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석학과 존재론” (2) 

*이 글은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 신학과/연합신학대학원 수업 <종교 인문학으로서의 해석학>에 제출된 기말논문을 출처로 쓰였습니다.

해석학적 반실재론의 암시 앞에서

철학적 해석학은 우리의 해석이 삶의 자리 위에서만 가능함을 주장한다. 언뜻 이러한 주제를 접할 때, 그것의 귀결은 반실재론이 되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해석학의 지평에서, 모든 진리는 결국 인간의 자기 이해와 결부된다. 따라서 진리는 한 방식으로만 결정되는 무언가가 아니다. 진리에 이르는 방식이 고정적이라는 생각은 그 진리 또는 존재를 담는 그릇인 실재가 고정적이라는 생각과 긴밀히 결부된다. 실재가 다의적이라면 당연히 진리는 다원적일 것이며, 실재가 일의적이라면 진리는 그러한 실재와 대응 또는 일치할 때 성립할 것이므로 진리는 일원적이고 고정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진리가 그러한 일원적, 고정적 특성을 갖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이 해석학으로 하여금 반실재론을 암시하게 하는 근거이다.

어떤 이들은 철학적 해석학을 그 반실재론적 암시로 인해 거부하려 한다. 그런 반면, 반실재론적 암시 때문에 해석학적 반실재론을 옹호하려는 이들이 역시 있다. 그러한 옹호자들이 있는 이유는 반실재론 논제를 따를 때 얻는 분명한 이론적 편리성이 있기 때문이다. 해석학적 반실재론은 해석의 다양성을 무한히 개방할 정당화 근거를 마련한다. 반실재론이 수용된다면 어떤 해석도 유일한 참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수많은 해석을, 유일한 해석의 군림 아래 있게 하지 않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가질 법한 낙관은 반실재론만이 풍성한 해석과 그 가능성을 열어주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며, 우리가 우상화된 특정 해석의 군림으로부터 자유할 방법을 해석학적 반실재론으로부터 얻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반실재론 논제를 따르는 것이 타당한가? 우리는 해석학으로부터 곧장 반실재론을 얻는가? 일단 편리성의 측면에서만 생각해 보자. 만일 그렇다면, 철학적 해석학은 신학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신학은 신앙을 전제한다. 그런데 신앙이라는 것은 이질적인 것으로부터 요구되는 결단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유아론적이지 않은 세계관을 요구한다. 한편 반실재론이 옳고 모든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으며, 그 해석이 각각 옳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면, 각 해석은 유아적인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본고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신학의 눈으로 고찰된 철학적 해석학, 즉 “신학적 해석학”은 해석학적 반실재론을 어떻게 방어할 수 있냐는 것이다. 여기에 딸릴 의구심은 둘이다. 하나는, 과연 해석학적 실재론이 옹호될 수 있느냐에, 다른 하나는 과연 신학적 해석학이 실재론을 옹호 할 수 있는가/해야 하는가에 관련된다.

즉 여기에서 문제가 될 것은 것은 다음과 같은 의심이다. 사실이 주체 독립적이 될 수 없음은 근대 철학으로부터, 주체의 인식이 삶에 독립적이 될 수 없음은 현대 철학으로부터 지적되었고 그 지적은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실재 자체가 삶에서 구성되는 것이며 그 삶은 인간의 것이므로 실재론의 자리는 없는 것 아닌가? 따라서 애초에 옹호될 수 없는 관점인 실재론을 신학적 해석학이 옹호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또는, 그러한 옹호를 굳이 해야만 하는가?

나는 불트만, 본회퍼, 리쾨르 세 사람의 관점을 통해 이 의구심에 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신학적 해석학 변증은 신학적 해석학이 모종의 실재론을 옹호할 수 있으며, 또한 해야 함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그들의 변증을 통해 나는 해석학적 반실재론으로부터 실재론을 옹호하는 것 역시 가능함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트만은 신학의 개념들을 통해 생각할 때 신학적 해석학이 주체 독립적인 실재를 간주해야만 함을 보여준다. 본회퍼는 해석학적 진리의 개념이 가능하기 위해서라도 반실재론을 거부해야 함을 주장한다. 리쾨르는 이러한 관점을 서로 다른 세 차원의 철학적 접근으로부터 다시 정당화한다.

본고는 이에 대한 논증이 될 것이다. 우선 나는 반실재론적 해석학이 두 지점에서 거부될 이유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 두 지점은 서로 다른 해석의 발생 가능성에 대한 상이한 두 문제에 관련된다. 이 문제들은 일종의 실재론을 요청할 때에만 극복될 수 있으며, 이에 따르는 의심 역시 신학적 해석학의 틀 속에서 해소될 수 있다. 한편 그러한 실재론은 현상론과 관념론이라는, 두 극단에 빠지기 쉽다. 나는 이 극단에 맞서, 본회퍼와 함께 그 두 극단이 충분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나오는 것은 “어떤 것도 없음”도, “그러한 무엇이 있음”도 아닌 “바로 그것이 있음”의 형식을 취하는 실재론이 됨을 주장한다.

