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성 이미지 : 앙리 마티스, 《삶의 기쁨Bonheur de Vivre》, 176.5cm×240.7cm, 캔버스의 유화, 1905. Photo from 〈henrimatisse.org〉

‘정치’라는 개념의 이중적인 이중성

오늘날 ‘정치’라는 개념은 너무나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며, 맥락에 따라서 상반된 함의를 갖기까지 한다. 혼재된 의미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이 의미들을 구분하여 정리하는 것은 분명 유용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구분된 의미들에 다른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이것들을 완전히 분리해내는 일이 아니다. 관건은 어떻게 이질적이고도 상보적인 혹은 상반된 의미가 하나의 이름을 가진 개념으로부터 발생하게 되는지를 이해하는 일이다. ‘정치’라는 개념이 갖는 다양한 의미작용을 명확히 하는 일은 곧 이 개념의 의미장을 둘러싸고 어떤 힘이 배치되어 작용하는지, 어떤 줄다리기가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상이한 의미가 공존하는 개념은 ‘정치’ 뿐만이 아니며, ‘정치’ 개념의 이중성(혹은 이중적 이중성)은 ‘제도’ 개념의 이중성, ‘문화’ 개념의 이중성, ‘권력’ 개념의 이중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사적으로 얘기해서, 바로 이 이중성의 혼란은 ‘정치’ 자체를 새롭게 갱신하려는 오늘-여기에서의 ‘정치적’ 기획 및 실천의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국가 혹은 국가와 결부된 이데올로기, 제도, 문화와 같은 구조와 그 구조 속에서 구성되고 억압받는 개인이라는 이분법적 구도”, 즉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의 이항대립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이미 와 있”으며,[1] “더 이상 폭력은 삶에 외재적인 ㄱ것이 아니”기 때문이다.[2]

정치란, 원론적인 의미에서, 어떤 것이 좋은가/옳은가/바람직한가에 관한 공동체의 합의를 이끌어내고 이를 이행하는 활동, 혹은 공동체의 합의를 새롭게 갱신하는 활동이다. 뒤집어 얘기하면, 한 공동체는 이러한 합의들과 활동들을 통해 지탱된다. 이중성은 이미 여기에 잠재되어 있다. 이러한 정치를 위해서는 이미 구성된 혹은 가정된 합의가 표명되어야 하고 이에 관해 논의할 수 있는 장場으로서의 제도가 있어야 한다. 동시에 이러한 합의의 내용은 이미 실행되고 있다. 그런데 이른바 ‘합의’는 절대적이지 않으며, 공동체의 모든 이에 의해 지지되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정치는 우선 이미 틀이 잡혀있고, 진행되고 있는 제도로서의 정치이다. 그런데 이러한 제도적 정치가 전반적인 의제로 승인한 문제 이외에도, 아주 미시적인 영역에서 언제나-이미toujours déjà 제도, 문화, 개념, 서사 등이 작동하고 있으며, 어떤 삶은 허가하고 어떤 삶은 저지한다. 이 작동함이 이미 ‘정치적인 것’이라 불릴 자격이 있으며, 그에 대한 비판/저항이 이미 대립되는 의미로서 ‘정치’라고 불릴 자격이 충분한 것이 아닌가? 정치적인 것은 권력의 작용과 그에 대한 비판/저항이며, 또한 그러한 관계가 지워지는 한에서 제도적인 논의이다. 후자에서는 어떻게 더 나은 선택을 할 것인가, 현상 유지할 것인가 혹은 변화를 꾀할 것인가의 문제가 형상화된다. 전자에서는 어떤 전략들과, 그 전략에서 벗어나려는 혹은 전략을 파훼하는 전략이 맞부딪친다.

