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현과 해석의 문제” (2)  

겹뜻을 옮기는 문제

문장 P=’동문 몇이 격월로 신촌 토즈에서 만나는 이 모임은 회원이 돌아가며 책을 선정한다.’의 의미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이 문장은 문법적으로 결함 있는 문장인가? “문법적으로 결함 있는”의 의미가 분명치 않다. 나는 문법적 결함이란 액면 그대로 문장을 이해했을 때 논리적 구조로 옮겨지지 않는 문장이 갖는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다음 문장,

<언어, 논리, 진리>는 에이어가 논리실증주의의 이념을 명료히 설명한다.

는, 다음 둘 중 하나로 (자비의 원리에 따라) 재처리되지 않으면 액면상으로는 의미가 이해될 수 없다.

<언어, 논리, 진리>에서는 에이어가 논리실증주의의 이념을 명료히 설명한다.

또는,

<언어, 논리, 진리>는 에이어가 논리실증주의의 이념을 명료히 설명한 책[또는 여타 위치에 관한 대용어들]이다.

문장 P는 그렇다면 왜 문법적으로 결함이 있는가? 이 문장이 다음 둘로 이해되지 않고서는 액면상으로는 애매하거나, 무의미한 것이라고 판단되는 탓이다. 즉 문장 P는,

P*=’동문 몇이 격월로 신촌 토즈에서 만나는 이 모임에서는 회원이 돌아가며 책을 선정한다.’

또는

P**=’동문 몇이 격월로 신촌 토즈에서 만나는 이 모임은 회원이 돌아가며 책을 선정해 운영된다.’

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P*와 P**는 단지 P의 의미를 보존하고 문법적 결함만을 보정한 그러한 두 문장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만일 그렇다면 P*와 P** 중 한 문장은 잘못된 보정이어야 한다. 두 문장이 서로 다른 명제를 표상함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P가 동시에 두 명제를 표상한다는 것이 자명한 것도 아니므로, 일반적 문장의 예들로부터 고찰할 때 P*와 P**는 둘 중 하나가 옳음이 판명될 수 있거나, 의미를 오롯이 보존한 해례가 아니다.

그런데 후자가 맞다면, P*와 P**는 결국 공히 “틀린” 해례가 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P*와 P** 중 어느 해석과도 같지 않은 “진정한 P”, 즉 P가 정말로 표상하는 명제이지만 P*와도 P**와도 다른 그러한 명제를 P가 품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이 생각은 애초에 P*도 P**도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P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불가능하게 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P는 유의미한 진술을 구성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법하다.

그렇다면 다시, P*와 P** 중 올바른 해례를 정할 수 있는 경우로 돌아와 보자. 언뜻 보기에 이 둘은 P에 대해 (오로지) 가능한 두 해석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둘이 모두 가능하다는 게 사실이라면, 대체 어떻게 둘 중 하나의 해례를 정할 수 있을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둘 중 하나만을 인정하는 상위이론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런데 각 해례를 인정하는 서로 다른 상위이론의 갈래 중 하나를 선택하려면, 다시금 그 상위이론에 대한 상위이론적 검토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

물론 실제 담화 상황에서 이러한 딜레마는 쉽게 해소된다. 발화자가 직접 자신의 말이 어떤 의도에서 발화된 것인지 말한다면 그렇다. 사실 이렇게 되면 모든 문제는 사라진다. 발화자의 의도라는 상위이론을 통해 둘 중 어느 해례가 옳은지는 명백하게 판단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일까?

예술 작품의 해석

문법적으로 결함 있는 문장의 사례와 유사하게, 예술 작품은 겹뜻의 가능성을 필히 갖는 경우에 해당한다. 하나의 예술작품에 대해 서로 다른 두 비평이 가능한 듯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그 두 비평이 함께 참일 수는 없는 경우가 존재한다. 예컨대,

O=’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에 대한 두 비평

C*=’하느님은 실제로 이 땅을 구성하는 물질들을 무로부터 만들었다.’

C**=’하느님의 창조는 이 땅을 구성하는 물질들에 관한 무질서한 관념을 질서 있게 만든 사건이다.’

일단, O가 C*와 C**로 모두 해석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O는 불투명한 표현이므로 둘 중 어떻게 해석되는 것이 단일한 옳음인지는 문장 자체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C*와 C**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듯하다. 그런데 이렇게 답한다면 어떤가? “C*와 C**는 한 예술 작품에 관한 서로 다른 진술이지만, O 자체가 모호하므로 C*와 C**는 동시에 C에 관한 참된(또는 옳은) 비평일 수 있다.”

비평은 현실적으로 언제나 비평적 진술이며, 또 비평적 진술은 어떤 작품에 관한 진술이다. 따라서 예술 작품이 진리를 담지하지 않는 순수 표현의 영역에 있다고 주장하더라도 실제 비평 역시 진리값을 갖지 않는 그러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어 보인다. 여전히 그것은 어떤 작품에 대해 참된 설명을 제공하는 진술이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을 비평이 제공하지 못한다면 애초에 비평은 어떤 작품에 대한 해명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C*와 C**를 함께 수용하는 것은 부조리하다.