해석학적 반실재론의 난점

기준점 없는 “해석의 다름”이 가능한가?

리쾨르는 언어현상으로부터 흥미로운 통찰을 이끌어 낸다. 단순한 동음이의적 관계에서가 아니라, 단일한 단어에서도 복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 사례들이 있다. 즉 “겹뜻”의 사례이다. 이는 다의어의 문제와도 다르다. 다의어나 동음이의어는 언어학 체계 내에서 정식화될 수 있지만, 겹뜻은 그렇지 못하다. 하나의 상징에서 복수의 의미가 발생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즉, 겹뜻은 하나의 상징에 대한 다른 해석을 야기하는 한편 언어 안에는 기호 간 연관만이 있다. 어떻게 다른 해석이 가능할 수 있는가? 그의 답은, 해석이란 언어를 실재에 접붙이는 과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상징이 될 수 있는 것은 먼저 그것이 언어 밖의 현실이기 때문이다.”(리쾨르 2012, 92면) 말하자면, 하나의 구조 안에서도 해석의 다름이 있고 그 다름은 결국 언어 밖의 현실을 암시한다.

반실재론을 지지하는 논거였던 것은 애초에 다양한 해석과 다양한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두 해석이 한 체계 위에서 양립 불가능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모두 나름의 진리일 때에나 가능한 주장이다. 그런데 반실재론은, 그러한 양립 불가능성을 야기할 동일한 실재를 전제하지 않는다. 또 아마도 진리의 개념을 실행적 차원에서, 또는 공동체 내적 진리의 차원에서만 인정할 터이다. 그렇다면 반실재론의 틀 안에서 해석은 “한 체계 위에서 양립 불가능”할 수도, “동시에 나름의 진리일” 수도 없다. 이러한 양립 불가능성과 다원적 진리성은 반실재론의 근거였다. 그 근거를 반실재론은 스스로 무너뜨리는 셈이므로, 결국 반실재론은 인정될 수 없는 것 아닌가?

또한 해석학적 반실재론은 “해석의 풍성함”의 근거도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비판되어야 한다. 반실재론의 논거는 전통적 실재론을 반박하기에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반실재론자가 해석의 풍성함이 그 해석의 근거가 없음에 있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실재론자들은 사실 그 해석의 풍성함은 해석의 풍성함이 아니라, 같은 실재의 서로 다른 부분들을 비춘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각 해석은 서로 다른 불완전함들일 뿐, 한 완전을 다면적으로 제시하는 풍성함이 아니다. 그저 해석이 잘못된 것 뿐이다. 반실재론자들은 이에 대해 반박할 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 어떻든 실재의 풍성함이 옹호되려면, 실재론의 차원에서 왜 다양한 해석이 풍성한 실재를 보여줄 수 있는지를 말해야 한다.

말하자면 이렇다. 다름이 있는 곳에는 같음도 있다. 그 같은 현실이 전제될 때에만 다름과 해석과 진리가 모두 가능하다. 비록 그 현실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알려진 명백한 그런 것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불트만은 다양한 관점에서의 조망 뿐 아니라, 그 관점에 참여하는 실존을 요청하는 것이다: “[…] 현상들이 역사적 현상으로 되는 것은 그것들이 특정한 관점에 의해 보여질 때[…]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만족할 수는 아직 없다. […] 관점들의 선택에서 이미, 우리가 역사가의 실존이라고 부르는 것이 작용한다[…]”(불트만 1980, 6면) 이 실존은 편의상 ‘역사가의 실존’이라는 표현으로 일컬어졌지만, 어떤 역사를 쓰는 바로 그 역사가, 즉 반성하고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역사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역사적 현상과 접하는, 실재 속에 있는 바로 그것을 말한다.

이렇게 나오는 것이 기준점의 두 축이다. 한편에서는 역사를 쓰는 역사가가 있고, 그가 참여하는 실존적 해후가 있으며, 또 그 해후에 참여하는 다른 항이 있을 것이다. 양항이 실재라는 하나의 기준에서 만난다. 또는, 실존적 해후를 겪는다. 그 결과, 불트만의 언급처럼 “[…] 역사에 대한 “가장 주관적인” 해석이 곧 “가장 객관적인” 해석이[…]”(불트만 1980, 6면) 된다. 이 두 만남이 단순히 두 공동체의 개인 간의 만남이 아니라는 것과, 그리고 이 해석이 오로지 주관이나 오로지 객관의 틀에서 짜이는 데에 끝나지 않음이 주지되어야 한다. 만남은 사건 속에서 이루어지고, 해석은 객관성과 동시에 주관성을 갖는다.

