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러게. 답 없는 질문에서 우리는 멈춘 것인가.

트리플렛이 몇 회차인지 세어 봤다. 이번이 열 회차다. 정확히는 열한 회차인데, 첫 회차는 프롤로그라 치고 뺐다. 세면서 돌아보니 참 많은 말들을 했었다. 그 궤적을 잠깐만 짚어야겠다. 정확히 어디서 멈춘 건지 궁금해졌다.

단현은 첫 글 「포르노그래피즘, 공적인 신체, 다시 행위」에서, ‘포르노그래피즘’이라고 명명한 어떤 양상(특정한 욕망을 생산해서 신체의 특정한 표현-행위를 요구하는)이 우리의 고유한 신체를 공적인 신체로 만든다고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신체의 공적임을 ‘발현’시킨다고 했다.

“신체는 원래 순수한 것인데 권력이 그것을 조작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하고 (그것에 관한 제반 지식과 함께) 새롭게 만들어내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단현. 「포르노그래피즘, 공적인 신체, 다시 행위」.

그리고 어떤 직면의 가능성을 물었다. 세계에 돌을 던질 수 있는 다른 신체의 가능성 말이다. 첫 회차의 닫는 글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에서 단현은, 포르노그래피즘에 포착되지 않는 잉여분으로서 ‘기억’이 거기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기억을 복원하는 ‘다르게 말하기’, 즉 문학이 가능성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둘째 회차의 「기억하기-사건에까지 도달하기-자기가 되기」는 사건과 사태를 구분하는 등, ‘기억’을 말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들의 해명 작업이었다. 동시에 기억을 통해 다른 주체의 가능성을 묻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셋째 회차의 「시지프를 넘어서, 혹은 실재와 행위의 정치성」은 카뮈를 경유하여 ‘실재’를 이야기함으로써 「포르노그래피즘~」에서 지적했던 행위의 문제를 정치와 결부시키는 데까지 나아간다. “실재는 정치적이며, 모든 행위는 정치적이다.” “모든 행위는 정치적이다”(단현. 「시지프~」)같은 명제들이 거기 있었다.

넷째 회차와 다섯째 회차(「작동하는 불온들, 서로를 읽고 연주하는 낙서들」, 「우리 자신에 대한 비판적 존재론, 파레시아, 불온-되기」에서 단현은 ‘불온으로서 작동하는 텍스트’를 이야기하고, 쓴다는 행위가 가지는 정치성을 발견한다. 파레시아라는 철학적 삶의 양식은 우리 자신에 대한 비판적 존재론으로서,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불온-되기’라는 예술적이며 정치적인 어떤 삶의 양식이다.

어쩌면 이 다섯 회차는 첫 글 「포르노그래피즘~」으로 묶일 수 있을 것 같다. 텍스트-문학을 읽고 쓴다는 것은 다른 방식의 작동을 가능케 하는 일이며 자발적인 불온-되기로서의 정치 자체다. 나름의 윤리적 주체를 탄생시킨 셈이다. 그러고 보면 단현의 이번 글 「작동되는 자아를 넘어서 타자와의 관계의 정치로」는 첫 글 「포르노그래피즘~」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반대일 수도 있는데, 뭐 마찬가지다.

우리 삶에 외재하는 폭력이나 억압은 없으며 이미 우리의 삶이 폭력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이번 글의 테제. 이것은 「포르노그래피즘~」에서 ‘신체의 공적인 발현’을 이야기할 때의 아이디어가 정교화된 것 같다. 또한 이번 글의 정상성과 중심성, 범주 짓기의 미시적 정치성에 대한 사유도 「포르노그래피즘~」의 아이디어를 전개하는 동안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발전해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글의 나머지 반은 「포르노그래피즘~」의 다음 작업들에서 온 것 같다. 단현의 여섯째 글 「기억하기로서의 글쓰기, 단상들」은 여전히 “글쓰기의 본령은 기억하는 것이다. 쓴다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며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을 경유하는 기존의 아이디어 위에서 전개되지만, 이 글부터 ‘애도’의 문제가 등장한다. 그리고 애도의 문제가 끌어들여오는 것은 바로 ‘타인’ 혹은 ‘타자’다.

