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스트모던 이후의 철학” (2)  

서설

근대 이후 텍스트를 읽는 것 내지 이해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나는 그것의 유형이, 특히 유럽 철학의 전통으로부터, 둘로 나뉜다고 간주한다. 그 중 하나는 니체에게서 대표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른바 그의 “계보학적” 방식의 읽기가 이에 해당하며, 이후 이 방식은 푸코의 읽기 방식으로 이어질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이데거적인 것이다. 그의 “해체”의 방식이 이 읽기에 해당한다. 해체로서의 해석은 앞서 데카르트를 읽는 스피노자에게서 나타났고, 이후 데리다의 읽기 방식으로 이어진다.

계보학: 영향사를 통한 텍스트 이해

니체와 푸코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읽기 방식을 “계보학적 방식”으로 간주하자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전의 그의 저작에서도 유사한 분석 방식이 나타나나) 본격적으로 계보학적 방식의 전형을 보여주고자 한 그의 저작 『도덕의 계보 』의 경우를 먼저 생각해 보자. 그는 오늘날 전형적인 도덕 관념, 특히 기독교적 도덕 관념이 어떻게 정당화되는지를, 체계 내부가 아닌 체계 외부로부터 살핀다. 그것이 체계 외부로부터 살펴진다고 할 수 있는 까닭은 그가 체계의 성립 이전에, 그 체계의 성립을 지지해 온 담론사적 흐름을 살피고 있는 탓이다. 그는 기독교 도덕 담론 이전의 도덕에 대한 관념이 어떻게 달랐는지를 살핀 뒤 그것이 또 어떻게 오늘날의 (선악의 대립을 통해 예증되는) 도덕 담론으로 이어졌는지 논구한다.

마찬가지로 푸코는(아쉽게도 나는 푸코에 관한 지식이 많지 않다), 본격적으로 계보학적 탐구를 시작하며, 국가나 신체, 정신과 같은 것에 관한 관념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를 살핀다. 니체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같은 대상에 대해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게 정당화되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다.

이 두 “계보학적 방식”의 전형은 한마디로 영향사의 방식이다. 다만 지배적 담론의 소유자들이 어떻게 그 담론이 다루는 개념적 대상들에 영향을 주었는지를 논구하는 방식이다. 다시 이 영향은, 개념들로부터 인민 일반에게의 영향으로 돌아올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개념-인간의 변증법을 거치는 영향사이다.

나는 이러한 방식이 상당히 텍스트 해석에 있어 상당히 실체적인 관점을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텍스트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작용을 상정하고 있는데, 그 작용 자체는 그 참여자, 예컨대 시민이나 군주, 기독교인들 등이 없다면 내용 없는 형식으로서 공허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참여자뿐 아니라, 어떤 개념의 동일성이 상정된다는 점에서부터도 그들의 이해는 실체적일 법하다. 개념 틀이 바뀜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도덕’과 ‘기독교 도덕’에서 “도덕”은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 양 사용된다. 마찬가지로 ‘국가’의 의미가 상이해짐에도 불구하고, 봉건 시대의 그 사용과 현대의 사용은 동일한 무언가를 지시한 채 그 의미만을 바꾸는 것처럼 간주된다.

이러한 태도는 어떤 개념이 단지 한 개념 틀 안에 종속되어 있다기보다, 역사 속에서 지속하는 것이라는 것이 전제되지 않았다면 이해되기 어렵다. 예컨대 우리는 기독교 도덕과 그리스 도덕이, 단순히 기호 상으로만 같은 것일 뿐 그것을 통약할 어떤 근거도 없다고 여전히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의 주장처럼 우리가 이미 도덕이나 국가에 관한 관념을 강한 의미에서, 즉 ‘도덕’이 의미하는 바는 ‘이러저러한 것’과 동일하다는 느낌으로 갖고 있는 것이라면, 그러한 도덕의 의미와 상충되는 도덕인 “그리스 도덕”을 도덕이라고 부를 수 없어야 한다. 따라서 생각건대, 그들이 분석하는 개념들은 개념 틀에 종속적이라기보단, 실체적이어야 한다.

