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필요할지도 모를) 서두

그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이 한 문장을 쓰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날 퇴근을 한 시간 남짓 남겨두었을 무렵 회사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포털에 검색해 보고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고인에 대해 평소 어떤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지만 그 소식은 충격이었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가 보았다. 연예인 아무나 하는 거 아닌가봐, 아 너무 슬프다, 내 건너편에 앉은 사람들이 조금도 슬프지 않은 어조로 말했고 곧이어 그와 관련된 농담에 깔깔거리고 웃어댔다. 그 소리를 들으며 누가 더 자극적으로 쓰는지 경쟁하는 듯한 헤드라인을, 운구차를 찍으려고 아우성치는 기자들의 사진을, 혐오와 조롱이 난무하는 뉴스 댓글란을 보았다. 한 개인에게 대중과 언론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실감했고 새삼 끔찍한 환멸감을 느꼈다. 결국 집에 갈 기운도 없어서 야근한 다음날 팀원 두 명에게 이 얘기를 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너무 감정이입하지 말아요, 누구나 슬퍼해야 되는 건 아니에요, 굳이 슬퍼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 입장도 이해해 보는 것도 필요해요. 나는 슬픔보다는 분노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한 사람이 죽어야만 했던 이유와 그 죽음이 소비되는 방식의 폭력성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곧이어 무력감이 밀려왔으므로 나는 침묵을 택했다. 고분고분하게 네, 그러네요, 라고 목소리를 죽여 논쟁을 피하고 유난스러운 사람에서 벗어나는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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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사태에 대하여,

행해지는 다양한 방식의 대응이 있다. 무감해지는 방법이 있고, 조롱하는 방법이 있다. 침묵하는 방식이 있는가 하면, 문제적인 방식으로 끊임없이 발화할 수도 있다. 아마도 박민정은 10년 전 「생시몽 백작의 사생활」로 등단한 이래, 문단의 최전선에 서서 가장 성실하게 혹은 절박하게, 여성에 가해지는 구조적인 성폭력에 대해 목소리를 내 오고 있는 작가일 것이다. 정신적/육체적 착취를 당하고, 유산을 강요받거나 성적 루머에 시달리는가 하면, 여자라는 이유로 해외 입양을 강제당하는 등 다양한 양상의 구조적 폭력을 그렸던 박민정은 최근 불법 촬영물 문제를 다룬 「모르그 디오라마」에서 그 어떤 과거작보다도 절망적인 표정을 보여줬다. 

나는 상담사에게 대답했다.

나는 죽었던 적이 있어요.

(나는 발가벗겨진 채 사진을 찍혔고) 그때 죽었어요.

박민정, 「모르그 디오라마」, 『2019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2018.

세기말의 분위기가 팽배했던 어린 시절, ‘나’가 겪었다고 서술되던 임사 체험은 결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벗겨진 채 강제로 사진을 찍혔던 성폭력의 기억이었음이 드러난다. 이쯤에서 박민정이 2013년 발표했던, 어머니가 죽은 후로 모든 것이 망가져버린 여성의 삶을 그린 「굿바이 플리즈 리턴」의 결말을 상기해볼 수 있다.

다시는 망하고 싶지 않다. 작게는 망해도 크게는 망하고 싶지 않다. 나는 조용히 살고 싶다, 라고 현실처럼 생각한다. 

박민정, 「굿바이 플리즈 리턴」, 『실천문학』, 2013.

두 결말의 온도차는 어디서 비롯되었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더는 망하고 싶지 않다고, 다만 살고 싶다고 생각하던 박민정의 소설 속 화자는 이제 오래 전 이미 죽어버린 모습으로 바뀌어 돌아왔다. 그 이면에 놓인 것은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의 시체 공시소, 20세기 말을 지배했던 종말론적 감각, 그리고 두 세기를 뛰어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혹은 더욱 극단적인 방식으로 여성의 신체에 버젓이 가해지는 폭력이다. 오늘날 세기말이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낯섦과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세기말의 분위기를 소환해야만 했던 작가의 절박한 절망감을 생각한다. 한 작가가 살고 싶어 하던 화자를 그렸던 5년 전부터 이미 한 번 죽었다고 여기지 않고서는 도저히 삶을 살아낼 수 없는 현재의 화자를 그리기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여성들이 숱하게 느껴왔을 좌절감에 대해 생각한다. 작가의 말마따나,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아닌가.’

