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라는 물음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과 겹쳐서 나타난다. 자신과 타인의 기억을 불러내고 그것들을 서로 맞춰보고 증거를 찾아낸다. 내가 스스로 ‘나’라는 말로 불렀던 것이 텅 비어있었다는 것, 이미 오래전부터 막연히 느끼고 있었던 그것을 다시 마주하는 순간은 ‘내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가’에 도달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소포클레스의 이 위대한 비극 작품에서는 그 물음에 대한 답으로 서술 — ‘한 남자가 자신의 친부를 살해하고 친모와 결혼하여 자식을 보았다’ — 이 제시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오이디푸스 자신-자체가 주어진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는 일어난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 그는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라고 말하는 것을, 이오카스테와 같이 부정(否定)을, 곧 자살을 택하는 것을 거부한다. 오이디푸스는 긍정 바깥에 아무것도 없는 긍정이다.

오이디푸스는 단지 자기를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된다. 자기가 됨을 직면하고 자기가 됨을 당하며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자기가 됨을 받아들인다 — 즉 그는 자신의 눈을 찌른다. 오늘의 오이디푸스(역사적 오이디푸스가 아니라 무대에 올려진, 육화된 “그”, 오이디푸스)는 사건의 다른 이름이다.
세 번의 신탁은 한 인간을 사로잡는 운명의 덫에 관한 은유가 아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에서 신탁은 초월적인 것, 초월적 기호로 주어져 있지 않다. 앞선 두 개의 신탁은 각각 이오카스테와 오이디푸스의 입을 통해 드러나는데, 이는 자신들의 행동을 설명하고 정당화하기 위해서이다. 신탁은 아직은 불확실한 것,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 신탁, 오이디푸스가 크레온을 시켜 받아온 그 신탁은 사실이 아닌 당위에 관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오이디푸스 자신이 그것을 사실로 구현한다. 오이디푸스가 추방되는 것은 (그가 정말로 테바이를 떠나기에 앞서) 그가 자신의 눈을 찌름으로써이고, 그와 동시의 세 개의 신탁이 비로소 이루어지고 상호 정합되는 관계를 맺는다. ‘라이오스의 아들이 라이오스를 죽임’과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함’과 ‘선왕을 죽인 범인이 오이디푸스임’이 동시에 맞물리며 사실로 생성한다(이전까지 세 개의 신탁은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이었다). 일어난 사건들은 신탁에 의해 강제된 것이 아니라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 눈 멀은 채 — ,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일어난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른 채 시비 붙은 행인을 죽이고 왕좌에 딸려있던 왕비를 취한다. 그러므로 신탁은 운명도 필연도 아니다. 다만 신탁은 사건에 의해 솟아난 사실, 사건이 죽어서 된 사실을 가리킨다. 신탁은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는 기호일 수는 있지만 특정한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끔 힘을 발휘하는 기호는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숨겨진 신탁이 하나 더 있다. “오이디푸스는 눈먼 자이다.”라는 신탁은 오이디푸스 자신이 제기하여 품고 있던 것이다. 그것은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름으로서 사실로 생성된다. 오이디푸스가 오이디푸스가 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이 죽어 하나의 사실(그리고 세 개의 신탁-사실)을 펼쳐 보인다. 그 사건의 이름은 오이디푸스이다. 따라서 오이디푸스가 자기가 됨은 이전의 오이디푸스는 오이디푸스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며,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것이 달라졌다는 것, 혹은 오이디푸스가 비로소 우리가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으로 가리키는 자(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자)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마리가 되는 사실들을 밟고 나아가서 사건에 도달하는 것, 타자의 자리였던 그 사건에까지 가서 자신이 그 타자가 되는 것, 일어난 모든 것이 되는 것을 뜻한다. “오늘이 그대를 낳고 그대를 죽일 것이오.”라고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를 가리켜 말한다. 이것은 시간의 초월적인 힘이 오이디푸스를 오직 오늘 속에 가둬 놓을 것이라는 예언이 아니다. 그것은 오이디푸스를 낳는 것, 곧이어 그를 죽이는 것은 없다는 뜻이며 따라서 — ‘오늘’은 ‘스스로’라는 말을 대신하는 수사에 불과하므로 — 오이디푸스는 처음으로 오이디푸스가 되며 또 되자마자 오이디푸스과 결별한다는 뜻이다. 오이디푸스는 전대미문의 것, 미증유의 것, 입에 담을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붙여진 이름이다.
 