유아론적 체계로부터 해석이 발생할 수 있는가?

반실재론에 대한 두 번째 공격은 해석의 발생 가능성으로부터 나온다. 설사 해석이 하나의 체계 안에서 진리로 설 수 있다는 주장이 정합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해석이 가능한지 자체가 의문시될 법한 것이다. 그러한 발생은 한 체계가 스스로 어떤 해석을 진리로 세울 수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즉, 체계 독립적인 실재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어떤 해석이 진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건도 없이 한 주체가 “짠!” 하고 스스로를 진리 제조자로 둘 수 있는 것일까? 그 체계가 어떤 것을 진리 제조자로 하기 위해서라도 이미 그 체계의 진리 제조 방식은 진리로 승인되었어야만 한다. 이 승인이 단순히 순환에 빠지지 않으려면 체계 밖으로부터, 또는 초월의 차원에서 이 체계를 승인해야만 할 것이다. 또는 그러한 승인이 가능할 계기를 주어야 한다. 체계 밖에서 진리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면 후자일 것이다. 최소한 우리가 이 체계가 참임을 믿게 할 그런 계기를 가져야만 우리는 스스로의 체계에 확실성을 가질 수 있다.

이 계기를 ‘계시’라고 부르도록 하자. 우리는 어떤 계시 사건이 있었음을 믿어야만, 또는 그 계시를 통해 어떤 것을 믿어야만 체계를 진리로 여길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순수하게, 어떤 행위도 어떤 존재도 없는 터 위에서 갑자기 한 진리의 체계가 생겼다고 말하는 것은 괴이하다. 이것은 해석자가 어떤 이질적인 것의 도움 없이도 해석할 수 있는 그런 초월적 주체임을 간주하는 것인데, 이러한 간주를 정당하다고 여기기 위해서라도 여전히 어떤 계시가 요구될 것이기 때문이다. 본회퍼의 표현으로는 이렇다. “인간적 사고의 최종적인 요청으로서의 계시는 자기 이해의 ‘비진리’에 빠지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실존적 요청 때문에 자신에게 권리를 주고 자신을 진리로 세우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오직 계시 […] 만이 행할 수 있는 일이다.”(본회퍼 2010, 93면)

혹자는 유아론은 여러 개인들의 유아론이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여러 개인들은 각자 서로에 대해 이질성을 가질 터이다. 즉 초월적 실재가 가정되지 않더라도 행위의 문제가 “너의 행위”의 차원에서 설명된다. 따라서 인간 외의 실재를 가정하지 않더라도, 해석 주체들 간의 만남이 있다고만 하자면 이질적인 것의 해석이 가능하다. 유아론은 개인의 차원에서는 불가능하지만, 그러한 만남의 구획의 차원에서는 가능하다. 즉 유아론을 개인의 유아론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아론으로 대치하자는 주장이다.

신학의 차원에서 이 주제를 다룬다면, 교회가 독립적인 신앙의 진리 제조자라는 주장이 된다. 이 주장은 반실재론의 주장과도 부합하는 듯 보인다. 공동체가 진리를 제조할 수 있다면, 단지 공동체의 해석학적 선이해에만 근거하여 모든 진리가 짜맞추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진리는 그 자체로 다원적이다. 진리의 의미와 기준이 동시에 그 공동체에게만 근거하여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신학으로부터의 문제제기가 이루어진다. 반실재론의 정식화를 위해 공동체의 유아론을 채택하는 것은, 본회퍼의 표현으로는 “너”를 절대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복음을 순수하게 윤리적으로 이해하게 될 뿐 아니라 신학과 역사의 개념 또한 불분명하게 된다. 즉 계시가 시야에서 사라진다.”(본회퍼 2010, 102면) 복음은 내용을 가진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실행의 형식만을 갖는다. 그런데 그것이 내용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의 핵심인 계시의 문제, 즉 신의 내용 전달 행위의 문제가 포기되어야만 하는 것이 된다. 이 포기가 진지하게 고찰될 수 있다면, 결국 모든 계시는 인간 자신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에겐 계시의 바탕이 없는 셈이다. 신학이 이러한 포기를 어떻게 수용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어떤 점에서, 진리가 공동체적 진리라는 주장은 옳다. “[…] 내가 공동체 속에서 내 자신을 알고 믿을 때에만, 공동체는 계시의 연속성을 보증해 [주]”(본회퍼 2010, 137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이는 공동체가 단지 계시와 진리를 담보하고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귀결만을 갖는다. 여전히 그 보존되는 계시가 주어지기 위해서는, 그 계시 행위를 하는 이가 상정되어야 한다. 기독교에서 그 상정되는 이는 신이다. 이 신을 중립적으로, 철학의 표현으로 옮긴다면 실재일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적 진리 역시 어떤 실재를 상정해야만 주장할 만하다.

