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랜만에 바다에 갔다. 해변의 왼쪽 끝부터 오른쪽 끝까지 걸었다. 그러니까 왼편에는 바다를 오른편에는 번쩍거리는 밤의 해안로를 두고. 파도가 칠 때마다 구불구불한 띠가 생기고 사라졌다. 이 젖은 모래의 띠는 밤에는 빛을 받아서 무지개빛으로 굵어진다. 바다와 육지의 경계선이다. 삼 년 전쯤에 이걸 가지고 습작을 쓴 적 있다. 그 때의 나는 내 분신이 선을 넘어가게 했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구불거리고 번쩍이는 해안선과 나란히, 하릴없이 걷다 집에 갔다.

랑시에르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정치에 대한 철학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하나의 명령문으로 잘 요약될 수 있다. 정치를 그것에 내재하는 위험에서 빼내기 위해서는 정치를 마른 곳 위로 끌어내고, 그것을 육지 위에 안착시켜야 한다.

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역.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길. 2013. 6p.

바다에는 휘몰아치는 파도가 있다. 예로부터 치자治者들은 그 불안정성을 두려워했나보다. 랑시에르는 정치에 관한 사유의 역사가 바다로부터 그 불안정성을 길들이는 과정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개인들의 중합될 수 없는 벡터들이 있고 정치란 그것들을 조율해서 하나로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질적인 힘들은 배제되고 하나의 체제가 선다. 체제는 기왕에 성립된 구획 안에서 구획 안의 자들 간 분배를 책임진다. 랑시에르가 ‘치안police’이라 불렀던 정치 메커니즘이다. 치안-정치 안에서 기존의 자들은 기존의 기준 아래 몫을 받는다.

랑시에르는 치안-정치에 다른 ‘정치’를 대비시킨다. 지난 글에서도 소개했듯이 그는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감성적인aesthetical 것의 분배) 과정으로서의 정치를 제안한다. 기존에 설정되어 있던 구획의 밖, 가시적/가청적인 것으로 분류되지 않았던 것들에 그들의 몫이 재분배되는 과정이 비로소 정치다. 지난한 불일치의 과정. 기존에 받아들여지던 구획을 의문시하는 존재들의 출현, 그 의문시의 과정이 치안-정치에 대비되는 불일치의 정치다. 말하자면 휘몰아치는 바다의 정치 비슷한 것일 테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치안-정치’를 마냥 부정적인 것이라 말한 적은 없다. 이를테면 그는 치안과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구분하고 있다. ‘정치’는 앞 단락에서 말한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 과정이다. ‘정치적인 것’은 ‘치안’과 ‘정치’의 길항이다.

나는 「정치, 동일시, 주체화」에서 공동체를 경영하는 기술인 치안과 평등 전제를 현실화하는 것인 정치를 구별함으로써 바로 이 분리를 정초하고자 했다. 이 분리는 정치적인 것에 더 분명하게 한정된 지위를 부여할 수 있게 해준다. 정치적인 것은 치안과 정치라는 두 원리가 충돌하는 장소이며, 하나가 다른 하나와 맺어지는 형태들의 체계다.

자크 랑시에르. 위의 책. 17p.

‘치안’은 단지 우리가 일반적인 의미로 ‘정치’를 이야기할 때 연상하곤 하는 하나의 가능한 체계다. 이 길항 관계를 끌어들이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만일 정치적인 것이 철학적 사유 대상으로 받아들여졌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 중성 형용사가 편리하게 정치(la politique)─정치의 일반적 의미는 당들 간의 권력 투쟁과 이 권력의 행사다─라는 실사와의 틈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정치가 아니라 정치적인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우리가 통치 책략이 아니라 법, 권력, 공동체의 원리들에 대해 말하는 것임을 가리킨다. […] 정치적인 것은 공통의 삶의 심급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

