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해 몇 줄 써야겠다. 잠깐, 사랑이라고 할 수 있나. 아무리 봐도 이거 연애 얘기라고 하기엔 좀 뭐한데. 어찌됐건 작가는 이 이야기를 일종의 연애라 명명하고 있긴 하니까 그냥 넘어가자. 그보다도 내게 사랑, 이란 것에 관해 논할 깜냥이란 게 있기는 한가. (내 지인들은 아마 이쯤에서 웃을 것이다.) 모르겠다. 그렇지만 일단은 최선을 다해 써 보기로 한다. 왜냐하면 나 또한 사랑을 아직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어떻게든 이해해 보고 싶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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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여러 형태의 사랑이 있다. 격렬한 사랑. 달콤한 사랑. 고통스러운 사랑. 아름운 사랑. 추한 사랑. 눈 먼 사랑. 강박적인 사랑. 사랑의 형태가 다양한 만큼 사랑을 다루는 서사 역시 무궁무진한데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는 사랑 얘기라고 하기엔 좀 너무 미적지근하지 않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연애’란 단어를 달고 있는 제목과는 달리 이 이야기에 정작 ‘연애적’이랄 만한 요소는 거의 없다. 그저 필용과 양희라는 이십 대 남녀가 매일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고 시시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정도가 전부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연애를 시작하면서 일어나는 통상적인 일들과 비교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해도 거의 괜찮을 것이다. (나는 의도적으로 ‘거의’ 괜찮다는 표현을 썼다.) 그럼에도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고 묻는다면, 어느 날 문득 양희가 필용에게 사랑한다 말하고, 매일 그 말을 확인하던 필용에게 양희가 어느 날 처음처럼 갑작스럽게 사랑하지 않는다 말하고, 필용이 양희에게 심한 말로 상처를 입히고, 오랜 시간 후 연극 무대에서 양희와 재회한 필용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너무 한낮임을 감각하는, 뭐 그렇고 그런 이야기. 이들의 연애 양상이 지나치다고 해도 좋을 만큼 밋밋해 보이는 건 우리가 익숙한 연애 서사에서처럼 “감정의 고저”가 없기 때문이다. 풋풋한 연애 초반기라든가, 싸움과 권태기 같은 일련의 과정은 생략되고 감정은 다만 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없는 것이 된다.

“알 필요가 없다고?”

“지금 사랑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는데, 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니까요.”

필용은 황당했다. 얘가 지금 누굴 놀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한다며?”

“네, 사랑하죠.”

“그런데 내일은 어떨지 몰라?”

“네.”

“사랑하는 건 맞잖아. 그렇잖아.”

“네, 그래요.”

“내일은?”

“모르겠어요.”

필용은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가 났다. 모욕당한 기분이었다.

–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필용이 길거리에서 사레가 들릴 정도로 울면서 듣는 퀸의 <Save Me>의 가사 중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Each night I cry I still believe the lie / I love you till I die……‘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다니 이 얼마나 상투적이고도 무책임한 거짓말인지. 반면 필용이 배신감을 느끼는 것과 달리 양희는 필용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 적이 없다. 그저 나른한 톤으로, “선배, 나 선배 사랑하는데,” 라고 말했을 뿐. 많은 연인들이 언제까지나 상대를 사랑하겠다고 맹세하고, ‘오늘보다 내일 더 사랑해’란 달콤한 말을 속삭이지만(거짓말!) 사실상 지금 당신을 사랑한다고 해서 내일도 당신을 향한 그 사랑이 지속될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필용을 사랑할지 어떨지 모르겠다는 양희의 저 발언은 영원히 사랑하겠다느니 어쩌니 하는 말보다 외려 더 진실하고 책임감 있는 말이다. 양희는 그저 지금 ‘있는’ 감정을 솔직하게 전달했을 뿐이므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에는 여러 가지 사교적인 대답이 있을 수 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당신 말은 한마디도 믿지 않아요”,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등등. 그러나 진짜 거절은 ‘대답 없음’이다. 나는 청원자로서뿐만 아니라 말하는 주체로서도 부인되기 때문에 더 확실히 부정된다고 할 수 있다.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반면 양희의 고백을 들은 이후로 필용은 강박적일 만큼 양희의 사랑을 확인하는 데 매달린다.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묻고, 양희가 그렇다고 대답하면 몸을 떨 정도로 기쁨을 느끼면서도 필용은 결코 양희의 고백에 대답하지는 않는다. 필용이 날마다 사랑의 지속을 확인하고 이에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양희는 사랑을 말하고도 주체성을 반복해서 부정당한다. 결국 양희가 어느 날 갑자기, “아, 선배 나 안 해요, 사랑,“이라 말한 것은 사실 갑자기가 아니라 어느 정도 예정되어 있었던 셈이다.

더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양희의 말에 필용은 분노하고 좌절하지만 여기서 필용의 상실감은 양희가 아니라, 양희의 사랑이라는 감정이 더는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양희를 그 자체로서 사랑했다면 양희의 사랑은 없어도 무방하지만, 양희의 사랑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반드시 양희가 필용을 사랑해야 했기 때문이다. 즉 바르트식으로 말하자면, “그는 그녀를 잃어버려서 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는 것이다.” 이를 바르트는 ‘취소annulation‘라는 다음과 같은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 자체의 무게에 짓눌려 사랑의 대상을 취소하게 되는 언어의 폭발. 사랑의 고유한 변태성에 의해, 주체가 사랑하는 것은 사랑 그 자체이지 대상이 아니다. 이 취소된 대상으로부터 내 욕망을 욕망 그 자체로 옮기기 위해서는, 어느 섬광 같은 순간에 그 사람을 일종의 무기력한, 박제된 사물로 보기만 하면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내 욕망이며, 사랑의 대상은 단지 그 도구에 불과하다.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요컨대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당신이라는 존재를 온전히 껴안음으로써 당신의 마음까지 함께 받아들이는 것. 이때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주체 그 자체다. 그러나 당신보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방점을 찍는 순간, 주체는 객체로 격하되고 사랑만 왜곡된 형태로 남는다.