2.

우리는 ‘과거’를 돌아볼 때 사실들만을 바라본다. 오직 사실들을 통해서만 우리는 ‘과거’를 생각할 수 있다. 사건들은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자리를 잇따른 사건들에 내어주고는 죽는다. 사건들은 죽어서 사실들이 되고 사건들이 죽어서 쌓이는 바로 그곳에서 사건들이 태어난다. 문장은 오직 사실들만을 잡아낼 수 있다. 사건은 어떻게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것, 즉 사실이 될까? 사건을 사실로 변이하게 하는 효과 — 여기에 모든 것이 있다. 사건의 연쇄를 일으키는 것, 사건을 지속시키는 것 혹은 사건을 종결시키는 것, 사건들이 지나간 자리에 조건을 만드는 것이 또한 어떻게 사실을 만드는가?
 

3.

사건이란 무엇인가? 미시적인 의미에서, 사건이란 가장 개별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저 일어남이다. 일회적이며, 다시 일어날 수도 돌이킬 수도 없고 필연적이지도 우연적이지도 않은, 인과라는 투박한 관념이 잡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닌, 그저 일어나는 것. 그것은 우리들의 오늘에 불쑥 나타난 ‘하필’이다.
그러나 또한 사건은 맞닥뜨리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겪는 것은 감각들이 아니라 사건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은 죽은 사건들, 즉 사실들이다. 사건들에 뒤이은 사실들에 의해 우리는 여전히 사건들을 겪고 있다. 우리는 경험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경험한다. 기억의 ‘내용’ 같은 것은 없다. 기억함만이 지속된다(지속된다는 것은 또한 언젠가 있을 단절을 함축하는 것이다).
사건은 감각적인 것들로 환원되지 않으며, 사실들로 환원되지도 않는다. 사건은 일어남, 즉 발발하는 것, 터지는 것, 닥치는 것……이지 일어난 것의 내용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에게 배정되어 있다. 엄밀히 말해, 우리가 사건을 경험한다고도 할 수 없다. 사건은 벌어지며, 우리를 통과하여 휩쓸고 지나간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경험하는 것은 그 직후이다. 경험한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것이다. 사건과 자기 — 혹은 자기보존적이고 언어적인 덩어리 — 간의 화학반응, 그리고 그 부산물들이 바로 기억이며, 우리가 경험하는 것 — 겪고, 짊어지고, 지탱하고, 거부하거나 피하고, 쫓기고, 혹은 바꾸고, 흩날려 보내고, 다시 돌아와서 찾는 것 — 은 바로 이것, 기억들이다.
 

4.

