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쉽게 시작하지 못하는 편이다. 스스로 만족할 만한 그림이 떠오를 때까지 계속 미뤄버리는 습관이다. 완벽주의라기보다는 걱정이나 불안에 가까운 것 같다. 좋은 글이 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주저하게 된다. 그러다가 마감이 가까워진다. 시간에 쫓겨 만족할 만한 글을 쓰지 못한다. 마감을 넘길 때도 있다. 이 글도 마찬가지로 마감 전날에야 첫 문장을 쓰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지금 마음이 급하다. 누구 말마따나, 갈팡질팡하다 내 이리 될 줄 알았지.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두려워하는 건 반드시 찾아와.”(295) “이제야 모든 걸 알겠냐고 묻곤 하지.”(298) 언니네 이발관의 가사란다. 정용준의 「사라지는 것들」을 이번 텍스트로 고른 건 저 문장들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에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나온다. 지인 몇은 이 작품이 이상문학상을 딸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그랬다. 뭐 남는 것도 없이 의뭉스럽기만 하다고. 그런 면이 없잖아 있긴 한데, 뭐랄까, 2000년대 이후 한국문학에 왠지 모르게 자리잡은 의뭉스러운 스타일에 관해 얘기할 때마다 이런 식으로 면죄부를 주게 된다: 삶이란 게 원래 어렵고 의뭉스러운 게 아닌가?

소설은 이따금 지금-여기에 펼쳐진 어떤 감수성에 텍스트라는 형체를 부여한다. 거기에 소설의 좋음 하나가 있다. 이를테면 사회학자 김홍중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지진계’적인 성격이 있다고 했다.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그래서 그 ‘좋음’을 묻기 전에도 소설은 생각보다 자주 정치적이고 사회학적이다. 소설을 읽고 덧쓰는 일도 생각보다 자주 정치적일 수 있고 말이다. 어떤 소설의 좋음을 묻거나 주장하는 일은 우리가 실제로 세계를 어떻게 감각하느냐를 묻고 주장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음, 이거야말로 의뭉스러운 문학론이므로, 서론은 여기서 각설하자.

*

정용준의 「사라지는 것들」에는 나이 든 모자母子가 있다. 둘 다 어째 아슬아슬해 보인다. 우선 아들 성수는 이혼 후에 일자리를 그만 두고 불안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책상이 없고 동료가 없고 급여도 없는 일. 난 이걸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퇴직금을 조금씩 헐어 한 달 두 달 살고 있지만 그것도 언젠가는 바닥이 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차라리 편의점이나 치킨집을 할 걸 그랬네,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저 멍하니 앉아만 있다 보면 발밑으로 온갖 쓰레기들이 밀려들었다. 전망. 예상. 예감. 상상. 하나같이 나쁘고 안 좋은 것들뿐인 미래.

정용준 외. ‘사라지는 것들’. “제4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2019. 269p.

그 와중에 성수의 엄마는, ‘그만 살기로’ 마음을 먹었단다.

힘들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아파서도 아니고 죽고 싶어서도 아니야. 생각이라는 걸 해봤는데 그동안 고단했고 앞으로도 애쓰면 그럭저럭 버티겠지만 이제 그럴 명분도 이유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어. 멀쩡한 정신으로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생각해봤단다. 그리고 결심했어. 나는 이제 그만 살고 싶어.

위의 책. 270p.

성수의 입장에서는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힘들다, 죽고 싶다도 아니고, 그만 살기로 했다니. 게다가 멀쩡한 정신으로 두 번 세 번 생각한 후의 결론이라니. 나도 가뜩이나 힘든데, 엄마가 어떻게 아들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엄마는 그래봤자 달라질 거 없다며 ‘그만 말해. 기분 좋게 가고 싶어.’ 라며 선을 긋는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좋은 소설적 소재다. 그런데 정용준은 이 모자를 기묘한 동행 속으로 밀어넣는다. 소설의 도입에서 엄마는 갑자기 성수에게 전화를 걸어 강화도에 바다를 보러 가자고 한다. 성수는 엄마를 내버려둘 수 없어서 따라나선다. 그만 살고 싶다는 사람의 기행이라면 나라도 불안해서 그랬겠다.

