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제기 – “공유된 공동체”

요전에 나는 “공동체의 기억”을 문제삼으며 다음과 같이 물었다:

[…] “공동체의 기억” 내지 “집단적 무의식”이라고 할 만한 것은 실제로 없어야 마땅하다. 그것은 확신할 수 없는 기억에 대한 명목적 공유에 기초한 집단적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확인할 수 없음에도 어떤 “공동체의 기억”이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하나의 공동체가 어떤 특정한 집단 행위를 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기억을 공유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 아닐까? 그 공유의 가능성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여정, “기억을 전달한다는 것“, 촉발글, 셋잇단음Triplet 2019년 5-6월 특집, 지평.

그러한 공유의 가능성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없다. 설사 그러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것을 알 수 없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이라면, 그러한 것이 있다고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공동체의 기억의 가능성은 신뢰하기 어렵다. 이러한 회의주의에 대하여, 집단 사이에 분명 무언가가 공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는 이를테면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을 것이다:

허상으로 놔두고 각자도생하는 순간, ‘이젠 아무래도 미시적인 것들을’ 운운하는 순간, 그런 순간에야말로 우리의 ‘우리’는 허상이 된다. 그래서는 어떤 악도 걸러낼 수 없고 어떤 선도 지킬 수 없다. […] ‘우리’를 외치는 일은 공허하지 않다.

파상, “공동公同 혹은 공동空洞“, 응답글, 셋잇단음Triplet 2019년 5-6월 특집, 지평.

물론 이 언급은 존재론적인 무언가를 염두에 둘 만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상당히 실용주의적인, 공동체의 요청이다. 반면 단현의 다음 언급은 정치적 공동체에 관해 존재론적으로 관여하는 듯하다:

나를, 자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타자를 거칠 수밖에 없다. […] 그런데 이것은 여전히 나를 확립하고 지키기 위해 타자를 동원하고 타자로 하여금 지켜져야 할 것으로서의 자아를 위해 봉사하게 하는 작용에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자아를, 나의 행위를 통제하고 조절하는 것은 윤리적인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오늘-여기를 특징짓는 문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윤리적인 것은 이미 정치적인 것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며, 윤리적인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 옳음을 실천하는 일은 이미 정치함을 향하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윤리가 정치에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윤리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단현, “작동되는 자아를 넘어서 타자와의 관계의 정치로”, 촉발글, 셋잇단음Triplet 2019년 7-8월 특집, 지평.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타자와의 관계를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타자를 거쳐 자아를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자아를 거쳐 타자를 찾는다는, 관계의 또다른 방향의 실천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단현, 위의 글.

그런데 이러한 “관계”가 단현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쉽게, 양방향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아닌가? 회의주의자는 이 점을 이렇게 반문할 터이다. 거기에서 언급되는 타자란 결국 주체를 통해 이해된 후에서의 타자 아닌가? 그러한 타자가 나와 차이난다는 것 역시도, 이미 주체를 통해 간주된 사실 아닌가? 따라서 자아와 타자의 차이 자체도, 이미 주체로부터 나온 그러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자아로 돌아오게 한다는 타자라는 것이 있다고 간주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런 것은 애초에 없던 것 아닌가?

이 반문을 피하려면 공동체론의 논의가 인식적인 데에로 한정되어야 할 듯하다. 즉, 자아와 타자가 쌍방향적인 관계를 갖는다기보다는, 이미 있는 자아가 타자(의 개념)를 통해 스스로를 안다. 만약 그렇다면, 여전히 존재의 문제가 남아버린다. 그 알려지는 타자, 경유되는 타자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여전히 유아론은 우리의 희망 뒤에서 협잡을 꾸미고 있지는 않은가?

발전 – “퀴어 문학”

모처럼 어울리지 않게 비평이나 해 보자. 이 토막이 비평하는 대상은 퀴어 문학의 개념이다. 퀴어 문학에 대한 문학 비평을 하는 것은 아니고, 퀴어 문학이라는 개념, 바로 그 문화적 대상을 비평하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토막은, 말하자면 문화 비평이다. (파상의 말투를 따라해 보며.)

