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기도 전에 드는 생각인데, 이 글은 정말 많은 반박 이후에야 완성될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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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전쟁물’이 재밌다. 이를테면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사 같은 이야기. 수십만의 병사가 평야와 산지에서 부딪히고 그들을 지휘하는 장수와 책사가 있다.

살아 움직이는 수십만의 병사들을 다룬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승리를 위하여 혹은 피해의 최소화를 위하여 밤낮 머리를 싸매야 한다는 것은 또 어떤 일일까. 그런 중압과 책임감 속에서 탄생한 ‘완전무결한 전략’을 감상하는 것이 내게는 즐겁다.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 일이 어떻게 흐르든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주는 전략.

반면 그런 전략이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파훼되는 것을 감상하는 것도 즐겁다. 이건 도저히 질 수가 없다, 혹은 이길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전장의 어딘가에서 변수가 생긴다. 용맹한 장수 한 사람이나 사연 많은 병사 한둘이 ‘인외人外’ (전쟁물에서 심심하면 등장하는 단어)의 활약으로 판세를 뒤집어버린다. 그러면 아연실색한 책사는 한탄한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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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외로) 경제학도다. 왜냐고 물으면 좀 식상해져야 한다. 한자어 ‘경제’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준말이다.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영단어 Economics도 비슷하다. 어원을 따지자면 οἰκονόμος라는 그리스 어에서 나왔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원래의 뜻은 ‘가사 관리’였다. 자원과 사람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최소 단위를 잘 관리하는 것, 즉 ‘가사家事’가 바로 국가(폴리스) 차원의 ‘치세治世’ 혹은 ‘정치’와 다르지 않다고 본 것이다.

그런 ‘치세’가 나의 관심사다.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왜 갈등과 불평등은 해소되지 않을까. 왜 사람들은 자꾸 서로 증오하고 싸울까. 세상이 이럴진대 어떻게 나아질 수 있을까. 아직 희망은 있을까. 또는 ‘완전무결한 전략’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혹은 사회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어떻게 작동하는가. 또 국가의 정책은 어떻게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가. 정책의 효과는 실제로 어떠한가. 사람들에게 재화는 어떻게 분배되고 있고 어떻게 분배되어야 하는가. 그 분배는 가능한가, 그리고 정당한가.

그러나, 또 다시 말하건대, 그런 ‘완전무결한 전략’은 가능한가? 불가능하다면 왜 불가능한가? 그리고 경제학 혹은 사회과학 학문은 어디까지를 말할 수 있는 걸까? 이 학문의 역할은 도대체 무엇인가?

바꿔 말하건대 ‘치세’를 목표로 하는 학문들, 사회에서 어떤 구조나 법칙을 발견해내고 이를 반대로 적용해 사회가 변동하고 인간이 행위·영위하는 것들을 조작하려는(경제정책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학문들, 그럴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연구하는 학문들의 ‘가능영역’을 묻는 일이다. 그 가능영역을 엄밀히 하는 것이 학문적 분석과 적용에 선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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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현대의 경제학은 그 과학성을 위하여 계량 방법론을 주로 취하고 있다. 어떤 경제 이론이 제시되면 그것을 통계적으로 검증하여 현실설명력을 따진다. 포퍼의 ‘반증가능성 원리’다.

통계적 추론은 결국 귀납적 추론이다. 충분히 많은 사례가 어떤 경향을 따르고 있을 때, 우리는 그러한 경향이 ‘일반적’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상황 S 아래, a는 x다. (혹은 a는 x한다) 또 b는 x다. c도 x다. … 수집된 사례들이 논리 전건이 되어 후건을 도출한다. 어떤 상황 S가 주어지면, 일반적으로 경향 X가 성립한다.

이 귀납에 기대어 경제학자들은 경기변동을 예측하고 그것을 조절  ─ 목적함수를 달성하려 한다. 하지만 근본적 한계가 있다. 이를테면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미래의 사건들을 현재의 사건들로부터 추론할 수 없다. 인과관계에 대한 믿음은 미신이다.” (5.1361) 혹은, “태양이 내일 떠오르리라는 것은 하나의 가설이다 ; 그리고 이는 태양이 떠오를지 여부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6.36311)

통계와 귀납은 ”필연적 참’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실제로 경제학의 모델은 많은 경우에 예외에 부딪힌다. 완전한 예측이 가능했다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기존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러한 예외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케인즈와 시카고가 몇 번 자리를 바꿨고 이제는 행동경제학이 노벨상을 받았다. (서브프라임 이후에는 민스키의 금융불안정성 가설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가정’을 바꾸는 식이었다. 현실과 더 비슷해 보이는 이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것을 받치는 공리axiom들을 수정했고 경제학의 주류가 달라졌다.