이 동행을 통해 작가는 이 불안한 정서의 기원을 제시한다. 성수 부부가 두 딸의 양육을 성수의 엄마에게 맡기던 중 둘째 딸 지인이 교통사고로 죽는 사고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의 상황은 이런 식으로 제시되어 있다.

아이들은 여러 이유로 죽는다. 감기로도 죽고 물에 빠져서도 죽고 사탕이 목에 걸려 죽기도 한다. 당시 세 살이었던 둘째는 아파트에서 후진하던 미술학원 차에 치여 죽었다. 나는 회사에 있었고 아내는 학교에 있었다. 다섯 살이었던 첫째는 할머니의 왼손을 붙잡고 있었고 둘째는 세 살 난 아이가 대부분 그렇듯 지나치게 명랑하고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몰랐다. 굳이 책임이 있다면 주위를 살피지 못했던 운전자와 갑자기 도로에 뛰어든 아이에게 있다. 그러나 나와 아내, 엄마와 해인은 각자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와 아내는 희미하고 끈질기게 다른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을 거라고 의심했다. 둘 중 누구도 그 생각을 함부로 말하거나 묻지 않았지만, 희미한 안개 같은 그 의심이 우리 모두를 서서히 무너뜨렸다.

위의 책. 291p.

소설에서 출발선으로 제시하는 건 그러니까 누구의 탓이라고도 할 수 없이 찾아오는 불행이다. 성수와 아내의 희미한 의심은 “어머니는 왜 해인이 손을 잡고 있었을까. 해인이는 언니고 성격이 차분해서 안 뛰어다니는데.”(291) 라는 아내의 중얼거림처럼, 단지 남은 자들을 무너뜨리는 부질없는 발버둥일 뿐이다. 남은 자들 스스로와 서로에 대한 물음과 원망 같은 것들은 성수의 가족을 안에서 무너뜨렸다. 성수의 엄마는 성수가 뻔히 목격하게 될 장소에서 자살을 시도했고 성수 부부는 “숟가락으로 계란찜을 뜨다 말고” “이젠 그만둬야겠지?” 한 마디로 “단정하게” 이혼했다. (292)

그래서 소설이 드러내는 것은 불행 자체라기보다 불행 이후 무너져가는 자들의 모습이다. 「사라지는 것들」의 불행은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것’에 가깝다. 왜 그래야만 했는지를 묻자면 너무나 복잡하고 구차해지는 것이다. 붕괴는 예정된 수순이다. 그 후로는 성수 엄마의 말처럼, 모든 게 다 치욕이다.

(물론 여기에는 현대 한국의 가정형태와 관련된 구조적 문제를 물을 여지도 있다. 이런 불행을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칭하는 일은 안일한 읽기일지도 모르겠다.)

내 삶은 왜 이럴까. 이유를 생각해본 적도 있었어. 죄가 있었겠지. 운이 없었겠지. 실수를 했겠지. 나쁜 선택을 했겠지. 누가 나를 미워하는 거겠지. 하지만 모르겠더라. 극복해보려 애썼는데 뭘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건지 몰라 아무것도 못했다. 그 후로 모든 게 다 치욕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뻔뻔하게 사는 것도. 따뜻하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분위기도. 화를 내지 않으려고 전력을 다해 노력하는 지인 엄마를 보는 것도. 이제 날 좀 내버려둬라. 그만. 그만하고 싶어. 피곤해 너무 피곤해.

위의 책. 294p.

죽기로 결심했다는 엄마의 선언은 그런 비극의 복잡함 뒤에 남는 치욕을 그만두겠다는 뜻이 된다. 소설에서 에피소드 사이의 다리 기능을 하도록 장치-소재로 삽입되어 있는 게 하필 일본의 단시 장르 하이쿠라는 것을 이렇게 의미화해볼 수 있지 않을까. 엄마는 성수에게, 나중에 자기가 죽으면 하이쿠를 지어 줄 수 없냐고 묻는다. 이런 대목은 자기 마지막이 간단하게 정리되었으면 좋겠다는 인물이 소망하는 것으로 읽힌다. 그러니까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299)라고 성수가 아무리 역정을 내 봐야 소용 없다. 엄마는 그대로 사라져갈 것이다 .

