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현과 해석의 문제” (1)  

비평의 쓸모

[…]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

마태오의복음서, 9 12.

왜 비평이 필요한가? 이를 위해서는 비평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는 이전 글에서 비평에 대한 두가지 이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먼저 나는 하이데거의 해체를 통해 비평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비평은 지나간 것(또는, ‘사실’)을 새로운 사건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시도이다.”*​ 다음으로, 푸코의 “비판”에 관한 언급을 통해 이해되는 비평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푸코의 “통치성”은 개념적 내포를 그 대상에게 연결하는 방식을 말한다. […] 그리고 푸코는 그 방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비평의 핵심임을 주장한다.”​†​

두가지 이해는 결국 동일한 방식으로 비평을 정의하게끔 한다. 비평은 잘못 이해된, 또는 투명하게 이해되지 않은 대상을 이해 가능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비판 역시 이러한 작업 중 하나이다. 어떤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는 비평과 비판이 본질적으로 같다고 본다. 비판 역시 어떤 대상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두고 그것을 반박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비판은 비평의 한 갈래이다. 단지 그 용례에 있어, 일반적으로 비평은 “비판”으로서의 비평의 여집합에 해당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정의로부터 다시 비평의 목적으로 돌아와 보자. 왜 비평이 필요한가? 대상이 제대로 이해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대상의 의미가 투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의미의 투명성”을 통해 뜻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의미 담지자에 대한 표면적 해석이 의도된 바 그대로만 해석된다.” 대표적으로 투명한 대상은 사실적 진술이다. ‘우리 앞에 물통이 있다’라는 문장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이에게 의미적으로 매우 투명하다.

각설하고 예술의 문제로 돌아오자. 진술문과 달리 예술은 일반적으로 투명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예술이 투명할 때 그것은 오히려 예술의 맛을 잃은 것처럼 평가된다. 무언가 심오하고 불투명하며, 다층지시를 수행하는 갈래의 표현이야말로 “진정한 예술”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러한 특징으로부터, 현실의 비평문들은 대표적으로 예술을 그 대상으로 삼는 것일 터이다. 왜 그런 것일까. 이에 대해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대신, 이로부터 한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투명하면서도 예술적 가치가 높은 예술 작품은 불가능한가?”

신적 언어, 신적 예술

우리는 언제나 사람의 말을 오해한다. 진술문이 투명하다고는 하지만 그 역시도 전적으로 투명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앎의 한계나 맥락의 오인에 따라 진술문의 의미가 잘못 이해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이다. 학술적 저술에 대해서도 비평과 주석이 달리는 학계의 상황을 보자면, 분명 진술문은 현실적으로 투명하지 않다. 나는 이것이 인간 언어의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한계 너머에 있는 것은 이념적으로만 존재하는 순수한 언어, 또는 ‘신적 언어’라고 불릴 만한 그런 것이지 싶다.

예술은 어떤가. 예술에 있어서는 그나마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수많은 오해로 치부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술에 있어서도 오해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적어도 의도 있는 작품에 있어서만큼은, 예술가 당사자가 결코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것이 이해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럴 때 그 예술가는 대담회를 열거나, 사인회 등에서 “아 그것은 그 뜻이 아니었는데…”등으로 “비평”을 수행하는 법이다. 이런 보론적 비평이 필요하지 않은 예술이 있을까? 나는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예술을 차라리 ‘신적 예술’이라고 부를 셈이다.

신적 예술은 가능한가. 가능하냐고 묻기 전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정말 별 의미 없는 진술, 예컨대 ‘이것이 이것이다’와 같은 것이 “신적인 것”으로 분류될 수 없듯, 매우 사소한 탓에 투명한 예술은 신적 예술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예술이 신적이라고, 또는 이상적으로 순수하다고 말하려면 그 예술 작품은 두가지 명령에 모두 충실해야 한다. 하나, 예술적으로 탁월해야 한다. 둘, 의미적으로 투명해야 한다.