요컨대, 위험을 무릅쓰고 정치(혹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관통하는 축을 형상화해보자면, 정치는 우선 정책적/정부-제도적인 것, 거시적인 것이며 한편으로는 문화적/사회-제도적인 것, 즉 미시적인 것, 일상적인 것에 이른다. 여기에서 두 극은 상반된다기보다 상보적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축이 관통한다. 정치는 통치성(여기에서 ‘통치’란 그 주체를 상정하지 않는 통치이다), 권력의 작용을 가리키며 또한 이에 반해 예외적인 것, 대안적인 것의 표명, 반항과 저항의 작용을 가리킨다. 이것은 정의상 서로 대립되는 극이다. 우리는 신문 1면에 실린 정당정치의 소식들을 정치라고 부르고, “여성은 자궁이 아니다”라는 외침을 정치적 발언이라고 부르고, 사회주의 체제를 옹호하며 독재 정권을 찬양하는 소설을 정치적인 소설이라고 부르고, 발전주의 담론 속에서 끝없이 유예되는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영화를 찍으러 다니는 것을 정치라고 부르지만, 이것들은 결코 ‘정치’라는 말을 아무렇게나 제멋대로 쓴 것이 아니며, 구분은 ‘정치’라는 말의 명사형과 관형사형 사이에 있지 않다.

(예술에서 드러나는) 정치적인 것과 ‘본격적인’ 정치?

이미 실체가 부여된 대상이 어떤 범주에 속하는지 아닌지를 구분하기 위해 제기된 본질 물음은 완전히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봉사하거나 아니면 거짓된 물음이다. 분류하는 명칭으로서의 ‘예술’은 지극히 실용적이고 제도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필요할 뿐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넣어도 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 무대 위에 올릴 수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 문학 전집 속에 포함시켜 출판할 수 있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 필요할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애초에 대상으로서의 ‘예술’ 혹은 ‘예술작품’이 아니라, ‘예술적인 것’이라는 술어 — 어디에서 그것을 발견해내든 간에 — 가 아닌가? (실체와 속성을 분리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인가?)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관계도 이와 상응한다. ‘정치’에서 ‘정치적인 것’을 분리해내려는 시도는 ‘정치’라는 개념이 가리킬 수 있는 대상을 상정하며, 그 대상은 제도적 정치와 정치 제도, 그에 참여하는 ‘본격적 정치’에 국한되기 십상이다. 세상을 바꾸려는 활동으로서 제도 정치에의 참여와, (어떤 예술이) 정치적인 함의를 가진다는 것, 정치성을 표현한다는 것을, 실체와 속성라는 유비에 기대어 구분해내는 것은 자의적인 구분, 엇나간 구분이다.

글쓰기는 이론이고, 행동으로 뛰는 것이 운동이라는 식의 이분법은 7-80년대 이후 지루하게 반복되어왔다. 단언컨대 어떤 시위에 참여하는 일이 조금도 정치한다는 것이 아닐 수 있는 만큼이나 어떤 글쓰기를 이어나간다는 것은 충분히 정치한다는 것일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하체가 완전히 마비된 한 사람이,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정책에 대해서 저항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그리고 이미 충분히 탁월한 실천은 쓴다는 것, 씀으로써 발언하는 것, ‘이렇게 통치되는 대로 남아있을 수는 없다’고 외치는 것이지 않은가? 그에게 광장에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아직 ‘정치’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리고 만약, 이들이 아직 자신에 관해, 자신들을 통치하는 힘에 관해 말해낼 충분한 언어를 획득하지 못했다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개념적 언어가 아니라 시각적 언어로 풀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그려낸 그 그림이 예술에 속하는지 아닌지, 예술이므로 정치성을 담지할 뿐 ‘본격적인’ 정치와는 구별돼야 하는 것인지 여부를 말하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 정치성을 담지하는 어떤 것을 생산하는 일과, 실제 정치 속으로 뛰어들어 본격적으로 운동한다는 것을 섣불리 구분하는 것은 어떤 정치함들을 배제할 우려가 있으며, 오늘날 정치는 아주 작은 정치들의 연대에서 시작된다는 흐름을 놓칠 위험이 있는 동시에, 정치를 이미 ‘중심 의제’로 정확히 설정된 거시적인 문제, 예컨대 공동체 전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문제에만 묶어둘 위험이 있다. 때로는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을 정도로 뒤흔들어 놓는 급진적인 정치성이 필요할 수도 있다. 때로는 우리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습득해버렸기에 문제인지도 몰랐던 어떤 차별들을 끊임없이 상기시킴으로써 공동체를 서서히 바꿔나가는 정치성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이때 정치성의 가동, 정치적 실천은 제도적 정치에 진입하려는 시도 이전에 미시적 정치의 차원에서 가동되어야 하며, 그곳에서 이미 당당한 하나의 정치하기이다.

