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 주제들

(*지금까지 이어진 “셋잇단음”의 논의가 어떤 흐름을 가졌는지에 관심이 있지 않은 독자는, 이하의 “재고찰” 단락으로 넘어갈 것.)

파상의 길을 따라 걸어 본다. 그러니까, 우리 각자가 본 지면을 빌어 이어온 작업들을 요약해보고자 한다. 사실 이 길은 반칙을 저지르는 길이다. 이 기획을 열며 우리는 “상대의 말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도 각자의 말을 이어 가기”를 꿈꿨기 때문이다. 파상의 “우리는 우리를“은 나와 단현의 행보를 관찰한 길 위에 놓였고, 사실 이것은 사도였다. (우연히도 그 점을 이야기한 글의 제목은 ‘우리는 아니다’였다.)

여튼, 각설하고 내 이야기를 이어가자. 셋잇단음이 이야기를 나눠 온 주제는 조금씩 변해 왔다. 처음에 우리는 정치와 (개인적 실존으로서) 존재의 관계로부터 존재론적인 문제를 유도했다. 이 문제는 세계의 재구성, 즉 인식적 정당성의 문제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 즉 실재와 인식을 구분하는 것에 대한 의심이 제기된다. 여기까지가 “포르노그래피즘, 공적인 신체, 다시 행위“에서부터 “수수께끼의 재발견“까지의 주제적 흐름이다.

그리고 문득 파상을 통해 셋잇단음은 그러한 인식적 정당성의 평가의 문제로 나아간다. 이를 위해 비평 및 비판의 문제가 유도되었다. 이 평가란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를 먼저 두 차례에 걸쳐 논했다. 그런 뒤에 이 평가가 어떠한 이유로 정당하게 여겨지는지를 물었다. 그 뒤에야 우리는 평가의 대상들에 관한 입장을 나누었다. 기억과 문학을 포함한 서사 일반에 대해, 그것이 어떤 식으로 의의를 가지며 그 의의로부터 우리가 어떤 귀결을 가질 수 있을지 논했다. 이 귀결이란 다름 아닌, (다시) 정치의 문제였다. 정치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또 다시) 우리는 그러한 정치의 문제가 존재론적인 문제에 어떤 의의를 갖는지를 물었다. 여기까지는 “함정인 것 같긴 하지만“에서 지금까지의 흐름에 해당한다.

입장들

비평 이전

이 주제들 속에서 각자는 어떤 입장을 가져 왔나? 정치와 개별적 존재에 대해서, 단현은 정치가 언제나 존재의 한 면만을 말하며, 이 때 “살아있는 것”에 해당하는 면이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음을 의문시한다. 파상과 나는 이에 대해 다른 응답을 주었다. 는 이에 대해 그 다른 면이 (지배적인) 제도를 통해서도 충분히 드러날 수 있어 보이며, 또한 윤리적 평가가 이루어질 때 바로 그 다른 면은 언급될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반면 파상은 그러한 제도를 통해서라기보다 여러가지 말하기 방식이 도입됨을 통해서만, 그 면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음을 말한다. 즉, 개별적 실존은 제도에 따르는 해석이 아니라 탈-제도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보여진다. 그리고 단현은 정확히 이 부분에 찬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너머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냐고 파상이 묻는다. 단현은 그 점에 대한 회의주의로 파상의 물음을 일갈한다. 파상 역시 이 점에 찬동하며, 우리의 세계 인식이 언제나 잉여분을 갖고 또한 세계 전체를 일관되게 설명할 원칙이 발견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 한편 는 윤리의 문제에 집중하며, 규범이 실재와 연관맺는 관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맺으며, 그러한 실재에 대해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실질적 측면이 이미 알려지고 있지 않냐고 물었다.