퀴어 문학이 무엇인가? 그 개념은 실로 모호하다. 어떤 개념이 유의미하게 쓰이고 있다면 그것을 모호함 없이 정의될 방식이 상대적으로 쉽게 발견될 것이다. 개념적 정의는 불가능하더라도, 적어도 적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것이 호랑이이고, 또 이것이 호랑이이다,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퀴어 문학에 있어서는 그러한 것마저도 어려워 보인다.

왜 그렇다고 나는 주장하는가? 무엇보다 “퀴어 문학”의 사례를 적시하는 행위조차도 “정치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조심스러움이 요구되어서 그렇고, “퀴어”의 정의 자체가 유동적이기 때문에 그렇다. 전자야 정치적 요구라고 넘겨 두자. 후자의 경우는 왜 퀴어 문학의 정의에 문제를 만드는가? 술어 ‘퀴어이다’는 특정한 속성을 고정지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혜진의 다음 논증에 따르면,

짚어두고 싶은 것은 ‘퀴어’라는 범주의 지시 대상이 고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 ‘퀴어’는 본래 ‘정상normal’으로 간주되는 이성애 규범을 따르지 않는 신체와 성적 선호를 가진 이들을 ‘이상한 것’ ‘기이한 것’이라고 폄하할 때 쓰인 말이 다. 최근 ‘퀴어’라는 용어가 ‘LGBTQIA’와 동의어인 것처럼 등 가 호환되고 있지만, 이는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젠더 퀘스쳐닝, 인터섹스, 무성애자 등이 ‘기이한 것’으로 여 겨지는 특정 사회와 역사적 맥락에서만 그렇다. 고대 그리스에서 자유시민이 행하는 남성 간 성애가 전혀 ‘이상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보라.

오혜진, “지금 한국 퀴어문학장에서 ‘퀴어한 것’은 무엇인가”, 문학과 사회 31.4, 84면.

‘퀴어이다’는 문화-상대적으로 그것이 지시하는 속성을 갖거나, (일반화하면) 특정한 문화와 특정한 속성들에 대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술어는, “H2O임”과 같은 속성에 대해 고정지시될 수 없다.

물론 그의 논증은 “퀴어임”이 비자연적 속성일 때에만 그러하다. 모종의 이유로 술어 ‘퀴어이다’가 특정한 자연적 속성을 지시하게 된다면(예컨대, “LGBTAIQ 중 하나의 성적 지향성을 가짐”) ‘퀴어’는 고정적으로 어떤 범주를 지시할 수 있다. 그러나 추가적으로 몇가지 보조논증을 취한다면 그의 결론이 방어 가능하다. 예컨대, 섹슈얼리티 역시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다고 이해될 수밖에 없다는 버틀러의 논증을 취하거나, 여러 속성의 선언지로 이루어진 속성-다발은 굿맨이 제기한 초랑/파록grue/bleen 역설을 회피할 수 없으므로 그것은 자연적 속성이 아니라는 희박주의Sparsism 테제를 수용하는 한에서 그렇다.

두 보조논증 중 적어도 하나는 그럴 듯해 보이므로, 오혜진의 분석을 수용하자. 그렇다면 퀴어의 개념은 “어떤 사회에서 ‘기이한 것’으로 여겨지는 성(지향)적 속성의 담지자” 정도에서 멈춘다. 앗, 그런데 여기에서 두가지 제한이 발견된다. 첫째, 우리는 “퀴어”의 개념을 확정하지 못한다. 단지 다른 두 사회에 있어서가 아니라, 동일한 사회에서 활동하는 두 사람도 단일한 퀴어의 외연을 결정할 수가 없다. 둘째, “퀴어”들 간의 자기정체성은 동일한 것으로 공유될 수가 없다. 퀴어의 개념 자체가 불확정적이기 때문에, 자기와 동일시할 수 있는 다른 퀴어의 사례를 확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퀴어 문학”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개념은 다음 둘 중 하나의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할 듯하다. 1) 퀴어 문학은 퀴어 작가를 통해 쓰인 자전적 양식의 문학 작품들이다. 2) 퀴어 문학은 퀴어 공동체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문학 작품들이다. 우선 앞의 방식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일반적으로 본다면, 이러한 제한은 기존의 다양한 문학적 양식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SF나 신화와 같은 허구 문학은 직접적으로, 취재를 바탕으로 한 문학은 간접적으로 “가능한 문학”의 틀에서 배제된다. 오혜진의 다음 비판이 목표하는 바가 이와 같은 지점이다:

퀴어문학을 읽고 쓰고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게 왜 문제가 되나. 여성문학, 노동자문학, 이주민문학, 장애인문학 등에도 같은 질문을 던졌나. 남성문학이나, 이성애문학에는? 특정 문학을 읽고 쓰는 데 적임자가 있다는 인식 혹은 특정 작품이 선보이는 정치적·미학적 상상에 대한 해석권은 바로 그 작품의 등장인물과‘동종’으로 분류되는 이들에게 귀속돼야 한다는 논리는 퀴어문학에만 강박적으로 부착된다. 물론 이 강박은 성 소수자를 도구적 장치로 등장시켜 대상화하는 경우를 경계하고자 생겨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게 성 소수자만이 성 소수자가 등장하는 서사에 대한 ‘적격’의 작가·독자라는 결론으로 귀결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당연히 성 소수자도 성 소수자를 대상화할 수 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소수자성을 다루는 작품과 관련된 문학 행위를 소수자들의 것으로만 치부한다면 소수자와 소수자 서사는 게토화될 뿐이다.

오혜진, 위의 글, 83면.

더구나 다음 비판을 고려할 때,

최근 퀴어문학론은 문학 주체의 성별 정체성이나 성적 선호를 ‘퀴어문학’의 정의에 포함하려 하지만, 작가가 말하지 않는 한 타인이 그의 성별 정체성이나 성적 선호를 식별할 수 있을 리 없다. 누군가의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본질주의적으로 상상하는 모든 시도는 필패다.

오혜진, 위의 글, 80-81면.

그 자체가 인식적 작업이므로, 인식적 가능성에 한계지워지는, 비평은 1에 따른 퀴어 문학을 작업에 사용할 수조차 없다. 따라서 퀴어 문학의 이해 가능한 두 방식 중, 작가의 정체성에 근거한 방식은 무력하다.

그렇다면 뒤의 방식, 즉 퀴어-공동체의 기억에 근거한 방식은 어떠한가? 이 역시 썩 만족스럽지 않아 보인다. “한국인의 기억”이나 “2차대전의 기억”은 (그러한 기억이 정말로 있냐는 물음과 별개로) 그 기억 공동체를 제한할 적절한 질적 특성을 제공한다. 그러나 퀴어적 기억을 공유하는 그러한 공동체는 적절한 질적 특성에 따라 제한되지 않아 보인다. 상기했듯 퀴어의 정체성은 문화에 따라 상대적이며, 퀴어의 개별적 사례들은 자신의 어떤 기억이 퀴어적인 것이며 그것이 다른 퀴어들과 어떻게 공유되는지 확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나는 퀴어 문학이라는 개념에 만족하지 못한다. 퀴어 문학이라는 범주에 대해, 그것과 필연적으로 관련되는 퀴어 공동체라는 집단이 공유된 무엇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퀴어 문학의 가능성을 위해, 퀴어 공동체의 기억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다음 두 제한이 만족되어야 했을 것이다. 우선, 모든 퀴어들이 공유하는 유의미한 질적 특성이 있다. 다시 말해, 퀴어를 비-퀴어와 구분하게 하는 분명한 특성이 있다. 또한, 그러한 특성으로 대별되는 퀴어의 각 개별적 사례들에 있어, 기억의 공유 또는 동일한 사태에 관한 동일한 행위 양태가 발견된다. 따라서 무언가 퀴어적인 것에 해당하는, 특성과 기억을 통해 퀴어의 각 사례들이 묶여 있어야 한다.

여기에 대해, “그럼에도 무언가 퀴어적인 것으로 그것들이 묶인 것 아닌가”라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다. 그것은 기껏해야 퀴어를 하나의 동일한 집단으로 환원하려는 정치적 맹목으로 끝날 것은 아닌가? 만일 그러한 귀결을 갖지 않으려면, 퀴어적인 무엇이 정말로 어떻게든 엮여 있으려면, 무엇이 더 필요할 것인가? 적어도 그것은 퀴어의 경험이 동종의 것으로 여겨진다는 공동체적 사실이어서는 안된다.