해석학적 실재론의 옹호와 난점

실재론을 옹호하는 두가지 방식

위에서 반실재론에 대해 제기한 문제는 둘이다. 하나는 반실재론이 해석의 다양성을 다양성으로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해석이 생길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두 문제 모두 결국엔 해석의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냐는 질문에 가 닿는다. 해석이 가능하려면, 그것이 다양한 것이든 단일한 것이든, 그 해석을 가능하게 할 제반 여건이 필요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단순히 그 여건이 있다고 간주함을 통해 해석의 가능성을 말하면 될 것 아닌가?

뿐만아니라 해석학적 실재론을 채택한다면 해석학적 관점에 제기되는 문제 중 하나인 무한퇴행의 문제 역시 깨끗하게 해결할 수 있다. 이 문제란 다음과 같다. 모든 해석이 선이해에 기반한 해석이며, 모든 진리는 그러한 해석 하에서의 진리라고 하자. 그런데 해석학의 이러한 테제는 “모든 해석”을 언급함에 따라 결국 해석 밖의 진리가 있거나, 아니면 다른 해석들에 관한 스스로의 주장이 상대적임을 말할 수밖에 없다. 전자를 택한다면 그 진리 밖의 또다른 해석을 찾아야 하고, 후자를 택한다면 해석학의 근본적 테제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 후자는 거부되어야 할 것인 반면 전자는 무한퇴행을 만든다.

그런데 해석학적 실재론이 옳다면 해석학의 테제는 개별 해석의 한 해석 사례로만 여겨질 필요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해석 과정에서 얻는 한계에 의해 발견한 원리적 사실이다. 이 원리는 물론 해석 안에서 참이기는 하지만, 그 해석에 의해 참인 것은 아니다. 해석이 이 한계를 만들었다면, 해석이 해석 스스로 구획을 지었다는 것인데, 해석 바깥의 무엇이 없고서야 한계니 구획이니 하는 말이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구획 밖의 실재가 이야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실재의 형태나 크기, 해석에 한계짓는 원리가 명시적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렇게 실재론을 옹호하는 것은 말하자면 반증 사례를 통한 옹호이다. 반실재론을 채택할 때 이러저러한 문제가 생기므로, 그 반대인 실재론을 채택할 수 있다. 실재론에 관한 논의가 부재할 때 무한퇴행이 문제시될 수 있으므로, 실재론에 관한 논의를 도입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그 실재가 정확히 어떤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인지는 논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큰 부담 없이 실재론을 지지할 수 있다.

해석학의 근거로서 실재는 가설을 통한 추측 속에서도 말해질 수 있다. 여기에서 실재는 단순히 놓여있기만 한 여건이 아닌 해석의 방향을 짓는 그러한 여건으로 여겨진다. 그런 까닭은, 다양한 해석이 공유하는 틀이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불트만이 말하듯 “철학과 신학이 어떤 진술들에서는 일치하는 것이 분명”(불트만 1981, 147면)하다. 상징에 관한 해석에 대해서도 차이와 함께 유사성이 발견된다. 이 유사성은 실재의 한 면 아닐까?

물론 이에 대해서도 해석학적 실재론을 거부할 경우, 그러한 주장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할 것이다. 이 역시 신학의 입장에서 철학적 주장을 해석해 가져온 결과라고 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주장은 불트만의 입을 빌리자면 철학과 신학의 대상이 다르다는 것, 즉 “철학은 불신앙적인 현존을, 신학은 신앙적인 현존을 주제로 [한다]”(불트만 1981, 147면)는 것으로 소급될 터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승인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신학은 가령 현존의 역사상과 현존의 이해 및 결정적 성격을 말함으로 분명히 철학이 그것을 말할 때와 같은 현상을 주장하게 되기 때문이다.”(불트만 1981, 147면) 말하자면, “세계관들의 구상 자체에서는 오히려 존재론이 근거를 두고 있는 현존 이해가 드러난다. […] 존재론적 분석에서 밝혀지는 현존의 양심적 구조들은 “중립적”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들은 모든 현존에 해당한다.”(불트만 1981, 150면) 우리는 그러한 현존을, 적어도 공유되는 실재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해석학적 실재론의 난점

그런데 실재론을 거부하게 했던 이유가 있었지 않은가? 한편으로 실재론은 초월적 여건을 존재론 안에 끌어들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문제가 되며, 다른 편으로 실재론은 존재론에 들어온 초월론적 존재자들을 우상화시킬 위험에 놓인다. 실재론을 옹호하는 두 방식에서는 이 문제가 나타나고 있는 것 아닌가? 반증을 통한 방식에서는 앞의 문제의 위험이 발견되는 것 아닌가? 가설을 통한 방식에서는 뒤의 문제가 나타나지 않는가?