는 몇몇 현상학적, 언어철학적, 형이상학적 고찰이 그러한 수수께끼를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파상은 그러한 수수께끼가 실재에 관한 실질적 지식과는 무관함을 주장하며 나를 논박하고자 했다. 이 논박에 따르면 세계에 이미 그러한 질서가 기입되어 있다는 것은 부조리한 상상이다. 한편 단현은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지만) 존재의 질서가 정치적 제도와 구분되었다는 생각이 부조리할 수 있음을 제시한다. 이 즈음 단현은 정치의 측면에, 나는 존재의 측면에 기울었다. 는 단현의 정치 환원적으로 보일 법한 방식이 아닌, 존재 중심의 방식을 취해야만 이 수수께끼가 해결될 것이라고 논하며 주제를 닫았다. 비평의 이야기는 이 다음에 나왔다.

비평 이후

기억 이전

파상은 이제 시야를 돌려 비평에 관한 다양한 문제들이 제기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비평의 형식적 본질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의 실질적 역량은 무엇인지에 답하자는 것이 그의 제안이었다. 는 비평의 본질이 텍스트 이해를 위한 처방적 역할에 있다고 논구했고, 이어지는 글에서 비평의 분류와 기능을 신학의 경우에 유비하며 설명했다. 단현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는 비평과 비평 대상이 명시적으로 다른 류에 속한다기보단, 동류의 텍스트로서 서로를 참조하고, 따라서 그것의 정치적 역량 역시 본질적으로는 같다고 본다. 그 역량은 이어지는 글에서 설명되는데, 곧 “불온 되기” 또는 “실천”이 그것이다. 파상은 그 불온의 이후를 물으며 주제를 닫았다. 그는 불온이 오로지 불온이 아닌 새로운 건설로 이어져야만 정당한 비평과 비판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나와 단현의 중간점을 찾은 셈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건설을 가능하게 하는가? 나의 글은 이 물음에 대한 응답이었다. 나는 텍스트의 승인이 공동체가 갖고 있는 진리 기준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따라서 비평에는 진보와 진리가 모두 있을 것임을 나의 모델들을 통해 논증했다. 파상은 텍스트의 승인에 대해서는 나와 같은 입장을 표했지만, 그 귀결에 대해서는 다르게 보았다. 그가 보기에, 그런 방식의 승인은 진리를 제공한다고 하기엔 공동체적, 제도적 좋음만을 제공한다. 따라서 “좋은 비평”의 이상은 부당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단현은 조금 더 나로부터 멀어졌다. 그는 후기 푸코에게 근거하면서 “불온 되기”로서 비판적 텍스트는 제도를 통해 진리를 얻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제도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파상은 위의 생각을 토대로 서사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단현과 나의 분기는 이에 대한 응답에서도 이어진다. 는 단현과 파상에 대한 불만족스러움을, 파상이 도입한 서사론을 통해 설명하고자 했다. 그래서 비평에 관한 이야기를 멈추고 비평 대상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비평이라는 텍스트가 파레시아가 될 수 없고, 될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다. 텍스트의 실천은, 텍스트 자체가 아닌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연상한 바일 뿐이다. 반면 단현은 텍스트가 어떻게 불온이 될 수 있을지를 이야기하자고 한다. 그의 답변은 기억하는 일과 애도하는 일, 글쓰는 일 사이의 연관에 기대고자 했는데, 그 연관이 어떤 귀결을 갖는지는 다음 주제에서 드러났다.

기억 이후

정치 이전의 논의. 단현은 기억의 문제를 텍스트의 제작과 애도의 관계를 보여주고자 도입했다. 글을 쓰는 일은 기억을 전하는 것이며, 애도는 그렇게 전해진 기억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렇다면 글쓰기에는 모종의 책임감 있는 태도가 요구될 것이다. 단현이 포르노그래피즘을 논할 때 도입한 두 면의 구분을 상기하자. 이것은 기억에 관한 한쪽 면에 해당한다. 다른 면은 다음 번 기획의 글에서 기술되었다. 개별적 존재의 생존은 그의 기억에 달린다는 것이 그의 전제이다. 이로부터 그가 얻는 귀결은, 살아있음이 의의를 갖기 위해서는 다시 기억하는 일, 그것을 위해, 쓰는 일이 요구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기억과 글쓰기는 한 지점에서 만난다.

