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기억

불치

   겨울 내내 투병 중이다
   의사와 알약은 아무 말도 없었고
   나는 거리로 나갈 필요가 부족했다
   안, 과 못, 을 저울질하다가
   따뜻해진 방에서 불치를 선고했다

   창을 열면 아우성이었다 거리에는
   내 것은 아닌 감정들 목소리들 눈빛들 하나같이
   꿈이나 다를 바 없어서 자주 잠을 잤다
   밤과 낮을 헤매다 보면 모퉁이마다
   거대하고 투명한 문이 나타났고 내가 택한 요법은
   손잡이를 싫어하는 일이었다

   혼자서 알약을 셌다 이번엔
   안, 과 못, 어느 쪽이야, 생각건대 내게는
   안 못해, 못하지는 않아, 따위의 말버릇이 있었고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 될 수 있는지
   갈팡질팡하며 입술을 뜯었고

   여기엔 남은 생의 표정… 같은 것이 통째로
   걸린 셈이다, 지난한 1인용 게임
   이따금 손잡이를 잡았다가
   놨다가 알약을 삼켰다가
   뱉었다가 하며 겨우내 불치, 라는 말을
   껴안고 자다가 깨다가 매만지다가
   몇 계절 치의 소란은 다행히 알아서 흘러가는 중인데

   아마 문은 한동안 전략적으로
   열리지 않을 것이다
   따뜻한 겨울

파상. 17.2.9.

16년에서 17년을 넘어가는 겨울은 퍽 심란했다. 2016년 10월 촛불집회가 시작되었고 나는 군대 생활관 TV로 과정을 정국을 지켜봤다. 그러다가 11월 10일에 전역해서 두 달 동안 고향에서 지냈다. 부모님은 노란 막대 풍선을 들고 자주 거리로 나가셨다. 나는 집에서 책을 읽었다. 김연수의 책들을 다시 펼쳤고 정유정의 『7년의 밤』을 아주 재밌게 읽었다. 위고의 『레 미제라블』도 그 겨울에 재독했다. 그러다가 17년 1월 동생과 함께 상경해서 새 자취방 생활을 시작했다. 개강하기 전까지 학교 도서관 2층에 틀어박혀 홍훈 교수님의 경제사상사 책들을 훑었고 맑스의 『경제학 철학 수고』를 재독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과 스미스의 『국부론』을 읽다가 포기했고 리카르도의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를 완독했다. 그동안 거리는 점점 더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3월, 오랜만의 개강이 찾아왔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17년 3월 10일, 전 대통령이 파면되었다. 그날은 지금 몸담고 있는 재즈 동아리의 정기공연 날이었는데, 앵콜 곡이 자코 파스토리우스의 ‘the chicken’이었다. 다들 무릎을 치며 웃었다. 끝나고 뒷풀이 자리에 섞여 술을 굉장히 많이 마셨다. 분명히 탄핵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것 같지만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2014년 4월 16일에 대한 기억은 조금 더 빈약하다. 동기들과 치킨을 먹다가 그 뉴스를 본 건 확실하다. 신촌의 흔한 저녁이었고 우리는 와, 저게 뭐래, 하면서 치킨을 뜯었다. 전원 생존 비슷한 말이 들렸고, 그렇구나, 하면서 맥주를 마셨다. 다음날과 그 다음날이 지났고 큰일이구나, 하면서 생활을 계속했다. 충격적이었고, 맛있었던 그날의 치킨과 맥주가 굉장히 낯설었고, 원래도 자주 우울해하던 때였지만 훨씬 더 우울해졌고, 자주 인터넷 뉴스를 보고 자주 화를 냈다. 그 치킨집은 지금 없어진 것 같다.

그러나 광장에는 한 번도 나간 적 없었고 그 일에 관해 치열한 말을 해본 기억도 없으며 아직 노란 리본을 단 적도 없다. 어째선지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었고, 아니 관심이 없었다기보다, 그런 것에 진심(어쩌면 ‘자격’) 없이 참여하는 일은 뭔가 이상해,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좀 미묘한 감정이었다. 지금까지도 길에서 노란 리본이 종종 보이는데, 그럴 때마다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동시에 그날의 치킨과 맥주가 생각난다. 그런데 그런데 나는 여전히 치킨과 맥주를 좋아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

결국 나는 한 번도 현관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방구석에서 도서관에서 술집에서 ‘안’과 ‘못’의 차이를 고민한 계절들이었다. 이후로도 나는, 가끔씩 광장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침묵하고 있다.

잘 모르겠다. 내게는 광장에 동참한다는 일이 너무 거대하게 느껴졌다. 방에서 자다가 책을 읽다가 뒹굴다가 사적인 삶을 누리며 창틈으로 거리를 조금씩 엿봤다. 그러면서 굉장히 새로운 감정 하나를 알게 됐다.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분노도 무기력함도 아닌 복잡미묘한 뭔가를.