사실, 이러한 지적은 온당하지 않다. 앞의 문제부터 들어 보자. 해석학적 실재론이 초월을 존재자로 끌어들이는 것이 논리적으로 문제된다는 것은, 그것이 순환의 문제를 야기함을 말한다. 해석학은 이미 존재론이 하나의 해석임을 간주하는데 거기에 그 해석의 조건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비판은 해석학적 실재론의 성격을 올바르게 이해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불트만의 입을 통해 이에 대답해 보자.

이 문제는 사실 다음의 문제였다. 실존을 하나의 실재로 생각할 때, 이는 결국 모든 진리를 인간 안에 세우는 것 아닌가? 이 우려는 잘못된 우려이다. 이는 바르트가 실존철학을 오해하여 배척한 것과 꼭 같은 오해에 기인한다. 그는 실존론적으로 신학을 재구성하는 것이 실재를 인간의 내적 지평에 환원시키는 잘못을 범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불트만이 말하듯 “이 실존은 전혀 ‘인간의 내적 생명’이 아니다.”(불트만 1969, 93면) 그것은 삶의 연관 속에서, 만남 속에서 진리와 해석이 나오게끔 하는 바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를 인간의 내적인 무언가로 이해하는 것은 범주 오류이다. 이미 그와 같은 “내적인 무언가”는 이해되어 대상화된 체계 내의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실재론은 그러한 존재자로서의 실존을 상정하는 체계가 아니다.

뒤의 문제로 주제를 옮기자.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해석의 결을 만드는 모종의 원리를 추상할 때 그 원리 자체가 하나의 절대적 법칙으로 우상화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절대적 법칙으로의 우상화는 해석학에 배치되기 때문에, 해석학자는 그 원리를 추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문제의 요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생각건대 전통적인, 존재 중심의 실재론에서만 발생한다. 모든 실재론을 전통적 실재론에 한정지으려고 하는 것은 해석학적 실재론에 대한 부당한 지적이다.

불트만의 언급은 이 지점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신-사상의 파악은 신-소유가 아니다; 왜냐하면 신은 오로지 그의 계시에 의해서만 이 계시에 대답하는 신앙에 주어지기 때문이다.”(불트만 1981, 142면) 해석학이 이렇게 저렇게 실재를 말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은 그러한 실재를 절대화한다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해석학이 요구하는 것은 해석학으로부터 추상된 이러저러한 신의 형태가 아니라, 그 해석을 방향짓는 실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주어진 해석 자체가 이러한 실재를 증언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신을 소유할 수 없음을 되려 말한다.

해석학적 다양성은 그러한 실재에 대한 우리의 한계를 겸양으로 말하면서, 또 실존적 해후의 다양한 방식의 가능성을 말한다. 이것은 우리를 한계짓고 우리와 해후하는 실재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지 않으며 의미할 수도 없다.해석의 근거가 되는 실재로서 실존의 개념을 취급하는 것이 전통적 실재론의 귀환이라고 간주되는 것은, 바르트의 오해와 꼭 같은 오해를 반복하는 격이다. 여기에서 말해지는 것은 진리의 근거로서 실존이 있고, 그 실존이 단순히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실존(또는, 사건)과 만나 새로운 진리를 만드는 과정이 있으며, 그 과정이 그저 무작위인 것이 아니라 사건의 결에 맞추어 일어난다는 것이다. 내용이 아닌 형식의 주장이고, 이 주장은 형식 안에 들어가는 내용이 텅 비어있지 않음을 말하는 데에 그친다.

한편 해석학적 실재론을 정식화함에 있어서도 난점이 따른다. 실재론과 실존의 개념이 요구되는 한 해석학은 오로지 앎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해석학은 그 있음과 앎의 관계를 다루어야만 한다. 하지만 있음이 그대로 앎에 들어온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있음과 앎이 각각 어떤 성격을 갖는지를 특징짓고, 두 성격이 만나는 방식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이 설명은 일단은 두 형태로 생각됨직하다. 하나는 선험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선험론적 설명이고, 하나는 헤겔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관념론적 설명이다.