자크 랑시에르. 위의 책. 15p.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정치’라는 단어가 무분별하게 지칭하곤 했던 영역을 정확히 세분화하려는 의지다.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구분하는 일은 ‘정치’라는 일상적 언어가 수많은 방식으로 착취당하지 않도록 구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현실/현장 정치와는 다른 의미로 치안-정치와 불일치-정치를 구분하고 그 둘의 길항을 ‘정치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등식은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 중요했을 것이다. 이론에서 다루는 ‘정치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현실/현장 정치와는 다르며 그것을 혼동하는 순간 온갖 낭만화와 비약과 과도한 의미 부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건 지난번에 랑시에르를 소개할 때 미처 짚지 못했던 부분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애초에 랑시에르가 감각적인 것의 분배 과정으로써 정치 개념을 고안했던 것은 기존의 미학aesthetic, 예술 담론에서 시작한 게 아니었다. 그는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들의 삶에서 ‘감각적인 것’이라는 개념의 초안을 세웠던 듯하다. (위의 책. 118p. 역주12) 노동자들에게 낮은 오로지 노동을 위한 시간이었고 밤은 오로지 휴식을 위한 시간이었다. 마찬가지로 가정도 휴식을 위한 공간, 거리는 노동을 하기 위한 이동 경로로서의 공간이었다. 그들이 그들의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감각하는지, 그들에게 시간과 공간이 어떤 것으로 감각되도록 분배되어 있는지가 기존의 치안-정치에 해당한다. 그들이 밤을 혁명을 위한 자기 교육의 시간으로 재전유했을 때, 다시 말해 그들 스스로 밤이라는 감각적 대상을 재분배했을 때, 불화로서의 정치가 발생했다. 그리고 양자 사이의 충돌이 비로소 ‘정치적인 것’이었다. 이 메커니즘을 랑시에르는 ‘감각적인 것’이라는 테마를 통해 미학으로 전환했으며(aesthetika─감각/감성적인 것이라는 미학의 어원을 통해) 그의 예술론은 ‘정치적인 것’의 구조와 어떤 유비 관계를 만든다.

여기서 노동자들의 운동은 백번 양보해 현실/현장 정치였을지 몰라도, 그것의 구조를 추출하여 이론으로 끌어온 순간부터 그것은 ‘정치적인 것’이 된다. 엄밀히 말해 그들의 운동은 정치‘적인’ 운동이었지 않나. 그들의 불일치가 실제로 세상을 바꾼 것은 현실적으로 다른 메커니즘 위에 있었지 않나. 단지 불일치만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 수는 없다. 불일치의 목적은 새로운 치안을 구성하는 것이다. 또한 그 치안을 다음에는 다시 파괴하는 것이다. 치안 체제는 그 대립항으로서 항상 거기에 있다. 이 과정에는 항상 입법과 캠페인과 소송과 투표에 관련된 현실/현장 정치가 관련된다. 거기서 ‘정치적인 것’이 힘을 발하곤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치’라는 단어에는 이 모든 것이 혼재되어 있다.

이런 구분은 정말이지 치사해 보인다.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나. 비유컨대 이렇게 말하려 한다. 파도의 일렁임은 오로지 바다 안에만 있다. 육지는 항상 굳건히 해안로의 불빛을 내며 거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육지와 바다의 경계를 자꾸만 바꾸는 번쩍이는 해안선이다. 바다만으로 육지를 바꿀 수 있다고 믿을 때 우리는 바다 저 멀리로 표류하게 되며 육지에 안주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믿을 때 우리는 바다를 잊고 파도의 일렁임을 잊게 된다. 정말이지 식상하지만 여전히 중요한 비유라고 믿는다. 나는 함부로 파도가 육지를 집어삼킬 수 있다는 믿음과 멀어지려 한다. 온갖 수사와 낭만화에 함부로 빠지지 않으려 한다. 심지어 실제로 우리 삶을 바꾸는 것은 육지와 바다 사이의 길항이 아니라 저기 내륙의 구체적이고 제도적인 힘이다. 나머지는 그 과정이다. 그러나 과정이라고 해서 가치 없는 것은 아니다.

*

2008년 12월, 시인이자 철학자라고 소개되는 진은영이 창작과 비평 계간지에 “감각적인 것의 분배”라는 글을 썼다. 랑시에르는 2000년대 출현한 일군의 문제적 시인들─‘미래파’ 혹은 ‘뉴웨이브’라고 명명된─의 분석틀로 일단 제기되었다. 그리고 진은영은 시가 정치성을 담보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학장 전체의 질문으로까지 논의를 넓혔다. 문단은 그가 소개한 랑시에르의 이론에 주목했다. 뒤따라 3년 만에 20명 정도의 평론가/이론가들이 동원되어 30여 편에 가까운 후속 논의가 이어졌다. (정한아. ‘운동의 윤리와 캠페인의 모럴’. 상허학보 35집 2012. 182p)

그러니까 랑시에르 ‘사건’은 기괴하고 난해하고 폭력적인 이미지로 무장한 이런 시인들─황병승, 이민하, 김행숙, 김경주, …─이 한국 문단에 충격을 준 적 있다는, 옛날 이야기의 후속작이다. 그 난해함을 앞에 두고 문단은 둘로 갈렸다. 이 시들은 현실과 유리된 자폐적 세계로 퇴행하고 있다, 라는 비판론이 한 쪽에 있었고, 이 시들은 그간 없었던 이질적인 감각의 출현을 보여준다, 우리 시의 미래가 여기에 있다, 등의 긍정론이 한 쪽에 있었다. 으레 그렇듯 문단 전체가 딱 양분되지는 않았지만 뭐 그런 경향성이 있었다는 얘기다.