그래서 그날들에 관한 다른 사람의 기억을 궁금해하곤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 번도 실제로 물어본 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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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혹은 세대 혹은 사회 혹은 유령같은 뭉텅이

그런 일들을 겪고 우리는 우리가 되었나. 아닌 것 같다. 나만 해도 계절내 방안에 있었고 광장에 있었던 이들과는 전혀 다른 온도로 그것들을 기억할 것이다. 분명히 공통으로 겪은 일들이고 여전히 그 땅에서 그 이후의 시간을 살고 있는데도 여전히 다른 것은 너무 다르다. 모든 게 다 같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 다양한 결들도 분명히 가치 있는 것이겠지만, 그런데 어떤 다름들 앞에서는 도대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로”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주십시오” 도와달라고 무릎을 꿇고 우는 정치인들이 있는 일상, “유가족들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세월호 때문에 경제가” “세월호 때문에 나라 분위기가” “세월호 때문에” 그들을 돕는 사람들이 있는 일상, 그들의 도움으로 국회로 돌아간 정치인들이 세월을 은폐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일상, 살아남은 사람들을 뻔뻔한 의도로 모욕하는 것을 보고 들어야 하는 일상, “유가족이면 좀 가만히 있으세요” “어디 뭐 노숙자들 있는 그런…… ” 진상을 규명하는 데 마땅히 필요한 것들이 마련되지 않는 일상, 거리로 나와야 하는 일상, 거리에서 굶는 아내를 지켜봐야 하는 일상, “제대로 단식을 하면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어?” “벌써 실려가야 되는 거 아냐?” “세월호 때문에”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아니 그보다 내가 좀 살아야겠으니 이제는 그만 입을 다물라며 눈을 부라리는 사람들이 있는 일상, […]황정은.”가까스로, 인간.” 문학동네, (2014): 1-8

정말이지 잘 모르겠다. 찾아가서 화를 내야 하나. 글쎄, 나는 화를 낼 자격이 있나. 이거 다 ‘윤리적임’을 소비하고 싶어서 내 것이 아닌 감정을 뒤집어쓰는 거 아닌가. 이런 걸 인용해서 발행하는 것도 되게 자기기만적인 거 아닌가. 잘 모르겠다는 따위의 말이나 할 거면서. 윤리적인 게 뭘까. 옳은 게 뭘까. 내 태도와 행동들은 얼마나 온당한가.

그러나 이런 다름은 어떻게 해야 하나. 정말 모르겠다. 왜 이렇게 다를까. 틀림과 다름 사이에서 오랫동안 고민했고 답을 내리지 못했다. 좋든 싫든/적절하든 부적절하든, 불타는 망루의 이미지나 416이라는 숫자나 ‘파면합니다’라는 선고는 시대적인 무엇이 됐다. 그렇게 충분히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새로이 구성해낸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소용돌이다.

시대는 세대는 사회는 그 비슷한 말들은 그럼 다 무슨 소용인가. 틀림과 다름 사이에서 영원히 헤매야 하는 지옥도인가. 그 모든 일들은 무엇을 위해 일어났나. 또다시 무의미의 늪에 빠져야 하나. 의미화와 애도의 강박인가. 혹은 애초에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다름, 도 가능한가. 이런 글은 내 삶이 여유로워서 쓸 수 있는 글인가.

공동체라는 게 그렇게 허망한 이름이었나. 같은 사건을 겪어도 다른 말이 나올 수밖에 없고 저마다 다르게 기억할 수밖에 없고. 개중에 말도 안 되는 다름이 있어도 그걸 다름이라고 부르고 섣불리 선善을 말할 수 없고. 그럴 수밖에 없나. 틀린 건 틀렸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나. 틀린 것들을 바로잡거나 몰아내고 옳은 것들로만 가득한 공동체를 만들 수는 없나.

물론 그럴 수는 없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오히려 훨씬 비윤리적인 괴물이 만들어지겠지. 누가 누구를 탓할 것이며 누가 무슨 기준을 세울 것이며 다름과 틀림 사이에서 어떻게 선을 그을 수 있을 것이며,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서사가 있고, … 단지 화가 나는 것이다. 울화만 남고 그 이상을 안고 갈 수가 없다. 게다가 나는 계절내 방안에 있었고 그간 수백 마리의 치킨과 수천 잔의 맥주를 마셨고, 나라고 무슨 할 말이 있나, 하다가도 그러나 이딴 죄의식조차도 온당하지 않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현명해진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고 이 모든 것은 반복되고 …

