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성 이미지 사진 출처 : 영화 《드래곤 길들이기How to train your dragon》 중에서)

1.

‘삶이 작동된다’는 사태의 다른 한 쪽 면, 그것은 바로 ‘자아가 작동된다’는 사태가 아닐까? 근대의 ‘무의식’(나는 이 말을 단지 비유적으로 쓰고 있다)과도 같은 것은 바로, 남에 대한 나의 우위, 외부/주변에 대한 내부/중심의 우위, 비자아/타자에 대한 자아(나는 이 말을 정식분석학적 맥락과 전혀 무관한 의미로 쓰고 있다)의 우위가 아닐까? 그리고 아마도, 이 우위는 인식론적일뿐 아니라 존재론적인 앞섬까지 보증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를 나로 정체화해줌으로써 나와 다른 것들을 내가 아닌 것들로 만들며, 그것들 속에서 나를 구분하고 나를 보호하는 어떤 것. 스스로를 단일한 것으로 상상하고, 분열을 봉쇄하고 은폐하는 것. 결국 (하나의) 나인 어떤 것을 보호하기 위해서만 작동하는, 응고와 피막 형성의 반복들. 이것이 자아이며, 자아의 작동됨이다. 이것은 민족이기도 하고, 국가이기도 하며, 여러 출신에 기댄 정체성이기도 하고, 개인을 개인으로 만들어주는 자아이기도 하다. 이것은 나에게 나임을 제공해주는 나-이게끔-만들기이며, 내가 될 수 없는 것을 배제하고 남긴 나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이따금 참을 수 없이 의아해지는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왜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니기를(내가 나에게 관계된 타자이기를) 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의 나를 상실한 것이 분명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나를 찾고 나를 확립하기를 꾀하는 것일까? 왜 우리 사회의 중심적인 문화는 우리로 하여금, 결코 진부할 일 없이 끝없이 역할 변신을 꾀하는 배우와 같은 것으로 스스로를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인지도 몰라서 방황하지만 좌충우돌을 통해 철이 들고 어른이 되어 자신을 찾아 고정해나가는 아이(말하자면 어른-아이)와 같은 것으로 상상하게 만드는가? 왜 우리가 접하는 대중매체는 삶이 나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이기라도 한 마냥 떠들 뿐,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할 뿐, 나 자신을 비워내고 타자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자아에 쏟아지는 이 엄청난 관심, 자아에 실리는 이 엄청난 무게는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2.

작동함은 위계의 재생산이기도 하다. 위계는 개념화 이전에 작동되는 것이다. (수많은) 어떤 것들에 대한 특정한 것의 우위. 그러한 우위는 다수성(물론 이것은 ‘수적인/양적인’ 다수성이 아니다) 혹은 일반성의 독점이다. 다수성, 일반성을 독점하는 그 무엇인가는 자신과 다른 것을 바로 그 일반성에 의거하여 구분짓고 다수성에 의해 정당화하며 다시 그 구분됨을 통하여 일반성과 다수성을 확보한다. 즉 그것은 자신과 다른[異] 것을 자신에 의해 구분되는 다른[他] 것으로 만드는 (두 상이한 뜻을 매끄럽게 이어붙이는 이 단어 자체처럼, 당연히 이 하나의 단어로 가리킬 수 있다는 듯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능청스러운 비약을 통해 세계에 ‘새겨진다’. 작동함은 달리 말해 중심성, 정상성의 재생산이며, 주된 것, 중요한 것, 대의적인/대표되는representative 것의 재생산이다. 흔히 오해되듯이 규범성에 의해 정상적인normal 것들이 (교육적인 예시처럼)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정상성에 의해 규범적인 것들이 구체화된다. 정상이란 정착이며, 도시화이다. 마치 유럽이 유럽에 끼지 않는 것들을 보고 비로소 스스로의 유럽적임을 자각하고 그렇게 유럽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시가 촌락과 지방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분함으로써 밀집되고, 중심화되고 구획을 갖추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상은 다른[異/他] 것에 비추어 스스로를 정상으로 알아보고 정상이 되어 정상임을 행사한다. 우리는 정상성이라는 편리한 도시에 의존함으로써 살아가지만(“아침에 기상, 전차를 타고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명,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화-수-못-금-토”), “어느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며 “문득 무대장치가 붕괴되는” 낯선 순간, 삶이 작동된다는 감각에 이따금 압도된다.