단현이 그 전에 타자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미 지금까지의 문단들도 단현의 텍스트들에 대한 폭력일 수 있기 때문에 슬슬 조심스러워진다. (그러나 이러자고 시작한 지면 아니었는가─대신 최대한 정성 들여 다시 읽었다는 것을 알아 주길.) 초점이 옮겨 왔다는 얘기다. 혹은 그간 가시화되어 있지 않던 또 하나의 초점이 등장했다는 이야기다. 단현은 윤리적/정치적 주체의 상을 그리고 나서 애도-글쓰기라는 아이디어를 경유하여 타자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래서, 감히 말하건대, 「기억하기로서의 글쓰기, 단상들」과 이어지는 두 개의 글(「다시-기억하기, 애도의 목소리」와 「생존과 기억을 넘어서, 쓰기」)까지의 세 글을 하나의 묶음으로 읽게 됐다. 타인의 고통과 문학, 그리고 쓰기. 도처의 상실들 속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의 의미. ‘살아지는 것’이 아닌 삶의 방식. 타자를 경유해 다시 짜여진 의미망 위에서 ‘정치’의 의미가 좀 더 명료해졌고, 그 궤적이 이번 글로 드러난 셈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부딪힌다. 여정이 이번 글 「“공유된 공동체”와 “신학적 상상력”」을 자신의 첫 회차 글 「복제할 수 없는 것, 그리고 윤리」로 맺은 것은 중요하다. 그 글에서 여정은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단현은 이 시대가 “포르노그래피즘”을 향해있다고 말한다. 포르노그래피의 본질적인 특징인 <보편적인 것으로의 환원>을 생각하자면, 그의 지적이 맞을 때 이 시대는 모든 것을 보편적인 데에 환원하며 발전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보편적으로 환원될 때 반대로 가장 독특한 개인이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이 개인이 등장하는 것은 정확히 어떤 시점인가? 나로서는 그 원리를 밝힐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지는 않는다. […]

보편화된 개인들이 정말로 오로지 보편화된 것인가? 실제로 저 개인을 구성한 토대로서 어떤 본질이 있지는 않은가?”

여정. 「복제할 수 없는 것, 그리고 윤리」.

여정에게 윤리의 관건은, 단현의 글을 경유하자면, 개별적인 것들을 온전히 복권시키면서 그들 사이의 보편을 확보하는 것으로 읽힌다. 말하자면 개별자들의 통약 문제다. “나와 내가 보는 것 이면의 주체를 동일시할 때 윤리가 시작된다”(여정. 「복제할~」) 작동에 저항하는 주체가 되는 법을 고민하는 일과, 작동에 저항하는 개별적/고유한 타자의 존재를 사유하는 일은, 양면이다. 둘의 분기점이 여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여정은 셋째 회차까지 이 작업을 이어갔다. 분명히 개별적인 것은 존재하며, 얼핏 보기에는 도저히 통약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분명히 사실은 어떤 방식으로든 공유되고 있다. 언어 밖에 있는 실재. 개별의 통약을 매개하는 것 같은 실재. 여기서 형이상학이 작동하고 있으며, 이는 형이상학적인 방법으로 해명되어야 한다. 필요한 것은 해소가 아니라 해명이다. ‘그런 실재가 있기나 합니까?’라는 자문에 내려진 답은, ‘있다!’ 혹은 ‘있어야 한다!’였다. 언어 외재적인 보편적 실재의 존재를 믿는 일을 ‘신학적/윤리적 상상력’이라고 여정은 그랬다.