해체: 환원 또는 해석을 통한 텍스트 이해

반면 나는 하이데거와 스피노자, 데리다의 텍스트 읽기를 해체적인 것이라고 부르자고 했다. (허락된다면 나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 이에 일치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텍스트 읽기와 해체는 양립 가능한가? 텍스트는 그 의미가 구축되어야만 읽어질 수 있지 않은가?

이 생각은 해체의 개념을 잘못 안 데에서 기인한다. 종종 오해가 있는 것과 달리, 그들이 해체라고 부르는 것은 텍스트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그러한 행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구태한 해석을 새로운 것을 갈아 치우는 방식에 해당한다. 예컨대 “마음”이라는 표현과 관련된 여러가지 기호적 연관들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몸”이라는 기호와 대립된 것으로 이해되어 왔기도 하고, 이러저러한 어원을 갖고…등등이 그 연관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그 구태한 이해들 중 우리는 서로 충돌하는 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마음이 몸을 움직인다”와 같은 사실은 마음과 몸의 이항대립과 충돌한다.

이러한 충돌로부터 우리는 기존에 가져 온 마음에 관한 이해를 쇄신할 수 있다. 그것이 몸과 갖던 대립은 실체적 대립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실체적이지 않다는 양 간주하던 어원적 이해는 마음이나 몸에 관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바와는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이 마찬가지로 다른 사실을 중심으로 삼아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 있을 일은 이렇다. 마음에 관한 고정된 존재론적 태도를 수정하여, 쇄신된 존재론적 태도로 만드는 것이다. 즉, 해체는 구태한 개념 틀에서 이해되던 어떤 개념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의 믿음을 기초로 해서, 그 개념을 새로운 개념 틀에서 이해되게 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의미에서 “무”에 관한 기존의 입장을 해체하고자 했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의미에서 “실체”에 관한 데카르트적 입장을 해체했다. 데리다의 텍스트 비평 작업은, 이러한 의미에서 여러 텍스트들을 해체한다. 이 방식의 이해는 해석이기도 하지만 다소간 환원적 해석의 성격을 갖는다. 다만 존립하고 있는 하나의 체계로의 환원이 아닌, 덜 기초적이었지만 기초적이게 된 하나의 믿음에 일관된 명제들로의 환원이다. 이 환원은 일단은 열려 있지만, 전적으로 열려있다기보단 그 기초적인 믿음에 대해서만 닫힌다. 느슨하게 열린 체계의 테두리로부터, 해체의 과정은 새로운 체계를 세우는 데에로 나아간다.

해체의 방식은 계보학의 방식과는 달리 개념을 실체적인 것으로 둘 필요가 없을 듯하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기호가, 다른 기호들과 같고 있던 관계를 쇄신하는 데에서 멈추기 때문이다. 기호는 단지 현상적인 또는 명목적인 존재자에 그치며, 그것이 어떤 실체적인 것을 지시해야 하는지의 여부는 기호 안에는 내재되어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해체의 작업은 개념의 지속을, 적어도 위험한 방식으로는, 상정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일단 각 기호의 개례(token)를 같은 유형(type)의 것으로 여기는 것은 우리의 인식적 판단이나 형태론적 유사성만으로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실체적인 대상을 상정하지 않는다. 또 과거에 같은 유형을 예화한 개례에 대해 그것을 오늘날의 그 유형의 예와와 다른 개념을 지시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해체의 방식은 시간적으로 지속하는 개념이라는, 대상을 상정하지 않는다.

계보학과 해체는 양립가능한가?