예술적 탁월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역사 속의 지난한 담론들이 보여주듯 쉽게 해소될 법한 것이 아니다. 이 글에서는 일단, 파상의 예술론에 잠정적으로 근거하고자 한다. (문학) 예술이 무슨 쓸모를 갖나? 파상이 말한다: “여기에 새겨진 것은 글자일 뿐, 그들의 육신에 새겨진 전쟁은 말로는 이해할 수 없는 너머에 있다.”‡​ 예술은 누군가가 품고 있지만, 언어로는 전달될 수 없는 상을 전달하는 쓸모를 갖는다.

그러한 상이 전달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시 나의 말을 가지고 올 참이다. 나는 기억의 전달이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특정 시점에 실현되었던 사태의 내용을 제공하고, 그것이 같은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으로 기억은 공유된다.”​§​ 즉, 예술 작품의 제작자가 작품을 통해 표현한, 자신이 소유한 어떤 역량이, 작품 감상을 통해 감상자에게도 소유된다면, 제작자가 소유한 그 역량이 전달된다.

그렇다면 종합하건대 신적 예술은 다음과 같은 것이겠다. 한 작품으로부터, 언어로써는 전달 불가능한 역량이, 작품 제작자에게서 감상자에로 전달되면서, 동시에 그 전달이 투명할 때. 이제 돌아올 수 있겠다. 이렇게 고찰되는 경우에는 신적 예술이 가능한가? 언어로써는 전달 불가능한 어떤 내용이 단 하나의 방식으로 감상자에게 특정한 역량을 전달할 수 있는가?

신적 예술은 (어떻게) 가능한가

실제로 신적 예술이 실현된 사례가 있을까. 나는 이에 대해 분명하지 않다. 만일 있었더라면 그 사례는 우리가 종교적 문헌을 통해 전달하는 신의 기적과 같은 사건들이었으리라고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오늘날 일어나는 사건들은 좀체 기적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뚜렷한 실제 사례를 통해 가능성의 여부를 말하기는 어렵다.

대신 귀류법을 통해 접근해 보자. 신적 예술은 개념적으로 불가능한가? 그렇지 않다면, 신적 예술은 논리적으로는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신적 예술의 개념은 그 어떤 논리적 문제도 함유하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신적 예술은 가능하겠지, 예술에 있어 물리적 한계가 있지는 않을 테니. 기껏 해야 문제가 있다면 우리의 역량에 의한 것 아니겠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불가능”은 아니다. 우리는 아직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에 있다. 공교롭게도 이 “어떻게”가 어떻게 해명될 수 있을지, 사실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갑자기 여기에서 파상스러운 말투가 나와버린다고?) 왜 오지 않을까. 나는 그 힌트를 앞의 문단에서 어설프게 흐린 데로부터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적 예술이 불가능해 보이는 까닭은 우리의 역량에 있다. 우리는 언어 문화에 이미 젖어있는 탓에, 언어적이지 않으면서 투명한 표현을 좀처럼 고안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언어적인 것이 곧장 투명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참 우스운 비극이다.

어떻게 투명한데도 비언어적일 수 있을까. 신의 언어를 생각해 본다. 말하건대 실로 “신의 언어”라고 불리는 것, 태초에 모든 것의 형상을 창조한 그 도구는 ‘언어’라고 불릴 만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의 창조행위를 언어적인 것으로만 상상할 법하기에 언어라고 말하는 것 아니겠나. 우리가 ‘언어’니 ‘사랑’이니 ‘국가’니 말할 때 그 단어들의 의미는 인간 언어, 인간의 사랑 감정, 인간의 국가 공동체에 고정지시됨을 통해 발생한 것이다. 그런 언어나 사랑, 국가를 신의 그것과 동일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신의 언어’를 통해 의미하려는 바로 그것을 두고 신적 예술의 도구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일까. 가장 궁극적인 도구! 세계의 인과율이나 조화로움, 혼돈으로부터의 해방을 초래한 바로 그 무엇. 정말로 “신”이라는 실체가 있냐는 물음과는 별개로, 이 “신의 언어”라는 것은 그러한 궁극적 도구이다. 이 도구를 사용해서 어떤 도덕적 교훈이나 미적 감상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신적 예술의 제작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을 어떻게 우리가 할 수 있냐고? 모르겠다. 애초에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없는 것일지도.