그러나 그게 무엇인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단현이 제기한 타자와의 정치적/윤리적 관계 문제에서 이 보편적 실재의 존재 여부가 다시 문제된다. 아니, 여정과 완전히 같은 지평을 공유할 수는 없으니 (그리고 그런 지면을 만들자는 것도 아니었으니) 굳이 형이상학으로 나아갈 필요는 없다고 하자. 그래도 단현이 만든 주체(정치적/비판적 주체, 텍스트-하기 예술의 참여자)만 가지고는 아직 타자를 이야기하기에 부족하다.

만약 어떤 삶의 양식을 여러 사람이 공유해서 ‘우리’의 형질이 바뀔 수 있음을 상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를’ 말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제시하는 정치의 형식이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는 모습을 상상하지 않는다면 이 지면은 셋이서 하는 지적 놀음이며 자기 위안이다. 애초에 이 가능성을 물으려던 게 여정의 작업 아니었나.

그의 질문이 다시 돌아온 거라고 생각하게 됐다. 얻어 걸린 거든 뭐든. 여정처럼 형이상학적인 시도를 하지 않더라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정한 삶의 양식─이를테면 파레시아─이 공유되어 ‘우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더라도 구체적으로 상상해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글쓰기가 이미 스스로 실천이며 비판이라고 해도, 우리는 ‘우리’를 진지하게 말하지 않는 순간 어떤 구획 안에 각자의 논의를 가두고 있지 않나. 그 무의식적 경계짓기야말로 비판이 겨냥해야 하는 지점 아닌가. 그 경계를 깰 수는 없을까. (다시 만난 질문 앞에서 여정이 뭘 할지는 잘 모르겠다. 이미 최선의 답을 내린 셈인 것 같은데…)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유아론의 협잡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인가.

2.

내게 이 문제는 여전히, 그리고 다시, 예술의 정치성을 사유하는 일과 같다. 그리고 비평이라는 일이 정확히 어떻게 정치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재론하는 일과 같다. 다만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단현의 「우리 자신에 대한 비판적 존재론, 파레시아, 불온-되기」와 여정의 「허구는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를 다시 읽어야 한다. 좀 돌아서 가자.

물론 이 텍스트들은 내가 썼던 「함정인 것 같지만」과 이후에 개진한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마나 한 이야기」를 병치해야 한다. 애초에 비평의 문제가 전격으로 제기되었던 것은 「함정~」이었다. 그 다음 회차에서 단현이 「~파레시아~」로 비판/비평이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삶의 양식임을 주장했고, 그 다음 회차에 여정은 「허구는~」으로 ‘비평’은 세계를 바꿀 수 없다고 못박았다. 이 두 회차 동안 나는 두 개의 텍스트를 쓰면서 나름대로 비평과 예술/문학이 어떻게 정치적일 수 있는지를, 주로 랑시에르를 경유하여, 고민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건대 셋은 다른 단어로 이야기했다. 오프라인 회의에서 몇 번 치열해 보이는 토론을 거쳤지만 나는 어쩐지 계속 찝찝했다. 둘은 어떨지 몰라도, 두 텍스트의 간극이 내게는 중요했다. 지금 내 작업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셋의 차이가 어디서 왔는지를 재고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처음에 나는 푸코의 비판critique(혼동을 피하기 위해 계속 ‘critique’을 붙이겠다) 개념을 언급하며 「함정인 것 같지만」을 열었다. 그 ‘자발적인 불복종’을 어떤 태도로 여기며 물음을 시작했던 것이다. 반면 내가 ‘비평’이라고 불렀던 것은 비판critique적인 자세가 기입될 수 있는 인간 활동의 한 형태이자 내용이었다. 정확히 하자면 내 작업의 시작은 비판critique을 태도삼아 비평에 대한 메타비평을 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비판critique은 비평적일 수 있으며 비평도 비판critique적일 수 있으나, 비판critique=비평은 아니라는 것이다.

