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우리는 충분히 말했다. 그것의 이름을 무엇으로 두든, 실재 대 언어, 말할 수 없는 것과 있는 것, 저항하는 몸과 구성되는 몸, 세계 대 분석, 실천 대 준칙, 사건 대 사실, 알레프 대 푸네스 … 이와 같은 구도와 관련된 우리의 희망을 줄곧 논해 왔다. 이제는 눈을 돌릴 때이다. 이하의 에세이는 우리, 그리고 우리 각자의 태도를 묻는다.

하나.

우리는 이른바 자연종Natural Kinds에 대한 직관을 갖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굳이 자연종이 아니더라도 어떤 종류의 속성들에 대해서는 그저 그러함이라는 태도를 갖고 있다. 전자에 대해서는, 예컨대 <어떤 것이 붉다>라는 명제에 대해 생각해 보라. 왜 그것은 붉은가? 혹은 왜 붉음은 붉은 것들의 속성인가? (이 질문은 어원에 관한 것이 아니다.)

후자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에 관한 관념이나 플라톤이 예로 든 바 ‘의자’와 같은 단어의 의미에 관해 생각해 보라. 왜 우리는 그 사람을 잘못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생각할 수 있는가? 왜 의자는 인공물임에도 불구하고 <의자임>과 같은 속성을 담지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예컨대 우리는 “이것은 의자가 아니다”라고 하거나 “이것은 의자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

1790년 이전에 <백조는 하얗다>는 참인 실증적 명제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검은 백조가 발견됨에 따라(오늘날 한국어로는 이 종을 ‘흑고니’라고 부른다) 이 명제가 거짓이 되었다. 어떻게 이 명제가 거짓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왜 과학자들은 검은 백조를 고니속이 아닌 다른 속에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고니속 아래의 흑고니라는 하나의 종으로 그것을 분류했는가?

단지 생물학적 유사성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그럴 듯한 이유이겠다. 실제로도 그렇다. 엄밀한 과학적 발견은 우리의 직관적인 오도됨을 해소할 수 있다. 하지만 왜 그런 질적 차이가 있는가? 목이나 속, 종과 같은 생물학적 분류가 자연에 실재한다는 것인가? 만일 이 분류가 오로지 자의적인 것이라면 생물학이 우리 직관을 수정했다는 점을 옹호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분류가 필연적인 것이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런 분류를 직관하여 과학에 도입할 수 있었는지가 문제가 된다.

과학이 배제된 상황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그저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 만으로도 그 사람에 관한 심적 목록Mental file에 그 정보를 기록한다. (“목록”은 일종의 은유이다.) 기록하는 과정 자체에서는 특정한 목록에 그 정보를 기입하기 위한 명시적인 절차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정보를 기입한다. 물론 그 기입 과정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으며, 우리는 그 경우 기록을 정정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과정 자체에서는 <이 사람이 A이기에 나는 A 목록에 이 정보를 기입한다>라는 명시적인 과정이 없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법원 등에서의 발화가 아닌 한) 우리는 누군가의 신원을 확실하게 검증한 뒤 그의 발화를 하나의 목록에 넣고자 하지 않는다. 어떻게 그에 관한 다른 사실들을 확인하지 않고도 어떤 정보를 그에게 기입할 수 있단 말인가? 이 과정은 전혀 자의적이지가 않다. 때로 식별의 오류로 A의 정보를 B에게 기입하곤 하지만, 일단 누군가를 B로 인식하고 나면 B의 정보로서 B의 정보를 기록한다.

색깔의 사례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더 나아가 웬만해서는 감각의 간섭에 의해서도 어떤 색을 잘못 분류하지 않는다. 느슨한 개념으로, 우리의 감각 내용 자체는 매번 동일하지가 않다. 태양광에 산란에 따라, 조명에 따라 어느 공간의 색온도는 유동적인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은 붉다”라는 판단을 내린다. 물론 이는 주변의 감각을 고려한 뒤 이러저러한 색온도일 것이라고 간주하여 그 대상을 본 결과이겠지만, 우리에게는 색온도의 관념이 미리 있지 않기 때문에(나는 색온도의 지각 능력이 후험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해명은 충분하다고 여겨지기 어렵다.