해석학적 실재론의 한정

선험론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재와 “알게 되는 것”을 대비시키는, 선험론의 방식에서부터 출발하자. 극단을 위해, 균형을 잘 잡고 있는 칸트가 아닌, 현상론에 가까운 선험론자의 방식을 들겠다. 이 경우 우리가 알 수 있는 실재는 우리의 선험적 틀 안에서 짜맞추어진 것에 한정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짜맞추어진 뒤의 내용이 그 이전의 무엇과 같은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무언가를 알기 위해 그 재료가 되는 것이 놓여 있음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의미있는 것은 현상 속의 대상들 뿐이다. 어떤 대상을 의미할 때에도 그것은 현상 너머의 대상을 직접 지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상 안의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며, 실재는 간접적으로만 지시된다. 우리의 해석 일반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언급은 짜맞춰진 이후의 해석 안에서의 언급일 뿐이다.

선험론이 전제하는 구분은 실재를 알 수 없는 것으로 멈추게 한다. 우리는 대체 그 실재의 구조를 알 수 없으며, 우리의 의식이 그러한 실재와 닿아있는지 역시 알 수 없다. 기묘하게도 이런 결론은 선험을 통해 초월을 대체하려고 했던 칸트의 기획과 반대로 간다. 선험철학이 초월철학을 대체하고자 했다면 단순히 불가지론에서 멈춰야 할 것이 아니다. 초월철학에서 전제되었던 것인, 근거 조건들이 제시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현상론에 치우칠 때 선험론은 그러한 조건들을 제시하기보다는, 맹목적 신념으로 한정지어버리거나 아예 인식의 구조에 들어올 수 없는 불가지한 대상으로 닫아 버린다.

이는 인식의 목적에 비추어볼 때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다. 리쾨르가 구조의미론의 역할을 분석할 때 수행한 비판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의 선험적 체계 속에서 모든 지시 방식을 정식화하는 것은 물론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정식화에 따를 때 “상징의 ‘맛’을 잃는다.”(리쾨르 2012, 104면) 즉 우리가 말을 통해 무언가를 정말로 표현하고자 한다는 신비를, 그 말을 통해 우리가 어떤 의미값을 가진 표현을 한다는 순환적 해명으로 대치하는 데에 그친다. 이는 “사라지기를 바[라는] … 죽기를 바[라는]”(리쾨르 2012, 111면) 언어의 기능을 과하게 절대적인 것으로 고정시키고 마는 오판이다. 체계 밖의 무엇이 실제로 지시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불트만이 학문에게서 본 것은, 그것이 대상을 언어 구조 안에 끌어들임을 통해 대상을 조작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는 점이었다: “[…] 인간은 […] 그것들을 객관화하며, 자신의 사유를 위해 이용할 수 있게 […] 하여, 객관화하는 칭명에 의해 자신을 불안으로부터 해방시킨다.”(불트만 1980, 2면) 그런데 이 때 객관화된 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의식과 닿지 않는 것이라면, 대체 그 불안은 어디에서 나오며 객관화의 필요성은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 우리는 어찌되었건 그 불안의 대상을 지목할 수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지목하고 대상화하여 불안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신학에서 이는 죄의 문제에서 해명된다. (적어도 개신교적인) 신학은 “인간이 신적인 것을 위해 열려 있는 어떤 “기관”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는 것”(불트만 1980, 136-137면)을 부정한다. 인간의 조건은 신적인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죄성이라는 한계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한계가 우리로 하여금 신적인 것에 관한 어떠한 의식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죄성을 한계로 인식하고, 그 한계가 신적인 것을 인식하는 데에 대한 한계임을 인식한다는 것은 적어도 한계되는 바깥의 무엇이 인지됨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깥의 의지로부터 들어오는 것이든, 적어도 우리에게 어떤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이든, 우리는 죄의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그 형식과 죄에 대한 부채의식을 가질 수 있다. 순수한 선험론은 그러한 의식을 무의미하게 돌려버린다.

이렇게 볼 때 극단적인 선험론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 우리의 앎을 실재에 비해 극단적으로 제한한 나머지 앎의 목적, 언어의 목적으로부터 괴리된 탓이다. 그 괴리에 대해 할 법한 반응은 둘이다. 하나는 위에서 보았듯 앎의 조건을 맹목적 신념에 불과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앎의 조건을 물은 것은 앎이 맹목에 그치지 하지 않게 함을 위함이었다. 따라서 이 반응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렇다면 반대로, 아는 모든 것이 이미 실재와 같다고 한다면 어떨까?