중심의 재생산은 중심과 중심 아닌 것(주변)의 이분법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이분법,양분화를 생산하는 일이다.

(예컨대 남성, 이성애, 백인, 유럽, 중산층 이상의 계급, 결혼, (정상)가족, ……이 작동된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

우리 사회에서 특권적인 담론의 중심 개념 중 하나는 ‘자아존중감(자존감)’이다. 이제는 심리학 용어를 벗어나 자기계발서를 통해 널리 소개되고 일상어로 자리잡은 이 개념이 실제로 담론 속에서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사회학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다만, 아주 엄밀하지는 못하더라도, 특징적인 지점을 짚어볼 수 있을 따름이다.

감정 조절부터 대인관계까지 아우르는 모든 문제의 근원에 있다는 듯이 말해지는 ‘자존감’이라는 것에 실체가 있기나 한가? 말하자면 ‘자존감’ 담론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두 축인데, 모든 문제는 자아를 강화하는 정신적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것이고, 동시에 모든 문제는 이 하나의 단일한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 단어가 생겨나고 유행하기 훨씬 전부터도, 불안, 우울, 슬픔, 허탈감, 무력감……과 같은 감정들은 어느 누구나의 삶 속에 늘 있었다. 이상한 지점은, 이 수많은 감정들이 나를 지나가는 각각의 것들이 아니라 하나같이 ‘보호받고 강화되어야 할 자아’에 타격을 입히는 것인 양 여겨진다는 점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오르내리는 무엇인가가, 지키고 더 높여야 하지만 자주 떨어지고 마는 양화된 감정 같은 것이 생기게 되었다. ‘자존감’ 자체가 높아지거나 낮아지는 것, 점수를 매길 수 있다는 듯이 측정되고, 그리하여 높으면 높을수록 좋은 것이 되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삶을 측정하는 성적표에 항목 하나를 추가한 것에 지나지 않은가? ‘자존감’ 담론은 겉보기에는 타인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일에 대한 강조처럼 보이지만, 과연 그렇게 해서 타인과 관계 맺는 법을 배우기에까지 나아가는 데 성공했던 적이 있었던가?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노력으로 채워진 삶에 예술 혹은 정치가 있는가? 구조적인 폭력성과 불합리에 맞서 비판하고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피폐해진 자신의 자아만을 돌보며 오르지 않는 ‘자존감’을 붙들고 있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침묵이고 사유-없음, 정치의 결여가 아닌가? ‘자존감’ 담론은 모두를 각자의 내부에 매어두고, 낮은 ‘자존감’을 탓하고 때때로 ‘자존감’이 높아진 것 같으면 기뻐하지만 주식보다 더 알 수 없이 오르내리는 이것을 어찌할 줄 몰라 애태우게만 만들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4.

내가 누구인지를 찾고 만들라는 ‘신성한 과제’가 소비자본주의와 만났을 때, ‘취향’들로 구성된 ‘개성’이 또한 특권적인 개념이 된다. 오늘날 내가 무엇을 소비하는지 what I spend를 들먹이지 않고 내가 누구인지who I am를 설명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게 어렵다. 이러한 맥락에서의 ‘개성’은 언뜻 보기에 모순되는 두 목표를 욕망한다. 즉 우리는 남과 구별되는 특성 혹은 기호를 갖추기를 원하면서도 주류mainstream에 편입되기를 원한다. 우리들 각각이 기성품과 같은 동일자가 되어버리는 지옥 속에서 기성품을 끌어모아 나 자신인 무엇인가가 되고자 하는 분투.

또한, 나 자신을 ‘실현’하라는 요구를 익히 들어왔지만, ‘커리어’의 영역, 즉 원하는 직업과 만족스러운 직급의 달성 혹은 취미 생활의 향유 이외에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법, 내가 되고자 하는 나 자신을 욕망하는 법을 우리가 배운 적이 있었던가? 교과서에 ‘자아 실현’의 예로 적혀 있던 직업들보다 훨씬 욕망되는 직업들의 다양성과 폭이 줄어든 세대에 속하는 우리들은 특히.