그런데 그렇게까지 된 마당에 소설은 왜 둘을 동행시켰을까.

*

이쯤에서 ‘사라지는 것들’이라는 소설의 제목을 묻게 된다. 무엇이 사라진다는 것인가. 기묘한 불화의 선을 지난 둘을 기어이 동행시키는 것은 어쩌면 그간 성수의 가족에게서 사라진 것, 남은 자들이 으레 잃어버리곤 하는 것을 묻는 소설적 작업이 아니었을까.

내게 이 소설의 결절점을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둘의 대화가 갑자기 터져나오는 대목─앞에서 제시한, 과거 둘째 딸의 사고가 제시되는 대목을 꼽겠다. (289) 그 전까지 성수와 엄마의 대화는 화가 나지만 화를 꾹 참고 도화선 주변을 빙빙 도는 대화에 가깝다. 성수가 말을 삼키는 장면이 계속해서 제시되고 엄마도 어떤 물음에는 대답을 피한다. “너희들은 언제 나랑 뭘 상의한 적 있었니? 그리고 내가 그걸 말하면 너희들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 거잖아. 상황을 바꿔줄 능력도 없고”(273)라는 엄마의 일침도 있다.

‘소통의 부재’라는 클리셰를 떠올리게 되는 대목이지만, 여기서는 남은 자들의 윤리 비슷한 무엇과 결합해서 양상이 약간 다르게 나타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성수에게 말을 하지도 않고 성수의 동생 진수가 있는 교토로 다녀왔다는 어머니의 얘기를 듣는 대목, 성수가 어머니의 교토 기행을 가만히 누워 상상하는 대목을 읽다 보면 사건 이후 성수의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이유를 생각하게 된다. 서로의 얼굴을 보면 사건에 관한 기억들이 계속 소환되어서 참을 수 없는 게 아닐까. 화가 가득 차 있지만 서로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답답함과 참담함. 이국의 묘지에서 하이쿠 시집을 사 오는 어머니의 에피소드는 어쩐지 분위기를 위해 덧칠된 장식같지만 엄마라는 인물 나름대로는 적절한 탈출구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성수의 아내가 성수에게 했던 쓴소리는 복기할 만하다.

당신, 그동안 아이 지키고 어머님 지키고 나 지키고 살아왔지. 지인이 일 때문에 선로 상처주고 싸울까 봐 걱정하고 애쓰며 살았어. 눈치 보고 염려하고 말이라도 나올 것 같으면 말을 돌리거나 그도 아니면 전부 당신 탓으로 돌리려고 노력했고. 알아. 아는데, 그건 아니야. 당신은 화냈어야 했어. 탓했어야 했어. 부주의했던 당신 엄마를. 알량한 석사 학위 하나 따보겠다고 애들 팽개치고 밖으로 나돌며 어머님께 애를 맡겼던 나에게 말을 했어야 했다고. 차라리 그게 나아.

위의 책. 296p.

이건 서로에게 화를 내지 못하고 스스로를 갉아먹었던, 남아버린 자들의 어떤 깨달음 같다. 나는 여기서 어쩔 수 없이, 한국 사회가 겪은 상실에 대해 문학이 한동한 취했던 자세를 연상하게 됐다. 살아남은 자들의 윤리는 한동안 ‘더 이상 쓸 수 없음’의 형태로, 통렬한 자책과 무력감의 애도로 점철되어 있었지 않나. 어떤 것들이 사라지고 난 뒤에 쉽게 빠지곤 하는 함정. 그 함정에 빠지는 것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소설이 인용하는 장미여관의 가사는 그게 함정이었다는 걸 가만 돌아보는 자의 말로 들린다. 그리고 그 돌아보는 자는, 어떤 것들이 사라지고 난 뒤 그 함정에서 또다른 것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감지한다.

두려워하는 건 반드시 찾아와.

이제야 모든 걸 알겠냐고 묻곤 하지.

위의 책. 각각 295, 298p.

