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찰나의 순간에 구축된 아포리아가 있다. 아무것도 말해질 수 없다면, 그럼에도 무언가가 계속해서 말해져야 한다면, 이 아포리아가 수렴하는 지점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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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황혼녘의 길을 걷고 있다. 강 위에 가로놓인 다리를 절반쯤 건너던 그는 문득 그 자리에 못박힌 듯 멈춰 선다. 별안간 그의 세계가 온통 구불거리며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지옥의 불이 타오르듯 일렁이는 하늘과 시퍼렇게 넘실대는 강의 경계에 선 그는 끊어지기 직전의 외줄 위의 곡예사보다 무력하다. 극심한 공포가 그를 짓누르면서 그의 얼굴이 해골처럼 창백해진다. 수의처럼 새까만 옷에 감싸인 채, 그는 온몸을 비틀면서, 끔찍한 비명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에드바르트 뭉크의 그 유명한 <절규The Scream>를 언제 처음 보게 되었는지 선명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마도 초등학생 언저리의 나이였을 것이다. 하도 유명하다 못해 그다지 재미있지도 않은 각종 패러디 따위로 진작 키치화해 버린 그 그림을 무심히 넘기면서도 한편으론 (당연하게도) 의문을 품었던 것 같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도 처절하게 비명을 질러야 했/하나. 뭉크는 이 그림을 1893년에 그렸다. 그 후로 100년도 넘는 시간이 흐르도록 그의 자화상은 시체처럼 박제되어 절규했다. 그리고 이 그림이 남아 있는 한, 계속해서 절규하고, 절규할 것이다. 그의 그림 안에서 정지된 시간은 잔인하게도, 영구히 존속한다.

갑작스럽게 뭉크의 그림을 들먹이는 이유는 한유주의 「왼쪽의 오른쪽, 오른쪽의 왼쪽」(이하 「왼쪽」)이 그의 그림과 기묘하게 닮아 있기 때문이다. 비단 두 작품에 흐르는 불안과 공포의 정서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세계를 이루는 복합적 시간성 때문인데, 이 시간성은 순간적인 동시에 영속적이며 한편으로는 사후적이기도 한 것이다. 이를테면 뭉크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

에드바르트 뭉크 (Edvard Munch, 1863-1944)

이 말은 —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다면 — 그 외형만큼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뭉크가 그린 그림은 그의 기억에 의존하여 철저하게 사후적이었다는 것인데, 이때 그의 기억은 그에 의해 철저히 재구성되어 최초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한다. 그의 기억은 과거의 것이나, 그가 그림을 위해 기억을 재구성하는/기억의 재구성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행동은 현재적인 것이다. 그가 물감을 덧칠하는 과정에서 기억은 끊임없이 변주되어 재창조된다. 그리고 그가 그림을 막 완성하고, 서명을 한 후 덜 마른 붓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그의 재구성의 행위는 종결되고 기억의 결과만이 영구히 박제되어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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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소설은 곧 시간이라고 생각했고 언제나 시간에 대해, 어쩌면 시간을, 시간 자체를 쓰고 싶었다.

한유주, 「처음부터 다시 짖어야 한다」, 『문학과사회』 31(4), 문학과지성사, 2018, 143쪽.

뭉크의 그림이 온통 요동치는 풍경을 묘사하고 있음에도 순간을 압축했다는 점에서 정적이라고 한다면, 한유주의 글은 그 순간성에도 불구하고 다채로운 시간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더 영화적이다. 화자인 ‘나’가 살해당할지도 모르는 위협에 직면한 순간을 그린 「왼쪽」은 마치 24fps 필름에서 1초를 뚝 떼어내 그 안의 스물네 개의 프레임을 늘어놓은 것 같다. ‘나’의 ‘왼발은 열세 번째 계단에, 오른발은 열두 번째 계단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채 소설 속 현재적 시간은 거의 정지하다시피 머물러 있다. 이 소설 속 서스펜스를 구축하는 시간은 한없이 길어 보이지만, 동시에 단 몇 초도 채 되지 않는 찰나의 순간인 것이다. 이 단말마의 순간에는 화자가 회상하는 과거, 머리채를 잡힌 현재, 살해당하게 될 미래가 불연속적으로 혼재해 있다. 그런데 이 파편적인 시간의 문법 너머를 흐르는 또 다른 시간성이 있다. 바로 전미래le futur antérieur다.

