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육부를 다 드러내는 글쓰기; auto-fiction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내게 어떤 문제는 (어쩌면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지언정 그것을 직면하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준 작품이다. 이 소설의 특정 장면은 내 인생의 한 부분을 그대로 잘라 붙인 것이나 다름없어서 쓰는 동안 꽤 힘겨웠으며, 다 쓰고 난 지금도 실은 좀 부끄럽다. 남들 보라고 (이렇게 긴 분량의 글을) 써서 출판까지 해놓고 부끄럽다고 하는 게 웃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완성했을 때,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어떤 해방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

동료 작가 S는 나에게 언제인가 “넌 어떻게 소설 쓸 때 그렇게까지 솔직할 수 있어?”라고 물어보았는데, ‘뭐래. 다 뻥인 거 알면서’ 싶다가도 돌이켜 생각해보니 소설 속의 어떤 순간이나 감정은 정말 내 오장육부를 다 드러내듯이 날것으로 드러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박상영.”[수상 소감] 제10회 젊은작가상 발표.” 문학동네, (2019): 1-3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소설이 세계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 지난 글들의 재론일 수 있겠지만, 왜 ‘문文’을 여는 일이 의미가 있는지를 다시 새기려면 매번 물어야 하는 문제다. 세상엔 소설이 아니더라도 재밌는 게 너무 많으니까.

생각건대, ‘무엇을 어떻게’가 소설이 가진 하나의 요체가 아닐까. ‘왜’는 엄밀히 말해서 소설 밖에 있을 것이다. 의도가 항상 자기와 닮은 자식을 낳지는 않는다.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그 이야기를 어떻게 전하느냐가 소설을 이룬다. 이건 고루하지만 그만큼 중요하다. 그러니까 소설은 재현 대상과 방법을 선택함으로써만 세계를 이야기한다/할 수 있다는 거다.

반대로 세계 또한 그 선택 없이는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세계는 그냥 거기에 있다. 그래서 이야기는 중립적일 수 없다. 하필 이것을 하필 이런 방식으로 썼기 때문에. 선택으로 직조된 이야기는 그렇게 수신자와 충돌한다. ‘문학은 감각적인 것la sensible의 재분배’라는 랑시에르의 말은 이렇게 재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좋은 소설은 어떤 의미망을 만든다. 불온함은 그래서 소설의 숙명이다.

박상영은, ‘하필 자기 자신의 삶을’, ‘하필 오장육부를 다 드러내듯이’ 쓴다. 그의 불온함과 그의 소설이 만들어 내는 의미망에 관해 말하려면 분명 여기─auto-fiction이라는 장르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의 ‘지금-여기’와 우리는 충돌해야 한다. 거기서 이번 문文이 열릴 것이다.

(이후의 인용은 모두 다음 지면에서.
박상영.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창작과비평 46.4 (2018): 179-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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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맛 우럭 연애 썰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줄거리를 요약하기가 애매하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소설 이전의 이야기같다. 소설가 ‘나’와 암 투병 중인 어머니가 있다. 간병 생활 중에 전 애인 형으로부터 우편이 온다. 오년 전 연애의 끝에 그에게 건넸던 일기 뭉치였다. ‘나’는 회상을 시작한다. 거기엔 ‘차곡차곡 정리되지는 않’는, 애인과의 일들과 어머니와의 일들이 있다. 우편에는 다시 만나자는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는 결말에서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

소설에는 정리되지 않는 많은 결이 있다. 어머니는 아들의 정체성을 부정했고 애인 형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했으며 ‘나’는 그 모든 것들에서 사과를 받아내고 싶지만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서 그럴 수는 없고 가만 앉아 엄마를 생각하고 애인을 생각한다.