최소한 나는 이것을 혼동했던 것 같다. 자발적 불복종의 기술인 푸코의 비판critique 개념은 말 그대로 태도 혹은 삶의 양식이지, 내 탐구 과제였던 비평의 형식이나 역량과 ‘같은 것’은 아니다.

어쩌면 「함정~」에서 갈라져 나간 단현과 여정의 작업은 각각, 태도로서의 비판critique과 지적 작업으로서의 비평에 초점을 맞췄던 거라고 읽을 수 있다. 물론 이 둘은 뗄 수 없다. 최소한 서로 교섭한다. 그러나 개념적으로 구분이 가능하며, 구분하지 않을 때 약간의 혼동이나 과장이 오는 것 같다.

이를테면 단현의 「~파레시아~」는 결말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자신에 대한 비판적 존재론으로서의, 실천으로서의 글쓰기란 어떤 것일까? 감히 오늘날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지에 관해 말하기, 우리 자신에 대한 자리매김의 변동, 전이의 가능성을 말하기······

일련의 글쓰기/행위/실천이 비판적이면서 스스로가 하나의 예시가 되는 방식으로 실재-사실들 속에 불온(의 진실)로서 자신을 자리매김하려 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주체는 자기 자신과 그리고 진실과 맺는 관계로서 발생하고, 바로 이 활동은 곧 ‘감히 말하기’와 같은 것, 푸코가 말하는 파레시아와 같은 것이 아닐까.”

단현. 「우리 자신에 대한 비판적 존재론, 파레시아, 불온-되기」.

이렇게 말할 때 겨냥되는 것은, 명시적으로 쓰여 있듯, 비판critique적 ‘존재론’이다. 이는 비평의 역량/형식/원리와는 범주적으로 다르다. 그 중 하나와 결합할 수는 있겠지만. 무관하지는 않으나(그래서는 안 되나) 개념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비판적 존재론이 실천적 글쓰기로 나아갈 수는 있겠다. 그러나 그게 비평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여정이 「허구는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에서 비평이 실천적 역량을 담보할 필요가 없다고 못박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읽기에 「허구는~」의 요지는 이렇다.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실천)은, 어떤 법칙에 근거해 행위할지를 결단하는 일이다. 그 결단은 비평을 통해서는 일어날 수 없다. 비평은 기껏해야 동어반복이거나 발견되지 않았던 사실을 발견할 뿐이다. 그것은 사실의 발견이지 저항이 아니다. 정말 실천/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축으로 삼을 법칙을 선택하는 결단의 가능성은, 자기표현에 있다.

그런데, “실천하고자 하는 이는 비평을 넘어 자기표현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여정. 「허구~」)고 할 때, 비평을 넘어 자기표현으로 나아가는 그 태도 혹은 삶의 양식이 바로 파레시아가 아닌가. 단현이 의미화한 파레시아는 실제로 개념/언어/명제 체계를 해체/번역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 것 같다. 파레시아는 이미 좁은 의미의 비평이 아니며, 충실한 비평 이후에 오는 실천적 자기표현, 비판critique적 삶의 태도다.

그렇다면 이건 단지 여정이 ‘비평’과 ‘자기표현’으로 나눈 것을 합쳐서 ‘비평(`)’로 부르면 되는, 용어의 재정의만 거치면 새로운 논의가 가능해지는 구태한 차이일 뿐이었을까. 아니다. 이런 재정의를 통해 단현과 여정의 텍스트가 같은 맥락으로 화해될 수 있다고 해도, 여정이 비평과 자기표현을 나누었던 것은 좀 더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나는 “실천하고자 하는 이는 비평을 넘어 자기표현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여정의 주장을 확장할 필요성과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느낀다. 이를테면 이렇게 :

예술 혹은 예술 비평에서 정치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이는, ‘정치적인 것’을 넘어 ‘정치’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3.