는 단현이 있는 곳으로 우회해서 다가갔다. 먼저 기억에 대해 정립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나는 기억이 언제나 명제에 관한 태도일 수밖에 없는데, 명제적 태도는 그 특성상 어떤 의미에서 주관적 표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논증했다. 따라서 기억은 오로지 객관적일 수가 없다. 이 때 제기되었던 문제는 어떻게 기억의 전달이 가능해 보이냐는 것이었다. 나는 이어지는 글에서 이에 답했다. 기억이 전달된다는 것은 동일한 사태에 대해 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반응을 정당하게 전달한다면, 기억은 전달된다. 그러나 이를 검증할 인식적 수단은 없다. 이것은 기억의 공유에 관한 존재적 가능성과, 인식적 불가능성을 암시한다.

파상은 한쪽 글에서는 단현에, 다른 글에서는 나에 답하고자 했다. 글쓰기에 관한 단현의 우려에 대해 파상은, 그럼에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을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어떤 서사들은 책임감을 굳이 의도하는지는 모르겠더라도, 충분히 탁월한 재현을 수행한다. 따라서 텍스트는 아직 믿을 만하다. 기억의 공유에 관한 나의 회의론에 대해서도 비슷한 낙관적 응답을 제공했다. 애초에 나와 우리는 분리된 것이 아니며, 그 분리가 현실적이라고 믿는 것은 사유의 질병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처방이다. 적어도 실천적인 측면에서 그러한 분리에 기초한 비관론은 제거되어야 마땅하다.

정치 이후의 논의. 위와 같은 논의가 진행되고 난 결과가, 지난 셋잇단음 기획이었다. 우리는 어째서인지 다시 정치의 문제로 돌아왔다. 단현은 기억과 글쓰기의 만남이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즉 정치를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관계 독립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윤리가 아닌, 관계 중심적인 정치야말로 우리에게 정말 문제가 되고 있다. 즉, 존재론적 탐구를 통한 정치의 의의 발견이다.

한편 는 기억의 문제로부터 정치적 주체를 요구한다. 기억의 공유가 인식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정당화가 이미 이루어진 양 여겨지는 문맥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문맥이 내포하는 바는 단지 어떤 실질적 기억이 어떤 특정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문맥을 이해하려면, 신학적 질문으로 여겨졌던, 특정한 초월적 주체가, 특히 정치적 주체가 생각되어야만 한다.

파상은 우리들의 글을 회고하며 시작했다. 그는 내가 제기한 문제는 예술의 정치성을 통해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정치적인 것”을 언급하는 예술이 곧장 실질적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예술은 어떤 의미에서 세계를 바꿀 상상력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두 글의 관심이다. 그는 이어지는 글에서 랑시에르를 통해 그의 관심에 다가간다. 그의 답은 이전에 언급했던 적 있는 “감성의 재분배”의 측면에 집중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단현의 “정치적 관계”와 나의 “정치적 주체”는, 파상에게 있어 감성이 갖는 한계 내지 본질로 여겨진다. (흥미로운 점은, 두 번째 글에서 파상은 이전에 허구에 대해 논한 나의 글과 같은 결론을 찾아내었다는 것이다.)

재고찰

파상의 경우

이제는 파상의 반대 방향으로 걷는다. 파상의 답이 나에겐 충분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까닭이다. 적어도 나는 여전히, 무언가가 선제되어야만 정치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파상은 그러한 것을 선제하지 않고서도 정치를 해명할 수 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단지 피상적인 “보임”에 그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우리는 각자 무언가를 선제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생각으로부터, 나는 파상의 반대 방향으로 걷는다.

