드러나지 않은 남자의 몸을 상상했다. 그녀는 이토록 더럽고 위험한 곳에서 낯선 남자에게 성적인 충동을 느낀다는 사실에 당혹감과 수치심을 느꼈다. 아이를 낳은 이후, 남편이 손을 뻗어올 때도 무언가를 느낀 적은 없었다. 나체의 집 위로 오후의 햇살이 쏟아졌고 지붕은 불타오르는 듯 이글거렸다.

171

소설은 “평상시와 다른 아름다움”(173)을 빛내는 그녀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붉은 지붕 집이 허물어진 다음 들어올 집은 “그녀가 알던 집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날 오후에 그녀가 보았던 집과도” 다를 것이다. 이제 그녀는 붉은 지붕 집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자, 붉은 지붕 집은 허물어졌다. 이 집은 왜 허물어져야만 했던 것일까. 그리고 붉은 지붕 집의 폐허에서 그녀가 만난 것은 무엇인가. 혹은 그 폐허에서 솟아오른 것은 무엇인가. 그건 아마도 한 여성의 휘발된 역사가 아닐까.

*

소설은 화자가 엄마로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공들여 묘사한다. 그녀는 “둘째 아이를 낳은 이후 집 밖을 나갈 일이 거의 없”(155)었고 한나의 레스토랑 오픈 파티에 간 날은 “아이들을 두고 처음으로 혼자 저녁 외출”(156)을 한 날이었다. 둘째 아이를 낳을 생각은 없었으며, 파티에서는 수유 때문에 와인을 참았고 핸드백에는 유축기를 넣어 가야 했다. 파티에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다가도 “마치 버림받은 아이처럼 숨을 헐떡이며 울던 아이가 떠올라 죄책감에 고통스러운 기분”(158)이 들기도 한다. 또 “예전에는 사람들과 있는 것에 이 정도로 서툴지 않았는데, 지난 십여개월간 아이들과만 지내다보니 그녀는 낯선 사람들과 사교하는 데 필요한 모든 규칙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159)

여기에는 이런 서사가 있을 것이다.

그녀는 운전을 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웃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런 집에 살기 위해서라면 일을 그만두지 않는 게 나았을까? 하지만 그런 생각이 잠깐 들다가도 육아 도우미를 부르는 비용 같은 것들을 생각하면 계속 일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큰 이득이 되지 않으며 그저 욕심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첫째 아이를 낳고 유산을 두 번이나 한 끝에 둘째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남편은 그전부터 그녀가 회사를 그만두길 원했다.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가고 나면 일하는 엄마를 둔 아이들은 따돌림을 당한다던데. 아무리 종종거리며 점심시간에 준비물을 사러 다니고, 하루 종일 보고 싶었던 아이를 오분이라도 일찍 보기 위해 환승역에서부터 뛰어봤자 아이와 친정엄마에게는 언제나 죄인일 뿐이라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이게 들어 왔으므로 그녀는 둘째 아이가 생기자마자 퇴사를 결심했다.

155

어쩌면 붉은 지붕 집에서의 삶은 가정 안으로 내몰린 엄마-여성이 그릴 수 있는 최선의 유토피아가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오랜 친구 ‘한나’와의 추억들을 복기하는 대목들에서는 화자의 성격이 다소 자세하게 제시되고 있다.

한나는 하고 싶은 일이 언제나 너무 많은 사람이었고, 그녀는 누군가 정해준 틀 안에서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이 편한 스타일이었으므로 둘은 그들이 이룬 균형에 만족했다.

156

그녀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지금 누릴 수 없는 것에 대해 괴로워하기보다는 인생의 단계, 단계에 걸맞은 역할을 수용하는 것이 성숙한 태도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녀는 결혼 전, 한나와 곱씹을 수 있는 추억을 많이 만들어두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고 행복했다.

162

한나와의 일들은 그저 “재미있는 시절”(163)으로 일축되고, 회상의 끝에는 그녀에게 몸을 던져 안기는 첫째 아이가 있다. 그러나 허물어진 붉은 지붕 집으로 들어가 인부와 마주섰을 때 그녀는 무용수를 연상하며 무언가를 깨닫는다.

최초의, 최연소, 국내 초연. / 그는 틀림없이 욕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어봤겠지? 불현듯 그녀는 자신이 지금껏 누구에게도 떼쓰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일찍 철이 든 척했지만 그녀의 삶은 그저 거대한 체념에 불과했음을.

171

붉은 지붕의 집과 함께 그녀의 체념도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일상에 침입한 두 사내─아니, 이쯤에서 말을 바꾸자; 어쩌면 원래부터 그녀의 삶에 있었으나 어딘가로 밀려나 있었던 리비도는, 그녀의 유토피아를 무너트렸으며 동시에 유토피아의 폐허에서 다시 솟아오른다.