엄마는 아예 잔디밭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을 보는 그녀의 표정은 누구보다도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어쩌면 내 앞에서 노을을 바라보는 저 사람도, 48킬로에 쉰아홉살의 그녀도 나와 비슷한 마음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라는 존재로 말미암아 인생이 예상처럼, 차트의 숫자처럼 차곡차곡 정리되지는 않으며, 오히려 가장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핏줄이 연결된 것처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존재가, 실은 커다란 미지의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인생의 어떤 시점에는 포기해야 하는 때가 온다는 것을. 그래서 인생의 어떤 시점에는 포기해야 하는 때가 온다는 것을.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생각을 멈추고, 고작 매일 지고 뜨는 태양 따위에 의미를 부여하며 미소 짓는 그녀를 그저 바라보는 일. 그녀의 죽음을 기다리는 일.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죽어버리기를 바라는 일뿐이다.

박상영. 244.

그렇게 쓴 소설일 것이다. 딱히 무엇을 하지는 않고, 그저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과연 그럴 수밖에 없었냐는 물음은 미뤄 두더라도, ‘어떤 문제는 (어쩌면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지언정 그것을 직면하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런 과정 자체인 셈이다. 소설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고 어떤 청사진도 그리지 않는다.

대신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같은 사랑은 있었다. ‘그 여름, 나는 완전히 미쳐 있었다. 돌았고, 사로잡혔다.'(205) 라고 말할 수 있게 해 준.

─ 지금 먹고 있는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 광어죠. 아니, 우럭인가? 제가 사실 생선을 잘 구별 못해요. 그냥 비싼 건 다 맛있더라고요.
─ 맞고 틀려요. 당신이 맛보고 있는 건 우럭, 그러나 그것은 비단 우럭의 맛이 아닙니다. 혓속에 감도는 건 우주의 맛이기도 해요.
─ 네? 그게 무슨 (개떡 같은) 말씀이신지…….
─ 우리가 먹는 우럭도, 우리 자신도 모두 우주의 일부잖아요. 그러니까 우주가 우주를 맛보는 과정인 거죠.
─ 아……
─ 우리 모두가 우주이고 우주의 일부로서 생동하며 관계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지 않나요?

[…]

─ 더 투명한 쪽이 광어입니다.
─ 네?
─ 둘 중에 살점이 더 투명한 쪽이 광어다, 생각하면 구별하기 쉬울 거예요. 더 쫄깃한 쪽이 우럭.
─ 그럼 오늘부터 저를 우럭이라고 부르세요, 쫄깃하게.
술 취한 나는 인간도 아니다, 방금 무슨 말을 내뱉은 거야, 정말 돌았군, 하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남자가 또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 아니요, 광어라고 부르겠습니다. 속이 다 보이거든요.

[…]

─ 엄마가 생선 가시는 진짜 잘 발라줬는데……
그가 갑자기 생선 가시를 바르기 시작하더니 두툼한 꽁칫살을 내 밥공기에 슥 얹어놓았다.
─ 아이고,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아이고, 죄송해라.
─ 좋아하는 거 같습니다.
─ 저도 좋아해요. 꽁치 맛있죠.
─ 꽁치 말고. 당신이라는 우주를요.
나는 마시던 소주를 그의 얼굴에 뿜어버렸다.

[…]

그늘진 그의 얼굴이 누구보다도 귀여워 보인다는 생각을 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늦어버린 뒤였다. 그의 얼굴이 점점 더 크게 다가왔고, 나는 그만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해버렸다.
그의 입술에서 이전까지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맛이 났다. 비릿하고 쫄깃한 우럭의 맛. 어쩌면, 우주의 맛.
그날 밤 우리는 함께 그의 집으로 향했다.

박상영. 199-202.

이쯤 되면 연애 썰 아닌가. 잰체 하는 문장들 없이 거창한 사랑론도 없이 술자리에서 썰 풀듯이 써내려간 이 글은 참 묘하다. ‘이게 소설이냐’는 말도 나올 만하다. 박상영은(‘나’는) 개의치 않는다. ‘문학적 편집’이랄만한 것 없이, 일체의 저어함 없이, 그는 만남과 이별을 이야기하고 아무래도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어떤 것들은 차곡차곡 정리될 수 없고 어떤 문제들은 해결될 수 없다. 그저 쓰는 것만으로 가능한 치유가 필요할 때도 있다. 그건 기존의 의미에서는 소설이 아닐 수도 있고, 어떤 면에서는 정말이지 소설일 수도 있다. 내용과 형식에 대한 고민, 그러니까 문학적 선택과 편집(혹시나 해서: ‘문학적’이라는 말을 딱히 엄숙하게 쓰고 있지는 않고, 그럴 이유도 지금은 없다)이, 없다시피 한 것일 수도 있고 반대로 이런 방식을 적극적으로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 최소한 이런 방식이 독특중요한 의미망을 만들고 있을 수 있다. 아무래도 후자이지 않을까 싶어서 짧게나마 글을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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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착, 새로운 프로젝트

