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우리는 다른 모든 것에 관해서도 말하듯이, 신체에 관해서도 말한다. 그런데 신체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신체가 하나의 기호로서 작동해야 한다. 아니, 신체에 관해 말함으로써 신체는 하나의 기호로서 작동한다. 그것은 곧 신체가 말하게끔 하는 것이다. 혹은 말들이 신체를 경유하게 하는 것이며, 신체에 말들이 지나가는 또는 머무르는 거점을 형성하는 것이다.
기호로서의 신체가 일단 있고, 그 기호는 해독되어야 할 것으로서 주관에 주어진다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신체는 본래 아무 뜻도 없이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체는 이미 뜻을 담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신체에는 기호가 달라붙어 있지 않다. 신체를 기호로 만드는 것은 행위이며, 즉 말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의성은 해소될 필요가 없다. 신체는 늘 말하면서 말해진다. 신체가 말하는 것은 신체가 말해짐으로써이고, 신체가 말해지는 것은 신체가 말함으로써이다. 곧 신체가/를 말한다.
만일 우리가 어떤 신체가 성적이라고 말한다면, 그 인식/규정에 의해서 우리는 성적이지 않은 나머지 부분을 상정한다. 어떤 신체가 성적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곧 성적인 것과 성적이지 않은 것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적인 신체를 금지하고 성적이지 않은 신체를 허용하는 동시에 성적인 신체를 소비하고 성적이지 않은 신체를 소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신체가 성적이고 어떤 신체가 성적이지 않은가? 서로 다른 문화에서 성적이라고 여겨지는 신체의 부위나 특징이 다르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사실은 분명히 신체가 성적인 의미를 본래 갖고 있거나 신체가 성적인 의미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그 사실이 성적인 것과 성적이지 않은 것의 구분이란 그저 문화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성적’이라는 서술어가 완전히 공허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어떤 효과와 관련된다. 그것은 우리가 신체와 맺는 관계, 신체에 대한 행위 혹은 신체가 하는 행위를 호출한다. 그것은 신체와 신체가 대면하는 방식들을 규정짓는다. 그러므로 ‘성적’이라는 의미는 개별적인 행위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 남성 집단이 어떤 여성의 젖가슴 윤곽을 두고 자기들끼리 평가를 주고받으며 시시덕댈 때 그 젖가슴의 성적임과 사랑하는 연인이 서로의 성기를 관찰하거나 접촉할 때 그 성기의 성적임은 다르다. 이것은 신체에 사회가 성적임을 다르게 부과한 결과가 아니다. 성적임이 원래는 중립적인 서술어인데 그것이 변질된 예도 아니다. 신체가 성적 코드로 소비될 때, 혹은 쾌락의 통로로 향유될 때, 각각의 경우에 신체의 ‘의미’는 행위(말하기)와 함께 발생한다.
그러므로 성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신체들이 거기서 거기라면, 그것은 성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신체들이 한정적이거나 우리의 성적 욕망에 보편성이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신체들이 말해지고 소비되는 방식, 우리가 신체들 앞에서 혹은 신체들과 행위하는 방식들이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이다. 만약 ‘문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을 가리켜야 한다. 앞서 쓴, 포르노그래피즘에 관한 글은 바로 이것을 문제삼기 위한 것이었다.
 

II

신체가/를 말할 때, 말하려는 것이 말하는 신체의 전부를 말해내지는 못한다. 어떤 신체가 성적이라고 한다면, 성적이지 않은 신체가 같이 발생하게 된다. 신체는 ‘성적임-성적이지 않음’의 기호-쌍으로 기호화된다. 그런데 성적이라고 서술하는 말하기 혹은 그와 마찬가지인 행위는 신체에 ‘성적임-성적이지 않음’의 기호-쌍으로 포착될 수 없는 영역을 남겨놓는다. 성적인 코드로서의 유방을 말할 때 유방암에 걸리는 유방은 말이 그려내는 것 아래에 묻혀있다. 예시를 들면서 병이 드는 신체를 언급하였으므로 병듦이라는 기호 또한 발생되었지만 여전히 병듦이 말하지 않은 신체가 남아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어떻게 말하든 간에 말해지지 않고 남은 것이 있다. 이 나머지는 곧 {하나의 의미와 그것이 아닌 나머지}의 나머지이다. 이 나머지들이 특수한 것, 개별적인 것을 지탱하는 것이 아닐까? 이 나머지들은 수없이 많은 말들에 의해 포착된 것을 하나씩 사상하고 남은 것, 말해진 것들의 꺼풀들을 벗겨내고 남은 불가사의가 아니라 매 순간의 말들이 규정하고 설명하려는 공격을 펼칠 때 그것들을 피해 살아남은 기억들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개별자를 가능하게 하는 것, 우리를, 우리의 몸과 경험을 보편적인 언어들의 포위공격에서 건져내는 것은 고정적이고 단일한 본질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르게 말하기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불가능한 실천에 대한 대안이며, 말해지지 않고 남은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하기이다. 그것은 형용하고 수식하고 기술하는 말하기가 아니라 사건들과 경험, 기억을 복원하는 말하기일 것이다. 이 끈질긴 실천을 우리는 문학이라고 불러왔던 것이 아닐까?
 

단현
danhyun012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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