X와 X적인 것의 구분이 문제다. 비평은 비판critique적일 수는 있으나 비판critique과 같지 않다. 비판critique은 비평적일 수는 있으나 비평과 같지 않다. 반복건대 둘은 혼재하고 있으나 개념적으로 구분될 수 있다. 둘을 혼동할 때, 과장이 일어난다. 비평 혹은 비판critique이 곧바로 정치일/할 수 있다는 식의. 이 문장 또한 혼동을 제거하면 교정할 수 있다. 비평 혹은 비판critique은 정치적일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이지는 않다. 우리는(최소한 내 작업은) 비평과 비평적인 것, 비판과 비판적인 것,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혼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무슨 말인가. 사실 여정의 「허구는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를 다시 읽으면서 더 중요하게 느껴진 것은 다음 문장이다.

왜 비평은 실천의 계기가 되어서는 안 되는가? 그것은 올바른 비평이 아닌 권위에 근거한 명령이기 때문이다.

여정. 「허구는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

나는 이 문장에서 두 가지를 떠올렸다. 비평이 곧바로 실천의 계기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말은, 사실을 근거로 당위를 이야기할 수 없다는 흄의 자연주의 오류 비슷한 것 같다. 그리고 이 오류를 경계하는 일은 단현이 「~파레시아~」와 이번 글에서 이야기하는 비판적 존재론과 정치적 사유에 필수적이다. 이를테면 단현은 이번 글에서 이렇게 썼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지점은, 어쩌면 윤리적 문제 상황들을 보편적인 도덕 규범의 설정과 준수를 통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과 정치적 선택으로써 생각할 때 더 나은 논의를 기대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점이다”

단현. 「작동되는 자아를 넘어서 타자와의 관계의 정치로」.

나는 「참 어려운 일입니다」에서 소개했던 랑시에르의 습속ethos 개념을 다시 경유하여, ‘보편적인 도덕 규범의 설정과 준수’를 곧바로/섣불리 정치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을, ‘규범을 사실 속에 용해시키는 일’이라고 번역하게 된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논의를 이렇게 재구성할 수 있다;

비평은 구체적 행위다. 그리고 비판critique은 비평을 추동하는, 혹은 그 이후에 오는 태도다. 이 둘을 혼동할 때, 즉 비평이 그 자체로 비판critique일 수 있다고 오인할 때에 두 개념은 모호하게 혼재되어 그 자체로 정치를 담보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괴상한 무엇이 된다. 사실에 대한 분석-비평이 그 자체로 비판critique의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식으로, 비판이 가질 수 있는 정치적(정치‘적’) 역량, 새로운 규범에 대한 구성력이, 사실 차원의 비평 속에서, 해체/용해된다. 비평-비판의 혼재체는 그 자체로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한다. 또한 비판critique적 정신에도 어긋난다. 규범을 분석하는 일만으로 규범에서 벗어나려 하면 안 된다. 사실 차원의 규범을 지적하거나 반대하는 일만으로는 규범을 무화할 수 없다.

아마도 이런 비약은 비평이라는 행위에 어떤 정치적인 위상을 부여하려는 욕망에서 오는 것 같다. 소설 하나를 비평할 때, 그 소설이 어떤 이야기story를 내용으로 가지며 그것이 어떤 형식 요소들 사이의 길항을 통해 어떻게 서사화되는지를 분석하는 일은, 단지 비평일 뿐이다. 이 과정은 스스로의 힘으로 비판critique이 될 수 없다. 실천과 변화를 추동하는 힘, 여정의 말대로라면 ‘자기표현’의 영역, 단현의 말대로라면 ‘비판적 존재론-파레시아’는, 그 다음에 온다. 이 개념들의 혼동은 비판critique의 힘을 잃게 한다. 비평의 정치적 역량에 대한 착각만 남는다.

4.