기억들은 보잘것없이 희미하고 기억한다는 것에는 많은 허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억을 인출하는 데 너무나도 익숙하며 기억들의 연속성 저 끝에 자기 자신을 갖다놓는 일에 너무나도 능수능란하여 기억한다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기억하고 사는지조차 묻지 않는다. 파트릭 모디아노Patrick Modiano의 마술적인 글쓰기의 비법은 기억함을 아주 낯설고 힘겨운 것으로 만드는 정교한 가정들과 서술들에 있다. 그에게 공쿠르상을 안겨준 작품(『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1978) 속에서 문장들은 한 사람을 휩쓸고 지나간 사건과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 사이의 거리를 가리켜 보인다. 타인의 기억들에서 얻어낸 오래된 사실들과 증거들, 그 와중에서 알아보아야 하는, ‘나’일지도 모르는 이름의 남자가 남긴 자취들과, 점멸하듯 깜빡이는 오늘의 ‘나’의 희미한 기억들 사이의 거리를.
“이것이 과연 나의 인생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 속에 미끄러져 들어간 어떤 다른 사람의 인생일까요?”(김화영 옮김, 문학동네. p.247)라고 화자인 기 롤랑은 팔 년간 흥신소에서 같이 일한 동료 위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묻는다. 그러나 그 물음은 정말로 의구심을 제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페드로는 정말 ‘나’일까? 중요한 것은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린 기 롤랑과, 그가 지난한 추적의 과정 끝에 찾아낸 페드로, 프레디와 게이의 친구였으며 드니즈의 연인이었던 페드로 맥케부아가 같은 사람인지가 아니다. 저 물음은 다만 ‘내가 나라는 것, 나였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일까요?’라는 고백에 가깝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첫 문장부터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만큼이나 빨리 저녁 빛 속으로 지워져버리는 것은 아닐까?”라는 마지막 문장에 이르기까지, 텍스트의 밑에 어렴풋이 깔려있는, 그러나 확고한 박자로 반복되며 변주되는 저음의 왼손 반주는 다름 아닌 ‘우리가 ‘나’라는 말로 가리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물음이다. 그래서일까, 간결하고도 명료한 문장들이 그려내보이는 한 남자의 탐색과 추적의 여정은 모호하고 아득하다. 마치 발 디딜 땅 없이, 붕 뜬 채로 걷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비탈길 가에 서 있었다. 또다시 그는 주머니에서 파이프를 꺼냈고 어떤 이상한 작은 소도구로 그것을 소제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태어났을 적에 내가 얻은 그 이름을, 내 생애의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불렀던 그 이름을, 어떤 사람들에게 내 얼굴을 환기시켜주었든 그 이름을 스스로 되뇌어 보았다. 페드로. (p.101)
나는 뒤로 돌아선 다음 한동안 강둑 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달리는 자동차들과 센 강 건너편, 샹 드 마르스 근처의 불빛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쩌면 저기 공원가의 어느 조그만 아파트 안에 내 삶의 그 무엇인가가, 나를 알았던 어떤 사람, 아직도 나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살아남아 있는지도 몰랐다. (p.251)
그러나 이 소설은 실존의 가벼움에 바쳐진 작품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긴박하게, 젊음과 열정을 거쳐 달려 나간 후에 남는 것이 이토록 보잘것없음을 환기시켜주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문장들이 곳곳에서 빛나고 있음에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사라져버린 기억, 잃어버린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살아보는 일에 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인 ‘나’는 처음에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다가, 주어진 작은 실마리에서부터 출발해 한 이름을 찾아내고, 그 이름을 아는 사람들을 찾아가 묻고, 사진들, 오래된 신사록에 쓰인 정보들, 흔적들과 증거들을 찾아 모으고, 천천히, 위태롭게, 기억을 일깨워내고, 이내 한때 자신의 이름이었던 낯선 음절들을 받아들이고, 그리하여 어렴풋이 드러나는, 페드로라는 이름의 한 남자의 지난 삶을 다시 산다. 마치 타인인 것처럼 추적하고, 복원하고, 다시 살아본다. 그리하여 ‘나’는 기억 속에서 프레디, 게이, 그리고 드니즈와 함께 므제브로 떠나 그곳에서 산다. 그 모든 사건들을 거쳐, ‘나’는 모든 것을 집어삼킨 바로 그 사건에까지 기억을 몰고 간다. 므제브에서 만난 베송과 브레데가 국경을 넘는 일을 중개한다는 것을 알게 된 나와 드니즈는 마침내 국경을 넘어 스위스로 가기로 결정한다. ‘나’는 그들 브로커에게 인당 오만 프랑을 건네고 차에서 내린다. 브레데와 드니즈가 차로 더 이동하고, ‘나’와 베송은 그들과 갈라져 국경 건너편에서 다시 만나기로 한다. ‘나’는 베송의 뒤를 따라 걷는다.
갑자기 그는 국경이 가까워지고 있으므로 자기가 정탐을 해보고 오겠노라고 나에게 말했다. 그는 나에게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십여 분이 지나자 나는 그가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 나는 드니즈를 이런 함정 속으로 끌어들였단 말인가? 나는 사력을 다하여, 브레데가 그녀 역시 버릴 것이며 우리 두 사람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는 생각을 물리치려고 애썼다. (중략) 나는  여러 시간을 걷고 또 걸었다. 이윽고 나는 눈 속에 드러눕고 말았다. 나의 주위에는 오직 하얀 빛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p.240)
 