말하자면, 선거구제 개혁을 주장하거나 정부의 외교 기조에 반대하기 위한 글쓰기의 형식으로 소설을 택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다. 그러나 호명되는 방식부터가 폭력적인 존재들, 담론의 거시적인 흐름 속에서 언급되지 않고 지워진 삶들을 건져내기 위한 글쓰기의 형식으로 소설을 채택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텍스트하기의 실천이며, 그들을 위한 제도적 지원이라는 머나먼 길을 시작할 발판조차 없는 현실에서는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다. 예컨대 난민이라는, 조국과 국적이 일치하지 않는 자, 규정되지 않은 자, 예외적인 자의 존재는, 버틀러가 지적하듯이, ‘민족nation’과 ‘국가state’를 연결하는 하이픈(‘민족국가nation-state’에서의 ‘-’)이 얼마나 작위적이며 그 자체로 권력의 작동인지를 보여준다. 이 ‘국가 없는stateless’ 자들이 대다수의 국적 있는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존재한다는 것,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 혹은 삶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들의 존재가 단숨에 시민인 자들을 특권적인 자들로 만든다는 것, 그러나 또한 시민이든 난민이든, 우리 모두는 상이한 방식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민족국가에 의해 통치되는 대상들이라는 것을 말해주지 않는가?[3] 어떤 이들에게,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하는 글쓰기,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글쓰기는 단숨에 충분히 정치하기이지 않은가? 쓰여진 대상은, 그것이 활자인 한에서 그저 사물로서 있을 뿐 정치하지 않지만, 그것이 텍스트라면, 그것이 쓰였다는 점에서, 계속해서 읽히고 다시-쓰여진다는 점에서 정치하기이지 않은가?

정치한다는 것의 의미를 실제로 ‘세상’을 — 즉 제도나 문화를, 통치 방식,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 바꾸는 일에만 두게 된다면, 이는 그러한 변혁을 강렬히 꿈꾸며 외치다가 스러진 이들을 ‘결국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 이들’로 만들게 된다. ‘실제로 제도나 문화를 바꿀 것을 꿈꾸지도 않는 정치하기’라는 정식은 물론 그 자체로 모순이다. 그러나 정치한다는 것, 정치적 상상력을 가동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한 삶을 작동됨에서 건져내고, 삶의 흔적을 이제껏 그리던 궤적과는 다른 방향으로 틀어 그려나가도록 한다. 어떤 이가 ‘이건 아니다. 이건 산다는 게 아니다. 이렇게 살다가, 살아만 있다가, 살아남기 위해 살다가 끝내 죽는다는 것은 산다는 게 아니다.’라고 외쳤을 때 이미 ‘세상’은 한 번 변했다. 이 외침은 모든 정치의 시작이며, 정치성의 영도다. 이것마저 ‘낭만적’이라고 지적한다면, 나는 더는 할 말이 없다. 이것보다 더 냉철해질 도리가 내게는 없으므로, 이것보다 더 냉소적으로 삶을 바라보는 일은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기로 체념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도리밖에 내게는 없으므로.

