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며 – 들뢰즈, 그러나 생존 내적인 긴장

들뢰즈는 니체에 관한 한 짤막한 텍스트 〈유목적 사유Penée nomade〉(1972)에서 리샤르 드사이Richard Deshayes를 인용하여 말한다. “산다는 것, 그것은 살아남는다는 것이 아니다Vivre, c’est pas survivre” 이 텍스트의 제목이 된 개념에 연관지어 볼 때, 이 문장의 뜻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그리고 이 문장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너무나도 옳다는 것 또한 명확하다.

그러나 단지 생존하기survivre를 살기vivre에 대립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늘날의 가장 첨예한 문제 지점에 닿기 위해서, 섬세하게 짚어보지 않을 수 없는 물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다. (어쩌면 우리 자신일 수도 있었던) 타인의 죽음이 언제나 단번에 우리를 살아남은 자들로 만들지 않는가? 이것은 생vie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조건이며 단순히 피해서는 안 되는 조건이지 않은가?

그러므로, 산다는 것, 삶이라는 것 내에 있는, 혹은 차라리 생존(살아있음/살아남음)이라는 것 내에 있는 긴장을 숙고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뒤에서 다시 얘기하겠지만, 바로 이 긴장이 오늘날 모든 생이 처한 곤경과 문제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1. 「대니」, 『레몬』, 「큰 늑대 파랑」

오늘날 한국문학에서 생존을 위해 사는 것, 생존을 이어나가는 것이 과연 산다는 것인지를 묻는 목소리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를 명시적인 문장으로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도, 이러한 물음과 아주 가까운 분위기를 감지할 있는 텍스트들 또한 적지 않다.

이것이 우리의 시대를 특징짓는 물음인 까닭은, 세계에 폭력과 억압이 있다고, 우리는 그에 저항해서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고 간단히 말해버리고 끝내는 것이 더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더 이상 폭력은 생에 외재적인 것이 아니다. ‘본래적인 순수한 삶’이 있는데 폭력이 그 삶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오늘날 “삶은 작동된다.”[1]

“스물네 살의 안드로이드 베이비시터”[2]인 ‘대니’는 ‘작동되는’(이 말의 일상적인 어법에서) 로봇이다. 그런데 화자인 ‘나’의 삶이 ‘대니’보다 더 살아있는 것이기는 한가? “이런 것을 생존이나 생활이 아니라 삶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나는 일종의 숟가락 같은 것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휘청이는 몸에 위태롭게 아이를 얹고 낮에서 밤으로, 하루에서 다른 하루로 끝없이 옮겨놓을 뿐이었다.”[3] 이 소설은 생존에서 산다는 것(관계 속에서 산다는 것)으로 나아가기 위한 몸부림에 관한 한, 슬픈 실패의 복기로 읽힌다. 대니는 ‘나’에게 “같이 살”[4]자고 말한다. ‘나’는 “그를 사랑했”으나 그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게 되어버렸고, “나는 여전히 살아 그것을 견딘다.”[5]

이러한 지점들이 어떻게 단지 한 작가의 예민한 감각의 산물이기만 하겠는가? 죽음과 애도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실은 결국 삶에 관해 묻는(그러나 결코 애도와 결별한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닌) 소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한다. “어떤 삶은 이유 없이 가혹한데, 그 속에서 우리는 가련한 벌레처럼 가혹한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6] 이 문장이 날카롭게 느껴지는 것은 ‘가혹하다’는 말 때문이 아니라 ‘모른다’는 말 때문이다. 또는, ‘가혹한’ 동시에 그런 줄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살아감은, 죽음 이후를 살아가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을 생존자로 만든 자를 잊게 하면서 또한 그저 경쟁에서 생존하는 일에 매어 놓는다. 고3인 아이들은 “임박한 대입시험의 생생하고 폭력적인 부담감”[7]으로 인해, 범인도 모른 채, 해언의 죽음을 잊게 된다. “그래도 우리는 여기 그대로 남아 있잖아? 죽을 맛이야.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 사는 게 이게 뭐냐. 이게 사는 거냐.”[8]