그는 예술의 정치성이 모종의 “정치적인 것”을 추구하는지가 아닌, 실제 정치에 참여하는지 여부에 달린다고 본다. 즉 예술의 정치적 역량은 어떤 작품이 내재적으로 얼마나 정치적인 것을 말하고 있는지에 달려있지 않다. 그 작품이 실제로 얼마나 정치에 영향을 줄지로부터 그 작품의 정치적 역량이 나온다. 예컨대, 그 작품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영향을 받는지 등으로 그 작품의 정치적 역량이 드러난다.

이 주장을 부정하지 않는다. 상기했듯, 나는 이전 글에서 그와 아주 유사한 주장을 했던 바 있다. 그 때 내가 주장한 바는 실제 정치적 추동을 일으키는 사건으로서 “파레시아”가 어떤 작품에 관한 형식적 평가로서 “비평”이 그 역할 상 분기를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비평은 오로지 그 텍스트가 무엇을 말하는지에 충실한다. 그러나 이 때 어떤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며, 그 텍스트와 같은 형식의 다른 작품들이 으레 갖는, 그러한 텍스트의 특징을 언급하는 것으로 과정이 종료된다. 작품을 통해 무언가가 바뀌는 것은 오로지 작품 감상의 측면이다.

한편 파상의 기획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지는 않는다. 굳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그가 말하기로는 ‘길항’이 어떤 것인지를 논하지 않는다. 그럴 법하다. 그는 예술 작품 그리고 비평의 역량에 관해 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기획은 그보다 먼 곳을 묻는다. 실천적, 인식적으로는 정치를 논하는 것이 정치적인 것을 논하는 것에 앞설 수 있지만, 존재론적으로는 그러한 우선순위 부여가 가능한지 의심스러운 탓이다.

실제로 파상은 실천적, 인식적 우선성으로부터 존재론적 우선성을 유도하려고 하는 듯하다. ‘정치적인 것’이라고 불리는, 정치와 비정치를 구분하는 선은 파상이 보건대 제도적 정치와 실존적 정치의 “길항”에서 나온다. 즉 그것은 실질적 내용을 갖는다기보단 제도와 감성이라는 두 실질적 조직으로부터 나오는 구분선이다. 그렇다면 정치와 예술(그는 감성적인 것, 또는 랑시에르를 따라 ‘불화 정치’라고 했지만)이 정치적인 것에 대해 우위를 갖고 있다. 정치적인 것 자체는 실질적 내용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인지 파상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 ‘정치적인 것’은 사실 가치중립적인 것에 가깝게 읽힌다. 형식에 해당하지 내용은 없다.”

선제되는 것들을 언급하기

“하나님 번개 때리시던 시절”, 버클리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esse est percipi’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는 감각 경험을 통해서만 세계를 알며, 그 외의 존재자들에 대한 지식은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지각되는 것만이 존재할 수 있는가? 최소한 어떤 것이 지각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무엇에 의한 지각이어야만 한다. 고로 버클리는 그의 테제를 수정한다: ‘존재하는 지각되는 것, 또는 지각하는 것이다esse est percipi aut percipere.’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선제되어야만 하는 것들이 있는 듯하다. 버클리의 경우, 지각하는 행위 일반은 지각될 수 없다. 이를 부정할 경우 지각의 무한 퇴행이 일어나게 된다. 따라서 최소한 존재하는 것에 있어서, 직접 지각되지는 않지만 그에 앞서 간주되어야 하는 대상들이 또한 존재한다고 여겨져야 한다. 러셀의 경우 보편자가 그러했다. 최소한의 보편자, 예컨대 “유사함”과 같은 것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술어를 유의미하게 사용할 수 없다. 따라서 보편자는 경험될 수 없음에도 (플라톤적인 의미로) 실재한다고 여겨져야 한다.