이 두 이해의 방식에 관한 짧은 고찰로 글을 마무리하자. (더 긴 의견을 내세우다 보면 나의 밑천이 드러날 것이 분명하다.) 오늘날 우리는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름으로 푸코와 데리다를 함께 스승으로 모시려 하곤 한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계보학과 해체를 동시에 자신의 방법론으로 삼고자 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또, 두 방법론이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만한 공통점을 갖는다는 태도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방법론에 있어서 둘은 공통점보다는 차이를 더 크게 갖는 듯하다. 정적인 개념과 정적인 개념틀이 없다는 사소한 진리에 있어서 두 방법론은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이 동적인지에 대해 두 방법론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한다고 나는 본다.

계보학의 방식은 개념틀 내지 한 개념과 다른 개념의 관계에 관한 우리의 이해가 동적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개념들은 그 자체로 그 개념틀을 관통하는듯 여겨지며, 이는 개념에 관한 실체론적 관점을 전제해야지만 이해된다고 나는 주장했다.

반면 해체의 방식은 개념 자체에 치중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다만 느슨한 방식으로, 우리의 개념틀이 어떤 개념들을 표현하기 위해 도입하는 기호의 사용들이,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음을 보이고자 한다. 또 지금 우리의 개념 사용에 있어서는, 바로 그 다른 방식이 우리의 개념틀을 구성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또 그것은 방법론의 위치에 있어서도 전혀 다른 생각을 한다. 계보학은 현행하는 담론 바깥으로부터 현행하는 담론 체계의 지위를 무너뜨린다. 반면 해체는 현행하는 담론으로부터 현행하는 담론 체계의 지위를 무너뜨린다.

이러한 차이들로부터 생각할 때, 하이데거와 니체를, 데리다와 푸코를 동시에 스승으로 삼고자 하는 시도는 다소 부조리해 보인다.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 해도, 그 가능성은 해체에로 계보학을 환원하거나 계보학에로 해체를 환원하는 방식으로만 가능할 것 같다.

보론: 계보학으로의 해체의 환원과 그 역

위 글을 닫으며 나는 계보학과 해체를 동시에 도입하는 것이 둘 중 하나에로의 환원을 가져오리라고 판단했다. 그 환원이 대체 무엇인가? 이를 짧게 기술해 보자.

계보학으로 해체를 환원할 경우, 우리는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논증할 듯하다: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 a는 실제로 이러저러한 영향사를 갖고 있던 것임을 우리가 안다. 이 앎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a를 종래의 양식으로 사용하기보다는, 이전의 영향사가 보여주듯,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고자 해야 한다.” 이는 해체의 근거를 계보학에 두는 방식이다. 그것의 논증 꼴은 해체의 방식과 유사해 보이지만, 그 논증의 정당화는 계보학적 방식에서 나온다. 즉 계보학적 탐구를 신뢰한다면, 해체를 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푸코나 니체 모두, 이러한 논증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 반대의 경우는 다음과 같은 형식을 가지리라고 생각한다: “어떤 개념틀에 근거한 기호 a에 관한 태도는, 실제 그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던 어떤 믿음들과 관련지어 보자면 사실 잘못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a에 관한 그러한 태도를 가졌는가? 이는 그들이 다른 믿음들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부조리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계보학적 분석에 해체의 방법을 도입한다. 비록 그 과정이 계보학적 분석의 일종이기는 하나, 이 논증이 주목하는 지점은 해체가 하는 그것과 같다. 데카르트를 비판하던 스피노자의 태도는 특히나 이러한 방식을 명시적으로 취하는 듯하다.

몇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환원이 이루어진 뒤, 두 방식은 양립 가능해 보인다. 그럼에도 둘은 결정적인 차이가 있지 않을까? 예컨대 전자는 현재의 개념틀에 대한 비판이라는 해체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사용될 법하고, 후자는 과거의 개념틀에 대한 비판이라는 계보학의 도구에 사용될 법하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바가 있을까? 아쉽게도 이 점에 대해서 분명한 진단을 내릴 능력은 나에게 있지 않다.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