관념론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선험론은 해석학적 실재론의 정식화를 수행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면 실재를 “알게 되는 것”과 단순히 동일시하는, 관념론의 방식이 제시될 법하다. 앎의 한계가 실재를 포섭하는 데에 모자라다는 선험론자들과 반대로, 관념론자들은 실재의 역량이 우리 앎에 포섭되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실재의 차원에서부터 이미 앎으로 밀고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의 한계는 중요하지 않아진다. 실재는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며, 따라서 알 수 없는 것 때문에 문제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리쾨르는 정신분석학을 반성하며 이러한 관념론적 결론에 발목을 건다. 이러한 관념론이 실재론에 결부된다면, 그것은 우리 인식 차원의 사실이 그대로 어떤 사실을 지시한다는, 즉 “소박한 실재론”을 따른다. 그러나 “소박한 실재론은 실제로는 해석관계를 통해 점차 형성된 의미를 회고적으로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리쾨르 2012, 134면) 지향성은 그 표면적인 의미와 별개로, 실제로 그 지향성을 형성한 대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에서의 발견이 바로 이 점을 보여준다. 내담자와의 대화는 그의 의식과 별개로 무의식적인 지향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인식되는 양태와 그 인식을 통해 실제로 지시되는 것의 형태는 동일하다고 간주될 수 없다.

혹자는 알고 있는 것의 영역이 아니라, 알려질 수 있는 것의 영역이 실재와 같다고 한다면 문제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관념론을 확장시킬 것이다. 이렇게 확장된 관념론은 정신분석학이 지적하는 문제를 회피하는 것으로 용인될 수는 있다. (물론 엄격한 기준을 부과한다면 이러한 용인도 불가능하다.) 어찌되었건 무의식의 영역을 상담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실제 욕망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고, 이로부터 그것은 내담자가 알지 못했던 것일 뿐 알려질 수는 있는 것임이 함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쾨르의 언급으로부터, 신학적 관점이 이러한 관념론 역시 거부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죄”의 개념이 단초가 된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죄는 돌출적 사건이다. 죄는 신학에서 이해될 수 없는 것으로 남았다. 우리는 그것에 관해 의식하기도 하고, 어떤 행동의 경향을 갖기도 하지만, 죄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죄가 하는 역할에 의해 그것은 존재론에 산입되어 있어야 한다. 반면 관념론적 귀결은 다소 유아론적인 뉘앙스를 갖고 있다. 죄가 파악 불가능함에도 실재함을 생각한다면 실재는 파악 가능한 것의 영역보다 더 큰 곳에 놓인다. 그렇다면 동일한 것은 그 영역에서도 동일해야 한다는 단순한 원리로부터, 실재의 영역과 알려질 수 있는 것의 영역이 동일하다는 주장은 논파된다.

같은 방식으로, 본회퍼는 신의 개념으로부터 관념론이 수용될 수 없을 근거를 발견하고자 한다. 본래 신은 초월적 범주에 속하므로, 비대상성으로만 있는 그러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관념론은 그러한 신 역시 존재의 차원 안으로 끌어들여 설명해야 한다. 결국 관념론에 의해 “[…] 하나님은 의식 속에서 다시 ‘대상적’이 되고 […] 의식에 사로잡힌 존재가 된다. 정신적 행위의 기능적 ‘상관 관계’로 사고되어야 하는 하나님이 부지불식간에 대상적 객체가 된다.”(본회퍼 2010, 55면) 이렇게 대상화된 신의 개념은 신 개념 도입의 목적이었던, “정신적 행위”의 해명에 도움을 줄 수 없다.

본회퍼는 이에 대해 두가지 가능한 해결책을 모색한다. 한가지는 (포이어바흐 식으로) 신의 초월성을 초월적 자아의 그것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즉 “[…] 하나님 체험을 […] 자기체험으로 이해하는 것이다.”(본회퍼 2010, 55면) 이 방식은 신학의 층위에서 만족스럽지 못하다. 하나님 체험이 자기체험이며, 또 그 하나님이 초월적 여건이었더라면, 인식론적 원리에 의해 하나님은 (존재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신인관계를 신학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방식으로 역전시키는 귀결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대상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앎과 있음이 그 자체로 같을 것이라는 관념론의 전제에 반하는 것일 터이다. 따라서 관념론이 부정된다.

“바로 그것”의 실재론

여기까지의 논의에서 알 수 있던 것은 다음과 같다. “그러한 무엇이 있음”도, “어떠한 것도 없음”도 그럴 듯하지 못하다. 그렇지만 어찌 되었건 후자를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다. 여기에서 제시될 두 모델이 “알 수 없는 그것” 대 “알게 되는 무엇”을 대비시키는 모델과, “알게 되는 무엇” 만을 인정하는 모델이다. 그러나 그 두 모델 모두 그럴 듯하지 못하다. 다시 말해, 반실재론과 전통적 실재론, 선험론과 관념론이 모두 그 자체로 수용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에게 대안이 있기나 한가? 애초에 어떤 선택지도 그럴 듯하지 않으며, 문제 자체가 잘못 제기되었다고 주장해버리면 될 일 아닌가?