나에게 “정치적인 것”의 개념은 정치에 선제되는 것이다. 마치 퀴어 문학에 “퀴어임”이, 민중 신학에 “민중임”이 선제되는 것과 같다. 왜 그러한가? 정치적인 것이 선제되지 않고서야 새로운 사건들을 동일한 정치의 계열로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랑시에르에 대해 파상이 평하듯, “‘정치’라는 일상적 언어가 수많은 방식으로 착취당하지 않도록 구원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정치로 여기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정치로서 만드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이는 퀴어나 민중의 개념에서 발생한 문제와도 같은 결의 것이다. 지금 퀴어로 불리는 자들의 집합이나 지금 민중을 구성한다고 여겨지는 다중의 개별적 합만을 논할 때 우리는 ‘퀴어 문학’, ‘민중 신학’의 의미를 잡아내는 데에 실패한다. 우리는 이미 그 의미를 통해 퀴어인 것과 민중인 것의 개념을 선제한다. 한편 이는 공동체 내부의 것이라고 여겨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공동체가 퀴어나 민중을 사유하기 위해 선제되는 그러한 무엇이다.

이렇게 선제된 개념은 오로지 형식적인 것인가? 파상은 “정치적인 것”이란 오로지 형식적으로만 주어진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실질적 내용을 갖는 것은 오로지 정치이다. 반면 나는 일련의 글에서 그와 정확히 반대되는 주장을 했던 듯하다. 우리에게 공유되는 모종의 현상은, 형식적인 성질⎯경험론자들이 이른바 “제일 성질”이라고 불렀던⎯뿐 아니라 실질적인 내용을 갖는다고 간주하게끔 한다는 것이 “형이상학의 수수께끼”라는 이름으로 부른 나의 질문이었다.

이 “실질적인 내용”에 관한 신앙을 갖는 이들을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러 왔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만한 이들은 특정 종교를 가진 이들이라기보단 일상인 모두이다. 일상인들은 그들이 지각하는 방식과 지각하는 내용 사이의 구분이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철학적 비판에 따르자면 그들은 지각의 형식으로부터만 내용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일상적인 태도에 있어 그러한 형식과 내용은 구분되는 것 자체가 부조리하다. 형식 없는 내용은 없으며, 내용 없는 형식도 없다. 그 둘은 오로지 개념적으로만 분리된다.

그런데 그러한 분리는 (단현이 암시하듯) 형식의 측면, 공동체적 규칙의 측면에 우위를 두는 분리가 아니다. 오히려 일상적 태도는 형식과 결합된 내용의 부분을 내용 자체로 사고한다. 파상의 주제에서 쓰인 말들로 일컫자면, 일상적 태도는 “정치적인 것”을 통해 사유된 정치를 정치 자체로 사고한다. 그리고 오로지 그러한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통해서만 정치를 사고한다. 그렇지 않다면 새롭게 등장하는 사건들을 정치의 계열에 놓는 일상인의 행태는 설명될 수 없다.

두 독단

오로지 형식 상의 경합에 관한 생각

우리는 곧잘 형식과 내용을 분리하고자 한다. 이러한 분리 속에서 형식은 내용에 관한 상위 이론의 역할을 한다. 이전 글에서의 예시를 반복해 보자. 문장 P=’동문 몇이 격월로 신촌 토즈에서 만나는 이 모임은 회원이 돌아가며 책을 선정한다’의 의미는 그것에 관한 상위이론meta-theory에 따라 양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이 때 양분되는 상위이론들은 P에 관해 서로 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이러한 의미 부여 장치가 형식에 해당한다면, 그 장치로부터 나온 의미는 각각 내용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예시에서 내가 든 문제는 이렇다. 서로 다른 두 내용이 하나의 문장으로부터 나오는데, 그 두 내용 중 어떤 것이 문장의 “진짜 의미”인 것인지를 규명할 절차가 마땅찮아 보인다는 것이다. 각각의 내용을 부과하는 상위이론들 중 하나를 선택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상위이론들에 관한 초상위이론hyper-meta-theory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러나 이 때에도 어떤 초상위이론을 선택해야 할지에 관한 논쟁이 벌어질 수 있다. 이렇듯 “이론 선택”은 무한퇴행적으로 문제시된다.