변주 – “민중 신학”

민중 신학⎯다시 말해 예수의 사역이 민중에 대한 사역이었으며 그 스스로가 하느님이 민중으로 육화한 결과라는 것⎯이 신학의 테제로 당연시되던 한 시기가 있었다. 한 시기라고 하지만, 그 시기가 과연 오늘날과 단절되어 있는가? 예컨대 촛불 집회가 시민의 의지의 발현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러한 메시아주의와 같은 맥락에서 이 집회를 사유하고 있다. 이러한 사유 속에서, 그리고 그 속에서만, 촛불집회는 어떤 정치적 의지가 시민의 집단적 행위로 육화한 결과이다. (단현의 말투로 다시 한 번 모사.)

문제되는 것은 이 “민중”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냐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역사 속에서 ‘민중’으로 호명된 대상들은, 그 민중의 형식적 특성을 갖는다고 간주되는 개인들, 이를테면 무산계급이나 서민대중, 인민 일반과는 다른 의지를 갖는 그러한 대상으로 나타났다. 예수는 고향 땅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박정희의 죽음에 수많은 서민들이 슬퍼했다. 촛불에 “맞불”을 놓은 한 무리의 시민들이 있었다. 정말로 예수가, 민주화가, 촛불이 “민중의 의지”에 의한 것이 맞다면, 어째서 이러한 형식과 내용 상의 괴리가 발생한다는 말인가?

결국 “민중적인 것”을 통해 의미되는 바는, 다음 지적에서 볼 수 있듯 두 괴리된 층위를 갖게 되는 것이다:

[…] 무엇보다 민중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하나는 특정의 정치적, 사회경제적 지위를 갖는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사회적 인구집단을 가리키는 서술적 개념으로서의 민중이다. […] 다른 하나는 담론으로서의 민중이다. 그것은 어떤 가치관이나 이데올로기적 비전을 통해 한국사를 이해하는 특정의 역사관, 한국사회의 구조와 문제를 해석하는 사회구성에 대한 특정의 이해, 그리고 이러한 틀에 바탕해 특정의 민주주의관을 공유하는 추상화된 사회집단 내지 그러한 의미지평과 가치관, 세계관을 공유하는 일종의 운명적 의미공동체를 지칭한다. 그러므로 민중운동에서 호명되는 민중과 실체적인 사회경제적 집단으로서의 민중은 일치하지 않는다. […]

최장집, “민중과 시민: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두 개의 다른 방법”, 황해문화 58, 130-131면.

아마도 실질적인 정치적 주체인 민중과 대비되는, 형식적인 정치적 집단으로 시민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시민의 정의는 훨씬 덜 모호하다. 단순히 기본적 권리를 갖고 정치적 참여를 할 수 있는 인민으로서 시민권이라는 성원권을 갖는 것만으로, 시민과 비-시민은 명확히 구분된다. 오늘날 촛불 “혁명”은 민중이 아닌 시민의 이름으로 일어난다. 그렇다면 촛불 시민의 시대는 민중의 시대보다 훨씬 덜 모호한가? “촛불의 의지”는 민중의 혼보다 훨씬 명백하고, 형식과 내용의 일치가 일어나고 있는가?

우리는 “촛불 시민”에 있어서도 동일한 괴리가 일어남을 주목해야 한다. “맞불”만으로도 이 점은 분명히 나타난다. 형식상 동일한 시민권을 공유하는 서로 다른 두 집단이, 시민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반목하는 것이 촛불 이후의 형국이다. 두 집단은 동일한 시민이지만 한 정치적 형국에 대해 다른 내용을, 다른 기억을 갖는다. ‘촛불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는 정신은 실질적으로 어떤 시민 집단이 전부 공유하는 그러한 정신으로 보증될 수 없다. 결국 촛불 시민 역시, 민중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요청된 그러한 주체이다.