여기에 문학의 정치적 무능에 대한 불안증이 결부된 것이다. 이 시들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 것인가. 이 시들은 정확히 어떤 변화를 불러왔는가. 한국 문학의 정치적 역량은 소진되지 않을 수 있는가. 뭐 그런 물음들. 그런데 어째 좀 이상하다. 여기에는 강한 전제가 깔려 있다: 문학은 정치적이어야만 한다!

이를테면 이후의 논의가 주목했던 진은영의 대목은 이런 것들이다.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지 방문을 하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을 쓸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사회참여와 참여시 사이에서의 분열, 이것은 창작과정에서 늘 나를 괴롭히던 문제이다. […]

새로운 시들을 둘러싼 이 논의들은 여러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나를 난감하게 만드는 문제, 즉 문학과 윤리 또는 미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영원 회귀하는 질문들 그리고 그 대답들로 느껴진다. […]

그래서인지 얼마 전 신간 서적들 가운데 ‘미학과 정치’라는 부제가 붙은 자끄 랑씨에르(Jacques Ranciere)의 『감성의 분할』을 발견했을 때 나는 먼 친척 아저씨가 보내온 달콤한 과자상자를 받아든 아이처럼 설레었다. 혹시 이 상자 속에는 나의 오랜 허기와 미각을 동시에 만족시켜줄 것이 들어 있지 않을까?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창작과 비평”. 36(4). 69-70p.

여기에는 문학/미학이 정치적인 역량을 담보하게끔 하고 싶은 욕망이 노골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랑시에르는 한 평자의 말마따나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대안이었을 것이다. (이상옥. 2017.) 앞서 잠깐 얘기하고 지나갔던 랑시에르의 미학-정치 이론을 자세히 소개하자면 다음 비슷할 것이다.

그가 가장 먼저 전제로 세우는 것은 처음에 이야기했던 치안-(불화로서의)정치-정치적인 것의 삼항 구도다. 그리고 이 삼항은 실제 입법/투표 등의 현실/현장 정치와는 또 다르다. 앞선 인용이면 충분한 근거가 될 거다. 문제는 ‘감성의 (재)분할’,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 등으로 번역되는 불화로서의 정치 개념이다.

정치는 공동체의 공동의 것을 규정하는 감성의 분할을 재구성하는 일을 하며, 새로운 주체와 대상들을 공동체에 끌어들이고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만들고 시끄러운 동물들로만 지각됐던 사람들의 말을 들리게 하는 일을 한다. 대립을 창조하는 이러한 작업은 정치의 미학을 구성한다.

자크 랑시에르. 주형일 역. “미학 안의 불편함”. 인간사랑. 2018. 55p.

사람들이 어떤 감각적 대상을 어떤 방식으로/어떤 것으로 수용하는 일이 곧 ‘공동의 것’이라는 구획이 된다. 그 구획 내에서, 구획을 유지하는 작용이 치안으로서의 정치다. 그 구획 자체를 의문시하는 이질적인 감각적 대상, 감각 방식의 출현이 불화로서의 정치다. 이 두 정치 원리 사이의 길항이 감성의 분할 과정으로서의 ‘정치적인 것’을 만든다.

이 작업이 정치의 ‘미학’을 구성한다고 한다. 이때 ‘미학’은 뭔가.

“미학”은 따라서 이 텍스트에서 두 가지를 지칭한다. 예술에 대한 가시성과 명료성의 일반적 체제, 그리고 이 체제의 형태들에게 속하는 해석적 담론의 양식이 그것들이다.

자크 랑시에르. 위의책 . 37-38p. 각주5.

예술이 있기 위해서는 그것을 식별하는 시선과 생각이 있어야 한다. 이 식별은 그 자체로 복잡한 구별의 과정이다.

자크 랑시에르. 위의책 . 32p.

미학 담론이 말하려고 노력했던 것은 사변적 인간들의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의 사물들을 식별하는 새롭고 모순적인 체제이다. 바로 이 체제가 내가 예술의 미적 체제라고 부르자고 제안한 것이다.

[…] “미학”은 교과목 명칭이 아니다. 예술의 특수한 식별체제의 명칭이다.

자크 랑시에르. 위의책 . 34p.

그러니까 감성적인(감각적인aesthetic) 것으로서의 ‘미학’은 우리가 무엇을 예술이라고 부르는지를 묻는 일, 그리고 예술과 관련된 사물들/형식들의 감각적 식별/인정 방식을 규정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뒤샹의 <샘>은 일상적 시공간의 감각 대상이었던 변기를 예술적 시공간의 감각 대상으로 바꿈으로써, 미학의 체제에 변화를 준다. 관객과 공연자의 위치를 바꾸는 식의 현대 극예술은 연극이라는 예술 장르에 연관되어 있는 주체들이 극의 상연 동안의 시공간에서 감각되고 감각하는 방식을 바꿈으로써 미학의 체제에 변화를 준다.