또 (나와 같이) 색각이상자가 아닌 한, 같은 계열의 다른 색을 묶는 방식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만일 색의 분류가 그 엄밀한 분류에 있어서만 동일성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색을 질적으로 연속적이라고 여긴다는 사실을 해명하기 어렵다. 비슷한 색을 비슷하게 여긴다는 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로부터 제기되는 문제는 “왜 그것이 그러한가?”이다. 많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개념의 자의성을 옹호한다. 그러나 왜 그 자의성은 항상 제한된 자의성으로만 나타나는가? 그 명백한 증거로, 과학과 논리학의 패러다임이 변화했음에도 우리는 현대 물리학의 지식으로 고전 물리학의 현상들을 해명할 수 있고 현대 논리학의 공리들로부터 고전 논리학의 체계를 설명할 수 있다. 또 우리는 어떤 언어 공동체에서도, 비록 (콰인의 주장처럼) 그것의 번역에 한계가 있을 수 있을지언정 어떤 대상을 하나의 덩어리로 여기는 기준이 같을 것임을 알고 있다. 문제는 왜 그러하냐는 것이다. 또, 그 “제한된 자의성”을 어떻게 여겨야 하느냐는 것이다.

둘.

알려진 한 지시사가 없는 언어는 없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지시사의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일단 나는 지시사를 어떤 종류의 대명사들과는 구분하며 말을 시작하려 한다. 지시사에 해당하는 낱말로는 ‘이것’ ‘저것’ ‘그것’ ‘나’ ‘너’ ‘그’ 등을 생각할 수 있겠다. 이 중 어떤 것들은 (이 문장에서도 “이것”이 쓰였듯) 다른 표현을 받는 대명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지시사들의 역할은 어떤 대상을 직접지시하는 데에 있다.

일상 언어의 표현이 으레 그렇듯 순수하게 지시만을 하는 표현은 상당히 적다. 예컨대 ‘S/He’는 그 대상이 유성동물이며 단어에 의해 특정되는 성별을 갖고 있다는 기술구를 선제하거나 내포한다. 또한 일상적 표현으로 ‘이것’이나 ‘저것’은 그 대상이 인격체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런 기술구적인 부분을 제외한 의미를 우리는 상상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지시사는 여전히 직접지시의 능력을 갖고 있다. 이런 탓에 지시사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직접지시되는 바로 그 대상과 같은 값을 갖는다고 여겨진다.

아래의 예시는 페리(John Perry)가 Frege on Demonstratives에서 제시한 것의 변형이다. 당신이 <인간오성론>의 저자 데이비드 흄이라고 하자. 그런데 어느날 당신이 기억을 잃었다. 기억을 잃은 뒤에도 철학적 사유를 하는 버릇이 남아있는 탓에, 당신은 언어 능력을 회복하자마자 도서관에 가 여러 책을 읽었다. 어느 날은 <인간오성론>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당신의 생각과 꼭 같은 주장을 하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제 당신에게는 <데이비드 흄이 ‘인간오성론’이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했다>라는 지식이 있다. 그런데 당신이 곧 데이비드 흄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나>는 ‘인간오성론’이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했다>라는 지식을 가질 법도 하다. 그러나 당연히도 그런 지식은 획득되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당신은 망상에 빠져 <인간오성론>의 저자와 당신을 동일시하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인간오성론’이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했다>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이 순전히 그의 믿음일 뿐, 그의 지식의 내용이 아니라고 생각할 법하다. 그의 믿음은 정당한 방법으로 얻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변형한) 흄 사례는 두가지를 말해준다. 1) 지시사의 의미가 오로지 지시되는 대상이라는 주장은 흄 사례를 해명할 만큼 보강되어야 한다. 2) 자의식과 같은, 지시사의 대상에 관한 의식에 특정한 믿음을 갖는 것만으로는 지시대상에 대한 지식을 얻는 충분한 조건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지시사에 관해 둘 중 하나의 주장을 지지할 수 있다.

지시사의 의미가 오로지 지시되는 대상뿐이라고 주장하자. 그러나 이 주장이 정당하려면 어째서 흄 사례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시사가 특정한 함수에 따라 정의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함수를 정교히 설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정도로 어려운 것이라면 애초에 우리가 그런 표현을 틀리지 않고 잘 사용한다는 사실을 정당화할 수나 있는가? 두 선택지를 모두 배제하고 지시사가 오로지 화용론적으로만 기능한다고 해 보자. 그럼에도 우리는 지시사를 통해 어떤 대상을 특정하지 않는가?