생각건대 이 문제는 예술/예술비평이라는 개념과 정치라는 개념의 관계를 해명하는 일에 내용적으로 직결되어 있으며, 또한 그 해명의 과정과 형식상으로도 동질이형이다. 그리고 예술/예술비평의 개념과 정치의 개념 간 관계를 해명하는 일은, 지금 우리가 ‘우리’를 말하기 시작한 시점, 즉 타자를 비로소 진지하게 말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여정이 지적한 신학적/윤리적 상상력의 문제─어떻게 공동의 것을 말해낼 수 있을지의 문제와 직결된다. 공동의 것을 말할 때마다 침입하는 유아론의 협잡에 대비하는 일은 예술과 정치의 관계를 해명하는 일과 멀지 않다.

최소한 내게는 그렇다. 아무리 현대의 정치 개념이 미시화되었다 할지라도, 단현이 지적했듯이 결국 윤리와 정치는 타자의 문제다. 주체의 공동체-내-존재론이, 그리고 그 주체가 타자와 관계맺는 방식이, 그 방식을 재사유하는 과정이 문제다. 그리고 비판critique적 자세를 견지하는 비평 행위는 분명히 그러한 사유/태도를 실현하는 구체적 행위 중 하나로 세워질 수 있다.

다만 왜 예술에서 출발해야 하냐는 질문은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내가 「참 어려운 일입니다」와 「하나마나한 이야기」에서 고수했던 랑시에르 독법에는 문제가 있었다. 이것은 「함정인 것 같지만」에서 내가 경계했던(그러나 경계에 실패한) 전제와 관련된다.

“그런데 이 모든 정식화(혹은 간략한 답변)는 어떤 전제 위에 서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전제 위에 서 있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 전제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은 문제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함정일 수 있다.”

파상. 「함정인 것 같지만」.

생각건대 그 함정의 실체는 이런 것이었다; 예술 혹은 비평이 꼭 정치를 해내야만 하는가. 예술의 정치성을 이야기할 때, 그 ‘정치성’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어떤 작품이 직접 공동체의 형질 변화를 일구어낼 수 있다는 얘긴가. 혹은 좋은 비평이라면 그 자체로 정치인가. 이 때 비평이란 정확히 어디까지를 얘기하는 것이며 정치한다는 것은 정확히 어떤 행위를 이야기하는가. 지난 작업들에서 나는 정치적인 것과 정치를 구분했는가.

구분하지 않았다면 왜 구분하지 않았는가. 거기에는 예술이나 비평을 정치와 직결시키려는 섣부른 욕망이 담겨 있지 않은가. 이 욕망은 예술/비평 행위를 유아론의 협잡에서 구원해내 공동의 무엇을 담지할 수 있게 하려는 욕망이기도 했다. 그러나 방향이 잘못되었다. 소설 한 권이나 그림 한 장은, 투표하거나 보이콧하거나 공론에 낄 수 없다. 예술장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많은 작품이 모여 봐야, 그것들이 할 수 있는 건 담론을 만드는 일뿐이다. 담론을 만드는 것으로만 정치가 수행될 수는 없다. 예술은 정치적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비평 또한 정치적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명제 위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예술 혹은 예술 비평에서 정치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이는, 정치적인 것을 넘어 정치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여전히 이 작업은 랑시에르를 경유할 것이다. 그러나 그간 내가 혼동해 온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구분을 동반해야 한다. 비판critique적인 자세로 랑시에르를 재독하는 일─랑시에르에 대한 기존의 내 독해를 재독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고 나면 비평의 실천적 역량에 관해 우리가 나눴던 대화들을 좀 더 의미 있는 맥락 위에 위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내 다음 과제는 비평(`)을 제안하는 일이다. 그 비평(`)은 비판critique을 섣불리 용해시키지 않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실천의 한 양태이며, 유아론의 협잡을 경계하고 공동의 것을 말해내는 비판적 존재론이 될 것이다. 이 상상력을 무어라 부를까.

파상
studien618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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