위험을 무릅쓰고 간단하게 말하자면, 미학이란 결국 ‘무엇을 무엇으로 부르느냐(감각하느냐)’의 문제다. 애초에 랑시에르가 세웠던 정치 삼항 구도가 예술과 미학을 이야기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렇다면 그의 이론에 꽤 매력이 생긴다. 이를테면 진은영 또한 이런 구절에 혹했을 것이다.

예술의 특특함이 지시하는 것은 바로 제시 공간의 분할이다. 그 분할을 통해 예술의 사물들이 식별된다. 그리고 예술행위를 공동의 문제에 연결시키는 것은 바로 특정한 시공간의 물질적이고 상징적인 구성이며, 감각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들에 대한 중지의 물질적이면서 상징적인 구성이다. 예술은 우선 그것이 세계의 질서에 대해 전달하는 메시지들과 감정들 때문에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예술은 그것이 사회의 구조들, 갈등들, 사회집단들의 정체성들을 재현하는 방식 때문에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예술이 정치적인 것은 예술이 이 기능들에 대해 두는 간격 때문이고, 예술이 설립하는 시간과 공간의 유형 때문이며, 예술이 이 시간을 분할하고 이 공간을 채우는 방식 때문이다. […] 예술의 목적은 물질적이고 상징적인 공간을 재분할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통해 예술은 정치를 건드린다.

자크 랑시에르. 위의책 . 53p.

이것은 예술과 정치는 서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 문제가 될 분리된 항구적인 두 개의 현실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들은 감성 분할의 중지된 두 가지 형태들이다. 두 가지 모두 식별의 특수한 체제에 매달려 있다.

자크 랑시에르. 위의책 . 56p.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 하나가 있다. 예술은 정치‘적’이다. 예술은 정치를 ‘건드린다’. “어떤 방식으로든 정치는 자신의 미학이 있고 미학은 자신의 정치가 있다”지만, (진은영 ‘분배’에서 재인용. 78) 이는 미학과 정치가 ‘같다’는 뜻이 아니며, 존재론적인 틀을 공유하고 있는 이형의 존재들인 것으로 읽어야 한다. 그러니까 “예술과 정치는 이처럼 특수한 공간과 시간 안에 있는 독자적 몸의 현존 형태들로서 그들 자신이 되기 전에 연결돼 있다.”(“불편함” 57)라는 멋짐 폭발하는 구절 앞에서도 좀 냉정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예술과 정치는 불화와 치안이 길항하는 ‘정치적인 것’, 즉 감성적인 것의 분할 과정─그가 정의한 ‘미학’의 메커니즘을 공유한다. 메커니즘을 공유한다고 해서 두 개념이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미학은 정치적이며, 정치는 미학적일 수 있다. 정확해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1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 게재된 이상옥의 글은 흥미롭다. (2000년대 후반 ‘시와 정치’ 논쟁과 근대적 문학 관념의 아포리아. 어문론총 74호. 2017.12.) 그는 당시의 랑시에르 담론이 사실 문학과 정치 간의 화해 불가능한 간극을 재확인하는 데 그쳤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자세히는 이렇다.

문학의 ‘자율성’이라는 모더니즘적 담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향이 한 쪽에 있었다. 예술/문학이 삶/정치와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없다는 미학주의적 입장을 고수하는 바람에, 문학에 정치적인 것이 잠재적으로 담보되어 있어서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문학은 정치적인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식으로 랑시에르를 해석하는 낭만화. 여기서는 랑시에르가 그렇게 구분하려고 했던 예술/미학/정치의 개념들이 용해된다. 정치라는 단어는 구차해질 때까지 확장되면 안 된다. 다른 한 편에는 문학의 정치성을 해석/수용 단계로 미뤄버리는 방식으로 문학과 정치 간의 간극을 재확인하는 경향이 있었다. 비평가나 독자를 거쳐서야만 시와 정치를 사유할 수 있다면 애초에 시와 정치를 이으려고 랑시에르를 도입하는 일은 소용 없는 일이다. 이 역시 예술적 자율성이라는 그간의 미학주의적 입장을 극복하지 못하고 문학의 정치적 효력에 대한 기대를 문학 밖의 영역으로 돌려버리는 셈이다.

뭐 그렇다고 한다. 그런데 재밌는 건 논자 이상옥도 마찬가지로 ‘문학이 직접적으로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단 거다. 오히려 기존의 논자들보다 훨씬 급진적인 것 같다. 애초에 문제틀이 이런 거였으니까: ‘문학이 직접적으로 정치적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데 실패했다! 성공했으면 좋을텐데!’ 이런 식이었다면 좋았을텐데: ‘애초에 안 되는 걸 가지고 헛다리 짚고 있었다!’

오히려 나에게 중요했던 것은 그가 비판한 신형철의 대목이다.