사족: 나는 내가 묻는 바와 같은 것이 굿맨Nelson Goodman이 <세계제작의 방법들>이나 <예술의 언어들>에서 답하고자 노력했던 바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역시도 충분히 답하지는 못한 것이 아니냐고 다시 묻게 된다. 이 이후의 답은 나에게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

주석이 필요 없는 인용문이란 있을까

이 글을 정리하며 흥미로운 발견을 했다. 이전에 파상은 한 글의 첫 꼭지를 인용구로만 채우며, 그 소제목을 “어떤 인용들엔 주석이 필요가 없다”​¶​로 정했다. 지금 나에게 이 소제목은 일종의 “순수 예술”이나 (조금 더 일반화하여) “순수 표현”의 문제를 겨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질문하게 된다. 주석이 필요하지 않은 인용문이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고, 없다면 어떤 의미에서 없는가.

표현이 투명하다면 거기에 주석의 필요란 없다. “문 닫아”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과연 그 발화의 의미가 무엇인가?”라고 묻는 사람은 없다. 있다면 단지 그 사람은 문장을 투명하게끔 하는 통사론적 원리에 문제가 있어 물었다기 보다는, ‘문’ 또는 ‘닫다’의 의미를 잘 모르는 외국인이었기에 그렇게 물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골적으로 어떤 대상을 표상하는 사진 작품, 예컨대 증명사진에 대해, “과연 이 사진이 무엇을 표상하는가?”라고 묻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보면 알 수 있듯, 투명한 표현들에는 주석이 필요가 없다. (즉, 파상적인 논제가 참이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표현은 투명하더라도 주석을 요구한다. 설사 그 표현이 우리에게 일관되게 영향을 주더라도 정말로 그것이 일관된지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에 그렇다. 일전의 글에서 적었던 다음 언급은 이러한 문제에 관한 것으로 읽힐 수 있겠다:

이런 경우가 가능한가?: 모든 지시 관계가 완전히 효력을 드러내는 중에 비평을 시작하는 . 어쩌면 가능하다. 아마도 비평가는 순수히 주석적인 비평만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름의 진리를 제공한다. 비평은 아마도우리는 체계에 불만족스럽다라는 생각을 계기로 시작되었을 텐데 비평가의 분석은 생각을 오늘의 체계에 연관시킨 것이 잘못되었다는 진리를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평은 믿음의 토대를 놓는 역할을 한다. 또한 나름의 개념적 연관의 발견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개념적 연관의 재발견으로서 비평의 진리는 비평의 귀결이다.

여정, “비평적 진보, 또는 비평적 진리”, <셋잇단음Triplet> 2018년 추계 상반기 촉발문.

한편으로 이러한 류의 비평은 순수 표현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우리는 이 이해에 불만족스럽다”라는 사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비평이 그 표현에 관련된 사실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때문에, 그 순수 표현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자면, 모든 인용문에는 달릴 주석이 준비되어 있는 셈이다.

기독교의 세계관에서 죄인이지 않은 이는 (궁극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적 관점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도 신적 관점, 즉 모든 기준을 고려하는 관점에서는 결핍된 이로 드러난다. 예술의 세계에서도 같은 사실이 유비적으로 적용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해석에서 가장 투명한 대상도 신적 해석에서는 복합적 이해가 가능한 대상이다. 그렇다면, 비평학의 세계관에서 불투명하지 않은 작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겠다.


  1. ​*​
    여정, “어떤 방식의 비평, 또는 비평이라는 처방전”, <셋잇단음Triplet> 2018년 하계 하반기 응답문.
  2. ​†​
    여정, “비평적 진보, 또는 비평적 진리”, <셋잇단음Triplet> 2018년 추계 상반기 촉발문.
  3. ​‡​
    파상, “소설의 어떤 쓸모”, <셋잇단음Triplet> 2019년 2019년 1호(3-4월) 응답문.
  4. ​§​
    여정, “기억을 전달한다는 것”, <셋잇단음Triplet> 2019년 2호(5-6월) 촉발문.
  5. ​¶​
    파상, 위의 글.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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