결론이 아니라 자세여야 했던 것들

다음 발걸음을 내딛는 일은 왜 이렇게도 지난한지. 다름과 틀림과 우리의 문제에 관하여 오랫동안 생각해왔지만 아무래도 교착을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다. ‘이해할 수 없어서, 이해할 수 없더라도, 바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글을 쓰는 나날들'(지난 글, ‘다음 발걸음’)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이따금 분노가 치밀어오르고 그건 내 안팎 모두를 향해 있으며 그럴 때 중에서 꽤 자주, 다 그냥 때려부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번에 못다한 이야기지만, 레비나스와 김연수에서 출발해서 나는 해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같은 것들로 나아갔다. 아직도 얘네가 정확히 뭔지 모르겠다. 실제로 가능한 이름인지도. 와중에 그나마 알게 된 것은, 돌이켜보건대, 매력적인 이론들일수록 함정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이 개인적인 교착과 무기력의 기원은 여기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항대립을 전복시켜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권력이고 억압이다. 굳게 서 있는 것들을 해체해라. (데리다) 중심과 체계에서 벗어나라. 존재는 애초에 분열되어 있다. 개체의 본질같은 건 없고 다양한 맥락만 있다. 매 순간의 코드들에서 탈주하라. 계속해서 다른 것이 되어라, 유목하라. (들뢰즈) 고정된 점들보다 그 사이사이의 차이들이 중요하다. 차이를 보존하는 것이 정치고 윤리다. 유동성, 유동성, 유동성. 차이, 차이, 차이. 가능성, 가능성, 그놈의 가능성.

여기에 잡아먹히는 바람에 한참을 방황해야 했다. 저 이론들 자체를 비판하려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어떤 체계든 간에 분열과 모순을 내재할 수밖에 없다. (지젝) 어떤 상징화의 시도도 미끄러질 수밖에 없고 잉여가 우리를 항상 쳐다볼 것이다. (라캉) 그러니까 함부로 공동의 것을 결론지으면 안 된다. 거기에는 폭력으로의 길이 있다. 맞는 말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들을 읽고 나서 멈추지 않는 거였다.

해체와 상대성과 차이 같은 말들은 겸손한 자세를 만든다. 그것들을 결론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가능성, 가능성, 가능성만 되뇌이다가 말도 안 되는 다름들 앞에서 우울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들이 공동空洞을 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공동公同 혹은 공동空洞

사실 재작년의 일 하나를 오래 기억하고 있다. 오래전에 동아리에서 공부했던 선배─정확한 학번은 기억나지 않지만 학생운동이 사그러들기 이전 세대셨을 것이다─한 분이 나와 동료들에게 물었다. 너네는 뭘 위해 공부를 하니? 나는 어쩐지 아득해져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저희는요, 뭐 거창한 거대담론이나 안티테제가 있어서 공부하는 건 아니고요, 그러기엔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다성적이고요, 그래서 그냥 눈앞의 작은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공부하고요, 말하자면 거시적인 것에서 미시적인 것들로 한참을 옮겨 온 것 같고요, …

그게 다 무슨 말이람. ‘안’과 ‘못’ 사이에서 여전히 뭐하나 과격해지지 못했고 현관 하나를 열지 못했다. 시대적 표지들은 저기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나는 그 안에서 제대로 된 문장 하나 만들지 못했다. 틀린 것을 가려내는 문장도 다음을 구성하는 문장도 하다못해 방 안의 나를 변호하는 문장도 아직 여기 없다. 아무래도 공동의 것은 요원해 보이고 해체나 차이 같은 말들 때문에 섣불리 뭘 할 수가 없고. 내가 어떤 공동公同에 있는지, 그 공동은 무슨 의미인지, 그 사이에서 무력감에 잡아먹혀 공동公同을 공동空洞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나 결국 나/우리는 공동公同과 보편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건 결코 허상이 아니다. 허상으로 놔두고 각자도생하는 순간, ‘이젠 아무래도 미시적인 것들을’ 운운하는 순간, 그런 순간에야말로 우리의 ‘우리’는 허상이 된다. 그래서는 어떤 악도 걸러낼 수 없고 어떤 선도 지킬 수 없다. 지금-여기에는 분명히, 이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질문들이 있다. 그것들 앞에서 좀 더 깊게 오래 진지해져야 한다. 유보해서는 안 될 것들, 공동의 사건과 문제와 과제들. 그 종합의 과정 속에서는 물론 어떤 차이도 서사도 누락시키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저어함에도 잡아먹혀서는 안 될 것이다. 광장에 모였던 다양한 이야기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물결이 빠트린 것과 지켜낸 것, 그려낸 것을 물어야 한다. 여기 힘겹게 만들어진 공동公同의 씨앗이 있고, 그것이 공동空洞으로 자라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를 외치는 일은 공허하지 않다.

파상
studien618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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