미래futur면서 동시에 과거antérieur적인, 그 개념부터 역설적인 전미래란 화자의 친절한 설명에 의하면 ‘미래의 어떤 시점에 행해지고 있을/끝나야 할 일을 말할 때 사용하는 시제’다. 약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자면, ‘그가 도착할 때쯤 기차는 이미 떠났을 것이다.’와 같은 문장에서 기차가 이미 떠났다는 부분은 그가 도착한 미래의 시점에서 이미 끝난 일이므로 미래의 전, 즉 전미래적인 사건이다. 시간이 선형적, 연속적인 통상적 세계관에서 전미래는 과거와는 무관한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왼쪽」에서 전미래는 소급적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는 사뭇 다른 시제로 사용된다. 단절적인 기억의 파편 속에서도 ‘나’는 전미래 시제를 배우던 어학원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나는 우연의 가속화라는 실증될 수 없는 종류의 현상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걸 믿고 살면 삶의 많은 부분들을 놓칠 수 있지, 하지만 삶의 의미를 재구성할 때는 이보다 편리한 믿음도 없다. 어학원에서 나는 내내 입을 닫고 지냈다. 무해한 짐승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었지, 그걸 보다 못한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말했어, 직역하면 다음과 같은 뜻이었다. 너는 좀 더 현명해져야 해. 나는 무해한 짐승처럼 웃었다. 그 말을 듣고, 나의 현명하지 못함이, 그 상태가, 12년이 지나 누군가에게 이토록 고통스럽게 머리채를 잡히는 순간을 만들어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유주, 「왼쪽의 오른쪽, 오른쪽의 왼쪽」, 『2019 現代文學賞 수상소설집』, (주)현대문학, 2018, 236-237쪽.

요컨대 「왼쪽」의 전미래란 이런 것이다. 현재 혹은 미래의 우연을 과거로부터 비롯된 필연으로 만드는 재구성이 이루어지는 시제. ‘무해한 짐승처럼 가만히’ 웃기만 했을 때, 지금 머리채를 잡고 있는 ‘이자’의 폭력성을 인지하면서도 만남을 지속했을 때,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나’의 현재는 실은 이미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과거를 필연화하는 이러한 기억의 재구성은 ‘실증될 수 없’으며, 더 나아가서는, 죽음의 위기가 닥친 현재의 시점에 어떠한 실재적인 영향도 미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스스로를 의심하는 대신 ‘이자’의 폭력성을 의심할 수 있을 만큼 현명하지 못했던, ‘이자’를 뿌리칠 수 있을 만큼 강해지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 그렇게 자책하는 편이, 도저히 이성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현재 눈앞에 닥친 파국을 대하기에 보다 ‘편리’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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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와 자책. 끔찍한 현재의 상황에 이르기 전에 다른 행동을 했어야 했다는 뒤늦은 믿음. 지금은 오래되어 많이 잊어버렸지만 6~7년 전 즈음 배웠던 프랑스어에는 전미래라는 시제 외에도 여러 문법적 규칙들이 있었고 그 중에 조건법 과거le conditionnel passé라는 것이 있었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반대 상황을 가정 내지는 이미 한/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를 나타내기 위한 문법적 장치’인 이 조건법 과거는 이제 생각해보니 소급적 전미래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이자를 떠나지 않았을 때, 지금 이 상황은 이미 예정되어 있던 것이었다.’ 이 문장을 조건법 과거 시제로 변형한다면 다음 정도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 처하기 전에, 이자를 떠났어야 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후회들은 어떨까.