끊임없는 가설검증의 길이다. 경제학에서 제시하는 것은, 아니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인과나 궁극적 원리가 아니라 논리적 모델이다. 그 모델이 얼마나 현실에 들어맞는지는 사실 얼마나 적합한 공리를 채택했느냐에 많은 부분 달려 있을 것이다. 그렇게 점점 반증불가능한 영역을 늘려나가겠지만, 여전히 그것은 논리적일 뿐 필연적이지 않다. 말하자면 항상 인외人外의 장수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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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경제학 혹은 계량적 사회과학 일반의 무능력함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가능영역은 있다. 그런 간편하고 확실한 방법들 덕에 지금의 사회는 유지되고 있다. 수천만 단위의 국민들로 이루어진 국가다. 그 수많은 제각각의 사람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데 정부 혹은 기업은 물가(가격)와 실업률, 생산량과 분배 양상을 목적에 맞춰야 한다.

* 그 목적 수준을 어디에 두느냐는 경제학이 논할 것이 아니다. 그건 경제학 밖에 있다. 이건 다음에 더 자세히 다루려 한다. 다만 지금 확실히 해둘 것은 있다. 애초에 경제학은 ‘효율’ 즉 최소 비용 최대 편익을 ‘선’으로 삼는 학문이다. 그러니까 경제학에게 직접, (‘경제학’이라는 이름표를 이마에 붙인 누군가를 상상하라) 왜 평등과 정의를 경시하느냐고 묻는 것은, 소용없는 일일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학문을 들자면 그건 윤리학이나 정치철학의 영역이다. 사실 이건 경제학의 가능성에 관한 체념이기도 하다. 경제학은 혼자서 정의로울 수 없다. 학문이 그렇게 칼같이 나눠져야만 하냐고 묻는다면, 학제간 교섭이 가능한 것이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정해져 있다는 게 지금의 내 생각이라 답하겠다.

이제와서 ‘수량화’라는 강력한 도구는 버릴 수도 없고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애초에 수량화 외에는 마땅한 방법이 없는 영역이다. 개인이 영위하는 ‘물적 기반’은 ‘태초부터 셀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두 사람일 때에야 말 그대로 숫자를 세면 되지만, 몇천만 국민들로 구성된 국가에서 무엇이 누구에게 얼마나 있으며 어디서 어디로 얼마나 흘러가는지를 셀 수는 없다. 그래서 수리적 모델링이 있고 그것을 검증하는 계량적 방법이 있다. 일반적으로 그럴듯한 공리들 아래, 보통은 이렇게 된다, 라는 공식은 일단 현대의 거대 사회를 불가능에서 구원한다.

그것만으로도 유능한 책사다. 다만 그 정도가 가능영역임을 항상 가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논리적 추론이지 인과나 필연이 아니다. ‘항상 그렇게 된다’는 것은 환상이며 아마 지금의 경제학자와 정책 입안자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해봐야 ‘많은 경우에’ 그렇게 된다, 정도겠지. 그들은 좀 더 많은 경우에 통하는 것들, 좀 더 현실에 ‘가까운’ 모델들을 찾아가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만 잘 해내면 된다.

첫 번째 결론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는 못했지만) 내렸다고 하자. 경제학은 ‘완전무결한 전략’을 세울 수 있는 책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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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너머는 내버려두어야 하는가.

책사들의 문제는 살아있는 사람이 전략과 길항하며 판도를 바꾼다는 것이다. 미제스(Ludwig von Mises ; 1881-1973)에 따르면 경제학은 인간의 행위에 관한 학문이기도 하다. 생산과 분배를 구성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를 구성하는 것은 인간의 합리성과 이기심, 뿐만 아니라 사랑과 질투와 증오와 사상과 꿈, … (인외인人外人!)

이건 태생적 교착 상태다. 다시 말하자면 경제학은 인간의 행위에 관한, 그 중에서도 양화 가능한 것들(경제학에서 ‘합리적’이라고 약속되어 있는 행위들은 자명히 양화 가능하다)에 관한 학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에는 양화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실제로 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둘의 총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경제학이 속 편하게 선을 그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 우리는 완벽할 수 없어, 라고 겸손해진대도 그 다음이 더 머리 아프다. 양화 가능한 것들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는데 양화 불가능한 것들도 경제를 움직인다(심지어 양화 가능한 것들만 다뤄도 인과나 필연은 포기해야 한다). 건드리는 순간 제국주의자가 될 테지만 건드리지 않을 수도 없다. (대표적으로 베커G.Becker의 모델들─그는 결혼, 출산, 범죄 등의 인간 행동을 편익/비용 계산 원리로 설명해내 노벨상을 받았지만 아직도 ‘경제학 제국주의’라며 논란이 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경제학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결국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말들 앞에 얄밉게도(!) 계속해서 나타나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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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은 말이다. 범주이며 체계다. 심지어 탈구조를 외칠 때도 구조적인 텍스트로 말한다. 분석과 정리, 판단이 없는 학문을 나는 상상할 수 없다. 특수한 것들을 경험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상위 범주의 것으로, 더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좀 더 많은 경우에 적확한 말들을 찾아간다. 그러다 빠진 것들을 발견하고 점점 더 많은 것을 포섭해간다. 그러나 끝까지 말로 포착할 수 없는 잉여의 것들이 있다.