5.

기억한다는 것은 곧 사건을 복원하는 것이다. 사건들이 남긴 사실들을 주워서 그것들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가리킬 수 있도록 배열해보고, 그렇게 하나의 사실을 또 얻고, 그리하여 정황들 속에서, ‘어떤 한 일이 과연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들여다봄으로써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를 헤아려 보는 것, 사건들이 지닌, 그리고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발휘해온 을 뒤늦게 입증해 보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사건을 손에 쥐게 되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그것은 이미 우리의 손아귀를 벗어나 있다. ‘나’라고 부르는 것이 늘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듯이.)
 

6.

사건은 ‘~에게 일어난’ 사건이다. 하나의 사건이 여러 다른 경험과 관계 맺는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은 오직 한 경험과만 관계 맺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사건은 관측되는 것이 아니라 참여되는(개입되는) 것이다. 초월적인,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관측자는 있을 수 없다. 나는 나에게 일어난 사건의 일부이다. 아니, ‘일부’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 나는 나에게 일어난 사건들이다. 아니다, ‘이다’라는 기술은 초월적으로 들린다. 그러므로 다시 고친다. 나는 나에게 일어난 사건들로서/써 나로 된다.
그러므로 사건은 이중적으로 고유한데, 첫째로 사건 자체의 불가역적이고 재발 불가능하고 따라서 가장 개별적임으로부터 그러하고, 둘째로 사건이 오직 하나의 경험을 끌어들여 개입시키고 생성한다는 데에서 그러하다.
만약 말해질 수 없는 것, 기호가 작동하게끔 하지만 결코 기호로 환원될 수는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건 —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 이다.
 