웹툰 작가들이 무성의하게 처리해놓은 모자이크조차 되어 있지 않은, 여자의 성기가 드러난 영상이. 그것도 몰래카메라 영상이었다. 정확하게는 비동의 유포 성적 촬영물. 그중 세 건은 정황상 강간으로 추정되었다. 사이트는 잠시 접속이 불가능할 정도로 방문자가 폭주했다. 로그인도 성인 인증도 필요 없는 사이트에 범죄 영상이 날것으로 올라왔으니 그날만큼은 온갖 매체에서 우리 회사를 다뤘다. 포털○○코리아 음란물 대량 업로드 사태……. 대부분의 매체에서 뽑은 제목이 그랬다. 누군가 새벽에 업로드한 동영상은 몇 시간 동안이나 방치되었고, 삭제된 후에도 이미 널리 유포되고 있었다. 

박민정, 「모르그 디오라마」

「모르그 디오라마」의 분위기가 유독 암울한 까닭은 어쩌면 소설 속 폭력의 주체가 개인이 맞서기에는 너무도, 다층적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비동의 유포 성적 촬영물’이라는 성폭력 문제에서 가해자는 비단 여성을 촬영한 한 개인 남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여성이 강간을 당한 범죄 현장의 영상은 일본 AV와 다를 바 없는(‘남자 직원들은 이게 품번이야 뭐야, 뇌까렸는데 나는 그때 품번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그저 자극적인 영상으로써 대중에게 소비된다. 영상이 유통된 포털 회사 사람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여성이 강간당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필이면 ‘어른들 물건’이 유출되었기 때문이다(‘성기 노출만 아니었더라도 이런 개망신은 없었을 텐데, 부장은 줄담배를 피우며 뇌까렸다. 마케팅팀 과장인 입사 동기는 하필이면 왜 딱 그 부분, 그 부분이 클로즈업된 영상들에 꽂힌 거야, 어린놈의 새끼가, 하고 말했다.’). 나아가 여성의 강간 영상을 ‘음란물’로 치부하는 언론과 경찰(‘형법 제243조 음화 반포의 죄, 그보다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음란물 유포행위 처벌규정,’)까지.

중학생 소년이라는 개인에서 특정 단체(회사), 불특정 다수(대중), 그리고 언론과 공권력에 이르기까지,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스펙트럼은 아득할 만큼 넓고 거대하다. 철저하게 구조화된 이 스펙트럼에서 강간이라는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은 철저히 소거되고, 피해자 여성은 다만 ‘음란물’이라는 쾌락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이 사건을 ‘범죄’로 인지하는 작중인물은 오로지 ‘나’와 동기, 두 사람뿐이다(“이 영상은 전부 스너프물일 뿐이었다. 이건 포르노가 아니었다”, “그래도 이건 몰카, 아니 범죄물이잖아요.”). 그리고 이들은 둘 다 성범죄의 피해자였다는 과거를 가지고 있다.

사실, 나도 성범죄 피해자야.

동기가 뜬금없이 고백을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나는 마른안주를 손으로 휘저으며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물었다. 언제? 어디서? 아, 이런 건 물어보면 안 되는데. 동기는 덤덤하게 말했다. 누구 하나 성범죄 피해자 아닌 사람 있을까?

나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나는 아닌데?

동기는 입꼬리를 올리며 그래, 내가 말실수했다, 대화를 마무리했다.

나는 아니었다.

나는 그날 잠깐 죽었을 뿐이었다. 일시적으로 눈이 멀었고.

박민정, 「모르그 디오라마」

소설에서 ‘나’는 성폭력 피해 사실을 털어놓는 동기에게 어쩌면 실례가 될 수 있는 질문을 한다. 언제? 어디서? 다소 섬세하지 못한 이러한 태도는 자신이 성범죄 피해자가 아니었음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기저에는 끔찍했던 기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일종의 방어기제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작가 박민정이 흔히 피해자에게 부여되는 ‘선량한 피해자’ 프레임을 거부한다는 데 있다. 성범죄를 당했다는 동기에게 자세한 정황을 묻고, ‘몰카 피해자’를 착취하는 저질 웹툰도 가상이라는 이유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나’의 모습은 마냥 선량하고 윤리적인 피해자상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평범한 수준의 윤리의식을 지닌 ‘나’와 같은 사람도 성범죄의 피해자였을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누구도 성범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작가의 문제의식이 더욱 선명해진다. (완전무결하지 않은 피해자를 그리는 작가의 이러한 서술방식은 「생시몽 백작의 사생활」의 J, 「리얼타임」의 J, 「세실, 주희」의 주희 등 여러 인물들에게서 이미 포착되어 왔다.) 