따라서 위의 P에 관한 경우와 마찬가지 딜레마가 생기는 것이다. 결국엔 어떤 상위이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O에 대해 C*와 C**라는 두 비평이 대립할 때, 둘 중 하나를 배제하고 다른 하나를 취할 그러한 상위이론이 있다면, 둘 중 무엇이 옳은 비평인지를 가를 수 있다.

예술에서 그 상위이론에 해당하는 것은 작품의 양식, 작가의 그룹, 작품의 시대 등이다. 또, 문장에서와 같은 방식의 “쉬운 해소” 역시 가능하다. 작품 제작자가 그 표현의 “진짜” 의도를 알려주면 된다. 즉, 제작자의 의도라는 상위이론을 통해 어느 비평이 옳은지를 판단할 수 있다.

판별자의 무력함

다시, “그러나 여기에서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일까?” 앞서 제시한 사례들은 언뜻 ‘제작자의 해명’을 통해 모두 해소될 수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해명이 불가능한 경우를 고찰하자면, 그러한 해소는 단지 쉬운 문제에 대한 해소에 그침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상황들을 생각해 보라:

O에 대한 올바른 상위 이론을 논구했으나, 최종적으로 그 이론들 중 어떤 것이 옳은지를 판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O의 저자가 누구인지, 언제 쓰였는지 등에 대한 명백하게 통일된 입장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위이론 불발 사례

P의 발화자에게 “당신의 문장은 문법적 결함이 있으니 이를 명확히 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요청했으나, 그 발화자는 P에 아무런 결함이 없고 자신을 그것을 액면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규칙 불일치 사례

실험적 작품을 만든 한 작가에게 그 의도를 물었으나, 그 역시 우연들을 통해 색을 조합시킨 탓에 별 의도를 알 수 없다고 답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단지 그 작품을 “물리적 우연성”에 대해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지한 작가 사례

상위이론 불발 사례를 통해 보자면, 우리는 상위이론 중 하나를 찾기 위해 다시 그 상위이론을 정당화할 초상위이론을 끌어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 상위이론들의 갈등이 있었음은 바로 그 초상위이론 담론에서도 마찬가지 갈등이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 이론을 발견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규칙 불일치 사례에 따르면, 상위담론을 선별할 작가가 있는 경우에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 작가가 갖고 있는 합리성의 규칙이 해석자가 갖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든 상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우리는 일치하지 않는 합리성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규칙을, 예컨대 작가의 인생을 연구하거나 그에게 정신분석학적 기법을 적용해서 발견하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발견된 것이 정말로 작품에 대한 비평으로 유효한 것인지에 대해 무지한 작가 사례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의 작품을 작품 외적으로 탐구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은 그가 그러한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 즉 작가의 인생이나, 그가 우연히 물감을 떨어트릴 때 그의 몸을 움직인 무의식이나, 물리 법칙 그 자체일 것인데, 그 중 어느 것도 사실은 우리의 작품 평가와는 관련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트러블슈⎯팅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군가는 차라리 작품을 그 자체의 문법을 통해 해석하자고 말할 것이다. 즉, 한 작품을 다른 여러 틀로 환원하려 한 시도 자체가 합법적이지 않으며, 우리는 작품 자체만을, 그것에 부과하는 우리의 틀을 통해서, 해석 대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말하자면 각 해석자마다, 해석 체계마다 나름의 참이 있다는 다원주의적 접근이다.

이러한 접근은 상대적으로 해석 공동체의 역량을 큰 것으로 설정한다. 해석 공동체가 그 대상을 어떤 작품으로 분류했는지, 그리고 그 분류가 대상들을 어떤 식으로 재구성하는지가 작품 해석의 기준이 된다. 그렇다면, 애초에 상위이론을 통해 대상을 다른 데에로 환원하려는 시도가 잘못된 것이며, 우리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해석 자체를 중요한 것으로 두면 될 일이다.

하지만 이 대답은 우리가 타고 있는 배 자체가 모순 투성이일 때 크게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듯하다. 분명 나와 원초적 상황에서도 모순 없이 작품을 대하는 사람을 만날 때에도 여전히 문제는 생기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람은 나 자신이다. 처음에는 P의 의미가 P*라고 확신했더라도, P**가 나의 해석 가능 대상에 산입됨에 따라 P*이냐, P**이냐는 알쏭달쏭해진다. 이 때부터는 나도 해석에 확신을 못 한다.

반대로 가면 어떤가. 작품의 의미는 너무나 명백하지만, 우리의 역량이 결코 그 의미를 다 잡아낼 수 없다고 하면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다양한 해석을 갖는다는 사실과, 무언가 하나의 의미가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 상충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우리가 실제로는 갖는 다양한 해석이 실질적으로는 같은 해석일 것이라는 믿음도 가질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다.

그런데 이 역시도 뭔가 이상하다. 애초에 우리는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작품의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두고 정의하고, 규정하고, 이름 지었던 것 아닌가? 그 과정에서 대체 어떻게 “잡아낼 수 없는 작품의 의미”가 있을 수 있던 것일까. 번지르르한 겉치레와 달리 여전히 찜찜한 면이 있다.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난 뒤, 일방적 환원도, 다원주의도, 선험주의도 거부하는 우리에겐 이러한 종류의 찜찜함이 남는다. 그렇다면 이 찜찜함을 어떻게 엎을 것인가? 이것이 내가 말해온 물음이었고, 지금 다시 묻는 물음이다. “다음 발걸음“이랄까.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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