동화 “파랑새”에서처럼, 이 때의 정답은 저 멀리가 아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공동체 또는 정치의 문제로 가치를 해명하려는 시도는 공동체 내부에서 정당화될 수 없다. 또 그 가치에 관한 담론이 오로지 공동체 내부에서만 이루어졌으므로, 애초에 그 담론은 그 공동체를 “바깥에서” 지시할 수 있는 어떠한 주장들도 포함하지 않는다. 정치가 윤리를 사고할 수 없다는 나의 주장은 여기에서 나온다. 윤리는 이미 정치가 들어 있는 그 전체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정치가 윤리를 사고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전체의 바깥에서만 타당한 생각인데, 이 생각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가능하다면, 단지 그것은 피상적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다소 사변적인 사고 실험을 해 보자. 누군가가 문장 P를 읽는다. 또는 (그가 문장의 구조에 관한 이론을 갖지 않을 수 있으므로) 문장 P에 사용된 표현을 관찰한다. 그는 P에 사용된 언어적 틀에 관해 어떤 지식도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가 ‘문장 P’라고 일컫던 그 표현은 어떤 의미로 관찰자에게 제시될까? 생각건대, 어떤 의미로도 제시되지 않을 것이다. 또 그 관찰자의 의미 공동체에게 그 표현이 공유될 때에도, 이 표현은 어떤 의미도 갖지 않을 수 있으며, 갖더라도 P에 대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두 의미 중 어떤 것도 갖지 않을 수 있다.

왜? 우리는 애초에 어떤 이론 하에서만 문장 P를 구성하는 표현들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언어 일반에 관한 이론을 통해서만 P는 하나의 언어적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그 중에서도 한국어 통사론이 기초하는 “통속적 국어학”을 통해서만 P는 한국어에서 의미 있는 표현이 된다. 또 그 P가 포함하는 이름인 ‘토즈’, ‘신촌’과 같은 것의 의미 편람을 갖고 있을 때에, 그리고 그것이 발화된 맥락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을 때에 비로소 P는 특정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러한 맥락과 이론 바깥에 P의 의미란 존재한다고 도대체 말할 수가 없다. P의 의미가 이미 그러한 틀 안에서 규정되어 있다.

요약하자면 이런 말이다. 우리가 말할 때 이미 그 곳에는 특정한 존재론이 선제된 사용들이 존재한다. 그러한 사용 상의 규칙을 토대로 우리는 어떠한 내용을 의도하며 말한다. ‘존재’나 ‘존재론’, ‘실재’와 같이 “저 밖에” 존재하는 듯한 무엇을 말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존재’라는 낱말의 사용을 토대로만 우리는 그 낱말이 쓰인 문장의 내용을 소유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용이란 내용과 형식을 모두 소유한 무엇이다. 이전 글에서 언급한 “주관적 표상”의 문제는 이러한 이유에서 발생한 일이었다. 형식의 차이가 이야기될 때, 내용의 차이가 언제나 동반된다. 이것이 한 축이다.

오로지 내용 상의 번역, 환원에 관한 생각

형식과 내용을 전적으로 분리하려 할 때 나타나는 다른 독단은 번역에 관한 것이다. 그 중심 생각은 이렇다. 다른 이의 음성을 통해 발화된 바, 다른 이의 필체를 통해 쓰여진 바를 우리는 일반적 국어 표현에 관한 이론을 통해 우리의 음성과 우리의 필체로 옮겨 적을 수 있다. 다른 언어 공동체의 통사론을 통해 형성된 내용을 우리는 한국어 통사론을 갖고 한국어로 옮길 수 있다. 이렇듯 번역이 가능하므로, 그것들이 공유하는 어떤 내용 역시 갖고 있다고 해야만 하지 않는가? 그러한 내용이 선제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번역이 가능한가?