사람을 이야기하는 학문일수록 더욱 그렇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 와중 끝까지 랑그에 포섭되지 않는 빠롤들. 심지어 의미가 아닌 방식도 있다. 지난 글에서 나는 그것을 ‘거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분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끝까지 분석하다 보면 구구절절한 이야기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 나온다. 이를테면 바르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서사는 초국가적이고 초역사적이고 초문화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인생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다.” (“Introduction to the Structural Analysis of Narratives”)

생각건대 그건 다른 말로, 세계다. 정말이지 날것의 의미로. 언어와 사유와 사회와 학문이 있기 전에 그 모든 것을 애초에 가능하게 하는 영점으로서의 세계. 한 사람이든 공동체이든 문화현상이든 경제현상이든 어떤 것을 분석하고 학문으로 체계화하는 와중에 만나게 되는 것은 관찰 이전에 그 모든 것들이 놓여 있는 바로 그 상태다.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라는 말은 그래서 적확하고 무겁다.


6.41 세계의 뜻은 세계 밖에 놓여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 속에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있으며, 모든 것은 일어나는 그대로 일어난다 ; 세계 속에는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 그리고 만일 가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무 가치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가치를 가진 어떤 가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모든 사건과 어떠어떠하게 있음so-sein 밖에 놓여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모든 사건과 어떠어떠하게─있음은 우연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비─우연적으로 만드는 것은 세계 속에 놓여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다시 우연적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계 밖에 놓여 있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교묘하게 우회한 것이다. 일찍이 이 교착을 알아차리고 그의 작업을 이 안으로 한정했다. 대신 그 한정으로 하여금 그 밖에 있는 것들을 더 진지하게 다뤘다. 어떻게 보면 그는 논의를 끝내버렸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7)

그러나 나는 지는 싸움이라도 지속해야 한다는 쪽이다. 스스로를 한낱 결과론으로 한정짓지 않기 위해, 학문은 (최소한 어떤 학문들은) 그것들을 말해내야만 한다. 세계 안에서, 세계 안의 말로. 비트겐슈타인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누군가는 치세를 위해, 누군가는 진리를 위해, 누군가는 윤리와 정의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포섭할 수 있는 것들을 넓혀나가야 한다. 그러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라는 거대한 벽을 마주하는 순간이 온다. 그냥 저기 있을 뿐인 것들, 그냥 저런 삶일 뿐인 것들을. 하지만 그 앞에서 포기한다면 ‘책사의 의무’를 저버리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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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비약들을 질문으로 압축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첫째, 학문은 말할 수 없는 것들(다룰 수 없어 보이는 것들)까지 포섭하려 애써야 하는가. 둘째, 그것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할까. 불가능하다면 왜 불가능한가.

(사실 엄밀히 하자면 그 앞에는 ‘과연 말할 수 없는 것이 있기나 한가’라는 질문이 앞서야 할 것이다)

또 하나를 덧붙이자면, 내가 ‘학문’ 혹은 ‘사유’라고 말해온 것은 ‘최소한 사회과학 혹은 경제학’의 의미일 것이다. 이런 논의는 자연과학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최소한 인간과 세계를 분석하고 그것을 거꾸로 적용시키려는 목적이 있는 학문에 국한한 이야기다. 이런 고민이 필요없다는 결론 또한 그것대로 유의미한 경계짓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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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외人外의 장수! 전략에 고려하지도 않았던 변수를 가져오곤 하는 저 무지막지한 존재들. 어쩌면 역사를 써온 것은 이 포섭불가능한 존재들이었을지 모른다. 물론 ‘장수’는 비유일 뿐이다. 그저 살던대로 살아간 사람들. 아무도 모르는 사이 자기 삶으로써 뭔가를 뒤바꿔버린 사람들. 사랑과 증오와 질투와 이기심으로, 그저 자기에게 절실한 대로 행했던 사람들.

인간사를 다루려는 책사가 있다면 그들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냐는 얘기다. 도저히 보편이나 필연 등의 말을 꺼낼 수 없게 만드는 세계가, 그냥 거기 있는 세계가 저기 있다. 침묵과 지는 싸움 사이에.

파상
studien618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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