7.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화자인 기 롤랑이 기억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사람이라면 존 밴빌에게 2005년 맨부커상을 안겨준 소설 『바다』의 화자 맥스 모든은 그야말로 기억의 달인이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그는 딸 클레어의 말처럼 “과거 속에서 사”는 사람이다. 기억함이라는 고된 작업으로 한 채의 집을 지어 그곳에 들어가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렇게 생생하게 자신의 유년을 되살릴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기억함의 불완전성 때문에 회상 중에 어느새 다른 순간으로 화면이 전환되고, 시간대가 약간씩 뒤섞이거나, 사람의 이름이 희미해지거나 사실들이 앞뒤가 안 맞게 혼동을 일으키고, 세월에 따라 기억 속의 공간들의 위치와 구조가 묘하게 변하기는 하지만 말이다.)『바다』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정말이지 기억하려는 노력만 충분히 기울이면 사람은 인생을 거의 다시 살 수도 있을 것 같다.”(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p.151) 밴빌이 구사하는 문장의 아름다움은 모디아노의 그것과는 반대편에 서있다. 모디아노의 책에서는 인터뷰들, 증거들, 문서들 — 화자의 감정이나 판단이 들어올 수 없는, 예컨대 오래된 전화번호부 같은 것들 — 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화자의 서술도 군더더기 없이 간명하다. 문장들은 쉽게 논리적, 인과적 관계를 만들지 않고 각각이 섬을 이룬다. 반면 밴빌의 화자는 나보코프의 화자처럼 혼자 길게, 계속해서 주절대고 자문해보고 너스레를 떨며 회상을 이어 나간다. 위선의 논리들 속에 교묘히 숨어 자기를 방어하지 않고,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파헤친다. 우리의 삶이 간단히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문체 또한 복잡 미묘할 수밖에 없다는 것처럼, 문장들은 이어지고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고, 꼬이고, 일렁이고 넘실거리듯 나아간다. 아마도 이 소설이야말로, 일어날 법도 하지만 내게 일어날 일 같지는 않은, 아주 독특한 ‘사건’을 중심으로 서사를 잡는 다른 많은 소설들에 비하자면, 그야말로 우리의 삶과 가장 닮아있고 그래서 가장 설득력 있는 텍스트일 것이다.
소설은 ‘나’의 어린시절 그레이스 가족이 여름별장으로 빌려서 묵었던 — 그래서 샬레 출신인 ‘나’도 놀러오곤 했던 — 하숙집 “시더스”에 ‘나’가 오십 여년 만에 와 짐을 풀면서, “과거가 내 속에서 두 번째 심장처럼 고동”(p.20)치면서 시작된다. 그레이스 가족을 처음 본 순간이 나오고 뒤이어 아내 애나가 의사로부터 시한부 선고를 받는 장면을 떠올린다. 이렇게 소설은 시작부터 끝까지 아주 오래된 기억, 즉 클로이 그레이스와의 기억과 비교적 최근의 기억, 즉 애나와의 기억을 나란히 전개해나간다. 현재 시점의 서술 또한  계속되므로 — 아내를 잃은 ‘나’는 클레어와 함께 시더스가 있는 동네에 와서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시더스에 방을 예약하고, 그곳으로 내려가 한동안 살다가, 클레어가 데리러 와 그곳을 떠난다 — 총 세 개의 시간대가 꼬여 있는 셈이다. 현재 시점의 서술은 물론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펼쳐진다. 클로이와 관련된 기억들은 대체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어진다. 애나와 관련된 기억들은 시간 순서대로만 정렬되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기억, 가장 혼란스럽고 아직 헤어나지 못한 기억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애나가 죽는 장면은 가장 마지막에 배치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는 애나의 죽음과 클로이의 죽음을 겹쳐 놓는다. 그제야 비로소 왜 ‘나’가 애나를 잃고는 아주 오래 전 유년의 한 시절을 보낸 동네로 ‘피난 와서’ 사는지 독자가 짐작할 수 있게 하려는 듯이.
왜일까. 왜 ‘나’는 아내를 잃고 아득한 과거 속의 상실을 떠올리는 것일까. 클로이 역시 어린 시절 ‘나’가 사랑에 빠진 여자였기 때문에 — 단지 그뿐일까.
삶, 진정한 삶이란 투쟁, 지칠 줄 모르는 행동과 긍정, 세상의 벽에 뭉툭한 머리를 들이대는 의지,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돌아보면 내 에너지의 많은 부분은 늘 피난처, 위안, 또 그래, 솔직히 인정하거니와, 아늑함. 그런 것들을 찾는 단순한 일에 흘러들어가버렸다. (중략) 숨겨지고, 보호받는 것.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었다. 자궁처럼 따뜻한 곳으로 파고들어 거기에 웅크리는 것, 하늘의 무심한 눈길과 거친 바람의 파괴로부터 숨는 것. 그래서 과거란 나에게 단지 그러한 은둔일 뿐이다. (p.62)