양희에게 심한 말을 퍼붓고 난 필용은 후회하면서 양희에게 가는데 이때 그가 듣는 건 또다시 퀸의 노래다. 내 평생의 사랑. 내 사랑을 되돌려줘. 나에게서 빼앗아가지 말아주오. 박자를 맞추기 위해서인지 뭔지, 정확한 의도를 알 수는 없지만 보컬 프레디 머큐리는 ‘Come back to me‘ 대신 ‘Bring it back to me‘라 썼고 여기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내게 돌아와 달라는 것과 사랑을 내게 되돌려 달라는 것의 차이. 다시 말해 ‘당신’이 필요하다는 것과 ‘당신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의 차이. 필용은 후자였고 퀸의 노래를 열창하며 양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을 생각한다. 양희야. 너의 허스키를 사랑해. 너의 스키니한 몸을 사랑해. 너의 가벼운 주머니와 식욕 없음을 사랑해. 너의 무기력을 사랑해. 너의 허무를 사랑해. 너의 내일 없음을 사랑해. 그러나 필용의 진짜 속마음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표현되어야 했을 것이었다. 너의 사랑을 사랑해. 너의 사랑을 향한 나의 사랑을 사랑해. 결국 필용이 문산에서 마주한 건 양희의 사랑이 아니라, 필용이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았던 양희의 ‘없음’이었다. 필용이 양희를 사랑했다면 양희의 없음마저 사랑했을 것이나 그는 양희의 사랑을 사랑했으므로 그녀의 사랑을 비롯한 모든 것이 부재해 보이는 그곳에서 필용은 아무것도 구하지 못하고 돌아온다. 필용이 사랑한다는 양희의 말에 답하지 않았던 건 당연했다. 양희를 만나는 동안 그는 그녀를 단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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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건 사랑 얘기가 아닌 건가. 십육 년 후 회사에서 좌천되어 방황하던 필용은 당시 양희와 마주앉던 맥도날드에서 양희가 쓰던 연극 제목이 적힌 현수막을 발견한다. 나무는 ‘ㅋㅋㅋ’ 하고 웃지 않는다. 처음에는 단순히 호기심에 양희를 일방적으로 보러 가던 필용은 점점 양희와 마주하고 싶은 욕망을 품는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추운 겨울날, 무대에 올라 양희와 마주보지만 시선을 떨군 필용을 양희는 비웃지 않는다. 오래전 양희를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양희에게 고통을 안겼던 것을 부끄러워하는 필용에게 ‘ㅋㅋㅋ’하고 웃지 않는다. 대신 필용이 양희의 고향으로 찾아갔던 날 밤의 느티나무처럼 몸을 조금씩 조금씩 흔든다. 그 옛날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사람이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몸짓에, 뒤늦게 필용의 얼굴을 눈물이 덮는다.

회사로 걸어가면서 필용은 울었다. MP3 플레이어도 퀸도 없는 종로 거리에서 필용은 이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 뭐 달리 어떻게 해볼 것 없이, 더이상 어디에서도 양희를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일은 어떨지 몰라도 지금은, 오늘은, 그것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이라서 필용은 뒤돌아 극장 쪽으로 뛰어갔다. (…) 필용은 다시 거리로 나왔다. 얼마쯤 걷다가 또 극장 쪽으로 향했지만 다시 몸을 돌려 종로에서 멀어졌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누르며 계속 멀어졌다.

–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이것이야말로 사랑이 아닐까. 시간이 많이 흘렀고 더는 예전과 같이 양희의 사랑을 기대할 수 없음에도 양희를 보러 가는 것. 마주앉기를 원하는 것. 보고 싶어 하는 것. 다시는 볼 수 없음을 예감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 십육 년 전 지금 날 사랑한다면서 내일은 어떨지 몰라? 라 물었던 필용은 이제 “내일은 어떨지 몰라도, 지금은, 오늘은, 그것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이라서” 운다. 퀸의 <구해줘Save Me>를 들으며, ‘누구에게도 구원에 대해 물을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무너질 때마다 필용이 찾게 되는 건 다름아닌 양희였다. 그렇다면 필용은 결국 양희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구원을 받았다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비록 그것이 너무 늦게 깨달은 사랑의 형태로 찾아와, 견디기 어려울 만큼 아픈 것이기는 하지만. 구원이 빛을 동반한다고 한다면, “슬프게도 해가 들지 않는” 지하로 추방당한 필용을 “환하고 환해서 감당할 수조차 없이 환한” 이 “너무 한낮“으로 이끌어 구원한 양희의 이름은 어쩌면 ‘陽'(볕 양)자를 품은 메타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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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다는 뻔한 말은 그만두자. 대신 이렇게 고백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을 사랑하는 매 순간 나는 비로소 구원을 받는다고. 내일은 어떨지 몰라도, 어쨌거나 지금은, 오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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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하
choha@yonsei.ac.kr
나, 너, 그리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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