이런 독법은 ‘비평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기도 하다. 앞에서 비평은 정치적인 것을 향해 모험을 하는 시들과 함께 고뇌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것은 모든 시인들이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시를 써야 한다는 뜻이 아닐뿐더러 모든 비평이 그런 지도에 나서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비평은 한편으로는 모험하는 시인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성공적인 성취들을 지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어쩌면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 첨예하게 미학적인 시들에서 우선 그 미학적인 것의 핵심을 정확하게 읽어내고(우리는 이것을 생략하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투박함을 혐오해야 한다), 그 이후에 거기에서 정치학적인 것까지를 읽어내는 일 말이다. 어떤 시인이 직접적으로 정치적이기를 원하지 않는 이상 그의 시는 최대한의 경우 정치학적인 시로 읽힐 것이다. 그러나 비평은 이것을 어떤 결함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정치학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의 장 자체를 성찰하는 계기가 될 논점들을 제공함으로써 또다른 방식으로 공동체에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비평은 텍스트를 통과하는 문을 여는 작업이다. 한권의 시집 앞에 우리는 선다. 미학적인 것의 문을 열면 그 안에 사회학적인 것의 문이 있고, 그 문을 열면 다시 정치학적인 것의 문이 있다. 독자가 마침내 정치적인 것의 문을 열고 광장으로 뛰쳐나갈지는 알 수 없지만 뛰지는 않더라도 아마 걸음걸이 정도는 달라질 수 있지 않겠는가.

신형철. ‘가능한 불가능’. “창작과 비평”. 38(1). 385p.

개념이 훨씬 엄밀해져 있지 않나. 신형철이 말하는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시는 시위와 투쟁 같은 현장/현실정치적 역량을 갈망하는 시일 것이고, ‘정치학적인 시’는 아마 랑시에르가 말한 ‘정치적인 것’을 실현하는 시 정도인 것으로 조심스레 다시 써 보려 한다.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이 내게는 중요해 보인다는 이야기를 몇 문단째 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글에는 중요한 지점─정확히 이상옥이 비판한─이 하나 더 있다. 그는 시나 예술이 혼자서 정치적일 수 있다는 식의 얘기보다는 비평가와 독자가 그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지/읽어내는지’를 염두에 둔다. 다른 논의들보다 한결 섬세하다고 느끼는 것은, 여기에는 최소한 작품이 스스로 정치적인 ‘주체’가 될 수는 없다는 선 긋기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진은영이 노동운동 현장에 대한 동경을 암시하며 ‘정치적인 시’란 단어를 호명했을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예술은 정치적일 수 있으되, 정치‘할’ 수는 없다.

이건 사실 랑시에르 논의 초반에 강계숙 평론가가 지적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우선 시의 정치성을 말하려 한다면, 정치적 행위의 수행이 시의 몫인지, 시인의 몫인지를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강계숙. ‘‘시의 정치성’을 말할 때 물어야 할 것들’. “문학과사회”. 22(3). 386p.

시-문학-예술에 내재되어 있는 정치성을 논하려 했던 지난한 물음들 사이에서, ‘정치의 주체’는 누구로 설정되었는가? 구분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맞다. 그런데 신형철의 글에서는 그 다음 걸음이 보이는 것 같다. 시 혹은 시인이 정말 정치할 수 있는가? 텍스트로 되어 있는 시가 정치적인 힘을 가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또는 사람이 시민이 아니라 ‘시인으로서’ 정치할 수 있는가? ‘시인으로서’ 정치할 수 있다면 그건 무슨 의미인가?

여기 관련해서 랑시에르 이론에 재밌는 점이 하나 있다. 사실 미학이 예술과 그에 관련된 사물들을 식별하는 체제라고 했을 때, 도대체 어떻게 불일치가 일어나는가? 이미 확립되어 있는 감각 양식─제도나 관습 같은 것들과 독립적인 새로운 감각 양식은 가능하기나 한가? 이미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을 예술로, 관객의 자리를 관객의 자리로, 시적인 것을 시적인 것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질적인 것과의 불화는 어떻게 성립하는가? 이질적인 것이 발을 붙일 자리가 있는가?

앞서 이상옥의 글에서 언급되었던 ‘미적 자율성’ 문제를 랑시에르 또한 언급하고 있다. 자율성은 사실 모더니즘 예술 사조 이후 식상한 테제다. 일체 사회적/정치적인 것들에서 벗어나 스스로 아름다운 예술. 그러나 랑시에르는 약간의 변주를 준다.

따라서 바로 자율적 경험형태로서 예술은 감성의 정치적 분할을 건드린다. 예술의 미적 체제는 자율적 예술과 타율적 예술 사이의, 예술을 위한 예술과 정치에 봉사하는 예술 사이의, 박물관의 예술과 거리의 예술 사이의 모든 대립을 사전에 거부하는 양식에 입각해 에술의 식별형태들과 정치적 공동체의 형태들 사이의 관계를 만든다. 왜냐하면 미적 자율성은 모더니즘이 찬양한 예술적 “행위”의 자율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각적 경험형태의 자율성이다. 그리고 새로운 인류의 씨앗, 삶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새로운 형태의 씨앗처럼 나타나는 경험이다.