그런데 윤이형은 이미 수년 전에 펴낸 소설집에서부터, 우리가 그저 “가련한 벌레처럼”, 혹은 ‘좀비’처럼, 우리가 숨이 붙어있음의 상태를 연장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예민하게 포착해온 작가였다. “부모님은 사회가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한평생을 성실하게, 그리고 우울하게 고생만 하며 살다가 고작 프로판가스 때문에 온몸의 살점이 갈기갈기 찢겨 바람에 날아갔다. 사라는 절대로 그런 삶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9] 그러나 회사에 취업하지 않고 여러 매체에 그때 그때 글을 팔아 근근이 살아가는 사라도, 재혁이나 정희도, “성실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먹고살기 위해 살고, 살아만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들은 좀비에 물려서 좀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좀비 같은 존재들 속에서 그 좀비라는 존재성에 천천히 전염되어 왔던 것이 아닌가. 좀비는 죽은 자이다. 아니, 그것은 이미 죽었으나 살아남은 것, 죽음 이후에 살아있되, 살아만 있는 시체이다. “늑대의 이름은 파랑이다. 파랑은 우리를 지킨다. 우리는 파랑을 지킨다. 우리가 우리를 잃고 세상에 휩쓸려 더러워지면, 파랑이 달려와 우리를 구해줄 것이다.”[10] 그들이 사이버 상에서 창조한 늑대가 현실 세계로 스며들어 존재를 부여받는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늑대 그림과 함께 업로드한 그들의 선언문에 대한 배반을 응징하러, 늑대가 사도처럼 오는 듯하다. 그들이 (예술도 정치도 없이) 그저 먹고살기 위해 살아가다 결국 좀비가 되었을 때, 파랑은 그들을 물어 죽인다. 한편, “서른한살, 친구들은 철밥통이라고 불렀고 부모님은 한심해했으며 자신에게는 그저 꾸역꾸역 삼켜야 하는 반고형 화학물질 같던 아영의 삶에는 그렇게 해서 도끼 한자루가 생겼다.”[11] 도끼를 든 아영만이, “거대한 한계들의 연속”[12]인 세상이 좀비에 의해 점령되어가는 아포칼립스 속에서 마침내 파랑이 찾아왔을 때 파랑을 알아보고는 파랑을 올라타고 중요한 무엇인가를 향해 달려나간다.

2. 「작별」, 「나무 불꽃」

한강은 살아있다는 것 내적인 모순과 긴장을, ‘살아있다’는 말 속에는 상이한 맥락들이 교차하고 꼬여있다는 사실을, 그렇기 때문에 이 말 속에서 이중적인 의미가 작동하며 상반된 잠재성이 겹쳐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포착해온 작가이다.

제12회 김유정문학상을 받은 한강의 최근 단편 「작별」의 첫 대목은 카프카의 「변신」을 연상시킨다. “난처한 일이 그녀에게 생겼다. 벤치에 앉아 깜박 잠들었다가 깨어났는데, 그녀의 몸이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13] 이 소설은 ‘심사평’이 얘기하는 피상적인 해석처럼, “소멸이라는 사건을 미분해서 존재와 소멸의 경계들을 보여주는” “소멸(사라짐)의 현상학”이나 “인간과 사물(눈사람)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 존재와 소멸의 경계”[14]에 관해 말하고 있는 텍스트가 아니다. 이 소설은 살아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지에 관해 묻는 텍스트다.

잠시 일을 쉴 때면 그녀의 자리에서 내다보이는 플라타너스의 반짝이는 잎사귀들을 바라보며 사물처럼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때로 그녀와 나무 중에 나무만 살아 있다고, 자신의 딱딱한 침묵을 주저 없이 앞질러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느꼈다. 어쨌든 조금 더 생존할 수 있을 테니까요. 감광지에 착색되다 만 얼룩 같은 문장이 그 창유리 위로 어른거렸다.[15]