소수자 문학이라는 말은 이상하다(이 지점을 지적해 준 여정에게 고마움을). 이 범주화는 언뜻 소수자를 존중하려는 사려 깊은 시도인 것 같지만, 그들의 성격을 여전히 이상한 것, 특별한 것, 부각시키고 박제되어야 할 것으로 남겨 두는 시선을 고수하기도 한다. 심지어 ‘아, 난 소수자들을 존중해’라는 과시적 PC함으로도 왜곡된다. 실제로 그들을 소수자로 규정하고 시작한 윤리적 작업들은 결국, 그리고 자주, 시혜적 맥락을 빠져나오지 못하거나 발화자의 정상적 위치를 강화하는 데 그치고 만다.

당사자성이 해결책일까.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소수자라는 규정/대상화가 그들의 다성성을 놓쳐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당사자도 그들의 다성성을 종합하고 대표할 수 없다. 박상영의 auto-fiction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정말이지, 자기 이야기를 오장 육부까지 그대로 쓴다. 그는 자기 정체성으로 그의 글의 범주를 결정짓고 있지 않다. 그런 엄숙함과는 다른 방식이다.

그렇다면 그의 소설은 퀴어 문학이, 아닌가? 또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여기에 중요한 교착이 있다. ‘내가 당사자로서 나의 소수성을 재현할 것이다’라는 엄숙한 사명감 같은 것 없이, 그는 그냥 자기 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그래서 그의 정체성이 소설에 드러나고, 그의 정체성 없이는 그의 소설을 말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그의 소설은 퀴어 문학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생각건대 이건 ‘퀴어 문학’의 정의 문제와는 관련 없다) 지금-여기의 그들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들을 말해내면서도 범주화에 저항하고 있는 이 글쓰기가 의미심장한 것이다. 그의 정체성 자체가 아니라, 혹은 그의 글쓰기에 붙일만한 이름을 찾는 일이 아니라 말이다. 굳이 퀴어 소설을 쓰지 않는 방식으로 퀴어의 이야기를 썼고, 그렇기에 그의 소설은 퀴어 소설은 아니지만 다른 퀴어 소설이 말할 수 없는 문제들을 (그들도 말하고 있는 문제들 또한) 그들보다 더 잘 다뤄낸다. 여기에 다른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박상영의 소설은 퀴어 소설이 아니라 박상영의 소설이다. 이 이상 그를 정리할 수는 없다.

박상영이 젊은 작가상을 수상한 것은 그래서 의미 있다. ‘무엇을 어떻게 쓰느냐’의 새로운(새롭지 않더라도 최소한 지금-여기에 중요한) 지평이 여기에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의 소설은 공허하고 억지스런 ‘전언 뿐인 전언’이 아니며, 그것을 가장 잘 말해내기 위해 필요한 선택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기존의 방식대로 대상을 재현해야 할 것으로 선택하고 특정한 시점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일종의 ‘문학적 편집’을 통하는 것이 아니라, 담담히 여기에 있는 ‘나’를 쓰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auto-fiction은 한 철의 트렌드가 아니다. 감각적인 것la sinsible을 재분배하는 방식에 관한 새로운 프로젝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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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 : 그의 소설이 ‘막 쓴’ 소설이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auto-fiction이라고 해서 서사가 아무렇게나 배치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의미화하지 않는 에피소드들이 무작위로 힘 없이 나열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글은 그에게 붙게 된 ‘퀴어 문학의 선두 주자’라는 타이틀을 재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의 해학적 문체 또한 긴 분량을 할애할 만한 특기다. 많은 것을 다루지 못해 아쉽다.)

파상
studien618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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