혹자는 이쯤에서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전혀 지시사의 분석이 철학적으로 중요한 이유를 모르겠다. 그런 것은 전부 말놀이의 문제로 넘기는 것이 낫다.” 글쎄, 나에게는 그렇지 않아 보인다. 나의 직관으로는 지시사의 문제가 오로지 언어철학적인 맥락에만 놓인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지시사의 문제는 세계와 주체가 이어지는 모호한 메커니즘과 관련해 큰 통찰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말하자면 지시사는 <분절되지 않은 세계를 언어로 양화하는 과정의 전언어적前言語的 표현>인 것 같다. 지시사는 그 대상 자체를 지시하는 지표적 표현일 터인데, 이 표현은 언어적으로 환원되기 이전의 세계를 전제하면서 동시에 양화된 세계만을 해석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지시하는 방식이 완전히 자의적이지 않다는 것, 다시 말해 직접지시의 대상이 지시하는 언어적 표현과 모종의 관계를 이미 맺고 있다는 것이 지시사의 미묘한 부분이다. 즉 지시사는 언어와 비언어 사이에 걸쳐 있다!

셋.

어떤 사실(나는 ‘사건’이나 ‘사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은 그것의 원자적 요소들로 구성된 듯 보인다. 예컨대 여러분은 스스로가 방금 겪은 일을 “나는(우리는) 방금 여정의 글을 읽고 있었다”라는 식으로 묘사할 수 있다.

이 사실을 구성하는 것은 여러분이 있던 세계와, 여러분이 무언가를 읽은 시간과, 그 안에서 일어난 <a가 b를 읽다>와, a와 b에게 각각 배당된 “나”=여러분 그리고 “여정의 글”=이 글이다. (조금 더 엄밀히 말하자면 이렇게 단순히 분석될 것은 아니긴 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분석에는 적어도 두가지 문제가 있다. 1) 우리의 인식 대상, 즉 어떤 사태에 있어 그러한 원자적인 대상들이 주어지는가? 그리고, 2) 어떤 명제가 사실에 의해 반증될 때 무슨 일이 있어나는가?

(오해를 피하기 위해 − 나는 이 두 질문을 하며 이른바 ‘논리적 원자론’이라고 불리웠던 러셀-비트겐슈타인의 이념을 부활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형이상학적인 전제를 두려는 것은 더욱 아니다. 오로지 나는 우리가 어떤 사실을 묘사할 때 그것의 구성요소를 분명히 분별할 수 있다는 일반적 믿음에 비추어 이야기하고 있다.)

두번째 질문을 좀 더 분명히 하자면 이렇다. 내가 어떤 명제를 믿는다고 하자. 예컨대 나는 <어떤 x에 있어, 그 x가 단현이라면, 그 x는 흡연자이며, 남자이고, 한국인이다>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일상적 진술로는, “나는 단현이 한국인이며, 남자이며, 흡연자임을 믿는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명제를 거짓으로 만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 보자.

이 믿음에 있어 누군가가 한 남자를 데려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 보아라, 여기에 이 사람은 단현이지만 한국인이며 동시에 남자이며 동시에 흡연자이지는 않다. 당신의 믿음은 틀렸다.” 나는 이 때 i) 그는 단현이 아니라고 할 수 있고 ii) 나의 믿음이 그릇되었다고 할 수도 있으며 iii) 당신이 보여준 것이 나의 믿음을 반증하지 못한다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i과 ii와 iii은 동시에 일어나지는 않으며, 우리는 그 중 하나를 선택하여 그에게 답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기에 나는 이렇게 답할 수 있는가?

하나, 원자적 대상이 사태 자체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어떤 사태가, 또는 현행적인 사건이 주어질 때에 그것은 앞서 예시로 든 <a가 b를 읽는다>와 같은 형태를 띈다고 확언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한 순간에 하나의 사건을 동시에 느끼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우리에게 감각 기관이 복수로 존재하므로 시간차가 생기고, 이는 하나의 사건이 동시에 느껴진다는 주장의 반론이 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오로지 하나의 감각에 대해 하나씩의 기관만을 갖는 사람을 생각해 보라. 그는 여전히 하나의 사건을 동시에 지각하면서도 <a가 b를 읽는다>라는 사실을 추론해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순간에 하나의 사건(‘이것’)만을 느낀다. 그러나 분명히 어떤 것은 세계에 이미 분리된 채로 존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a가 b를 읽는다>라는 방식으로 해석-단현의 말로는, ‘기억’-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지과학에서 발표되는, 어떤 대상을 볼 때 이미 그것을 구분된 대상들로 해석하고 그 대상에게 초점을 맞춘다는 식의 연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둘, 우리는 왜 특정한 요소를 축 삼아 믿음의 내용을 수정하는 것일까? 앞서 말했듯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관해 반증사례가 될 수 있는 어떤 사례를 접했을 때 그 믿음을 포기하지만은 않는다. 우리에게는 i과 ii와 iii의 사례가 모두 있고, 그 중 하나만을 택해 믿음 중 하나를 포기한다. i에서는 상대의 믿음이 그릇된 것임을 지적하고, ii의 경우에는 내가 기존에 갖고 있던 믿음이 포기되며, iii은 믿음의 반증에 관한 하나의 믿음이 포기되는 경우이다.