내게 생각할 시간이 더 있을까, 네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데, 이미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이것이 첫 문장이 될 수 있을까, 네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데, 이미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나는 이야기를 시작해야 해, 내게는 시작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한유주, 위의 글, 233쪽.

오른손으로 문을 열었어야 했는데…… 그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이불을 주었어야 했다. 안으로 들였어야 했다. 어쩌면 그 사람도 맨발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사람도 할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다. 안간힘, 안간힘을 써서 도망쳤을 것이다. 그래서 입을 막았던 청테이프를 떼어내고, 맨발로, 초인종을 눌렀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네 장례식장에서 이자의 차에서 내리지 않은 걸 후회하기 이전에, 그날 새벽 이불 한 채 달라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걸 후회해야 했다.

한유주, 위의 글, 252-253쪽.

「왼쪽」의 ‘나’는 그 짧은 찰나의 시간 동안 두 화자로 분열된다. ‘이자’의 폭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희생되는 ‘나’와 타인을 방관했던 ‘나’, 이들을 각각 방관자-‘나’와 피해자-‘나’로 호명해볼 수 있을까. 두 화자를 묶는 공통분모격 정서는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한 후회와 무력감이다. 그리고 방관자-‘나’로서 느끼는 자책감은 피해자-‘나’가 느끼는 감정 이상으로 통렬한 그 어떤 것이다.

온몸의 통각이 반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열렬히. 그래도 생각해야 한다. 왜 너는 죽기 사흘 전에 내게 전화를 했을까, 나는 그 이유를 오랫동안 생각했다. 하지만 충분히 오래는 아니지, 고작 몇 년이었다.

한유주, 위의 글, 245쪽.

방관자-‘나’의 첫 번째 자책감은 8년 전쯤 죽었던 ‘너’를 향한 것이다. 딱히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던 ‘너’는 화자의 생일에 화자에게 전화를 걸었고 사흘 후 죽었다. 방관자-‘나’는 ‘너’와의 통화에서 어떤 징후를 들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너’의 죽음을 들었을 때 사인을 묻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어째서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다‘면서도 방관자-‘나’는 아마 그 어째서, 를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상한 조짐을 알고도 ‘너’의 죽음을 저지하는 데 아무런 힘도 되지 못했던 것, 그리고 ‘너’를 충분히 오래 생각하지 않았고 진작 ‘너’의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자책감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너’의 이야기를 어떻게든 시작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는 머리채를 잡히고 청테이프로 입을 막힌 채, 맨발로 위태롭게 계단에 서서, 계단 아래 떨어진 칼을 의식하는 현재의 극한 상황에도 돌아올 만큼 강렬하다.

방관자-‘나’의 이야기해야 한다는 강박 내지는 욕망(‘말하고 싶다. 말하고 싶다. ……말하고…… 싶다.‘ – 한유주, 「암송」)은 그러나 불연속적인 사고의 흐름에 의해 끊임없이 제지당한다. 이 이야기해야 한다는 강박은 화자가 서투른 프랑스어로 ‘나, 열쇠에, 떨어진다, 선로를‘이라 더듬거리던 때와 마찬가지로 파편적으로 분산된다. 많은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어떠한 이야기도 제대로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화자의 모습은 마치 ‘왼쪽의 오른쪽, 오른쪽의 왼쪽’이라는 이 이야기의 제목과도 같다. 왼쪽의 오른쪽은 오른쪽이고 오른쪽의 왼쪽은 왼쪽이다. 길게 풀어서 이야기했지만 빙 돌아서 결국 ‘왼쪽과 오른쪽’이라는 원점인 것이다. 화자의 장황한 고백이 마지막 말줄임표의 강렬한 여운과 함께 사그라들 때까지 ‘너’에 관해 명확히 드러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죽기 직전에서야 사무치게 느끼는 강렬한 욕망에도 불구하고, 결코 말해질 수 없는 종류의 이야기를 ‘나’는 말하려 하는 것이다. 그 뒤에는 다시 한 번 전미래적으로, 실패가 예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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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의 이야기를 마냥 실패한 이야기로 규정할 수 있을까? 말하기를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에게서 화자narrateur/-trice라는 명칭을 박탈하는 것은 온당할까? 어쩌면 한유주는, 이야기하려는 시도 자체만으로도 성립될 수 있는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점차 알게 되었지, 어떤 사람들은 유령이 되어서야만 목소리를 내게 된다는 걸, 전에도 목소리는 있었지만 누구의 이목도 끌지 못했으리라는 걸, 나는 알게 되었다.