헌데, 여기에서 선제된다고 일컬어지는 “내용”이라는 것은 추상적이고 개별 언어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존재자인 양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존재자는 그 자체로 모호하다. 어떻게 어떠한 방식으로도 우리에게 짜여진 형태를 갖지 못하는 것이, 이러저러한 내용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어떤 명제를 이해할 때 오로지 그 명제에 관한 모국어 표현을 통해서만 이해한다. 이 때 ‘명제’라는 단어의 지시는 그러한 표현들에 대해서 고정된다. 그 바깥의 어떤 것과 우리는 도무지 직접적 관계를 맺지 않는듯 보이므로, 그 바깥에 있는 특정한 내용에 대해 우리가 말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듯 보인다.

바로 이 생각이 독단을 만든다. 만일 어떤 바깥의 무언가가 있다면 명제란 언어와 무관한 무엇이 되어야 한다. 명제란 어떤 문장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표상이라고 가정해 보자? 이 때에도 우리는 그러한 사태를 오로지 언어적 도구들을 경유해서만 제공받는다. 그렇다면 그러한 표상은 실제로 바깥의 무엇이라기보단, 우리의 일상적 이론을 통해 기술된 바이다. 이는 전제와 모순된다. 그렇다면 어떤 사실이 언어와 무관히 제공하는 어떤 바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러한 것을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다. 세계에 관해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만 사유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와 무관한 명제를 다룬 적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번역에 관한 이전 글에서의 주장은 약화된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나는 번역이 가능하다는 점으로부터 그것들이 공유하는 내용이 있다는 데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부정하는 것은 그것들이 메타 언어에 대해서도 외부에 존재하는 그런 내용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나의 앞선 주장은 우리가 번역하여 읽은 어떤 글이든, 그 글의 원본과 그 글은 (잘 번역되었다는 가정 하에) 어떠한 내용 상의 차이도 가질 수 없다는 주장에 불과하다.

내가 주장하려는 바는 번역이 가능한 이유가 언제나 메타언어로의 환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외국어 문장 Q에 대해 그것이 한국어 문장(예컨대, 상기한 P)으로 번역된다는 것은 이미 한국어를 외국어에 대한 메타언어로 설정한 뒤의 진술이다. 그렇다면 이미 Q는 한국어에서 P를 의미하기 때문에, P로의 번역이 타당하다고 여겨지고 있을 뿐이다. Q의 의미가 한국어 문장 P의 (사용 상의) 의미를 넘어,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상상하는 것은 한국인 화자에게 불가능한 일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환원이 안 일어난다고 보이는 것은 착시에 불과하다. 이 착시는 ‘영어에서 Q는 한국어에서 P의 의미를 갖는다’라는 2항 문장의 형식을 가질 때 일어난다. 그러나 이 문장 역시 이 경우 한국어 통사론을 통해 구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한국어를 메타언어로 갖는 문장일 때에만 의미를 갖는 듯 보인다. 만일 이것을 어떤 언어에 대해서도 독립적인 문장으로 쓴다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그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혹여 누군가는 수에의 대응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아니다. 그 때에도 여전히 우리는 글자를 숫자에로 대응시키는 사상을 통해 모종의 환원을 하고 있을 뿐이다.

형식은 그 형식이 기술하는 바에 관한 메타이론이다. 나는 언제이든 ‘내용’이라고 불리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이 형식에 구속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형식 독립적인 내용이 있고 그러한 내용이 어떻게든 전달될 수 있다는 생각은 부조리하다. 애초에 형식 없이 만들어진 “내용”을 우리는 접한 적이 없는 까닭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무언가에 대해 ‘내용’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형식으로부터만 내용이 발생한다. 이것이 두번째 축이다.

다시, 존재

이제 나는 무엇을 말한 것일까? 나는 파상의 생각과 달리 여전히 우리가 내용 상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그 내용 상의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어떠한 형식 하에서만 그것을 다룰 수 있다고 논증했다. 앞의 생각으로부터, 나는 존재하는 것들에 관해 진지하게 말할 필요를 부른다. 뒤의 생각으로부터, 그러한 것들에 관해 말할 때 우리가 어떤 이론 하에서만 말할 수 있음이 나온다.