파티에서 만난 남성에 대한 호감에는 아무래도, 무용을 하고 싶었으나 포기해야만 했던 그녀의 이력에서 나온 동경이 섞여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줄곧 발레리나를 동경해왔으나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아 무용을 배워보지조차 못했다.” (159) 파티에서 그녀는 무용수와 대화하다가 마음을 일순 열고 포도주를 받아 마신다. 그리고 다음날 무용수의 이력을 찾아보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핸드백 안에서 휴대용 유축기를 꺼내다가 남자의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남자는 생각한 것만큼 어렸고 생각보다 더 유명한 현대무용 발레리노였다. 한국 최초의, 최연소, 국내 초연. 둘째 아이가 다시 잠애서 깨어 울음을 터뜨렸다. / “엄마 여기 있어, 여기 있단다.” / 그녀는 휴대전화를 놓고 아이에게로 돌아가 땀을 닦아주었다.

161

엄마 여기 있어, 라는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여기 밖의 어딘가로 나갈 수도 있어, 라는 뉘앙스를 획득한다. 그녀의 붉은 지붕 집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실제로 그 집 앞에서 인부들과 트럭을 발견한 장면이 바로 이어진다.

그리고 며칠 후 또다른 사내, 건장한 중국인 인부가 등장한다. 소설은 그의 육체에 관심을 보이는 그녀를 묘사한 후 한나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뒤에 잇는다. 무용수가 그녀에게 공연 초대권 두 장을 줬다는 내용이다. 유부녀라는 말은 안 했으니 남편이랑은 가지 말라는 한나의 말에 그녀는 어쩐지 한나와 클럽에 다니던 밤들을 떠올린다. “아까 그 젊은 남자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 리드미컬하지만 대담한 움직임으로 벽을 부수는, 싱싱하게 젊고 군살이 전혀 없는 근육질의 남자.”(167) 이런 문장 이후에 그녀는 그날 저녁 남편에게 공연을 보러 가고 싶다고 말한다.

공연을 실제로 보러 가지는 못했으나 붉은 지붕 집은 젊은 인부의 손에 무너졌다. 대신 소설이 공들여서 복구해낸 것은 거대한 체념 사이에서 휘발되어온 한 여성의 꿈과 욕망, 자주 외면되곤 하는 리비도일 것이다. 그녀는 무너진 집 아래에서 한나와 봤던 영화를 떠올리고 ‘사랑’이라는 단어를 재소환한다. “나는 사랑을 몰라.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172) 그녀는 지금까지 무엇을 사랑해왔는가.

휘발되었던 그 힘이 그녀의 서사에 다시 끼워진 후, 그녀는 다른 아름다움을 되찾는다. 폐허에 세워질 다음 집은 그녀가 꿈꾸었던, 혹은 살아왔던 어떤 집과도 다를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이다.

“이젠 상관없어.” / […] 그렇게 말하자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기쁨이 동시에 그녀 안에 차올랐다. 그 순간, 그들의 삶의 각도가 미세하게 어긋났지만 남편은 아무것도 알아챌 수 없었으므로 그저 첫째 아이가 내미는 컵을 받아 쥐었다.

173

삶은 이미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으므로. 다른 집에 관한 꿈은 필요 없을 것이다.

*

우선은 소설적 정교함이 놀랍다. 백수린 작가에게는 서사를 장악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군데군데에 들어 있는 디테일이 인물과 사건을 특정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이끈다. 그리고 무너져 내린 붉은 집, 그 아래에서 인부와 대면하는 장면의 이미지는 잘 만들어진 영화의 미장센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처음에 인용한 인터뷰의 내용이 이렇게, 소설가로서의 탄탄한 역량 위에서 좋은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쩐지 소설이 끝난 후 화자가 어떤 사건/삶으로 나아갈지, 어떻게 체념을 넘어 허락되지 않은 것들에 발을 디딜지가 궁금해진다.

그러나 약간의 이물감이 남는다. 이를테면, 무용수와 인부와 같은 대상이 있지 않았더라면 집은 허물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 여기서 독해는 두 갈래로 갈린다. 그들을 대상으로 삼을 주체로서의 힘을 그녀는 돌려받은 것인가. 혹은 그(남성)들을 대상삼아야만 그녀는 붉은 지붕 집의 꿈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가. 후자라면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다시 대상들에 종속되는 게 아닌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소설이 한번에 모든 혁신을 성취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혹은 내가 여기에 이물감을 느끼는 이유에 내 삶이 기입되어 있을 수도 있으니까.

*

마무리를 어떻게 지어야 할까.

음, 내일쯤엔 엄마에게 전화해서 「싱글 라이프」의 내용을 물어보려 한다.

파상
studien6180@gmail.com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