아직은 이르다. “바로 그것”의 실재론이라는 선택지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라는 표현을 통해 내가 대비시키려는 실재의 그림은 “그러한 무엇”이다. 관념론의 영역에서 실재는 우리가 아는 그 내용 그대로 있다. 반면 선험론의 영역에서 실재는 내용으로든 형식으로든 우리가 아는 것과 동일하다고 여겨질 수 없다. “바로 그것”은 두 그림의 중간에 있다. 우리는 실재의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것의 형식은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이런 저런 해석을 부과하고, 이런 저런 형식의 결을 갖게 하는 그런 실재의 형식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관념론은 형식적으로는 실재를 주체인 것으로 여기지만, 실제로는 실재를 대상화한다. 관념론이 영원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철학의 주체인) 인간의 관점에서 고찰될 때 그것은 언제나 대상화의 형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관점에서 관념론의 테제는 “우리가 아는 그것이 실재이다”라는 것이 된다. 선험론은 반면 이 대상화를 피하고자 너무 많은 것을 존재론 밖으로 몰아냈다. 그런데 문제되었던 것은 실상 실재의 내용을 정식화해버리는 데에 있었고, 그 내용의 측면을 존재론에서 제거한다면 실재론은 무해하게 수용될 수 있다.

따라서 ‘바로 그것’을 통해 실재를 언급하는 것은 다른 방식의 실재론과 이렇게 구분된다. 먼저 이는 전통적 실재론과 다르다. 실재의 내용과 앎의 내용이 구분될 수 없다는 전제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관념론적 정식화와도 다르다. 우리가 아는 바로 그 내용으로 있는 실재를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형식만이 주장된다. 선험론적 정식화와도 다르다. 우리가 아는 방식과 실재가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마냥 신비의 영역으로 던져두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는 이미 구조화되어 있지만, 우리의 언어 속에서 말해질 수는 없는 그러한 실재의 모델이다. 본회퍼의 모델이 이러한 형태이다. 그의 모델에서, “하나님은 ‘객체적 존재자’의 의미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본회퍼 2010, 108면) 대신 비대상화를 통하여 주체 밖에서, 초월하여 존재한다. 엄연히 이러한 “존재”를 우리가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존재 양식에 관한 술어가 있으려면 우리에게 그 양식에 관한 이해가 선점되었어야 할 텐데, 이는 다시 신을 비롯하여 실재하는 것들의 존재 양식을 존재론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지 행위를 통해서만 우리와 만나는 그러한 실재들은 비대상적으로만 존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모델은 리쾨르를 통해서도 제시되었던 바 있다. 그의 질문은 “어떻게 의미론을 존재론 속에 다시 넣을 것인가?”(리쾨르 2012, 44면)이다. 그는 그 답을 “반성”에서 찾는다. 언어에 대해 반성하자면 “언어 밖의 현실”(리쾨르 2012, 92면)이 드러난다. 무의식에 대해 반성하자면 “무의식적 실재론”(리쾨르 2012, 147면)이 드러난다. 현상에 대해 반성하자면 “주체” 또는 “실체”(리쾨르 2012, 259면)가 드러난다. 이 지점에서 리쾨르는 반성을 멈출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반성 대상의 근거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갈 필요가 없으며, 더 나아가서도 안 된다. 물론 이는 일종의 존재론이다. 그러나 무해한 존재론이다. 이러한 존재론은, 그의 시적 표현을 빌리자면, “반성에서 출발한 철학에게 약속된 땅이다.”(리쾨르 2012, 52면)


신학적 해석학은 반실재론에 저항해야 하며, (철학적으로 수용될 수 없음이 명백한) 전통적 실재론을 지양해야 한다. 이 두 대립 사이에서 해석학이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그것”, 즉, 인간의 언어 안에 있지 않지만 그 언어를 비판할 때 발견되는 실재에 관한 그림이다. 신학적 해석학의 틀은 이러한 그림을 그리도록 유도된다. 더 나아가 철학적 해석학의 그림을 제대로 세우기 위하여도, 그러한 실재가 제시되어야 한다. 본회퍼를 따라 말하자면, 극단적 존재론과 극단적 행위론은 이렇게 서로를 지양하며 하나로 결합한다.

참고문헌

단행본

  • Bonhoeffer, Dietrich. 2010. 『행위와 존재: 조직신학 내에서의 초월철학과 존재론』. 김재진/정지련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 Ricoeur, Paul. 2012. 『해석의 갈등』. 양명수 역. 파주: 한길사.

논문집

  • Bultmann, Rudolf. 1969. 「해석학의 과제」, 『성서의 실존론적 이해』, 허혁 역(서울: 대한기독교서회), 69-98.
  • ______. (1980). 「학문과 실존」, 『학문과 실존 1 』, 허혁 역(서울: 성광문화사), 1-13.
  • ______. (1981a). 「”자연신학”의 과제」, 『학문과 실존 2』, 허혁 역(서울: 성광문화사), 134-150.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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