한유주, 위의 글, 252쪽.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상황에서 방관자-‘나’의 파편적인 의식 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또 다른 자책감은 어느 겨울 새벽 초인종을 눌렀던 어떤 여자, 의 목소리, 에 대한 것이다. 너무 추워서 견딜 수 없으니 이불 한 채만 달라고 울며 애원하는 여자에게 방관자-‘나’는 결국 문을 열어주지 않았는데 이에 대한 후회는 지금 ‘나’를 죽이려 하는 ‘이자’를 떠나지 않은 데 대한 후회에 선행한다. 어떤 종류든 간에 생존의 위협에 직면한 사람을 외면한 일은 ‘유령이건 사람이건 나는 문을 열었어야 했다‘는 죄의식을 불러온다. 억압되었던 죄의식이 ‘유령의 목소리‘의 형태로 귀환한다는 점에서, 여자의 목소리는 8년 전 통화로 죽음의 징후를 보여주었던 ‘너’의 목소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문제는 이들과 죄의식에 대해 비로소 파편적으로나마 이야기하기 시작한 ‘나’의 목소리 또한 금방이라도 유령의 그것으로 돌아갈 것만 같다는 점이다. 어떠한 명확한 단서도 없이 단지 ‘아, 아아아, 아아악, 아아’라는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나’의 이야기는 이대로 종결되고 마는 것일까?

나는 그들을 전부 잊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잊고 지냈었지요. 하지만 그들은 자꾸만 되돌아오고, 나를 바라보고, 내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해요. 그렇게 어제가 오늘이, 내일도 오늘이 되고 말아요. 그래요, 이야기는 결코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한유주, 「K에게」, 『문학과사회』 19(4), 문학과지성사, 2006, 164쪽.

그럼에도 어떤 이야기들은 계속 되돌아오고,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 유령의 목소리를 빌려서라도 귀환해야 하고, 파편적인 기억의 조각으로나마 계속되어야 할 이야기들이 있다. 그 이야기들은 결코 온전하게 이야기될 수 없고, 후회와 자책을 덜기 위한 미온적인 윤리에 기댈 가능성(‘그러니까 나의 알량한 윤리적 위안을 위한 강박인지, 혹은 그 모든 불운한 가능성들에도 불구하고 써야 하는 것이 결국 작가의 일인지, …‘ – 한유주, 「처음부터 다시 짖어야 한다」, 147쪽)과, 늘 실패할 징후(‘소설 쓰기라는 일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뭘 써도 실패할 것이라는 점이다.‘ – 한유주, 위의 글, 144쪽)를 끌어안고 있으나,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재구성되어 쓰이고 말해질 때 비로소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한유주는 이 이야기될 수 없으나 이야기되어야 하는 모든 것들을 찰나의 순간에 박제함으로써, 어떻게든 이야기를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영원한 시간성 위에 놓는다. ‘나’의 이야기는 언젠가 반드시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것이 비록 유령의 목소리라고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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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영원한 찰나의 아포리아가 수렴하는 지점은 어디인가, 라고 썼다. 답을 정해놓고 쓴 것은 아니었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였는데 이 글을 다 써내려간 지금에서야 질문을 정정해야 되겠다. 한유주의 글에서 아포리아는 수렴되지 않는다. 대신 이야기해야 한다는 끝없는 욕망이 있는 영원한 시간대로, 무한히 발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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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하
choha@yonsei.ac.kr
나, 너, 그리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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