“촛불 집회 참여자”라는 축소된 형식적 정의를 들어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촛불을 든 이들은 전체로서만 촛불 시민이다. 그러나 그 안의 부분들인 각각의 시민들은, 촛불 집회라는 사건에 대해 다른 인상들을 갖는다. 각자 촛불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바 역시 달랐다. 자진 하야, 탄핵, 누군가는 어떤 수감자의 해방을 원했다. 따라서 촛불이라는 사건, 또는 모종의 메시아적 사건은 공동체의 사건으로 간주되지만, 실제로 그러한 공동체의 각 구성원이 동일한 기억을 공유한다고 하기엔 어려워 보인다.

이 맥락에서, 2000년대 후반 한국에서의 시민 담론의 무력함에 대한 최장집의 다음 지적은 이른바 “촛불 혁명”을 경험한 오늘날의 “시민”들이 누구이냐를 묻는 것처럼 들린다:

[…] 필자가 이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핵심 주장 가운데 하나는 한국사회에서 시민은 민중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민중은 아직 시민권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시민이란 개념 역시 그러하다. […] 시민과 시민권의 핵심 요소는 보편성의 원리다. […] 왜냐하면 이는 […] 우리가 시민권이라고 말하는 자유와 권리를 공동체의 성원이 되는 ‘자격으로서’ 모든 개인들에게 보편적이며 평등하게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시민의 의미가 정착되지 못했다는 것은 시민권의 개념이 제대로 정착되지 못했다는 것에 다름 아니며, 이는 시민권이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되지 못한 것의 결과이다. […]

최장집, 위의 글, 144-147면.

오늘날 시민의 의미⎯적어도 ‘촛불 시민’이라는 표현 안에서의 의미⎯는 과거 ‘민중’이 갖던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시민권의 보유자라는, 형식적 의미에서의 “시민”은 촛불 시민의 기억 속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는 누구의 기억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누구의 의지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이상한 것은 정치적 정당화의 차원에서 발견된다. 일견 그러한 의지가 없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의지를 바탕으로 한 정치적 운동은 정당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퀴어 문학은, “퀴어적인 것”의 내용이 규명되기 이전에 이미 정당하다. 민중 운동은, “민중”의 질료적 정체가 발견되기 이전에 이미 정당하다. 시민 혁명은, “시민”의 형식과 질료의 통합이 이루어지기 전에도 유효한 정치적 운동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이 정당화가 순환적이지 않으려면 퀴어적인 것과 민중, 시민은 정말로 존재해야만 한다.

따라서 정치 이전에 가정되는 어떤 윤리적 주체가 없이는 정치적 정당화 역시 불가능하지 않냐고 나는 묻는다. 민중이나 촛불시민이 바로 그러한 주체로 상정되어 왔다. 이 주체는 단순히 명목상의 무엇이 아닌, 실질적인 특정한 정신이기를 요구받는다. 퀴어 문학에 있어 퀴어적인 것이 같는 지위도 이와 같았다. 퀴어 문학의 존립을 위해서는 “그럼에도 가정되는 어떠한 정신”이라는 괴상한 것이 요구된다. 민중 정치 또는 시민 정치의 존립을 위해서는, 단지 형식적일 뿐 아니라, 실질적인 집단적 정신이 요구된다.

정치는 전체가 윤리 아래에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윤리는 전체가 정치 아래에 있을 때, 정치 스스로의 정당성을 무마한다. 따라서 개념상, 윤리는 전체가 정치 아래에 있을 수 없다. 만일 윤리가 그 전체로서 정치 아래에 있는 것이 맞더라면, “대중에 의한 정치” 역시 스스로의 정당성은 갖지 못할 터이다. (나는 지금 단현의 언급과는 조금 다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응답 – “신학적 상상력”

이제 다시 나의 이야기를 할 차례이다. 저번 글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기억의 공유”에 놓인 두 양상을 이야기했다:

가능성은 존재론적인 맥락에 놓여 있고, 불가능성은 인식론적인 맥락에 놓여 있다. 하나의 사태에 관해, 그 사태를 기술하는 여러 방식이 있고, 그러한 기술이 성공적이어서 동일한 감상을 상대에게 불러일으킨다면, 기억은 공유될 수 있다. 그러한 공유가 검증될 수 있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불가능해보인다. 전달이 안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경우에도, 공유가 성공했음을 검증할 절차를 마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정, “기억을 전달한다는 것“, 촉발글, 셋잇단음Triplet 2019년 5-6월 특집, 지평.