5.

나는 요즘 들어 정치가 윤리에 앞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윤리는 정치를 해명할 수 없지만 정치는 윤리를 사유할 수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위계의 전복이지만, 단지 위계의 위치를 맞바꾸어 놓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지점은, 어쩌면 윤리적 문제 상황들을 보편적인 도덕 규범의 설정과 준수를 통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과 정치적 선택으로써 생각할 때 더 나은 논의를 기대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점이다. 예컨대 (특정한 상황 맥락이 주어졌을 때) 거짓말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는 정치적으로 사유될 때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아무도 해치지 않고 자신에게 부과된 의무를 전부 성실히 이행하며 산다는 것이 탁월하게 산다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도덕적으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탁월하게 살기.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문제에 가장 밀접하게 닿아 있는 “실존의 미학”이 아닐까?

이 사유는 아직 스케치의 단계에 있으며, 본 절의 내용은 어느 정도는 가설의 제안이다.

윤리란 한 사회의 규범 및 가치 체계에 관련된다. 그렇지만 윤리적 실천은 결국 내가 사회(가정된 타인들)에 비추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가(선한가)의 문제가 된다. 다시 말해 윤리는 내가 어떻게 타자들에게 혹은 실재에 영향을 미칠까의 문제라기보다 내가 어떤 것을 행해야 하고 어떤 것은 행해서는 안 되는가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윤리는 공동체의 것이지만 윤리에 입각한 도덕의 행함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도덕적으로 옳은 삶을 산다는 것은 (그 삶이 지속 가능한 것인지는 차치해두고서) 차라리 쉬운 일이 아닐까? 아무도 해치지 않고, 모두의 부탁을 들어주고 산다면 말이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수식어는 과장법으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전혀 불가능하지 않은 실천의 양태를 가리키고 있지 않을까? 정말로 어려운 것은, 법 없이도 법의 테두리 안에 잘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법을 고치고 또는 법을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는, 우리들 각각에게 요구되는 비판과 결단, 실천과 참여가 아닐까?

사유에 ‘타자’를 가장 급진적이고도 적극적으로 도입했던 레비나스는 타자를 절대적 타자로 상승시킴으로써 철학의 핵심에 윤리학을 자리 매김하는, 혹은 윤리학을 형이상학에 앞서는 제1철학으로 정립하는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타자를 사유에 근본적으로 도입하는 다른 방식이 가능하지 않을까? 사유는 이제 다시, 바로 그러한 또 다른 가능성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의미에서 타자를 진정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이미 윤리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며, 타자와의 관계를 사유한다는 것은 정치를 다시 사유한다는 것이 아닐까?

6.