꾸역꾸역 회사를 다니는 주인공, “학창 시절부터 경쟁에서 가까스로 살아남는 사람”[16]이었던 ‘그녀’가, 자신이 하나의 “사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나무보다 더 살아있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현수 씨’의 말을 겹쳐 떠올리는 이 대목을 통해 작가는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은 “가까스로 살아남는” 것, “조금 더 생존할 수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지 않느냐고 묻는다. 작가는 ‘생존’이라는 말 속에서 “생생生生하게 존재存在하”는 것과 “조금 더 생존生存하”는 것을 분리시킨다. “매우 날카롭게 휘어 있”는 발톱을 가졌지만 “나뭇가지에 매달려 버티는 데에만 사용”[17]할 뿐인 나무늘보를 떠올리고, 심지어는 자신을 “더 이상 자신의 몸에 속해 있지 않”는 “어떤 사물”로 상상하는 등의 장면들이 바로 이 지점을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잘라 말하자면 한강은 어떤 살아있음 혹은 ‘살아남기’를, 다른 살아있음 혹은 차라리 ‘살아있기’에 대 립시킨다.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들과 규범들에 충실하게, 먹고살기 위하여 열심히, 성실하게, 처절하게 계속해서 살아남아서 살아간다는 것이 충분하게 살아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어째서인지 […] 피와 살과 내장과 근육이 있는 몸을 다시 갖고 싶지 않았다”[18]고 쓴 작가는, 십 년도 더 전에 이미 “나, 내장이 다 퇴화됐다고 그러지. […]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야 언니”[19]라고 썼었다.[20]

이렇게 죽으려는 거니? 그런 건 아니잖아. 그냥 나무가 되고 싶은 거라면, 먹어야지, 살아야지.

말하다 말고 그녀는 숨을 멈춘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의심이 고개를 쳐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잘못 생각한 것 아닐까. 처음부터 영혜는 바로 그것, 죽음을 원해온 것 아닐까.[21]

소설의 이 대목과 이어지는 장면들에서, 나무가 되려는 일과 죽음을 막고 조금 더 연명시키려는 일 사이의 대립이 뚜렷하게 제시된다. 영혜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을 그저 더 연명하기 위해 다시 내장을 가진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영혜를 살아있게 하려는 인혜는 과연 살아있었던 적이 있었던가? 생존을 위해 열심히 (견디고 버티며)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죽어있는 상태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작가는 인혜의 회상과 독백 속에서 말하고 있다. 인혜는 처음부터 “살아간다는 게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아 보이는”[22] 사람이었고, 바로 그 점에서 지금의 영혜와 대비된다. 살아간다는 것을 체득(체화)한 사람, ‘숨쉬듯이’ 혹은 ‘밥먹듯이’ (자연스럽게) 생존해나가는 사람. 그런데 그녀는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었고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23]는 느낌을 받는다. “그녀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24]다는 것을, “자신이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25] 깨닫는다. 생존하기 급급해서 삶을 “살아본 적 없다”는 것, 그런데도 사람은 그저 살아남아 살아가게 되어있다는 것, 바로 이 점이 한강에게는 이물스럽고 폭력적인 것이다. “산다는 것은 이상한 것이라고 […]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26]

3. 데리다의 생존 개념, 오늘날의 문제

오늘날 우리의 세계에, 폭력과 억압이 있다. 이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런데 관건은 단지 이 사실의 확인이 아니다. 삶이 고통스럽고 비참하므로 삶이 덜 고통스럽게, 더 수월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것만이 관건은 아니다. 왜냐하면 문제는 삶이 ‘살아남아 살아있는 것’이 되고, ‘살아남기 위해 사는 것’, ‘목숨이 붙어있음을 지속하는 것’, 존속 혹은 연명이 되어버리면서도 이것이 은폐된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가 억압된 삶이고 어디까지가 상투적인 삶일까?”[27] 이것이 명확히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 이 두 계열이 뒤섞이고 영합하고 공모한다는 것. “우리 삶 속의 경험, 행위, 혹은 경험과 행위의 관계가 섬뜩할 만큼, 소름끼칠 만큼 닮아 있다는 것, 폭력과 부당함의 경험도 (그것의 행함도), 내밀한 불행까지도 놀랄 만큼 닮아있다는 것, 나의 불행 또한 ‘상투적인 불행’이라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참을 수 없는 것에 속한다.”[28] 그러므로, 단지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 내가 보기에, 바로 이것이 오늘날의 문제를 정의한다.