자크 랑시에르. 주형일 역. “미학 안의 불편함”. 인간사랑. 2018. 65p.

그러니까 자율적인 것은 감각 경험이지 예술 작품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건 바꿔 말하면 이런 뜻인 것 같다. 이질성의 출현은 인간의 감각이 자율적이므로 가능하다. 그렇다면 치안-불화의 길항으로서의 ‘정치적인 것’ 혹은 ‘미학적인 것’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저 대목의 근거를 좀 더 이야기해야 한다. 랑시에르는 쉴러와 칸트를 경유하고 있다. 이해를 위해 진은영의 해제 격 논문까지 인용한다.

흥미로운 것은 미적 판단, 즉 미적 공통감각이 발생하는 경우이다. 여기서는 네 능력 중 어떤 능력도 입법하지 않는다. 능력들은 어떤 규제도 받지 않은 채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조화를 찾고 결국 일치를 이룬다. 아렌트가 칸트의 철학에 매료되었던 것은 바로 이 점이다. 그녀는 칸트의 ‘취미(Geschmack)’에 내포된 자유로운 일치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그로부터 자유롭고 조화로운 정치공동체 형성의 기반을 이끌어내려 한다.

진은영. ‘숭고의 윤리에서 미학의 정치로’. “시대와 철학”. 제20권 3호. 409p.

칸트는 취미의 공적 성격의 근거를 상상력(Einbildungskraft)과 공통감각(sensus communis)에서 찾는다. […] 상상력은 직접적인 현존에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쾌감을 주기 때문에 무관심성(Interesselosigkeit)을 지닌 미를 산출할 수 있다.

진은영. 위의 글. 410p.

이것이 바로 쉴러가 “놀이”라는 용어 안에 요약한 감성 분할의 새로운 형태이다. 가장 좁게 정의된 놀이는 자기 자신 외에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 활동이다. 그것은 사물과 사람들에 대한 어떤 유효한 능력도 갖지 않는다. 놀이의 이 전통적 뜻은 미적 경험에 대한 칸트의 분석에 의해 체계화됐다. 이 분석은 실제로 이중 중지라는 특성을 갖는다. 오성의 카테고리들에 따라 감각적 자료들을 결정하는 오성의 인지능력의 중지, 그리고 욕망의 대상들을 강제하는 감성능력의 상관적 중지가 그것들이다. […]

왜 이러한 중지는 동시에 삶의 새로운 기술, 공동의 삶의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가? 달리 말해, 어떤 점에서 특정한 “정치”가 이 체제 안에서의 예술의 특수성에 대한 정의 자체와 동질인가?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대답은 이렇게 작성될 수 있다. 그것은 그 정치가 지배의 감각중추와는 다른 감각중추에 예술의 사물들이 속한다는 것에 의해 예술의 사물들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칸트의 분석에서 자유로운 놀이와 자유로운 외형은 재료에 대한 형태의 권력을, 감성에 대한 지성의 권력을 중지시킨다. 이러한 칸트의 철학적 제안들은 쉴러에 의해 프랑스 혁명의 맥락 하에서 인류학적이고 정치학적인 제안들로 바뀐다.

자크 랑시에르. 주형일 역. “미학 안의 불편함”. 인간사랑. 2018. 62-63p.

인간의 미적(감각적 경험)이 자유롭다는 믿음. 이성과 오성에 구애받지 않는 미적 판단은 상상력-무관심성에 의해 자유로운 취미판단으로 이어지고 인간이 매번 다른 감각중추를 향유할 가능성이 생겨난다. 이 미적 경험의 자율성이 ‘정치적인 것’의 가능조건이며 공동의 것을 만든다.

그러니까 ‘자율적인 것은 작품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 경험’이라는 명제를 다시 생각해 보자. 랑시에르의 이론이 ‘문학이 직접적으로 정치적일 수 있다’는 식의 낭만적인 이론으로 전유되었던 한국의 ‘시와 정치’ 논의 일련에서 빠져 있었던 것은, 시인이라는 아이덴티티나 시라는 예술 장르가 아니라 현실의 인간들이 정치의/정치하는 주체여야 한다는 간단하고 냉정한 인식이었지 않나. 그게 빠져 있음으로써 시에다가 정치적인 위상을 부여하려는 미학주의의 치안을 반복하고 있었지 않나. 랑시에르를 인용하면서도.

랑시에르는 미학주의자가 아니라 정치철학자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결국 단순하게 말하자면 좋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원리를 고민한 것이 그의 작업이다. 그리고 그 정치 행위의 주체는 인간이며 그 가능성은 인간의 자율적 감각 경험 능력에 있다. 예술 작품이 아니라 인간이 정치한다. 반복건대 예술은 정치적일 수 있을 뿐이다.