그런데 i의 경우 누군가가 다시 “아니다, 이 사람이 단현이다”라고 반론할 수 있다. ii의 경우에도, 반론자가 나에게 장난을 치는 것이며 저 사람은 여전히 단현이 아닐 수 있다고 의심할 수 있다. iii의 경우는 내가 순전히 독단에 빠진 것이라는 반론을 받을 수도 있다. 정말로 우리가 셋 중 하나의 선택을 할 때 확실한 믿음을 기반에 두는가? 그렇다면 대체 그런 믿음이 어디에서 정당화되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 우리가 사실이 아닌 사태만을 지각한다는 주장을 승인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사실은 오로지 기억 차원, 믿음 차원에만 있는 명제적 대상에 불과하다. 심지어 그 대상은 나의 회상을 통해 구성된다고 주장된다면, 사실이란 일정 부분 이상 주체 의존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아론적인 주장은 대화를 통해 사실이 공유된다는 아주 소박한 사실을 해명하지 못한다.

단현이 그의 글 말미에서 암시한 것을 다시 추적해 보자. 사실 없이는 사건이 기억되지 못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사실은 주체 밖에 정말로 있으며, 주체는 기억을 통해 그 사실을 가져온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사실”이란 대체 어디에 위치한다는 말인가? 그런 대상이 실존한다고 성급히 승인하는 것에는 부조리한 면이 있다. (프레게주의적 명제에 대한 비판이 바로 이 부조리함을 향한다.) 우리는 급진적 내재주의와 급진적 외재주의 사이의 어딘가에서 만날 필요가 있다.

종합.

어떤 실재가 있다고 하자. 그것이 어떻든 중요하지 않다. 어찌 되었건 우리는 실재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인다. 더군다나 그 태도란 상당히 일관되어 보인다. 어떻게 실재에 대한 태도가 일관되어 보인다고 주장하는 것이 정당하냐고? 우리가 어떤 사태를 기억하면서 그것에 관한 사실을 유사한 방식으로 공유한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어떤 사태에 관해 각자는 분명 다른 사실을 갖는다. 그렇기에 하나의 사태에 관해 사소하게 엇갈리는 여러 증언들이 분명 등장한다. 그러나 그 증언들은 그 사실을 서로 유사한 방식으로 나눈다. 유사성은 가까운 공동체 내에서 더 유사하며, 개인 단위로 내려갈수록 유사성은 차츰 소실된다.

아마도 전자를 ‘사실’에 더 가까운 것으로, 후자를 ‘기억’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어찌 되었든 사실의 구성은 자의적이지 않다. 이 사례는 사실의 전적인 외재성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외재적인 것은 사실이 아닌 사태이다. 오히려 하나의 사태에 대한 여러 기억, 그리고 여러 사실들이 엇갈린다는 점에서 사실과 기억은 공동체와 개인에게 의존한다.

질적 차이가 선제되지 않는다면 위에서 제시한 전언어적 현상은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세계가 언어 이전에 양화되어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위의 현상은 일관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 하지만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정교한 그런 세계가, 즉 소박한 실재론자들이 상상하는 그런 세계가 정말로 우리에게 놓여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최소한 우리가 지금껏 보았듯 정교하게 구성된 체계 하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여기에서 수수께끼를 던지며 우리의 글을 열자. 주어진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ㄱ) 어떤 일이 일어나고, ㄴ) 그것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해석하며, ㄷ) 유사한 해석의 양상은 어떤 방식의 해석을 하도록 이끄는 지침들이 있다고 암시한다.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유추할 때, 사태에서 사건으로의 전환, 즉 경험 자체에서 경험 대상들로의 분절은 어떻게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한가? 또 그 해명은 직접지시하는 표현들, 즉 지시사가 왜 그렇게도 별난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해명할 수도 있는가? 나의 질문은 이 수수께끼로 나아가야 했다.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One thought on ““그런 실재가 있기나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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