생존survie은 데리다가 남긴 마지막, 미완의 개념이다. 이 개념은 흔적, 유령, 애도…(데리다는 탈구축déconstruction의 사상가인 동시에 정확히 그만큼 애도와 폭력에 관한 사상가이기도 하다)와 같은 개념들이 모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2004년, 건강을 잠시 회복했다고 생각했던 데리다는 그의 마지막 텍스트로 남겨질 마지막 인터뷰에 응한다. 데리다가 사망한 후, 이 인터뷰는 『마침내 산다는 것을 배우기 apprendre à vivre enfin』라는 제목으로 출간된다. 이 책에서, 데리다는 생존을 “산다는 것이나 죽는다는 것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생을 가능케 하는 “기원적인” 것으로 제시하는 동시에 이중적인 것으로 제시한다. “삶은 살아간다는 것이고 삶은 생존이다.”[29] “우리는 모두 일시적인 집행유예로 인하여 살아남은 자들이다.”[30] 즉 생존survie은 유예sursis인데, “생존한다는 것은 보통의 뜻에서는 계속해서 살아간다는 것이지만, 또한 죽음 이후에 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존이란 한편으로 “살아가는 것, 계속해서 사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책이 그 책의 저자보다 오래 살아남듯이〔저자의 죽음으로부터 살아남듯이〕, 한 아이가 그의 부모보다 오래 살아남듯이〔부모의 죽음으로부터 살아남듯이〕, 죽음으로부터 살아남는다는 것”[31]이다.

요컨대 근원적인 조건과도 같은 생의 이중성이란 다음과 같다. 생존은 살아있음을 이어나가는 것, “조금 더 생존하”는 것, 존속하는 것, 연명하는 것, 살아남기(위해 살기)인 동시에, 또한 살아남음, 즉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았다는 것, 죽음 이후에 산다는 것, 망자보다 더 오래 산다는(살아있다는) 것, 살아남아서 살아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살아있음이자 살아남음인, 혹은 살아남음이자 살아남기인 생존(개념) 내적인 두 차원 간의 긴장이다.

생존 개념은 삶(또는 생명)의 실존과 우연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한편으로 삶의 동일성과 수동성을 보여주는 식으로 두 번에 걸쳐 오늘날 우리가 처한 폭력의 상황을 가리킨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문제의 가장 첨예한 지점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것이 있는가? 여성에 대한 일련의 범죄들 이후 ‘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선언이 이어지는 한편 여전히 ‘먹고사는’ 일, 경쟁에서 ‘살아남아’서 살아있음을 연장하는 일 밖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는, 이중으로 덫에 걸린 우리들의 상황을 말이다.[32]

그러므로 생존 개념이 제기하는, 살아있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에 관한 물음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타자들의 죽음 이후에, 여전히 남아있고 작동하는 폭력들의 와중에 ‘나’는 어찌어찌하여 살아남았다는 것이 과연 살아있다는 것인가? 혹은, 이렇게 연명한다는 것, 숨이 붙어 있기만을 지속한다는 것, 살아있음의 상태를 연장하는 것, 조금 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과연 살아있다는 것인가?

4. 『레몬』, 「작별」

어떤 삶에도 특별한 의미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삶에도, 언니의 삶에도, 내 삶에도,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지어내려 해도 없는 건 없는 거라고, 무턱대고 시작되었다가 무턱대고 끝나는 게 삶이라고.[33]

삶에 보편적인 의미를 부여해주는 (초월적인) 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방향”[34]을 알 수 있을까. 권여선의 『레몬』은 바로 이런 물음을 던진다. 이 탁월한 소설은 또한, 애도라는 길고 지난한 작업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다. 누군가를, 자신을 살아남은 자로 만든 그 사람을 잃어버린, 또 “내 삶을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잃”[35]은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이, 단지 살아있기만 한, 목숨이 붙어있음을 지속하는 삶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는 것이,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죽음은 우리를 잡동사니 허섭스레기로 만들어버리”며, “순식간에 나머지 존재로 만들어버리”는데.