즉 나는 존재를 말해야 함을 역설한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말한 “기초존재론”이나, 퍼트남이 말한 “존재론Ontology” 등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카르납이 말한 “외재적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칸트가 말한 바 초월적transcendent 존재자들이 옹호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 체계 독립적으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칸트의 “초월론적transcendental”인 존재자들, 카르납의 “내재적 질문”, 퍼트남의 “존재론ontology”에 대한 평가를 하고 있다.

나의 그림은 선제되는 것들이 내용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감각적인 내용을 갖지는 못함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어떤 내용이라고 불릴 법한 것들을 갖고 있다. 왜? 그러한 내용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그것들의 실효성 자체를 부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정치나 퀴어, 민중 등이 오로지 그러하게 불리는 것들에만 관련된 형식적 정의만을 갖는다면, 그것들은 새로운 정치-사례, 퀴어-사례, 민중-사례에 답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러한 답이 나오고 있음을 볼 때, 그것들은 실질적인 특징을 갖고 있음이 선제되어야만 한다. 즉 정치와 비정치, 퀴어와 일반, 민중과 지배 세력은 단지 형식적으로뿐 아니라 질적으로 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비는 모든 것에 초월해 있을 수는 없어 보인다. 최소한 그러한 것들을 기술하는 우리의 이론들에 따른 질적 대비여야 한다. (아마도 단현이 생각한, 윤리에 대한 정치의 우위는 이러한 생각을 반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때에도 이 질적 대비를 ‘공동체의 것’이라거나, ‘정치의 부산물’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러한 일컬음은 적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컫기 위해서는 이 이론들의 구성 요소와 이론 사이의 관계를 기술하는 또다른 상위 맥락이 필요하며, 이 때에는 이론 안에서 그 구성 요소들이 이론에 대해 가하는 사용 상의 제약이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그러한 제약이 있다고 말해지고 있을 뿐이다.

내용과 형식을 엄격히 분류하려는 시도 자체가 거짓이었다면 거짓이다. 모든 내용은 형식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그러한 내용들이 모두 배제된 형식은, 어떤 사용 상의 예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이해될 수 없다. 우리는 도대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구분을 받아들일 수 없다. 따라서 차라리 나는, 내용과 형식의 엄격한 구분을 배제하려 한다. 이 구분이 유의미하다면, 오로지 우리의 사용 상에서 유의미하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유의미한가? 우리는 둘을 구분할 이성의 역량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구분이 우리에게 어떤 사용 상의 확장을 주는 것은 아닌 듯하다.

이 시점에서 나는 본 지면을 통해 기존에 해 왔던 시도들을 잠정적으로 중단한다. 일상적 태도를 넘어서 그 태도에 관해 기술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썩 쓸모있는 일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가 어떠한 사용 상의 의미를 갖느냐인데, 이는 말 그대로 우리의 사용을 통해 드러나는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루어지는 철학적 비판의 작업은 한 존재론 하에서 여러 사용들이 어떤 관계를 갖는지를 규명하는 데에 그친다. 그것을 “저 밖의” 무엇에 할당하는 일로 여기는 태도는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음 발걸음이 정해질까. 나는 철학을 통해 만들어진 개념, 일상 속에서 주어진 개념, 자연 법칙의 설명을 위해 도입된 개념 모두를 그저 수용한 채 시작하는 것이 낫다고 느낀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개념 사이의 관계가 우리의 일상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그것이 일상의 차원에서 어떠한 관계를 갖는지이다. 그것에 관해 상위 이론의 차원에서 설명해야 할 합리적 이유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우리는 모종의 오해를 해결해야만 했던 실용적 이유에서 이 질문들을 집어 내었고, 지금은 이 질문을 다시 버려야 할 때이다.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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