비판과 반성

비판이 ‘나’(중심, 기준이 되는 주체 혹은 ‘내부’)의 대립항으로 설정된 대상, ‘외부’ 혹은 ‘적’에 대한 비난과 공격일 때, 그것은 일상 언어의 맥락에서의 ‘비판’이긴 하지만 사유이며 정치하기인 그러한 비판은 아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반성이라는, 비판의 다른 한 쪽 면이 떨어져 나간 공허한 비판이다. 비판은 이미 내가 관여하고 있고 개입되어 있는 구조에 대한 반성이며, 나를 포함한 공동체 혹은 ‘우리’에 대한 반성이다. 비판한다는 것, 그것은 나에게 역시 책임이 있는 어떤 것을 반성한다는 것이다. 비판은 필연적으로 그 대상을 호출하며, 반성은 비판 자체를 다시 그 대상으로 호출한다. 그러므로 반성은 비판이 여전히 비판일 수 있게 하는 지점, 비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지점을 지탱한다. 비판의 다른 한 쪽 면인 반성이, 비판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갱신하며 나아가게 하고, 그것이 고착화된 교조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도록 한다. 비판과 반성은 분명 상호의존적이지만, 결코 실체적으로 구별되는 존재자가 아니다. 반성은 비판에서 생성의 사태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런데 반성은 비판으로 하여금 그 대상을 외부로 상정함으로써 비판적 발화의 주체를 구성하고 그것을 그 외부에 대립되는 내부로 상상하게 하는 것을 막는다는 점에서, 비판이 시작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비판은 방향성을 가진, 즉 대상을 갖는 내용이며, 반성은 비판에게 있어 토대적인 것인 동시에 비판 자신의 갱신, 변화, 재생성이다. 반성은 사건적이며, 비판은 사실적(그 사건의 사실)적이다. 그렇다면 반성의 다른 이름이 배움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사유는 비판이며, 사유는 배움이다.

예술과 정치

나는 대상으로서의 예술(작품)이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존재하는 대상은 그저 사물이며, 온갖 존류의 실재하는 사물들과 다름없는 사물이다. 존재하는 그림(캔버스 위에 물감이 덕지덕지 붙은 것)은 모든 다른 사물에 비한 우월성 없이 그저 사물이다. 차라리 예술의 행위와 그 행위를 감상하는 행위, 그럼으로써 다시 예술을 재구성하는 일련의 모든 행위적인 것에, 그것들이 조직해내는 관계에, ‘예술’이라는 이름을 주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줄기차게 대상을 연상시키는 ‘예술’, ‘예술작품’ 대신에 ‘예술적인 것’이라는 술어를, 나아가 ‘텍스트’라는 개념을 고집하는 이유다. 텍스트는 사물처럼 존재하는 대상이라기보다는 늘 덧붙여질 여지를 갖고 있고 지금도 덧붙여 쓰이고 있는 실재다. 쓴다는 것의 행위적, 곧 사건적인 면을 ‘텍스트하기’라고 부른다면, 실재로서의 측면 곧 사실적인 면을 ‘텍스트’라고 부를 따름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아주 당연한 진실이 나온다. 사물은 (설령 그것이 우리의 제도와 문화에서 ‘예술작품’이라는 분류로 칭해질지라도) 결코 정치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예술작품’의 범주로 인정되는 것들을 생산하는 것이 곧장 정치성을 띤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술에게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광장에 하나의 당당한 메시지로서 개입하는 것이 아니다. 단언컨대 예술은 내용을 갖는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닮아있는 근처의 다른 실재들과 마찬가지로 실재다. 그것을 나눠 갖고 다시금 읽는다는 행위들은 통치성이 기대하는 정상성의 자연스러운 삶에서 벗어나는 일탈적 행위다. 예술 자체는 정치의 모든 의미와 모든 영역에 관해서라면, 실천하지 않는다. 예술은 아주 작은 계기를 제공함으로써 비판의 시작을 가능케 하는, 혹은 비판을 갱신하게끔 하는 ‘탁월한 반성’이다. 예술한다는 것은 주장하는 것이라기보다 기도하는 것에 가까운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탐닉하듯 기도하는 것이 예술한다는 것이라고, 기도하듯 탐닉하는 것이 산다는 것이라고 종종 생각한다.