*

그래서 어쩌겠다는 이야긴가. 나는 지난 글을 이렇게 맺었다.

그러므로 이 명제 위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예술 혹은 예술 비평에서 정치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이는, 정치적인 것을 넘어 정치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여전히 이 작업은 랑시에르를 경유할 것이다. 그러나 그간 내가 혼동해 온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구분을 동반해야 한다. 비판critique적인 자세로 랑시에르를 재독하는 일─랑시에르에 대한 기존의 내 독해를 재독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고 나면 비평의 실천적 역량에 관해 우리가 나눴던 대화들을 좀 더 의미 있는 맥락 위에 위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내 다음 과제는 비평(`)을 제안하는 일이다. 그 비평(`)은 비판critique을 섣불리 용해시키지 않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실천의 한 양태이며, 유아론의 협잡을 경계하고 공동의 것을 말해내는 비판적 존재론이 될 것이다. 이 상상력을 무어라 부를까.

파상. ‘우리는 우리를’. “지평L`horizon”. 19.8.21.

랑시에르의 미적 자율성 개념에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한 건 여전히 예술과 함께 정치를 말하기 위해서다. 다만 ‘정치의 주체는 예술이 아니라 인간이다’라는 징검다리가 필요했다. 그 징검다리를 건너면 새로운 땅이 있다.

그런데 이것 또한 예술을 좋아하는 자의 강박 아닌가. 이 글은 진은영의 글과 무엇이 다른가. 글쎄,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의 생각은 거기서 거기인 것 같다. 예술이 직접 세계를 바꿀 순 없다 해도, 예술에 뭔가 대단한 게 있었으면 좋겠다. 문제는 예술과 정치의 개념을 용해시키지 않는 일이다. 정치는 인간의 것, 인간’들’의 것이기 때문에 항상 공동의 무엇이 결부되어 있다. 예술로 섣불리 정치를 이야기하는 일은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일과 비슷하다는 것 정도가 이 글의 요지라고 하겠다.

그래서 ‘예술 혹은 예술 비평에서 정치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이는, 정치적인 것을 넘어 정치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내 명제를 이쯤에서 다시 쓸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저 명제는 ‘예술 혹은 예술 비평이 정치적인 것을 넘어 정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꿈이 있는 이는 예술이나 예술 비평 너머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에 가깝다.

문제는 예술이나 예술 비평을 대단한 것으로 추앙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우리를’ 말하는 것이다. 미학적인 것에 정치적인 것이 있다는 랑시에르의 테제는 결론이 아니라 전초가 되어야 한다. 사실 그의 텍스트에서 ‘치안-정치 vs 불화-정치’라는 구도는 사소하리만치 단순하고 넓다. 예술/미학적인 것 안에 있는 불화-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에 홀리면 막상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다. 이질적인 것들은 충분히 범람하고 소비되고 있다. 단현이 지난 글에서 지적했듯이 주체를 강화하는 데 수단으로 소모되고 여정이 퀴어 소설의 정의 문제로 지적했듯이 배제를 강화하는 경계로 쓰인다. 이전의 치안 체제에서 다음 치안으로 나아가는 힘/메커니즘이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일 텐데, 이래서는 원래의 치안을 붙드는 일밖에는 안 된다.

이 ‘정치적인 것’은 사실 가치중립적인 것에 가깝게 읽힌다. 형식에 해당하지 내용은 없다. 말하자면 옳음에 대한 기준, 더 나은 우리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공통의 삶의 심급’을 언표의 대상으로 삼지만 그 메커니즘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우리의 삶은 어때야 하냐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건 우리의 몫이다.

이를테면 이런것: 이번에 고향에서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 이 책과 관련된 문단의 반응을 이해하고 싶었다. 읽고 나서 생각건대, 이 책에 얽힌 담론들은 그야말로 랑시에르적 의미에서 ‘정치적’인 거였다. 한 편에서는 문학의 형식적 완성도/아름다움의 기준을 고수한다. 다른 한 편에서는 ‘왜 이것을 소설로 부르면 안 되는가’라며 기존 문학 담론에 내재되어 있던 위계적/남성적 기준을 묻는다.

소설 자체가 아니라 소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문제다. 엄밀히 말해서 텍스트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 김세희 작가는 『항구의 사랑』의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설은 경험이 아니라 경험의 해석이다.” 그렇다면 소설을 읽는 일은 경험의 해석을, 하나의 관점을 다시 읽는 일이다. 그리고 경험의 해석과 그 해석을 읽는 일 양쪽에 모두, 본질적으로 호오 판단(무관심까지 포함해서)이 수반된다.