이전에 아내와 이 노래를 들었던 것을 기억해내서 그녀와 통화한 이후, 성수는 조금은 노골적인 뉘앙스로 자기진단을 감행한다.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길래 언젠가 그것이 찾아오리란 생각에서 이토록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그래서 일단 애썼다. 방어적으로 살았다. 사건 하나, 갈등 하나가 뭔가를 일으킬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을 걱정하고 대비하며 지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어떤 일 때문에 무너지는 게 아니었다. 일이 일어나지 않게 버티는 힘으로 무너지는 거였다. 안에서 밖으로 점점 갈라지다가 스스로 무너지는 초라한 집 한 채. 그래서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어리석은 삶.

위의 책. 296p.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것이 오는 게 두려워서 버티다가, 그 버티는 힘 때문에 안에서부터 무너져내리는 집. 성수의 가족은 그런 식으로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성수는 “이제야 뭘 좀 알겠어. 알았는데……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300) 라고 중얼거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앞서 잠깐 언급만 하고 넘어갔던 결절점, 비로소 이 기묘한 모자의 불화가 원인을 드러내는 대목은 소설에서 훌륭한 다리 역할을 수행한다. “말 나온 김에 엄마, 하나만 물을게. 그때. 그날. 지인이 그렇게 되고.”(289)라며 폭발하듯이 전개되는 대화는, “안 돼, 성수야. 말하지 마. 그동안 서로 말하지 않았던 건 다 이유가 있어서야. 제발 그러지 마.”(289) 라는 내면의 설득을 무시하고 다리를 건넌다. 연쇄되는 폭발처럼 엄마는 그간 쌓여 있던 넋두리를 늘어 놓고(사실 꼭 읽어야 할 대목이지만 너무 길어서 인용할 수 없다), 꾹꾹 참는 울화처럼 감정의 형태로만 제시되던 에피소드가 모습을 드러낸다. 소설의 형식, 인물들의 세계, 그걸 읽는 우리 독자들까지 한꺼번에 다리를 넘는 순간이다.

여기에서 어떤 기간을 특징지었던 감수성에 대한 청산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나 싶다. 이 소설에 2019년 지금 상을 주는 건 아무래도 늦은 구석이 없잖아 있다. 근데 그건, 문학장에서 이제야 이런 청산이 이루어지는 거라는 말도 되지 않나. 지면이 허락한다면, 다음 지면에서는 최근 권여선의 「레몬」에서 나타난 애도의 모습과, 정용준의 이번 「사라지는 것들」을 포함한 몇몇 작품에서 나타나는 애도의 모습을 비교하고 싶다. 하지만 여기선 여기까지만 하자.

*

사라진 것이 뭐냐면, 그건 성수의 말마따나, 아직 모른다. 그들의 딸 ‘지인’일 수도 있고 안에서부터 무너져 내린 가족일 수도 있다. 성수의 엄마일 수도 있겠다. 다만 남은 것은 있다. 소설의 말미에서 성수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다.

알아서 해. 엄마는 뭐 엄마 삶이 있으니까. 하지만 나도 입장이 있어. 막을 거고 방해할 거야.

위의 책. 302p.

삶을 그만두겠다는 엄마를 보내면서 성수는, 알아서 하라고, 대신 나도 입장이 있으니 막을 거라고 말한다. 이 작품에 대한 어떤 코멘트들은 ‘성수’라는 인물의 흐릿함을 지적하거나 인물들의 내면이 너무 얕게 서술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근데 나는 이 정도면 되지 않나 싶다. 하나의 작품에서 어디까지를 바랄 수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소설 한 편이 인물 하나를 바꿨으면 그것대로 성공한 소설 아닌가. ‘나도 입장이 있다’는 말이 저렇게나 힘차게 들리는 건 내가 소설의 대사를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는 문학 청년이어서 그런가.

이 이야기에서 내게 남은 것은 더 이상 갈팡질팡하지 않게 된 나이 든 한 사람의 모습이다. 앞서 이 소설을 고른 이유로 ‘나와 닮은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들었다.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르고 두려워하는 자, 그 와중에 사라지는 것들이 사라지는 줄도 모르고 있는 자, 다음이 무서워서 버티다가 안에서부터 무너져내리는 자. 나와 닮은 이 인물들과 함께 다리 하나를 건넜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좋은 소설이었다. 소설의 좋음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파상
studien618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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