나를, 자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타자를 거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유럽이든 비유럽이든, 제국인 민족국가이든 식민지인 민족국가이든) 역사적으로 민족 혹은 국가적 정체성을 형성해낸 방식이면서 개인이 자신을 정체화해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은 여전히 나를 확립하고 지키기 위해 타자를 동원하고 타자로 하여금 지켜져야 할 것으로서의 자아를 위해 봉사하게 하는 작용에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자아를, 나의 행위를 통제하고 조절하는 것은 윤리적인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오늘-여기를 특징짓는 문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윤리적인 것은 이미 정치적인 것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며, 윤리적인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 옳음을 실천하는 일은 이미 정치함을 향하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윤리가 정치에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윤리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실재/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바꾸기를 꾀하고 마침내 바꾸어내기. 그런데 이것이 나 자신을 가꾸고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여기 타자가 있다’는 사실을 끝없이 상기시키기 위해서, 그 타자, 즉 나‘의’ 타자가, ‘-의’의 의미가 소유격 혹은 속격이 아니라 지향과 관계 맺기를 가리키는 것인 한에서 ‘나의 타자’, 또는 차라리 ‘나에 관한 타자’가 되고, 그러한 타자가 나의 투영이나 나의 소유가 아니라 나의 밖이면서도, 또한 그의 밖이 나이기도 하며 그리하여 오직 어떤 관계 속에서 독특한 타자가 되는, 그러한 관계를 위해서 행해질 때, 행한다는 것은 이미 정치함이다. 사랑하기와 예술하기가 이미 정치라면, 그것은 타자와의 만남이 실재 속에 새겨지기라도 하는 양, 타자와 관계하며 실재와 관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개인적이고 사적이기만 한 사랑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천재적 예술가가 영감을 받아 골방에서 만들어 낸 예술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행함이 이미 정치적이라면, 관건은 정치로부터 순수한 영역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치적임을 어떤 정치함으로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덧붙이건대, 사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정치한다는 것은 올바르거나 그릇되거나 하는 이분법으로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언컨대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 누구이든 나이기만 하면 족하는 그런 나를 만들기 위해서 혹은 나를 내가 원하는 어떠한 누군가로 만들기 위해서 나의 ‘취향’을 개발하고 확립하며 그것들을 끌어모아 나의 ‘개성’을 만드는 일은,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는 독특한 나, 대체될 수 없이 고유한 나를 만들어주는 데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소비 사회의 제도적이고 문화적인 작동함이 적극 권하는 그 일들은 분명히 자아를 지켜주기는 하기만, 그 자아는 살아남아 연명하기 위해 버티는 삶 — 설령 이러한 삶이 고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유쾌하고 낙천적인 것일 지라도 — 을 작동시키는 자아 이상의 것이 아니다. 요컨대 타자와의 관계 없이 자아를, 나 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타자와 관계한다는 일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타자를 거쳐 자아를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자아를 거쳐 타자를 찾는다는, 관계의 또다른 방향(이 단어가 순전히 수사라는 점은 다음 절에서 밝히겠다)의 실천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혹은, 실제로 발견되는 것은 자아에 의한 타자가 아니라 관계의 이름으로서의 타자이다.

7.

관계란 만남이면서 그 만남의 문체style이다. 어떤 만남이 스스로를 재현하며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만남 자체가 뒤따르는 만남과 만나는 것, 그것 역시 우리가 만난다고 부르는 것이고, 관계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계는 두 개의 항에 의해 뒤따라 나오는 것이 아니며, 두 항 중의 어느 하나에 의해 정의되는 것도 아니다. 관계 자체에는 방향성이 없다. 그것은 지향-없는-만남이다. 예컨대 현상학적 지향성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관계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며, 그것은 차라리 내가 비판하고자 하는 바로 그러한 개념이다. 다음은 하나의 예시이면서 유비이기도 하다. 물리학에서의 힘의 작용을 작용과 반작용으로 나눠 부르지만, 그것은 묘사에 가까우며 실제적인 사태와는 괴리가 있다. 작용이 있으므로 반작용이 있는 것도 아니며, 반작용이 있으므로 작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것이 작용이며 어떤 것이 반작용인지를 구분해낼 수는 없다. 힘은 그저 완벽하게 동시에(이는 시간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다) 작용한다. 두 사물 간의 주고받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두 사물의 만남이라는 사태만이 있으며, 그것이 힘이라는 관계이다. 관계는 그 자체로서 방향성을 가지거나 혹은 쌍뱡향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가장 개별적인 관계 자체에는 방향이 없다. 마주친다는 것, 맞닥뜨린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만나고 있다는 것.

나르시시즘은 왜 경멸스러운가? 그것은 아마도 이미 형성된 것, 고정된 것에 대한 집착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주체의 우위를 상정해 놓고 그 주체의 생존을 위해 관계들을 잡아다 주체에게 먹인다. 욕망은 관계이며, 관계는 생산하지만 나르시시즘은 어떤 의미에서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적인 것의 소멸이며, 그런 의미에서 타자-없음이고 정치-없음인 공회전이다. 그것은 오직 자기 자신을 반복하고 보호하는 작동함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란 ‘내가 관계 맺는 타자가 관계 맺는 나 자신을, 그러한 타자를 거쳐 보기’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하겠다.)

우리에게 여전히 예술한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비판한다는 것과 함께) 이미 정치이며, 오늘날 모든 생이 처한 공경에서 생을 건져낼 거의 유일한 방법이지 않을까?