그러므로 기억의 공유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려면, 최소한의 어떤 개별적 실체들이 가정되어야 한다. 이는 내가 다음과 같이 해석학을 비평한 의도와도 일치한다:

신학적 해석학은 반실재론에 저항해야 하며, (철학적으로 수용될 수 없음이 명백한) 전통적 실재론을 지양해야 한다. 이 두 대립 사이에서 해석학이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그것”, 즉, 인간의 언어 안에 있지 않지만 그 언어를 비판할 때 발견되는 실재에 관한 그림이다.

여정, ““신학적 해석학”: 반실재론을 넘어“,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2019년 7월 기획, 지평.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사소한 의미에서 “기억의 공유”를 말할 뿐 아니라, 공동체가 그 자체로 갖는 어떤 기억이 있다고도 말하고 싶어한다. 만일 어떤 질적인 것이 이미 있지 않다면, 즉 어떤 질료 내지 내용에 이미 어떤 형상 내지 형식이 부여되어 있다고 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기억이 존재할 수 있는가? 퀴어 문학이나 민중 신학의 예로부터 논박하고자 했던 것이 그러한 관점이다. 민중이나 퀴어는 단지 있는 어떤 것에 대응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형식과 질료가 동일하다고 간주되어야만 정치적 정당화를 수행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다. 기억의 공유가 질료의 지점에서 멈추어야만 한다면 그러한 기억은 존재할 수 없다.

오늘날 고전적 실재론을 비판하는 대표적 논자들, 이를테면 퍼트남이나 굿맨, 데이빗슨, 멀리 가면 콰인과 같은 이들은 그렇지만은 않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공동체의 언어 또는 공동체가 공유하는 존재론을 통해서만 소통이 가능하다. 그러한 존재론 이전의, 그 존재론마저 상대화시키는 그러한 원초적 존재론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애초에 공동체가 모종의 존재론을 공유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들이 함께 말할 수 있던 자연적인 무언가가 있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한 것이 있었다면, 그 자연은 어떻게 질적인 속성을 가질 수 있었을까? 여기에 답하려는 순간 이미 우리는 원초적 존재론에 개입하는 것 아닌가?

이 질문은 (많은 고전적 이론가들이 그러했듯) 곧장 신학적 응답을 요청하는 것처럼 보인다. 원초적 언어 내지 언어와 유사한 것이 없었다면 최초의 존재론의 터가 되어야 했던 그러한 것도 존재할 수 없다. 진화에 호소할 수 있지만, 그 진화 과정 자체가 이미 모종의 자연적 속성이 존재론 이전에 존재해야만 했음을 요청한다. 그렇지 않다면 진화는 질료적 사실, 즉 전언어적 사실이 아니라, 이미 공동체가 부과한 신화적 사실이 된다. 이 때엔 진화에 호소하는 것 자체가 부당해진다. 그렇다면 결국, 그러한 형상을 만들어 낸 심원이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결국, “우리 공동체”를 말하는 바로 그 때 무언가 신학적 질문이 피어난다고, 나는 자연스럽게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공동체이든 정치이든 무관하다. 집단적인 사실을 말하려면, 유아론적 독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 결국 “신학적인 것”으로 불려 온 종류의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나는 아직까지는 이 질문을 회피하거나 해소할 방법이 발견된 적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전에 던진 다음의 주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 윤리적 인간(또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신학적 상상력>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신학적 상상력”이란, 윤리적으로 필요한 모든 낙관이 실제로 그러리라고 믿는 상상력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모든 이들에게 고유한 어떤 것이 있으리라는 가능성이 상상되어야 한다. […] 이 상상은 정당한가? 정당하다. 우리의 언어 사용은 우리에게 이러한 방식의 상상을 낳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본질이 있으리라는 기대는 선험적으로 정당화된다. […] 그리고 그 위에 선 이들을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여정, “복제할 수 없는 것, 그리고 윤리“, 셋잇단음Triplet 2018년 3월 특집, 지평.

물론, 이 화두는 (인간의 현재적 개념들을 통해 논증하는,) 철학이 답해야 하는 그러한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정치나 문학 역시 이 화두에 답할 수 없다. 답 없는 질문에서 우리는 멈춘 것인가?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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