‘나’는 “과거 속에서 사시네요.”라는 딸의 말이 맞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가 시더스로 와서 “은둔”하는 것은 보호받기 위해서이다. 과거 속에 젖고 그 속에 숨기 위해서. 그렇지만 애나를 잃어버리고 클로이로 숨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보호해주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나’가 이 글을 쓰는 것을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텍스트 속에서 ‘나’는 바로 이 텍스트를 쓰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즉 ‘나’가 이 텍스트를 썼다는 것까지가 텍스트의 이므로, 우리가 텍스트를 읽을 때에는 바로 거기까지 읽어야 한다. 그저 과거의 향수 속에 숨으면 그만인 사람이 왜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글을 써가며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파헤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기억한다는 것, 이토록 필사적으로, 세밀하게, 때로는 휘몰아치듯이, 문장들의 집을 쌓아올리면서까지 기억한다는 것이란 곧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사투, 혹은 자기를 되찾으려는 작업이기 때문인 게 아닐까. 아니, — 이미 ‘자기’라는 것은 그것을 나와 함께 만들어 지탱했던 타인의 죽음과 함께 떠나버렸으므로 — 다시 한 번 더 자기가 되기 위한 작업,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처음부터 애나에게서 발견한 것은 “나 자신의 환상을 실현하는 한 가지 방식이었다”(p.201)고 ‘나’는 털어놓는다. 그것은 ‘나’가 애나를 사랑하지 않았다거나 — ‘나’는 “우리는 함께 행복했다. 아니, 불행하지는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룰 수 있는 것 이상이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 애나를 이용하기 위해 결혼했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애나와 함께함으로써 ‘나’는 ‘나’가 되고 싶은 자기에 근접할 수 있었다는 뜻이 아닐까. 물론 여기에는 출신 계급을 벗어나서 “계급에 구애받지 않는 계급”으로 편입하고 싶은 욕망 또한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인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애나가 나의 변형의 매개가 될 것임을 즉시 알아보았다. 그녀는 나의 비틀린 곳을 모두 바로 평 수 있는 놀이공원의 거울이었다. “왜 당신 자신이 되려 하지 않아?” 애나는 우리가 함께 지내던 초기에 세상을 파악하려는 내 서툰 시도가 안쓰러워 나한테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녀가 나 자신을 알라고 하지 않고 나 자신이 되라고 한 것에 주목하라. (중략) 그것이 우리가 맺은 협정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우리라고 규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짐을 서로에게서 덜어주기로 한 것이다. (p.202, 강조는 원문)
‘다른 모든 사람들이 나라고 규정하는 사람’이 아닌 ‘내가 되고자 하는 나’가 되는 것. 바로 그것이 이 소설의 화자인 ‘나’가 애나에게 빚진 것이다. 자기가 되는 것은 새로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며, 타자를 경유해서만 이룰 수 있었던 사건이다. ‘나’는 애나를 잃어버리고서야 다시 자신이 되고자 한 ‘나’라는 것에 대해 묻는다. 애나와의 기억을 클로이와의 기억과 나란히 펼쳐나가고, 마침내 애나를 잃어버림과 클로이를 잃어버림을 겹쳐 봄으로써 ‘나’가 도달하는 것은 ‘클로이의 죽음’이라는 사건이다. 클로이 또한 애나와 마찬가지로, 그 시절의 ‘나’에게는 “나의 변형의 매개”였음에 (어쩌면 그 이상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녀가 현실이 되자, 갑자기 나도 현실이 되었다. 나는 클로이가 내 자기의식의 진정한 기원이었다고 믿는다. 전에는 오직 하나가 있었고, 나는 그 일부였다. 이제는 내가 있었고, 내가 아닌 모든 것이 있었다. (p.158)
『바다』의 화자인 맥스 모든 역시 기억하는 일을 끈질기게 이어나가 마침내 모든 것을 집어삼킨 — 이미 나 자신이 된 어떤 것을(그리고 그와 마찬가지인,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 바로 그 사건에까지 도달한다. 마치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 중 한 구절을 자신에게 읊조림으로써 비로소 위안을 얻는다는 듯이.
정신병 환자는 붕괴의 공포 속에서 산다고 한다(이 이외의 증세는 방어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데 “붕괴에 대한 인상적인 공포는 이미 체험한 적이 있는 붕괴에 대한 공포이다. […] 그러므로 때에 따라서는 이런 붕괴의 공포가 삶을 침식해나가는 환자에게, 이 붕괴가 이미 일어난 적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줄 필요가 있다.” 사랑의 고뇌도 이와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사랑의 출발점, 내가 매혹되었던 그 순간부터 이미 치러졌던 한 장례에 대한 공포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마세요. 당신은 이미 그를(그녀를) 잃어버렸는걸요.”라고.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김희영 옮김, 동문선. p.54)
맥스는 “우리는, 애나와 나는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었던 모든 것도 서로 용서했다”고,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뭔가가 빠져 있었다는, 나에게 뭔가 빠져 있었다는 확신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읽은 이 회고록은 바로 그 ‘빠져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한 탐색의 글쓰기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맥스 모든에게 ‘바다’라는 이름을 단 이 일련의 회상 작업은 애나 없이 (물론 전적으로 타인 없는 나는 가능하지 않지만) 자기가 되어보려는 노력이었던 것이 아닐까.
 