다언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장章들 사이에 성희와 태림의 시점으로 쓰인 장이 겹쳐지며 쌓여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마치 추리소설처럼, 사건의 설명되지 않던 상황이 하나둘씩 짜맞춰진다. 그러나 끝내 해언을 죽인 범인은 알 수가 없다. 다언은 처음에 한만우가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용기를 내어 그의 집에 찾아갔었다. 그러나 그는 범인이 아니었고, 의심쩍고 모순되어 보였던 그의 8년전 진술은 사건에 태림이 개입된 정황과 함께 완전히 맞아떨어진다. 다리를 잃은 만우를 보며, 그의 동생 선우와 얘기를 나누고 그들의 왜소증 어머니를 보고는 “살아갈 방향”을 생각한다. 산다는 것, 그것은 살아남았으므로 복수를 위해 살아간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듯이. 다시 9년이 더 흘러 다언은 묻는다. 아니, 한탄한다.

우리 삶에는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걸까.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지어내려 해도 없는 건 없는 걸까. 그저 한만 남기는 세상인가. 혹시라도 살아있다는 것, 희열과 공포가 교차하고 평온과 위험이 뒤섞이는 생명 속에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일 수는 없을까.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살아있음으로 인해서, 죽음 이후에 여전히 살아나간다는 그 살아있음을 통해서 애도할 때, 이제 살아있음이 애도와 같이 걷는 살아감일 때에 한에서이다. 그럴 때, 그 살아있음은 단지 살아있음의 상태를 지속하는, “가련한 벌레”의 삶 이상의 것이 될 계기를 품는 것이 아닐까. 다언은 “누구나 한번 보면 잊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였”던 언니의 죽음을, “내용 없는 텅 빈 형식의 완전함이 주는 황홀”이, 즉 “아름다운 형식”[36]이 파괴된 것으로 여겼었다. 이제 다언은 “완벽한 형식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내용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한만우의 죽음을 경유함으로써” 다언은 “비로소 언니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게 되었다.”[37]

「작별」 또한 살아간다는 것은 “버티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사력을 다해”[38]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런 한에서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가 인간인 건지”[39]라는 말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가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건지’라고도 들린다. 주인공의 생이(삶이 그리고 생명이) 글자 그대로 ‘녹아내리는’ 순간들 속에서, 살아있기 위해서 그녀는 “사력을 다해” 사랑하는 이들을, 현수 씨와의 일들, 아들 윤이와의 일들을, “자신의 삶이라고 불렸던 몇십 년의 시간에 대해”[40] 기억하고 더 기억하려고 애쓴다. 인간의 몸을 가졌을 때 자기 스스로를 사물로 상상했던, 살아남는데 급급해서 자신이 살아있는 줄도 몰랐던 ‘그녀’는 눈사람이 되어 이윽고 몸이 녹아내리는 순간, 녹아서 완전히 흩어져버리기 직전, 최대한으로 사랑하고 기억하고 그리하여 (‘아직’ 생존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생생하게 “살아있다”.

5. 맺으며 – 생존을 넘어서 살아있기

우리가 살아남은 자들이라는 것을 정확히 응시하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있음의 상태만을 지속하고 연장하는 것에, 즉 살아남기에 머무르지 못하게 한다. 생존 개념 내의 긴장은 이제 “우리가 ‘그저 생존함’을 넘어가야(sur)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 그러므로 나는 데리다의 마지막 작업을 물려받아 바꿔 써내려가면서, 생존survie에서 sur를 두 번 겹쳐 읽는다(sur-survie).”[41] 기원적 조건으로서의 생존을 망각하지 않고, 그것과 결별하지 않고 늘 이어져 있는 한에서(다시 돌아올 수 있는 한에서) 그것을 넘어 한 발자국 더 나아간 삶을 살기. 현전présence하는지 여부를 넘어서서, 우리가 서로 이어져 있는 한에서 살아나가기.