단언컨대 거의 대부분의 경우, 문학으로 정치하느니, 정치하기 위해 ‘문학’이라는 글쓰기 방식을 택하느니 그냥 곧바로 주장하고 논증하는 비판적 글쓰기로 나아가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이는 문학적 글쓰기에는 비판적인 것이 전혀 담길 수 없다는 것이 아니며, 문학적 글쓰기가 주장하고 논증하는 글쓰기가 아니라고 해서, 그것이 비판하고 정치하는 일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것도 아니다. 정치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발언한다는 것, 외친다는 것, 불특정 다수의 말들 앞에 서서 어떤 말들을 개진함으로써, 그 불특정 다수의 말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정치를 통해 제도의 변혁에까지 도달하는 경우에도, 그것은 권위 있는, 고정되어 있는 말들, 즉 약호code들과 규정norm들을 설득해낸다는 점에서, 말함으로써 말에 닿는 행위이다. 그런데 어떤 것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 이것은 말한다는 일 이전에 사유되어야 한다. 읽고 쓰는 일의 지난함이 바로 여기에서 요청된다. 그리고 이때 읽고 쓰는 것들에, 우리의 제도와 문화 속에서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들이 포함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다. 문학은 정치를 위한 방법, 적어도 최선의 방법은 아니지만, 문학은 얼마든지 아름답고 정치적일 수 있다. 문학을 쓰는 자는 물론 다른 모든 자들처럼 정치적 인간일 것이다. 그가 써낸 텍스트는 아마도, 다른 무언가와 마찬가지로 정치를 ‘위한’ 것이 아닌 한에서, 즉 단순한 수단이 되어버리지 않는 한에서 탁월한 텍스트가 될 잠재성을 지닐 것이다. 이 직조물이 이미 당당한 한 실재인 한에서, 이것들을 읽고, 읽음으로써 다시-쓰는 행위들로써 정치를 향해 열려있는 어떤 상상력을 가동시키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정치적이지 않은’ 소설을 읽으면서도 무언가 정치적인 것을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작가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구태여 덧붙일 필요조차 없다. 최초의 텍스트 구성이 있다는 관념이 ‘작품’이라는 관념을 만든다는 것을, 이미 여러 논자들이 지적한 바 있다. 최초의 근원적인 텍스트 구성이라는 것이 유보되는 한, 텍스트에 관한 실천은, 읽는다는 것은 이미 늘 다시-쓰기이며, 이 서로 얽혀있는 비판적이고도 반성적인 다시-쓰기들을 통해 우리는 이 삶에 뿌리를 두고 있되 이 삶을 넘어 다른 삶을 엿보려는 상상력을 공유할 수 있다.

정치성의 영도(零度), 정치적 상상력

지금 우리가 도처에서 맞닥뜨리고 있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우리에게 지겹도록 재현되어 우리 자신의 다른 모습을 박탈하는 삶이 아닌 ‘다른 삶’을, 바로 이 삶의 면면으로부터 출발해서 그려볼 수 있는 정치적 상상력. 바로 이 지점이, 우리 제도와 문화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장르의 예술, 나아가 모든 다양한 장르의 예술이 닿을 수 있는 지점이면서, 비판을 가동하게 하는 반성이고, 비판으로서의 정치하기가 시작될 수 있는 지표면, 해발고도 0미터이다. 비판을 시작할 수 있게 하는 근원적 반성이며, 비판을 갱신하게 하는 계기적 반성인 이것은 이미 비판이며 정치이다. 해변이, 파도가 육지의 모래톱으로 밀려들며 그려내는 그 선이 육지의 시작점이면서 이미 육지이듯이.