말하자면 『82년생 김지영』을 이야기할 때, 기존의 문학적 좋음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좋은 소설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리얼리티를 드러내기 때문에 ‘좋은 소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비슷한 오류가 있는 것 같다. 전자는 기존의 치안을 문제삼지 않으며 후자에는 ‘불화를 담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이며 그래서 좋다’라는 성급함이 있다.

중요한 건 ‘무엇이 좋은 것인가’를 묻는 충돌의 과정이다. 서로의 호오가 부딪힐 때 ‘우리’의 경계면이 흔들린다.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호오 판단의 근거는 텍스트 외부에 있다. 『82년생 김지영』이 좋은 작품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이 작품의 어떤 점을 우리가 왜 좋거나 나쁘다고 여기느냐가 문제다. 정치적인 힘이 여기서 발생한다.

어떤 비평은 이 지점까지를 잡아낼 수 있다. 텍스트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이 지점은, ‘우리’가 무엇을(에 의해) 어떻게 분할하고(되고) 있는지를 묻게 된다. 비판critique은 여기까지 와서야 기술 차원에서가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에서 비평과 구분될 수 있고, 그래서 온당하게 연합할 수 있다. 비판적 태도는 비평을 곧잘 따라다니곤 한다. 그러나 ‘완성도를 따졌을 때 『82년생 김지영』이 좋은 작품이 아니다’라고 비평할 때에는, 비판적 태도는 ‘자발적 불복종의 기술’이라기보다는 선제되어 있는 어떤 좋음을 이야기하기 위한 냉철한 기술 정도로 사소해진다. 마찬가지로 이 작품을 덮어 놓고 정치적으로 좋은 작품이라고 말하는 일도 또다른 치안(정치적 옳음이라든가 하는)으로 논의를 환원하는 것뿐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텍스트를 지금-여기의 우리와 결부시켜 읽는 일까지를 비평(`)이라고 부르려 한다. (유치한 일일 뿐일까?) 텍스트가 아니라 텍스트 앞에 선 ‘우리’의 정체를 묻는 일이야말로 공동의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 텍스트는 예술이어야만 하는가? 그건 아니다. 다만 예술 작품(텍스트)을 대상 삼았을 때의 특이성은 있을 수 있겠다. 신문에서 어떤 사건을 접했을 때 우리의 반응은 예술 작품(텍스트) 앞에서와 어딘지 다른 것 같다. 이 문제는 아직은 막막하니 접어 두기로 하자. 예술/예술 비평 또한 좋은 정치적 작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변호했다는 것으로 만족해도 될 듯하다. 비평(`)은 물론 대상의 장르에 구애받지는 않을/않아야 할 것이다. 원래 있는 아/비아의 구획, 우리/우리 바깥 사이의 경계를 끊임없이 묻는 일, 왜 하필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감각하고 있었는지를 묻는 일이 비평(`)이다. 무엇이 좋고 나쁜지, 무엇을 아름답거나 추하다고 느끼는지, 지금-여기에 자리잡고 있는 이 윤리적/정치적 구획을 묻는 일 말이다.

다만 이 점은 분명히 하자. 그것만으로는 실제로 무언가를 바꾸지 못한다. 여전히 이 모든 작업은 정치적인 것이다. 예술 혹은 예술 비평에서 정치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이는, 우선 눈을 예술 밖으로 돌려 ‘그 앞에 선 우리’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자신의 발마저 예술 밖으로 내딛어야 한다. 그 영역은 훨씬 더 현실적이고 자세한 세계, 캠페인과 운동movement과 공론장의 세계다. 다음 치안을 위한 구성 행위, 새로운 대륙을 만들기 위한 실천의 공간이다. 물론 이 말은 모든 비평가는 결국 활동가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 작업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적인 것을 넘어 정치를 담보할 수 있는 무엇으로. 비평(`)은 거기까지 나아갈 수 있다고 믿고 싶다. 그걸 가능케 하기 위한 상상력이 필요할 뿐. 방구석에서 이런 말까지 하고 있다.

*

그러니까 바다로 들어가지 못하고 해변을 걷는 일을 찝찝해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사람은 (아직은?) 바다에서 못 사는 짐승이다. 이 글을 완성한 지금, 고향에서 다시 상경한 지 이주일쯤 지났다. 여기 서울은 지나치게 내륙이라 이따금 숨이 막힌다. 하지만 뭐 바닷가에서 계속 살 수는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 고향을 다녀올 때마다 ‘바다 짠내를 충전해왔다’는 말을 종종 한다. 그 정도면 충분한 것 같다. 파도가 그리는 선과 나란히 해변을 걷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바다로 뛰어들어도 안 되고 해변을 영원히 걷는 것도 안 된다. 다시 내륙으로 돌아와야 한다. 다만 해변을 걷는 자의 마음쯤은 지키고 살아도 좋을 것이다. 겨우내 맡으려고 바다 짠내를 긷는 일 비슷한 것이다.

파상
studien618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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