애도하는 것, 기억하는 것, 사랑하는 것이 살아가는 일에 ‘단지 생존함’보다 한 발자국 나아간 무엇인가를 부여하는 이유는, 그것이 관계 속의 살아감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것이 자신의 삶을 탁월한 것으로 가꾸어갈 첫 걸음인 동시에 정치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정치성의 영도零度이기도 하지 않을까? 이것이 “마침내 산다는 것을 배운다 apprendre à vivre enfin”는 것이 아닐까?


  • [1] 졸고, 〈작동함/됨에 맞서 불온을 가동하기〉 (2018), 웹페이지 《지평L’Horizon》. (lhorizonsociety.com/580/)
  • [2] 윤이형, 「대니」, 『러브 레플리카』, 문학동네, 2016. 47쪽.
  • [3] 같은 책. 22쪽.
  • [4] 같은 책. 45쪽.
  • [5] 같은 책. 47쪽. 강조는 인용자.
  • [6] 권여선, 『레몬』, 창비, 2019. 145쪽. 강조는 인용자.
  • [7] 같은 책. 58쪽.
  • [8] 같은 책. 같은 쪽.
  • [9] 윤이형, 「큰 늑대 파랑」, 『큰 늑대 파랑』, 창비, 2011.
  • [10] 같은 책. 141쪽.
  • [11] 같은 책. 139쪽.
  • [12] 같은 책. 136쪽.
  • [13] 한강, 「작별」,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은행나무. 13쪽.
  • [14] 〈심사평〉, 위의 책, 8-9쪽.
  • [15] 같은 책. 28쪽. 강조는 인용자.
  • [16] 같은 책, 같은 쪽.
  • [17] 같은 책, 27쪽.
  • [18] 같은 책. 46쪽.
  • [19] 한강, 「나무 불꽃」, 『채식주의자』, 창비, 2007. 186쪽.
  • [20] 내가 아는 한, 이 소설에 대한 가장 흔한 독해는 육식과 채식(혹은 반-섭생), 동물성과 식물성의 대립을 읽어내고, 여기에 폭력성과 비폭력성의 대립을 대응시키는 것, (경우에 따라서는) 육식과 동물성의 항에 가부장적인 것을, 그의 반하는 항에 여성적인 것을 대웅시키는 것, 그리하여 영혜를 (가부장적이고 동물적인) 폭력에 저항하는 인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지 의문스러웠다. 나는 「작별」을 읽고 비로소 『채식주의자』 연작의 마지막 중편인 「나무 불꽃」 역시 근본적으로는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묻는 소설이라고 다시 읽을 수 있었다.
  • [21] 같은 책. 189쪽.
  • [22] 같은 책. 161쪽.
  • [23] 같은 책. 197쪽.
  • [24] 같은 책. 200쪽.
  • [25] 같은 책. 201쪽.
  • [26] 같은 책. 204쪽.
  • [27] 졸고, 〈작동함/됨에 맞서 불온을 가동하기〉.
  • [28] 같은 글.
  • [29] Jacques Derrida, 『Learning to live finally』 – An interview with Jean Birnbaum, Melville House Publishing, 2007. 26쪽. 번역은 인용자(필자 본인).
  • [30] 같은 책. 25쪽.
  • [31] 같은 책. 26쪽.
  • [32] 졸고, 〈생존과 기억을 넘억서, 쓰기〉 (2019), 웹페이지 《지평L’Horizon》. (lhorizonsociety.com/2111)
  • 이 문단은 인용하며 일부 수정하였음.
  • [33] 『레몬』 12쪽.
  • [34] 같은 책. 145쪽.
  • [35] 같은 책. 92쪽.
  • [36] 같은 책. 34쪽.
  • [37] 같은 책. 199쪽.
  • [38] 「작별」 55쪽.
  • [39] 같은 책. 46쪽.
  • [40] 같은 책. 52쪽.
  • [41] 졸고, 〈생존과 기억을 넘억서, 쓰기〉
단현
danhyun012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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