어떤 제도를 새로운 제도로 교체하는 일은 지난하고 어렵다. 제도의 어떤 지점이 문제이며, 어떤 새로운 제도가 적절한 제도가 될 것인지를 파악하고, 설득하고, 결국 바꿔내는 일은 그야말로 험난할 것이다. 나 자신이 죽을 때까지는 결코 이 제도와 문화를 완전히 바꿔내지 못할 수도 있다. 예술하기는 결코 우리의 삶을 변혁해내는 데, 제도와 문화를 개혁하는 데 일조하지 못한다. 그러나 비판을 가동하고 정치적 실천들로 나아가려면, 이미 짜인 판에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구조 속에서의 이 삶이 아닌 다른 삶(다르다는 의미에서 더 나은 삶)을 사유할 수 있는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늘 사유하게끔 하는 계기이며 용기인 것이. 예술적인 것이 줄 수 있는 정치성이 바로 이것이다. 일전에 내가 ‘작동함에 맞서 불온을 가동하기’라는 개념으로 가시화하고자 했던 사태가 바로 이것이다.

텍스트하기와 정치하기

문학은 정치를 구원할 수 있는가? 문학은 세상을 바꾸는 데 아주 작은 만큼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가? 나의 벗들이, 문학의 정치성에 대한 낭만을 버리고서 냉정히 진단했듯이, 나의 대답 역시 부정적이다. 그러나 문학은 차라리 실존을 구원한다. 문학이 닿아있는 것은 정치의 가장 효과적인 실천이라기보다 차라리 정치의 시작지점이다. 정치가 결연하게 한 걸음을 내딛기 직전에 깊이 들이마시는 들숨이다. 정치가 뒷걸음치고 몸을 숨기며 깊게 내쉬는 날숨이다. 문학이 ‘세상을 바꾸는’ 정치적 실천을 해낸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문학이 정치적인 데에 한계가 있다거나, 혹은 문학은 정치를 함의하고 표현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지만 ‘실제적으로’ 혹은 ‘본격적으로’ 정치한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되풀이해 강조하건대 구분은 거기에 있지 않다. ‘문학’이라고 부를 만한 글쓰기, 혹은 텍스트들 속에서 빛나는 어떤 예술적인 것이 가동하는 불온, 정치적 상상력은 정치하기를 가능케하지만 결코 정치 자체를 초월하지는 않는 조건, 기반이자 동력이다.

신랄하게 공격하고, 논증하고, 질기고도 진부한 전제들을 드러내고 논박하는 글쓰기가 있는 한편, 후회와 회한에 가득 차, 천천히 돌이켜보고 곱씹고, 지나간 그 모든 것들은 내게(우리에게) 무엇이었는지를 복기하고, 애도하고, 추스르는 글쓰기가 있다. 자, 이제 나는 제도가 편의상 구분해 놓은, 텍스트에 대한 명명을 버린다. 글쓰기에는 그 글쓰기가 품고 있는 방향들이 있다. 어떤 글쓰기는 곧장 비판하는 일로 나아갈 것이다. 어떤 글쓰기는 침잠하고 반성하며, 또 다른 글쓰기는 후회하고 기도하듯 박동할 것이다. 어떤 글쓰기는 확신에 찬 분노와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뒤섞여서, 한 번 목놓아 외치고 한 번 목놓아 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텍스트들의 어떤 부분을 보고는 이 텍스트가 비판하고 정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것이고, 텍스트들의 다른 어떤 부분을 보고는 이 텍스트는 다만 정치성의 영도에서, 반성하고 애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것이다. 그리고 서로에게는 서로가 절실히 필요할 것이며, 아마도 글쓰기, 텍스트하기라는 이 이란성 쌍둥이들은 서로를 서로로부터 구분하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새롭게 발견해나가되,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다투고 또 화해하면서, 그렇지만 어느 한 쪽도 완전히 내쳐버리지 않으면서 느린 걸음으로 나아갈 것이고 사유라는 땅이 있는 한 그 위에서 영생할 것이다.


[1] 필자의 다른 글, 《작동되는 자아를 넘어 타자와의 관계의 정치로》의 ‘보론’, 〈오늘날의 문제, 수많은-작은-정치하기〉

[2] 필자의 다른 글, 《생존을 넘어서 살아있기, 애도하기/기억하기》

[3] 주디스 버틀러, 가야트리 스피박, 주해연 옮김,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산책자, 2008.

단현
danhyun012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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