관계하기를 배우기. 관계함으로써 살아가기를 배우기.

(이차대전의 시기 프랑스에서 그토록 도저하게 제기되었던 실존의 문제가 오늘날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올 때, 그것은 이제 관계의 문제로 드러나게 된 것이 아닐까?)


보론 : 오늘날의 문제, 수많은-작은-정치하기

(이하의 글의 명시적인 주제는 두 번째 문단의 첫 문장으로 요약된다. 여기에서는 다만, 정치의 의미가 달라졌다는 고찰이 앞선 본 글의 내용을 보충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 지점이 있어서 보론으로서 소개한다.)

오늘 여기에서 비판과 글쓰기는 어떤 쓸모가 있는가? 사유와 실천 간의 관계에 관한 물음이 우리의 시대에서도 여전히 제기된다면, 우리는 여기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 텍스트를 읽고 쓰는 일은 어떤 점에서 오늘날에도 역시 이미 정치인가? 오늘날 이 근본적인 물음이 자신의 함의와 뉘앙스를 바꾸면서 새삼스럽게 다시 제기되는 까닭은, 더 이상 정치가 국가 혹은 국가와 결부된 이데올로기, 제도, 문화와 같은 구조와 그 구조 속에서 구성되고 억압받는 개인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사유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관건은 우리를 통치하는 자가 악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통치하는 주체랄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통치되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여전히 정치적 실천이란 개인이 자유의 획득을 위해 자신을 억압하는 구조를 공격하고 변혁시키는 활동으로 얘기할 수 있겠지만(그리고 이는 일상적이고도 편리한 인식의 틀이고, 실제로 여전히 많은 경우 유용하겠지만), 이러한 도식이 전제하고 있는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의 이항대립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이미 와 있다. 거대한 폭력이 죽은 자리에 수많은 작은 폭력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오늘날 비판은 더욱더 복잡하고 난해한 지점들을 겨냥하게 된다.

만약 앞선 시대와 우리의 시대 간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형식적) 민주화의 달성 등의 역사적 성취가 우리 세대로 하여금 정치에 개입할 필요성을 감소시켰기 때문이 아니다. 오늘 여기에서 우리들의 문제인 것에 대한 사유와 비판은 여전히 실천적인 지점들을 겨냥하며, 그런 한에서 비판한다는 것은 이미 정치한다는 것이다. 변화는 동일한 문제(이를테면 이론을 공부해서 정치적 변혁을 꾀하는 일)에 대한 상이한 응답이나 시도에 있다기보다, 문제 자체의 이동에 있다. 정치라는 개념, 정치가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 정치적 실천을 행하는 방식, 요컨대 정치의 의미 자체가 변했다. 정치는 더 이상 거시적인 구도로서 전적으로 가시화되지 않는다. 앞선 시대에 폭력이 있었듯이,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오늘날에도 역시 폭력이 있다. 다만, 더 이상 “폭력은 삶에 외재적이지 않다. 즉 ‘본래적인 순수한 삶’이 있는데 폭력이 그 삶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오늘날 삶은 작동된다.

요컨대 오늘날 우리에게 읽고 쓰고 비판하고 사유한다는 것이란 운동에 뛰어들기 위한 도구로서의 이론, 세계에 대한 인식을 전환함으로서 변혁의 단초를 얻는 이론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이론은 여전히 필요하며 자기 안에 안주하지 않는 한에서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것이 사유한다는 활동 전부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것은 아니다. 물음 자체가 이동했다. 정치의 의미가 이동했다. 폭력은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것이며, 그런 만큼 우리의 글쓰기는 작은 정치들이다. 비판은 폭력과 억압을 단호히 거부하되 수많은 억압을 한데 묶어 악마화하지 않고, 그 억압의 기제가 작동하는 방식을 파헤치며 그 억압의 담론에 발을 담그고 있는지도 모르는 우리의 행위를 반성한다. 적은 하나가 아니며, 적은 밖에 있지 않다. 오늘날 젠더 문제, 소수자 문제에 관해 사유한다는 것은 비판하는 일이면서 실천하는 일인, 수많은 작은 정치하기이다.

단현
danhyun012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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