1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그날의 수업을 잊지 못한다. 파리 시체 공시소 모르그의 개방……. 신원 미상의 시체를 공개하여 유족을 찾는 일이 목적이었으나, 결국 파리 시내의 가장 즐거운 구경거리가 되어버렸던 모르그 디오라마에 대하여. 그저 눈을 감은 듯 깨끗하고 아름다운 소녀의 시체를 두고 “그 소녀는 왜 죽었을까?”를 집요하게 물었던 사람들. 교수는 미국 유학파였는데, 당시 CSI 사진감식반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때마다 나는 모르그 디오라마를 떠올렸어요. 빨랫줄에 널려 있듯 널린 시체를 구경하는 것만이 유일한 스펙터클인 당시 사람들의 마음은 대체 뭐였을까.

박민정, 「모르그 디오라마」

결국 단 하나의 질문으로 좁혀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달라졌나.

시체가 진열되어(‘공시소公示所’에 쓰인 ‘시示’의 기본 뜻은 ‘알리다’가 아닌 ‘보이다’이다. 또한 ‘모르그morgue’라는 용어는 ‘응시하다morguer’라는 프랑스어 고어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단어가 이미 함의하고 있는 시선과 폭력성의 징후를 생각해보자.) 선정적인 구경거리이자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되던 19세기 말과 강간 촬영물이 날것으로 유통되는 오늘날. 언론과 국가가 성범죄 영상을 음란물로 규정하는 현대의 폭력의 기원은 국가가 대중에게 시체 구경을 유희로 허용하고 언론이 이를 앞다투어 보도하던 19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눈을 감은 채 대중의 관음의 대상이 되었던 소녀의 시체와 눈이 가려진 채 나체 사진을 찍혔던 ‘나’의 신체는 시선을 빼앗긴 상태 그대로, 이백 년의 시간을 초월하여 대중의 시선 앞에 나란히 병치된다. 개인, 대중, 언론, 그리고 국가라는 공동의 가해-권력에 의해 끊임없이 자행 내지는 재생산되는 폭력의 유구한 역사로부터 우리는 사실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종말 이후의 서사란 이토록 잔인한 것이었나. 절망적인 와중에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이 있다면 다름아닌 작가가 2017년 발표한 다음과 같은 수상 소감일 것이다.

오랫동안 나는 내 소설이라는 물건이 나 자신의 지극한 취미이거나 과업을 넘어 과연 세상에 필요한 것일까에 대해 고민해왔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모두 초고를 완성하는 단계에서 이 글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할지 모른다. 나의 고민은 그보다 훨씬 검소한 단계에서 지독하게 깊어졌다. 어쩌면 나약한 인간의 정념일 뿐이거나 그 현학적 취미의 전시가 아닐까. 전부 맞다. 그러나 이제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히 확신한다. 필요하다. 내 소설 같은 소설도 세상에 필요하다.

박민정,  「수상 소감」, 『문학과사회』,  30(1), 2017.

요컨대 지금-여기의 우리가 이백 년 전보다 전진한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시대적으로 당면한 폭력의 존재를 분명하게 깨닫고 맞서는 것. 나 역시 어린 시절 가졌던 순진한 환상을 어느 순간 폐기해야만 했듯이, 글로써 세상을 바꾼다는 건 어쩌면 한없이 요원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침묵하는 대신 세계에 대한 어떤 확신을 갖고 끝없이 쓰는 것, 그리고 그러한 글들을 읽음으로써 단단한 연대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희망이 아닐까. 비록 종말 이후의 세계일지라도, 그리고 그것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느린 발걸음이라고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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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변명을 위한) 부기

 「모르그 디오라마」를 처음 읽은 지도 사실 꽤 오래되었다. 처음 읽었을 때에는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쓰지 못했고 빈약하기 그지없는 글을 간신히 써낸 지금도 어떤 말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어떤 말이든 해야겠어서 썼다. 더 섬세한 사유와 언어가 수행되었어야 했는데 능력상 그리고 여건상 많이 부족했다. 고인을 이야기하며 불법 촬영물을 다룬 이 소설로 넘어가는 것은 어쩌면 무리한 시도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조심스럽다. 이름을 직접 언급하는 것 역시 다른 종류의 폭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지막 순간에 첫 문장을 고쳤다. 아직도 이렇게 갈 길이 멀었다. 다만 어떠한 형태로든 폭력을 가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부족할지언정 부적절한 글을 쓰는 사람은 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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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하
choha@yonsei.ac.kr
나, 너, 그리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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