8.

기억, 사실, 사건은 서로 긴밀히 관계 맺는다. 우리는 그 세 개를 꼭지점으로 하는, 경험의 삼각형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기억 없이 어떻게 사건이 사실이 될 것이며 사실 없이 어떻게 기억이 사건을 살려낼 수 있을 것이며 사건 없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이란 얼마나 공허한가.
경험의 삼각형은 곧 ‘나는 무엇인가’, 혹은 ‘나는 무엇을 살아내는가’라는, 답할 수 없는 물음에 대한 응답으로서 드러난다.
 

9.

나는 자기가 됨에 이은 자기가 됨……들로서/써, 나에게 일어난 모든 것들로서/써 나로 된다. 그러므로 다시 자기를 들여다본다는 것, 자기가 되기를 꿈꾼다는 것은 가장 개별적이고 고유한 역사성(그러나 이것은 인과성에 따라 체계적으로 조직되는 종류의 역사일 수는 없다) 속에서 기호로 환원될 수 없는 것들을 일어난 것의 일어남 그대로의 모습까지 발굴해내어 보존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을까.
그 건물들의 입구에서는 아직도 옛날에 습관적으로 그곳을 드나들다가 그후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남긴 발소리의 메아리가 들릴 것 같다. 그들이 지나간 뒤에도 무엇인가가 계속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점점 더 약해져가는 어떤 파동, 주의하여 귀를 기울이면 포착할 수 있는 어떤 파동이. 따지고 보면 나는 한 번도 페드로 맥케부아였던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었다. 그러나 그 파동들이 때로는 먼 곳에서, 때로는 더 세게, 나를 뚫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차츰차츰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흩어진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였다. (p.130, 강조는 인용자)
모디아노의 이 텍스트에서 “파동”과 “메아리”는 곧 “흔적”이고, 지나간 사건이다. 나는 내가 “옛날에 습관적으로 그곳을 드나들”었는지, 바로 내가 그러다가 “사라져버린 사람들” 중 한 명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화자 기 혹은 페드로처럼 기억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든 그렇지 않든, 우리 모두는 내가 나라는 것, 나였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일어난 것들을 주워 모을 때가 있다. 그것들을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여전히(‘다시’가 아니라 여전히) 그것들 전부를 겪는다. 그렇게 해서 도달한 그 사건, 그것은 도대체가 말해질 수 있는 것일까? 사건들이 이룬 ‘결정체’는 말해질 수 있는 것일까? 그것들의 말해질 수 없음이 이어주는 일렁임, 넘실거림, 그것을 가리켜 우리는 ‘나’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기억한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들의 말할 수 없음에 충실하여, 일어나는 것들의 일어남까지 나아가서, 나를 이루는 바다 속에서 여전히 자기가 되기를, 자기로 되기를 추구하는 끈질긴 운동에 다름 아니지 않을까?

단현
danhyun0124@naver.com

2 thoughts on “기억하기-사건에까지 도달하기-자기가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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